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 SEASONS
OF LOVE
봄은
w. 서리
연분홍 꽃잎이 흩날렸다. 얼마 만에 보는 꽃이던가. 아직 추운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남들보다 빨리, 조금은 이른 개화를 했다. 너무 세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햇빛이 마당에 내리쬐었고 약 일 년만의 봄꽃 향을 맡은 벌과 나비가 날아 들어왔다.
지난 겨울은 한없이 춥기만 했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달래느라 제 스스로도 많이 지쳤던 그런 계절이었다. 밖이 따뜻해지면서 자연스레 묻혀있던 들뜬 감정이 되살아났다. 꽃잎이 제 방 안까지 살랑살랑 날아와 책상에 살풋 떨어졌다. 그 것을 보자 괜히 설레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에 지민은 책을 읽다말고 자신의 방 앞에 심어진 벚꽃나무를 바라보았다.
"나가볼까?"
지민은 나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는 신분제가 폐지 된 이후 다른 양반들의 반발에도 그저 묵묵히 어명을 따르시며 집안의 노비들을 대부분 풀어주었다. 마침 오늘은 그 중 지민에게 가장 친절했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들어올 땐 빈손으로 들어와도 나갈 때는 양손 가득 무겁게 보내야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며 지민은 돈 몇 푼이 아닌 한 보따리를 여맸다. 지금 쯤이면 아직 도성을 나가기 전이리라. 가는 길에 근처에서 열린다는 봄 축제도 둘러보고 와야겠다 생각한 지민이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잠시 볼 일이 있어 나가려던 참이네. 개똥아범도 어디 나가나?"
"예, 대감님 심부름으로 우체사(근대적 우편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에 갑니다."
"그런가, 가는 길도 같은데 같이 나가지."
가는 길은 화사했다. 한껏 가벼워진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경성의 거리에 가득했고 가는 길에 거쳐온 오일장에서 풍겨오는 냄새나 광경은 봄이 아주 왔음을 실감케 했다. 청에서 들여온 서양의 물건들은 지민의 눈을 사로잡았다. 친우인 태형과 다음에 한번 더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
서양식의 건물이 많이 들어선 한 골목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을 칠한 남자가 서있었다. 18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와세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인물, 바로 민윤기였다. 그는 자신의 검은 양복을 매만졌다. 기다리는 사람이 대단하고 중요한 인물이라도 되는 양 한참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양복이 어색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어두운 표정이 참으로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타케다? 타케다씨로군요."
"아 네, 오타츠상, 오셨습니까."
타케다 센츠키. 익숙치 않지만 익숙해져야만 하는 그 이름이 불리자 윤기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얼굴이 윤기의 앞에서 웃고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한일합병계획에 대해서 알게 된 이상 여러 사람들과 뜻을 모아 비밀리에 군대를 조직했고 이제 거의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번 투자를 얻어 자금을 확보해야 했고 거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해야 했기에 윤기는 애써 웃으며 그 자와 함께 이동했다.
한국 이름 김석진. 일본이름 오타츠 기로쿠토. 25세의 대단한 사업가로 현재 양국에 엄청난 자본을 갖고 있는 인물. 눈치가 빠르고 실리를 깐깐히 따지는 자라서 설득하기 힘들지도 몰랐다. 윤기는 들은 말을 곱씹으며 석진을 살폈다.
"마실 건 됐고, 둘 다 바쁜 것 같은데 시간낭비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석진은 다가오는 종업원을 확인하고 왼손을 조금 들었다 내리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윤기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얇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흠, 오타츠상, 요즘 이곳 땅값이 오르고 있는 거 아십니까."
"들었습니다."
넥타이를 매만지며 종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만 끄덕거리는 모습이 아주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윤기는 이곳이 일본인 사업가들이 도시를 만들려는 곳이라며 이곳의 땅을 사면 몇 년, 아니 짧으면 몇 개월 뒤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대지주가 될 거라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서류뭉치 한 덩이를 꺼냈다. 대단한 양에 석진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것들은 보시면 아실 테고, 지금까지 그렇게 개발된 땅으로 호의호식하는 일본인들이 일본열도는 물론 이 곳 대한제국의 땅까지 넘쳐납니다.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니 잘 결정하십시오."
"... ...타케다상은 유학시절부터 참 대단한 인재였습니다. 일본으로 오시면 아주 대단한 인물이 하나 탄생할 것임을 내 장담하기에 겨우 땅 파는 일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석진은 오랜 친구를 걱정이라도 하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서, 그 근처에서 나오는 말들은 윤기의 자존심에 금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윤기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게 제 천직인가 봅니다. 그 시절에는 늘 옷걸이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편하고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알고 살아야지요. 지금 저는 여기가 아주 아늑합니다. 옷걸이야 뭐 언젠가는 오타츠상처럼 대단해지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하."
