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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w. 니나

"아, 민윤기 진짜 미워!" 

"또 시작이네, 저기." 

"내 젓가락질을 멈추게 하다니, 참 대단한 친구들이야." 

 내 말은 개미 똥구멍만큼으로도 안 들어주는 민윤기, 맨날 혼자만 실컷 생각하고 행동하는 민윤기, 못된 민윤기! 

 잔뜩 씩씩거리며 형 방에서 나와 문을 쾅 닫고 나왔는데 거실에서 냉면을 먹고 있던 호석이 형이랑 석진이 형과 눈이 마주쳤다. 나름대로 지금 화가 많이 났어요 하고 티를 내고 싶어서 문까지 쾅 닫았는데.... 민망해 죽겠네. 

"아... 형들 있었어요? 죄송해요, 시끄러웠죠?" 

"아니, 그거야 이제 하루이틀도 아니고 괜찮은데 이번엔 왜 싸웠어?" 

"어... 그게." 

 나랑 윤기 형이랑 만난 지도 벌써 3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그저 멤버 중 한 명이었을 때보다 서로의 일상에 더 깊이 녹아들었다. 형은 내게 동료고, 가족이고, 또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늘 눈이 닿는 곳에 형이 있으니 지금처럼 다투기도 자주 다퉜다. 그래도 뭐... 윤기 형이 알고 보면 여리고 다정한 사람이라 지금처럼 내가 토라지면 오래 끌지 않고 바로 사과해줬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다. 상황 파악도 빠르고 똑똑한 형인 줄 알았는데 내가 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어디 내가 먼저 굽히나 봐라. 문 쾅 닫고 예의 없이 군 것도 미안하다고 안 할 거야! 

"...그냥 조금 속상해서 그랬어요. 별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화해할게요." 

"평소엔 윤기가 서럽게 하면 바로 와서 쫑알쫑알 얘기해 주더니... 왜, 정국이라도 불러 줄까?"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요즘 정국이는 사귄 경험도 많이 없으면서 내 연애 상담을 들어주곤 한다. 그래도 형이 돼서 매번 쪽팔리게 사랑싸움으로 징징대는 것도 이제 좀 민망했다. 냉면이라도 먹고 들어가라는 호석이 형의 말을 뒤로한 채, 방에 들어와 곧바로 이불 속으로 돌진했다. 혼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니까 조금 전 윤기 형이 했던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돌았다. 형,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요.... 

"공개 연애라니.... 그걸 진짜 말이라고." 

"윤기 형이 공개 연애하자고 그랬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이불을 젖히고 앉았다. 막 씻고 나온 건지 정국이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뭐야, 언제 들어왔어." 

"방금요, 근데... 진짜 윤기 형이 그랬어요? 되게 의외네." 

"지금 완전... 사랑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불도저시다." 

 내가 아는 민윤기는 팀 내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거기다 나 역시 생각에서 실천까지 가는 게 빠른 편이 아닌지라 우리는 서로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도 2년 가까이 '그냥 멤버' 사이로 지냈었다. 우리의 삽질이 오죽했으면 남준이 형 입에서 "제발 그냥 사귀면 안 돼?"라고 나올 정도였는데... 그랬던 형이 돌연 공개 연애를 하잔다. 아이돌이, 그것도 팀 안에서 멤버 두 명이 공개 연애를 한다는 게 대체 무슨 경우입니까? 

 

"형은 왜 하기 싫은데요?" 

"...나도 윤기 형이 많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잃는 게 너무 많잖아. 나는 지금처럼 만나도 충분히 행복한데." 

"뭐...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건 그렇죠. 아, 이건 둘 다 이해가 잘 가서 문제네." 

 윽, 큰일이다. 또 우울해졌어. 입술을 한껏 내밀고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으니까 내 눈치를 보던 정국이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런데 지민이 형, 진짜 엄청 사랑받고 있네요." 

"응?" 