"하하하하. 그렇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타케다상 다워요. 이 건은 조금 더 고민해보고 내달 12일까지 확답 드리지요. 일이 바빠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석진이 윤기가 건넨 서류뭉치를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살짝 고개를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잠시 맡겼던 겉옷을 받아들고는 밖으로 나가는 석진이다. 서로 호탕한 웃음이 오갔던 자리였지만 서로가 서로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음은 틀림없었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자신을 비꼬던 석진이 생각나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분위기도 괜찮았고, 전할 말도 다 전했기에 딱히 후회는 없는 윤기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겠군.'
윤기는 밖으로 나와 길을 걸었다. 딱히 할 것이 없어 신문 발행이나 거들러 갈 생각이었다. 윤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색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역시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이었다. 봄이라 그런지 거리에 꽃잎이 가득했다. 발이 땅에 닿을 때 마다 일던 흙먼지를 꽃잎이 살짝 막아주는 듯 이상하게 봄에는 걸음의 느낌이 좋았다. 봄내음을 따라 걷고 있을때, 잠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윤기는 쓰고 있던 중절모를 다시끔 눌러쓰고 그 주위로 발걸음 했다.
"어우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천한 상것에게.."
"사람에 귀천이 어딨나, 이제 신분제도 폐지됐는걸."
개똥아범도 필요하면 말해. 내 아범은 보따리가 터질 만큼 싸줄 터이니. 싱긋 웃으며 중년여성에게 비단을 넉넉히 싸서 손에 들려주는 지민이었다. 딱 봐도 굽신거리는 허리와 허름한 옷차림이 노비인 걸 말해주는 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 윤기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달큰한 바람이 불었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가던 길을 다시 갈 법도 한데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윤기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하늘색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에게 눈이 갔다. 꽤 높은 집안 자제가 낮은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을 본즉 없어서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갓에 살짝 가려진 하얀 얼굴에 눈이 갔고, 비단이 담긴 보따리를 건네는 조그만 손에 눈이 갔다. 윤기는 곧 자신의 시선이 닿은 방향을 깨닫고 혼자 낮게 읊조렸다.
"... ...내가 봄에 취한거지."
지민은 개똥아범을 대강 달래고 다시 걸음하려 방향을 틀다 윤기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서로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리는 윤기다. 그에 오히려 더 민망해진 지민이다. 지민은 개똥아범을 이만 우체사로 가보라며 어서 보냈다. 그리고 아직 그곳에 서 있는 윤기에게 다가갔다. 평소 모르는 이에게는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먼저 다가가는 법 없는 지민인데 그날은 유독 달랐다. 저벅 저벅. 지민의 발소리가 윤기에게 가까워졌다. 아하, 오히려 봄에 취한 건 윤기가 아니라 지민이었을 수도 있겠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대담하게 윤기의 앞으로 가 말을 걸었으니.
"혹시 봄 축제가 어디서 열리는지 아십니까?"
"아, 네."
얌전한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망설임 없이 훅 들어온 지민에 윤기는 미처 할 말을 생각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지민은 개의치않고 다시 물었다.
"길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사례는 하겠습니다."
"그러지요. 따라오십시오. "
"어딘지만 알려주시면 혼자 가겠습니다. 괜히 바쁜 분 붙잡아 놓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저도 마침 근처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봄날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걸음하지요."
윤기는 모자를 살짝 올리며 입꼬리를 당겼다. 지민도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같이 축제장으로 향했다. 바람에 날려 걸을 때 마다 사락거리는 지민의 두루마기 소리가 듣기 좋았다. 봄내음이, 따스한 온도가 둘을 감쌌다. 한동안 웃을 일이 없었던 윤기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가령 지민이 혼자가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와 같은 질문을 할 때도 윤기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윤기의 친우들이 보았다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고 감탄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축제가 열리는 곳에 도착했다. 가는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통성명도 하고 나이도 물으며 부쩍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아쉽지만 이제 돌아가려는 윤기의 양복을 지민이 붙잡았다. 윤기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만 같이 구경하면 안 됩니까?"
"... ..."
지민이 울망한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지민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어 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지민은 신난 표정으로 윤기를 잡아끌었다. 윤기도 피식 웃으며 지민을 따라 갔다.
"봄을 좋아하나 봅니다."
"예, 봄이 좋습니다. 따스한 느낌이 왜 이리도 설레는지 모르겠어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꽃들, 그림, 꽃문양이 새겨진 도자기 등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지민에게 묻는 윤기다. 그에 지민은 아까 집에서 느낀 설렘이 떠오른 듯 답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윽고 윤기가 지민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민의 심장이 세게 울렸다. 쿵쾅대는 소리가 제 귀에까지 들렸다. 살면서 심장이 그렇게 빠르게, 세게 뛰어본 적은 없었다. 혹여나 그 소리가 윤기에게 들릴까 부끄러워 슬쩍 뒤로 한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제 손을 잡아 감싸는 윤기에 그러지 못했다. 윤기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살짝 말라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이는 윤기였다. 이윽고 낮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지민의 귓가에 들렸다.
"저도 설렙니다."