"기억나요? 저 형들 처음에 연애한다고 할 때 솔직히 엄청 걱정했잖아요. 팀에 해가 될 것 같아서 뭐 그런 게 아니라 윤기 형이 워낙 그런 쪽으론 무신경하니까... 혹시나 형이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싶어서요." 

 아, 기억난다. 우리가 사귀고 바로 얼마 뒤에 형이 멤버들한테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자고 했었다. 나 역시 찬성했고 우리는 멤버들을 거실에 불러다 놓고 공식 발표를 했다. 형이 내 손을 꼭 잡고선, "나랑 지민이 만나기로 했다." 그랬었지. 속으로 이렇게 앞뒤 다 자르고 대충 말해도 되는 걸까 했었는데 오히려 멤버들은 "이제야?" 하더라고. 지금 생각하니까 엄청 웃기네.... 그런데 나중에 태형이랑 정국이가 밤에 나만 따로 방으로 불러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저 민윤기를 감당할 수 있겠냐고. 워낙 무기력한 형이니까 나도 연애 초기엔 그 점을 걱정했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형은 나를 끔찍하게도 챙겼다. 곡 작업으로 바빠서 자기 끼니는 거르더라도 나는 밥을 챙겼는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매일매일 확인했다. 후에 남준이 형이랑 호석이 형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질리더라. 그 다음부턴 먼저 나서서 자랑을 하진 않았다. 

 

"근데 지금 보니까 윤기 형, 이거 완전 사람이 사랑꾼이구만? 애인 하나는 잘 만났네요, 지민이 형."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이구, 이제야 웃네? 아, 근데 형. 저 사실 형들이 뭐 좀 물어보라고 해서 들어온 거거든요." 

"뭐를 물어 봐?" 

 정국이가 난처하게 됐다는 듯이 무릎을 두어 번 톡톡 건드리곤 머리까지 긁적이더니 겨우 입을 뗐다. 

"우리 이번에 여름 휴가요. 모레 출발하자고 하던데?" 

"모레? 너무 갑자기 가는 거 아니야?" 

"우리 바로 해외 스케줄 있잖아요. 그래서 형들이 지금 아니면 우리끼리 못 갈 것 같다고 해서.... 그래서 펜션도 예약 바로 되는 곳으로 겨우 잡았대요." 

 

맞아, 여름엔 항상 스케줄로 가득 차서 우리 일곱 명의 소원이 카메라 없이 1박 2일 여행 가기였을 정도였다. 연차가 조금 생긴 뒤로는 이렇게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멤버들끼리만 놀러 갈 계획을 짜곤 했는데... 아무 얘기가 없어서 올해도 갈 줄은 몰랐다. 이런 계획은 늘 동생들이 좋아라 하면서 짜니까 형들이 먼저 나서서 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네. 

"근데 형, 괜찮겠어요?" 

"응? 뭐가?" 

"지금 윤기 형이랑 냉전 중이잖아요." 

아, 이런 미친. 

…♡… 

 이틀 동안  어떻게든 윤기 형과 화해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형은 마치 "공개 연애에 대한 화제가 아니라면 돌아가라."라는 식으로 나를 대했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무슨 말을 해도 "응" 아니면 "그래". 그것도 아니면 다른 형들과 놀고 있는 나를 멀리서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번엔 둘 중 어느 쪽도 먼저 굽히고 들어가질 않으니 우리는 냉전 상태 그대로 강원도행 차에 몸을 실었다. 

"지민이 형, 형! 일어나요!" 

"으응...." 

"도착했다구요, 형!" 

"됐어, 내버려 둬. 내가 안고 갈게." 

 휴게소에 들리기 전만 해도 멤버들과 신나게 떠들면서 왔는데 도중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힘겹게 실눈을 뜨니 윤기 형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어 나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윤기 형도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나를 안아들려고 했던 팔을 다시 내리고 형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치... 그냥 안아 주면 어디가 덧나나. 

"우와, 집 엄청 넓다!" 

"야, 방은 어떻게 쓸래? 일단 나는 작은 방." 