그렇게 대단한 말도, 거창한 말도 아닌 담백한 윤기다운 고백이었다. 어느새 윤기의 귀는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맞잡은 윤기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지민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얼굴에 점점 번져오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딱히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좋았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앞에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붙여도 표현을 못했다. 지민의 양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이제 가까워질대로 가까워진 두 사람에게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한데 섞여 울렸다. 그런 둘의 옆에서, 봄바람이 수줍게도 불었다.
*
내달 12일.
톡 톡 톡. 석진이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연신 두드렸다. 석진의 앞에는 저번에 윤기에게서 받았던 서류봉투가 놓여있었다. 연통을 넣은지 조금 되었으니 이제 올 때가 되었겠군. 이라고 생각하자마자, 문이 열리면서 윤기가 들어왔다. 윤기는 곧장 석진의 쪽으로 걸어와 그의 앞에 턱 하고 앉았다.
“저를 부른 걸 보니 기대하는 결과가 있겠군요.”
“허허… 벌써 눈치 채셨습니까?”
“그 반대였다면 12일이 되어도 연통을 넣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랬겠지요. 하지만 난 그대가 벌인 일에 흥미가 생겨서 말입니다.”
석진이 싱긋 웃으며 차를 권했다. 윤기가 찻잔을 들었다. 가슴께에 있는 찻잔에서 올라오는 향은 아슬아슬한 자리와는 달리 향긋했다. 그리고 짙었다.
“여기,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윤기는 펜과 계약서를 꺼내 석진에게 주었다.
“읽어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타케다상께서 잘 해주실 터인데요.”
망설임도 없이 바로 서명하는 석진이다. 그리고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도 모를 남자 한명이 나타나 꽤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윤기에게 건넸다.
“일단, 6억입니다. 나머지 돈도 곧 보내드리죠.”
역시, 이렇게 큰돈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건넬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석진 뿐일 것이다. 윤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했다. 석진도 씩 웃고는 이만 가봐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 ...민윤기씨.”
문을 열기 전, 석진이 잠시 멈춰섰다. 석진이 윤기를 타케다상이 아닌 민윤기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석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그 돈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 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당분간 몸을 사리는게 좋을 겁니다. 내일 오전까지 이곳에 나머지 돈을 맡겨 놓겠습니다. 그 후로 나는 그 돈과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 점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 …”
“아, 조국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대가 마음에 들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장난스레 던진 마지막 말까지 끝나고, 석진은 나갔다. 그 후 문에 달린 풍경소리가 더는 귀에서 들리지 않게, 멀어질 때 까지 윤기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 윤기는 몸을 사리라는 석진의 말을 들었지만 서도 그 돈을 보내기 위해 근처 지인을 찾았다. 한순간에 생긴 6억을 보여주니 지인도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 분은 윤기의 어깨를 두드리며 장하다고 연신 칭찬해주었다. 윤기는 내일 다시 들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지인과 헤어졌다.
터벅 터벅. 걷다보니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문득 지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번 일을 생각하고 있는 와중, 지민의 집 앞에 당도한 윤기다. 그는 피식 웃었다. 저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온 곳이 여기라니. 지난번 봄 축제 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데려다 준, 그 한번이 다였을 텐데.
윤기는 가방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지민이 윤기에게 써 준 편지의 답장이었다. 축제 이후로 둘은 서로 몇 번이나 편지를 주고 받았더랜다. 둘은 서로 이래저래 바쁜 탓에 닷새정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종이는 온통 보고싶다는 말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 금세 말을 놓아 이제는 귀여운 투정까지 부리는 지민이었다. 그 조그만 손으로 편지를 썼다고 생각하니 어느새 윤기의 입가는 온통 웃음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누구를 부르지도 못한 채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윤기가 아쉽지만 편지는 내일 전해야겠다. 생각하고 돌아서려던 때, 멀리서 매일 밤 그리던 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인사를 하려던 찰나, 그 옆에 얼핏 봐도 키가 장대같이 크고 얼굴이 희멀건게 딱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남자가 지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같이 오고 있는 게 보였으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 윤기 형!”
지민이 윤기에게 달려와 안겼다. 닷새 만에 보는 얼굴에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그 뒤로 천천히 걸어온 태형이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의 지인은 오랜 친우인 자신이 다 알고 있는데 윤기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니 궁금할 만도 했다. 그러자 지민이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태형에게 얘기했다.
“누구신지...?”
“내 정인이야.”
살풋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지민에 태형은 조금 당황했다. 음. 그러니까, 지금 나를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보고 계시는 이분이 네 정인이란 이 말이지. 태형은 그제서야 윤기에게 인사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민윤기입니다.”
한손은 지민의 허리에 두르고 있고 다른 한손은 저에게 악수를 청하는 윤기였다. 태형은 그 손을 잡았다. 은근한 힘이 느껴져 얼른 손을 빼고는 지민에게 이만 가보겠노라. 말했다. 태형은 갔지만 윤기는 지민의 허리를 둘렀던 팔을 떼지 않았다.
“많이 친한 사이인가?”
“그럼요. 막역지간입니다!”
그저 해맑게 웃는 지민에 그래, 네가 좋다니 되었다. 라고 생각한 윤기는 짧은 질투를 거두었다.
“잠시 걸을까요?”
“그래.”
둘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겨울이 아직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봄이었지만 어두워지니 조금 쌀쌀했다. 낮의 화사한 꽃들은 어둠에도 감춰지지 않은 채 제 존재를 뽐냈다.
‘정인. 정인이라…’
윤기는 아까 지민이 태형에게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너무 기분 좋은 말이었기에 계속 생각하며 담아두고 싶었다. 윤기는 계속 지민을 바라보았다. 보고만 있어도 닳을까 아까운 사람, 손만 잡아도 좋은 사람, 그저 꼭 안아보고 싶은 사람. 그게 지민이었다.
지민은 앞을 보며 걷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느껴지는 윤기의 시선에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아도 빼려하면 더욱 꽉 잡는 윤기 탓에 손을 놓지도 못했다. 지민은 잠시 멈춰 섰다. 그에 윤기도 영문을 모른 채 같이 멈췄다.
“왜 자꾸 저를 보는 겁니까?”
“...”
“그만 좀 보세요. 안 그러면 저도 이제부터 형 계속 쳐다볼 겁니다?”
“나야 좋지. 지민이 네 눈 이렇게 마주 볼 수도 있고.”
윤기가 씨익 웃으며 능글맞게 말했다. 지민이 윤기를 쳐다보자 윤기는 지민과 눈을 맞추었다. 동그란 고동색의 눈동자에 저만 담긴 것을 보니 한껏 기분이 좋아진 윤기다. 지민은 은근 눈을 흘기면서도 윤기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추우냐?”
윤기는 아까부터 몸을 잘게 떠는 지민에게 물었다. 지민은 고개를 저었지만 너무 얇게 입고 나온 탓에 오소소 소름이 돋긴 했다.
“내 품을 빌려 줄 수 있는데. 꽤 쓸만해.”
윤기가 양 팔을 벌리자 지민이 그 안으로 쭈뼛 쭈뼛 들어왔다. 윤기는 제 품에 지민이 들어오자 지민을 꽉 안았다. 지민에게서 나는 특유의 달달한 향이 좋았다.
“... ...따뜻하네요.”
지민이 말했다. 윤기의 품은 너무 포근했다. 마치 겨울 이불에라도 들어온 듯 따뜻했다. 지민도 윤기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고 윤기는 씨익 웃으며 더욱 오랫동안 지민을 안았다. 이윽고, 그의 품에서 벗어난 지민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더워서 그런 겁니다. 더워서.”
둘 사이에 별다른 말은 오가지 않았으나 지민은 괜히 찔리는 것처럼 변명했다. 손 부채질을 하며 애써 얼굴을 식히려는 지민이 귀엽다는 듯 볼을 쓰다듬는 윤기다.
“내 품을 빌려 주었으니 그 대가는 무얼로 받을까?”
“대가라니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 중에서도 내 품은 아주 비싸단다.”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윤기다. 지민은 그 말을 하는 윤기가 아주 얄미워 죽겠으나 뭐, 어쩔 수 있나. 그의 품이 좋은 건 사실이었는데.
“...쳇. 잠깐 이리 와보세요.”
지민의 손짓에 윤기가 가까이 다가갔다. 더 가까이요. 지민이 재차 손짓을 했고 이제 둘의 사이는 아주 가까워졌다.
쪽. 윤기의 입술에 말캉한 무엇인가가 빠르게 닿았다 떨어졌다. 부끄러운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지민이다. 윤기는 그것이 지민의 입술이었음을 인지한 순간 그 특유의 입동굴을 훤히 내비치며 웃었더랬다.
밤이었지만 붉게 물든 지민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느껴졌다. 아무도 몰랐지만 겉으로는 담담한척 하는 윤기의 귀도 색이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그들의 풋사랑이 사랑으로 변하는 그런, 봄밤이었다.
둘은 한참을 걸으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같이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정처 없이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늘의 별들도 너무 멀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테니, 지금 이 밤은 오로지 둘뿐의 세상이었다.
“가볼게요.”
“먼저 가.”
“형 먼저 가요.”
“으음.. 그럼 동시에 뒤 돌자?”
“그래요!”
지민이 큰 소리로 하나, 둘. 숫자를 세었고 셋을 외치자마자 돌아섰다. 다시 뒤 돌아보지 말고 곧장 집으로 들어가는 말에 풀죽은 목소리로 알았다고 말하며 천천히 집으로 들어가는 지민이다. 윤기는 뒤를 돌지 않고 그런 지민의 뒷모습을 보며 살살 웃었다. 귀여워서, 삐죽 튀어나온 입술과 말랑한 볼 살이 귀여워서 웃었다.
“아! 편지!”
지민과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전해주지 못한 편지가 생각난 윤기는 밍기적 대며 집에 들어가려는 지민에게 뛰어갔다. 어깨를 탁 잡자 지민이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고 윤기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보자 편지인걸 알아챘는지 해사하게 웃었다.
“답장이지요? 내일 주시려나 싶었는데.”
“그래.”
“잘 읽을게요!”