 멤버들을 따라 들어온 펜션은 급하게 예약한 곳치고 넓고 깔끔해서 좋았다. 침대 방도 세 개나 있었고 화장실도 여러 개였다. 우선 짐부터 풀기 위해 같이 방을 쓸 멤버를 고르려고 하는데, 평소라면 당연히 윤기 형과 내가 한 방이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나도 멤버들도 모두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두 손에 가방을 꼭 쥐고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를 보고 정국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 오랜만에 지민이 형이랑 한 방...!" 

"안쪽 방 침대 작으니까 거기 나랑 지민이랑 쓸게. 너네 물놀이 간다고 했지? 나 방에서 좀 잔다. 저녁 먹을 때 깨워 줘." 

"아...." 

"야, 여기까지 와서 잔다고? 같이 가자!" 

"윤기 형 어제도 작업한다고 밤새서 피곤할 거예요. 이따 우리 바베큐 먹을 때 깨워요." 

 가장 안쪽 방 문을 열고 살펴보던 윤기 형이 가방을 바닥에 내리더니 나와 같이 방을 쓰겠다고 말했다. 정국이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큰 방에 짐을 풀기 시작했다. 나도 갑작스런 합방 선언에 조심스럽게 방에 따라 들어갔는데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윤기 형은 이불부터 펴고 누워버렸다. 차에서도 바다 생각에 신나있던 형들은 여기까지 와서 잠부터 자는 윤기 형에 아쉬워했지만 남준이 형의 말을 듣고 각자 새 옷을 챙겼다. 

 

"윤기 형, 자요?" 

"응." 

"안 자고 있으면서... 저도 같이 다녀올게요, 쉬고 있어요." 

"그래." 

 또 "응"이랑 "그래"다. 완전 토라진 고양이 같아.... 잠든 윤기 형을 뒤로 하고 혹시나 탈까 썬크림을 발랐다. 그러면서도 방에서 나가기 전까지 침대 위만 빤히 쳐다봤지만 형은 이불 밖으로 손가락 하나 꺼내지 않았다. 

"지민아, 준비 다했어? 얼른 나가자!" 

"응, 나갈게!" 

 태형이가 불러 방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신발장도 신고 온 운동화들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고. 다들 이럴 때 보면 참 귀엽다. 차에선 몰랐는데 벌써부터 여름이긴 한 건지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현관에서부터 나는 바다 내음에 기분은 두둥실 떠올랐다. 아직 휴가 성수기가 아니라서 그런가 펜션 앞 바다에는 우리 멤버들밖에 없었다. 정국이랑 태형이는 신나게 물놀이를 즐겼고 남준이 형과 호석이 형은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석진이 형은 옷도 챙기더니 그냥 파라솔 밑에서 쉬고 있었다. 옆에 가서 조심스레 앉았는데 갑자기 앞뒤에서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뭐야, 너네." 

"히히." 

"찐 형, 같이 놀아요!" 

"야, 이거 안 놔? 나 아직 썬크림도 안 발랐어! 야, 야 제이케이 나 주머니에 핸드폰 있다고 인마!" 

 석진이 형이 뽀송하게 말라 있는 꼴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태형이와 정국이가 형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어느 새 남준이 형까지 합세해 허리까지 받치자 곧 풍덩, 소리와 함께 석진이 형이 물에 젖은 생쥐가 됐다. 멍한 얼굴로 핸드폰이 무사한지 확인한 형은 다행히 작동하는 걸 보자마자 태형이와 추격전을 벌였다. 

"으이그, 저러다 감기 걸리지." 

"저 형 수건도 안 가지고 왔던데...." 

"제가 가지고 올게요. 형도 좀 놀고 있어요." 

 남준이 형이 뛰면서 무너진 모래성을 보수 공사하던 호석이 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홀로 바지에 묻은 모래를 탁탁 털고 수건을 챙기러 숙소로 향했다. 펜션은 여전히 불이 다 꺼져 있었다. 아직 윤기 형이 안 일어난 건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방문을 여니 침대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렸다. 벌써 두 시가 넘어가는데... 