고마워요. 지민의 말에 윤기는 쑥스럽게 웃으며 지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너무나 소중히 편지를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지민의 모습이 예뻤다. 윤기는 얼른 들어가 보라며 지민의 어깨를 톡 톡 두드렸다. 가기 싫은지 발로 땅만 연신 차는 지민이었다. 조금만 더 있다 헤어지자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지민이었지만 윤기는 시간이 너무 늦은 탓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기는 다시끔 아쉽게 뒤를 도는 지민을 지켜보다가 돌연 지민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 ...?”
“간다.”
지민은 볼에 느껴지는 입술의 감촉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윤기는 멋쩍게 웃으며 지민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지민은 발갛게 물든 자신의 왼쪽 볼을 살살 매만졌다.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윤기에게 인사하는 지민이다.
“잘 가요!”
*
쾅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오래되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힘없는 문은 덜그럭 소리를 내며 빈틈을 보였고 그 틈을 타서 장정 몇몇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요란하게도 집을 뒤지는 그들은 나이를 지긋이 먹은 집 주인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도 인상만 찌푸릴 뿐 하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왜, 왜 이러는 겁니까.”
“어딨어? 그 새끼?”
“누, 누구, 말인지…”
“이 영감이? 타케다 센츠키 어딨어?”
타케다. 그 이름이 들리자 바닥에 엎드려서 바들바들 떨기만하는 영감을 보며 장정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를 내었다.
“어제 여기 다녀갔다는 사실 다 알고 있어!”
“얼마를 받았나?”
“저...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몰라? 모른다고?”
그들의 추궁에 거의 바닥에 몸을 붙인 채로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는 영감이다. 누군가 영감의 등을 콱 밟았다. 이어서 욕지거리가 들렸고 덜덜 떠는 영감을 발로 차며 구타하는 그들이다. 거의 자식뻘인 남자들에게 발로 채이며 맞고 있는 영감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사람이 영감의 턱 끝을 손으로 들어 올리며 얼굴을 바싹 가져다대며 말했다.
“민윤기 라고 해야 알려나?”
“허..억!”
“민윤기는 다시 여기 올 거야. 잘 잡고 있어. 그럼 너는 살려줄테니.”
잔뜩 날이 서린 말. 소름이 돋았다. 영감의 눈이 흔들렸다. 이 시간에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며 윤기를 찾을 정도면 예사 일이 아니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단정지을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들이 벌인 일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반대한다면 친일세력이거나 일본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든 알려야 했다.
그가 위험했다.
해가 조금 더 높게 올라왔다. 윤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석진을 만났던 곳으로 가고 있었다. 나머지 돈을 찾을 심산이었다. 윤기는 가게에 들어가 가방을 하나 건네받았다. 역시 묵직했다. 어서 지인의 집에 들러 돈을 보낼 생각이었다.
“...헉...헉… 아저씨…!”
그때, 누군가 윤기를 불렀다. 한 아이였다. 지인의 집에 갈 때면 가끔 보는, 지인의 손자였다. 아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빨갰다.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보러 온 오늘 아침, 새벽의 흔적과 함께 엎드려서 앓는 소리를 내는 할아버지를 본 것이었다. 지인, 영감은 손자에게 어서 윤기에게 가서 말을 전해 달라했다.
“하, 할아버지가 아파요… 흐윽...흐어엉..”
“뭐? 마침 가는 길이었어.어서 가자.”
“끕, 끅…아니, 어..서 만주,로 떠,나래요. 여기 오지말고… 끅.. 흐아아앙.”
터져버린 울음을 참으며 말을 전하는 아이를 다독여 주던 때, 윤기의 머릿속에 문득 어제 석진이 했던 말이 휙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그 돈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 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당분간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겁니다.’
아. 윤기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결국…’
윤기는 아직 코를 훌쩍이는 아이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후…일단 할아버지께 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안돼요… 아저씨 다칠 거랬어요… 오지 말랬어요.”
“괜찮다. 괜찮아.”
아이는 무서운지 윤기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영감의 집으로 가는 동안 윤기의 마음은 너무 착잡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이 일이 잘못되면 모두 죽는 것이었다. 얼마 안가 윤기는 영감의 집에 도착했다. 집은 여전히 난장판이었다. 발자국들도 여러 개가 남겨져 있었고 도자기는 깨져서 조각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윤기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게 만든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영감은 윤기를 보자 크게 역정을 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말소리를 내려하면 맞은 곳이 아파 와서 잘 낼 수 없었다.
“여긴 뭣하러 왔어! 바로 떠나라고 하지 않더냐!”
“...”
“정수 이 놈아! 말을 똑바로 전하지 않은 게야!”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제가 오자 한 것입니다.”
영감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걱정, 화, 슬픔 등등의 감정들이. 이렇게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는 어디로 숨든 잡힐 게 뻔했다. 그렇기에 얼른 이 땅을 떠나라 한 것인데, 말을 듣지 않는 윤기가 답답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변을 당하셔서.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고 뭐고, 어제 받은 돈은 이미 보내 놨으니 나머지만 들고 어서 가라. 여기 있다가는 너나 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간다.”