"밥 좀 챙겨 먹으라니까...." 

 캐리어에서 가지고 온 수건 여러 장을 꺼내 팔에 걸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에 석진이 형한테 제대로 반격을 당한 건지 태형이도 정국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상태였다. 

"자, 정국아 여기 수건." 

"앗, 형 땡큐. 우리 이제 점심 먹으러 저쪽 식당 가려고 하는데 형도 갈래요?" 

 수건을 받은 정국이가 팔을 닦으면서 물어봤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유명한 맛집이 있다는 모양이다. 나야 해산물만 아니면 다 괜찮은데... 아무래도 밉지만 혼자 남을 애인이 신경 쓰였다. 

"아냐, 나 윤기 형이랑 같이 숙소에서 먹을게. 아직도 자고 있더라." 

"아직도요? 많이 피곤했나 보다. 알았어요, 형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가서 윤기 형이랑 있어 줘요." 

"응." 

 남은 수건도 모두 정국이에게 건네 주고 다시 빠르게 발길을 돌렸다. 아, 일단 저기 가게부터 들리자. 

"형, 형 일어나 봐요." 

"...지민이야?" 

"응, 또 밥 안 먹고 잠만 자고 있길래요." 

"혼자 왔어?" 

"네." 

 침대 맡에 앉아서 윤기 형을 살살 깨우니까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기던 형이 우뚝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나만 온 게 미안했는지 바로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 앞에서 컵라면이랑 김밥 사 왔는데 이거라도 먹을래요?" 

"응, 아무거나." 

 평소라면 내가 알아서 다 하겠지만, 지금은 아무거나라는 주문이 제일 어렵다고요, 형.... 

"그럼 형 원래 이거 잘 먹으니까... 아, 여기 정수기 없지. 물 끓여야겠다!" 

"천천히 해. 다치지 말고." 

"에이, 제가 남준이 형도 아니고 이런 걸로 안 다쳐요." 

 내 말에 형이 피식 웃더니 남준이 형한테 이를 거라며 농담을 던졌다. 우리가 언제 다퉜냐는 듯한 지금 같은 분위기가 나는 너무 좋았다. 우리 말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의 이런 소소한 추억도 만들 수 있고. 굳이 누가 알아 주지 않는다 해도 행복하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따 저녁에 바베큐 한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저랑 이걸로 떼우고 밤에 맛있는 거 먹어요." 

"응." 

 우리는 선풍기 하나만 틀어 놓고 같이 식탁에 앉아 컵라면을 먹었다. 고요한 펜션 안에는 후루룩 라면 먹는 소리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밥을 먹는 동안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민아, 같이 산책 나갈래?" 

"산책이요?" 

"응, 여기까지 왔는데 숙소에만 있으면 아쉽잖아. 그리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아, 형.... 결국은 올 게 와 버렸구나. 벌써 다 먹은 건지 젓가락을 내려놓은 윤기 형이 나를 쳐다보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 계속 피하기만 하면 이런 상황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곤 있었다. 하지만 분명 또다시 다투게 될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 보니까 뒤쪽에 산책길이 따로 있더라. 오래 걸으면 더워서 힘드니까 잠깐만 둘이서 걷자." 

"...네, 가요." 

 다 먹은 라면 용기를 치우려고 봉투에 넣고 있는데 윤기 형이 내 머리 위로 밀짚모자를 씌웠다. 

"형?" 

"밖에 덥잖아, 이거 쓰고 나가자. 얼굴도 안 타고 좋잖아." 

 나와 같은 모자를 쓴 형이 내 손에 들린 봉투를 들고는 샌들을 신고 먼저 나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이렇게 신경 써 주고... 정말 민윤기는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모자를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형을 따라나섰다. 

"...예쁘네." 

"네?" 

"바다 말이야." 

 뭐야... 갑자기 예쁘다고 해서 놀랐잖아. 바다 얘기였구나... 형만 쳐다보며 걷고 있다가 민망해져서 나도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산책로를 따라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확실히 절경이긴 했다. 풍경이 예쁘긴 했지만 별로 집중이 되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더니... 예쁘다 이후로 윤기 형은 말없이 묵묵하게 걷기만 했다. 왜 또 꿀먹은 벙어리가 된 거예요, 형. 나까지 어색하다고요. 에라, 모르겠다. 

 

"윤기 형." 

"..." 

"..." 

"지민아." 

 내가 부르자 바로 휙 하고 돌아보는 형에 걸음이 멈췄다. 챙이 큰 모자 때문에 그늘이 져 있는데도 윤기 형의 눈은 무척 깊고 진지해 보였다. 잠시동안 나를 가만히 바라만 보던 형이 입을 뗐다. 그 순간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 떨어졌다. 

"어?" 

"아, 이런." 

 형도 나도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까까지 맑던 하늘은 어디로 가고 먹구름이 몰려 오고 있었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도 점점 굵어지면서 많이 오기 시작했다. 급히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결국 쏴아아 하고 소나기가 내렸다. 윤기 형은 당황한 내 손을 잡고 무작정 뛰었다. 숙소 방향이 아니라 경황 없이 뛰는 줄로만 알았는데 형은 나를 산책로 뒤편의 작은 원두막으로 데리고 왔다. 

"으아... 쫄딱 다 젖었다." 

"...그칠 기미가 안 보이네." 

 형이 미리 봐 두었던 원두막 덕분에 더이상 비를 안 맞아도 됐지만 둘 다 이미 실컷 다 젖고 난 후였다. 옷을 손에 말아 쥐고 비틀어 짜보니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잔뜩 젖은 면이 몸에 닿으니 영 찝찝하기도 했다. 내가 작게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자 넋 놓고 하늘만 쳐다보던 윤기 형의 고개가 황급히 나를 향했다. 

"지민아." 

"네?" 

"벗어." 

"...네?" 

 그대로 있다가는 감기에 걸린다며 형이 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하지만 형... 아무도 없다곤 해도 여기 너무 사방이 뻥 뚫린 거 아닌가요.... 그냥 비가 그칠 때 까지 억지로 버텨 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길어지는 비에 결국 형도 나도 티셔츠를 벗어 버렸다. 

 

"안 그치네." 

"...그러네요." 

 싸우긴 했지만 서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자니 괜히 분위기 이상했다.... 어색한 공기에 윤기 형과 조금 떨어져 앉아 손톱으로 모자의 밀짚만 긁어냈다. 

"민아." 

"...네." 

"공개 연애 말인데, 아직도 그렇게 하기 싫어?" 

"..." 

 내가 조금의 거리를 두고 앉았는데도 형은 앉은 그 자리에서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시선도 계속 내가 아닌 정면에 둔 채였다. 

 

"공개 연애가 대중이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그냥 보통 사람인 스물 여섯 민윤기는 지금 이 비처럼 온통 다 너로 젖어버렸어. 그만큼 내 마음이 전보다 더 짙고 무겁다는 소리야." 

"..." 

"근데, 만약에 우리가 이대로 헤어지게 되면... 아무도 우리가 연인 사이였다는 걸 모르는 거잖아. 당장에라도 너를 잃으면 죽을 것 같은데 아무 흔적조차 남지 않으면 나는 어떡해?"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평소 형의 행동에서도 나를 많이 좋아해 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할 정도로 불안해 하고 있었다는 건 정말 꿈에도 몰랐다. 

"왜, 왜... 끝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냥 지금처럼 예쁘게 오래오래 만나면 되는 거잖아요, 형." 

"세상에 끝나지 않는 관계는 없어, 지민아. 시선들이 무섭다면 내 뒤에 숨어도 좋아. 그저 난 네가 내 옆에서 같이 이겨내 주면 좋겠어." 

"형, 저는 형이랑 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 시선 같은 건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무서운 건 우리가 지금 같지 않을까 봐... 변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워요." 