“예, 뭘 염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 조리 잘 하세요.”
영감은 윤기의 인사에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고 윤기는 영감의 손자에게 할아버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아무래도 신변이 들킨 탓에 조만간 이곳을 떠야하는 건 사실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만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따라 망설여지는 것은 왜일까.
그냥, 어젯밤 지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사하게 웃던 그 모습을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제 못 볼지도 모르는데, 그 모습을 한번 더 눈에 담고 싶었다. 한번 더 품에 안고 싶었다. 윤기의 발걸음은 지민에게로 향했다.
윤기가 왔다는 걸 들은 지민은 당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안 그래도 어젯밤 받은 편지를 다시 읽고 있던 중이었다. 넘치는 설렘을 주체를 못하고 달려 나온 지민의 눈앞에 서있는 윤기는 얼굴은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잠시 걸을까요?”
어제와 똑같은 말을 건네는 지민에 윤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이제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신경이 여러모로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지만 지민과 있는 지금은 살짝 누그러진 기분이었다. 역시, 그도 거사를 앞두긴 했지만 그도 봄을 즐길 줄 아는 23살 밖에 안 된 어린 청년이었다.
“사실 어제 받았던 편지 읽고 있었어요. 어제 늦게까지 여러 번 읽었는데도 너무 좋아서 오늘 일어나자마자부터 계속 읽었는걸요.”
“그러냐. 다음에 또 써줄 테니 잠은 푹 자야한다.”
미소를 띄우며 지민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윤기였다. 지민도 머리를 만지는 윤기의 손길이 좋은지 가만히 있었다.
타닥. 그때 무슨 소리가 윤기의 귀에 정확히 들렸다. 분명 누군가의 발소리였다. 감이 좋지 않았다. 지민을 쓰다듬는 윤기의 손길이 멈췄다.
윤기는 지민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윤기의 갑작스런 행동에 지민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너무 다급해 보이는 표정에 아무 말 않고 그를 따랐다.
누군가 윤기와 지민, 그 둘을 쫒았다. 아까는 숨어서 쫒아오더니 이제는 대놓고 빠르게 둘을 쫒아왔다. 윤기는 작은 골목 사이사이로 들어가며 그들을 따돌렸다.
“허...허억...헉… 형.. 대체 무슨…”
“미안하다.”
지민이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물어왔지만 윤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자였다면 죽을 각오로 싸웠겠지만 지민과 함께 있으니 그럴 수 없어서 그냥 뛰었다. 그 자들의 생김새나 옷차림, 그런 것을 제대로 본 게 아니라서 더욱 걱정스러웠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서. 저야 다친다 해도, 죽는다 해도 별 상관없는 몸이었지만 지민은 아니었다. 윤기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주위를 살피며 지민과 함께 조심히 걸어 나왔다.
“지민아.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다. 데려다 줄게.”
“...네.”
“당분간 집에서 나오지 말고, 혼자 있지도 말고.”
“...네.”
“미안하다.”
“...네.”
둘은 말없이 걸었다. 지민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고 윤기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은 맑기는 또 엄청 맑아서 둘이 처음만난 날을 연상케 하는 그런 날씨였다.
“다치지 마요.”
지민의 한마디가 둘의 침묵을 깨었다. 윤기는 살짝 웃으며 알았다고, 안 다치겠다고 연신 되뇌었다.
“가볼게요.”
“그래.”
내일 꼭 보자. 우리. 윤기는 끝말을 삼킨 채 뒤돌았다. 썼다. 삼킬 수 없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겨우 흘려보냈다.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누구냐.”
어느 정도 걸었을까, 윤기의 앞이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그 새끼들이다. 윤기는 피하려했지만 여럿이서 앞뒤를 다 막은 상황이었다.
“후… 영감에게 잘 좀 잡아 달랬는데. 여기서 보네?”
“...?!”
“아아. 걱정 마. 아이는 살아있으니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죽일 것만 같은 살기를 내뿜고 있는 윤기에 피식 웃는 그들. 아주 기고만장했다.
“영감은, 죽었고.”
“... ...뭐?”
영감이 죽었단다. 손자 보는 앞에서 피를 흘렸단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만났던 영감이, 나 때문에 죽었단다. 나 도와주다가 죽었단다.
“미친.. 네 놈이 죽으려고…!”
윤기는 실실 웃고 있는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몇 년간 아버지처럼 여기며 모시고 섬겼던 분인데, 그런 분들 돌아가시게 한 저 새끼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주먹으로 한 놈의 얼굴을 내리쳤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은 그 놈은 비틀거리다가 반격해왔다. 하지만 곧 윤기의 발에 막혔고 그 놈은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덤벼들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은 뒤로 조금 빠져 여전히 피실 피실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윤기는 다른 놈들은 다 제쳐두고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품 속에 있던 총을 꺼내어 그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쏠 건가?”
“...”
“박지민.”
“이 미친 새끼가!”
그 남자의 입에서 지민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윤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워워. 진정하고.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
“군대, 해산시키게.”
“뭐?”