 나만큼이나 무대 역시 사랑하는 형을 아니까. 공개 연애를 하게 되면 두 사람 모두 지금처럼 무대 위에서 마냥 행복하게 즐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일을 빼앗게 되는 것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팔을 쓸어내렸다. 어느덧 시선을 내게로 돌린 형이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곡을 쓸 때... 우리 팀에 대한 얘기도 하고, 내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고. 또 가끔은 팬들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도 있어. 그런데 널 만난 뒤로는 작업을 할 때마다 항상 너부터 생각나더라. 어느 샌가 네가 내 노래의 이유가 돼 버린 거야. 네가 내 꿈이고, 영광이고 또 자부심이야 민아. 그러니까 난 이제 꿈이랑 너를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윤기 형의 말을 듣곤 곧바로 형한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더 듣고 있다가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흐르려는 눈물을 꾹 참고 형과의 키스에 집중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고 그만큼 너한테 사랑도 더 받고 싶어, 민아." 

"...사랑해요, 윤기 형.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예요." 

 결국 나란히 눈물이 터져 버렸다. 이번엔 형도 나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목을 꼭 끌어안고 다시 입을 맞췄다. 원두막에서 형과 나눈 키스는 무척 습했고 또 축축했다. 앞머리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고 둘 다 실컷 울고 난 후라 입술 끝에서 짠맛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형의 체온은 비 때문에 차가웠지만 얼굴에 닿는 형의 눈물만큼은 따뜻했다. 온통 까맣게 어두운 밤에 그칠 기미도 없는 소나기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온전히 둘로 남았다. 

 

…♡… 

 

"진짜 둘이 어디 물에 휩쓸려 간 건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요?" 

 시골이라 어두워서 찾지도 못하겠지, 비는 억수같이 내리지... 제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탔는지 아시냐고요. 내 끝날 기미가 없는 잔소리에도 윤기 형은 듣는 둥 마는 둥 헤드셋을 낀 채 작업을 계속했다. 

"하... 그래서, 형. 둘이 화해는 했어요?" 

"자." 

"...왼손? 뭐 어쩌라고요?" 

"이거, 이거 안 보여?" 

 윤기 형이 왼손 등을 흔들며 내보였다. 아니 지민이랑 어떻게 됐냐니까 갑자기 손은 왜 보여주는 건데? 

"약지에 반지, 안 보이냐 남준아." 

"아? 형은 항상 반지 끼고 있... 어, 처음 보는 거긴 하네요. 참한 게 형 스타일은 아닌데." 

"아니, 내 스타일 맞아. 우리 서울 올라오는 날에 지민이가 사 준 거야." 

"지민이가요?" 

 형이 끼고 있는 반지는 커플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정도로, 어떤 보석도 박히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참 지민다운 선택이었다. 

"결혼 반지야." 

"네?!" 

"농담이고, 언젠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면. 그때는 아예 둘이서 같이 살자고 하더라." 

"...이야, 박지민이 상남자네." 

 프로포즈 받았을 때를 생각하는 건지, 볼이랑 귀가 붉게 변하는 형을 보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제발... 적응 안 되니까 그런 새색시 같은 표정은 그만둬 주세요, 형님. 

"궁금한 건 다 끝났냐? 이제 작업할 거니까 나가." 

"참나, 언제는 저 있다고 못했습니까...? 또 지민이 불렀구만, 이 형." 

"알면 꺼져라." 

"예, 예. 알겠습니다." 

  이거 뭐 사랑 싸움이 소나기보다도 굵고 짧으시네.... 그래, 무지개도 소나기가 온 뒤에 제일 선명하게 보인다잖아요. 오늘도 두 사람이 행복했으면 그걸로 된 거죠. 네. 

"아, 작업실에서는 뽀뽀 금지입니다 형." 

"시끄러워, 내 작업실이야." 

 

fin.

© 2018 by SUJIM Four Seasons, presented by @EPILOGUE_sj & @Love_maze_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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