“뭘 놀라는 척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
“이렇게 몰래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거라 생각하나. 아무도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아. 자네도 이쯤하고 넘어가면 없던 일로 해주겠네.”
“풋. 그럴리가.”
윤기가 실소를 내뱉었다. 지금 저 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남자는 윤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옆을 지나갔다.
“며칠의 말미를 주지. 잘 판단하게.”
모두 가고 그곳에는 윤기 혼자 남았다. 윤기는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제서야 슬픔이 밀려왔다. 땅이 한 방울씩 젖어 들어갔다. 그 슬픔은 너무 컸지만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혼자 짊어지기에는 아직 너무 무거웠다. 23살의,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깊고 큰 흉터로 남을 그런 상처들이었다.
‘다치지 말라고 했는데.’
다쳐버렸네. 윤기는 얼굴과 팔에 생긴 상처들을 더듬었다. 죽도록 화창한 하늘 앞에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
“아이고…아이고,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흐윽...흑…”
대성통곡을 하는 소리가 몇십 리 전부터 들렸다. 영감의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이웃들까지도 함께. 이는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 앞에서 며칠 째 서성이며 들어가지 못하는 한 사람. 윤기였다. 어떻게,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발이 안 떨어졌다. 그러지 않을 분이라는 걸 제가 가장 잘 알면서도
니 놈이 뭣한답시고 여기 찾아 왔냐, 그 뻔뻔한 낯짝을 들고 어딜 들어오느냐, 이 천하의 못돼먹은 놈. 과 같이 영감이 호통을 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자신의 시선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트는 윤기이다.
하.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직까지 자신의 손에 있는 나머지 돈이 든 이 가방을 노려보았다. 다 이것 때문인 건가도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미 벌어진 일이니 다 부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는 발걸음을 옮겼다.
“형!”
그때, 누군가 윤기를 불렀다. 지민이었다. 지민은 저벅저벅 빠르게도 걸어가 윤기와 가까이 마주보았다. 그런 지민을 보는 윤기의 표정은 참담하리만큼 아무렇지 않았다. 미소를 짓기 위해 입 꼬리를 올리려 노력을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대로였다.
“혼자야? 당분간 나오지 말랬잖아. 위험해.”
“괜찮아요.”
“다행이네.”
지민을 이리저리 살피며 안부를 묻는 윤기에 지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민은 윤기를 잠시 보더니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지민이 윤기를 데려온 곳은 작은 술집. 윤기는 나가려고 했으나 단호하게 잠시 앉아보라고하는 지민에 어쩔 수 없이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편히 있어요. 여기 태형이 가게니까.”
“... ...”
“걔는 믿어도 돼요.”
“... ...”
“형. 나한테 말할 거 없어요?”
“... …없어”
“진짜…말할 거 없어요?”
“... ...그래.”
음… 지민은 연신 윤기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손가락으로 괜한 식탁만 톡톡 쳤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들은 내용이지만 윤기에게 듣는 건 다르지 않나.
윤기와 헤어진 직후.
지민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서 당과나 깨작거리고 있는 태형을 발견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과를 마저 입에 털어 넣고는 자세를 고쳐 앉는 태형에 픽 웃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깔고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여기 앉아봐라. 하는 태형이다.
“뭐야?”
“어허, 일단 앉아봐. 네 ‘정인’님과 관련된 일이니.”
응? 일부러 ‘정인’을 힘주어 말하는 태형. 지민은 그 단어에 이끌려 태형을 마주하고 앉았다. 입을 열기에 앞서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게 사뭇 어두워진 태형에 지민은 의아했지만 일단 잠자코 있었다.
잠시 뒤, 태형이 말을 시작했다.
“...아까 도망치는 너희 두 사람을 봤어.”
“아..”
“당사자에게 듣는 게 예의인 것 같은데, 내가 말해서 미안해. 상황이 상황인지라, 너까지 다칠까봐.”
“뭔데 그래.”
왠지 불길한 예감이 지민의 머릿속을 휙 하고 스쳐지나갔다.
“민윤기. 항일단체 소속이야. 군대를 조직하고 있는데, 민윤기가 그 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지. 내 추측으로는 내부고발로 인해서 다 들통난 것 같아. 군대가 어디 주둔해 있고, 뭐 이런 자세한 것들은 모르겠지만 민윤기에 대해서 알 정도면 그쯤 알아내는 거야 식은 죽 먹기겠지. 지금껏 아무도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거든. 아마 아까 쫓아온 사람도 민윤기를 죽이려고 누가 보낸 자 일거야.”
태형의 말을 다 듣고도 지민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분명 물음이 따라와야 할 텐데 질문은커녕 멍하니 있는 지민에 태형은 괜히 초조했다. 잠시 후, 생각이 조금 정리되었는지 지민이 태형을 바라보았다.
“그럼 넌?”
“그 소속은 아니고, 지인 부탁으로 가끔 전달했지.”
아… 그제서야 지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나 때문에 알려준 거야?”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네가 다치는 게 싫어서도 있지만 군대가 해산되면 손도 못써보고 잡아먹힐 것 같아서. 나즈막히 그 이유를 내뱉는 태형. 모든 말을 들은 지민의 눈빛이 변했다.
“뭘 도와주면 될까.”
이렇게 지금의 상황까지 온 것이었다. 태형은 윤기가 있음직한 곳을 알려주며 일단 윤기한테 가보는 게 좋겠다 했고 지민은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윤기의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 적막이 흐른 지 한참. 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떼었다.
“... ...작년 겨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허약하신 분이라 다들 병이 악화되어서 그리되셨다고 했지만 사실 독살이었어요. 아버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사람들이 괜히 아버지는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못하니 어머니께 그런 거죠. 의원을 돈 몇 푼으로 매수해서 약에 독을 조금씩 섞은 거죠. 그걸 매일 드셨으니… 그럼 아버지가 흔들릴 거라 생각했나 봐요.”
“지민아.”
건드리면 눈물이 떨어질듯 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지민. 윤기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지난겨울은 유독 춥고 견디기 힘들었어요. 날씨가 조금씩 풀리자 마음도 조금씩 녹은 거랄까요. 잔뜩 날이 서있었는데 요즘은 표정 좋아졌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형 덕분인거죠.”
“... …”
“저는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씁쓸한 미소를 짓는 너에게 내가 무어라 말해야 할까. 윤기는 지민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이야기까지 해주는 이 아이의 진심은 무엇일까.
“지민아. 나는…”
윤기는 결국 지민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유학시절부터 시작 된 꽤나 긴 이야기 었지만 지민은 한 번도 딴짓 하지 않고 윤기에게 집중하며 경청했다.
“... ...그렇게 된 거야. 미안하다만 이 일에 너를 더 이상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아.”
“아니요, 도와줄 거예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잖아요? 형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고맙다.”
“별 걸요. 그나저나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까요?”
항상 순둥 순둥 하기만 했던 지민의 표정이 영악하게 바뀌었다. 자기의 추측과 윤기의 말을 적당히 맞춰가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모습. 하지만 그닥 큰 방도는 찾지 못했는지 머리를 감싸며 식탁에 푹 엎드리는 지민이다. 윤기는 지민의 머리에 슬며시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지민이 윤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형은 원래 어쩔 계획이었어요?”
“뭐, 그때도 지금도 딱히 방도는 없어.”
“뭐야아…”
“... ...상부에서는 대부분 모를 거야. 쉬쉬하고 있는 분위기거든. 그래서 다음에 올 때는 부하들 대신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이가 직접 나올 확률이 커. 불안한 거지. 그때를 기회로 다 없애는 것밖엔.”
“그치만 여기를 떠나도 되잖아요.”
내가 널 놔두고 어딜 가겠니. 윤기가 지민의 볼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아야… 아프지는 않았지만 저를 바라보는 윤기의 눈빛을 보자 괜히 민망해져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에 윤기는 피식 웃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 끔 달달함이 돌았다.
탁 탁 탁 탁.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서 듣기에도 점잖은 발소리도 섞여 들렸다. 윤기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윤기가 몸을 일으켰다. 지민에게는 여기 있으라고 했지만 지민은 한사코 거절하며 따라나섰다. 결국 같이 나오게 된 둘. 그들을 만났지만 저번처럼 주먹이 날아다니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들은 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시가 내려질 때 까지 그 매서운 눈빛만 쏘아댈 뿐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함께 온 사람 때문이리라. 입고 있는 차림새는 얼핏 봐서는 일반인과 비슷했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무겁고 사나웠다.
“김유헌 이라고 하네.”
“귀한 발걸음 하셨군요.”
김유헌. 이름 석 자만 얼핏 들어본 인물이었다. 약해빠진 집안이어도 그들에게 잘만 굽신대면 어떻게든 한 자리 얻을 수 있던 시대, 유헌도 보나마나 그런 자이겠거니 생각한 윤기였다. 윤기가 어떻게 생각하던 유헌은 윤기의 말에 스스로 매우 흡족해했다. 마치 윤기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듯 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생각은 좀 바뀌었나?”
“... …”
“그 일은 유감일세. 겁만 주라고 했는데, 참… 내 부하들이 워낙에 사명감이 깊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몇 발걸음 더 걸어와 윤기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유헌. 윤기는 제 어깨에 닿은 손을 쳐냈다. 소름이 끼쳤다. 말로는 유감을 표하지만 보란 듯이 웃고 있는 눈. 그 눈길이 윤기의 옆에 서 있는 지민에게로 향했다. 뱀이 득실대며 제 온 몸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마치 따르지 않으면 지민도 그렇게 될 거라는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이었다.
“제가 무얼 하기를 원하는 겁니까.”
“음? 나에게 몇 가지 사실만 알려주면 돼. 군대는 내가 해산 시킬 거니까. 아무래도 확실히 하는 편이 어느 쪽에나 좋지 않겠나. 알려주기만 한다면야 자네는 특별히 빼주겠네.”
“하.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믿을 수밖에 없겠지.”
윤기의 입에서 차가운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유헌은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될테니.”
“뭐하는 짓입니까!”
지민이 소리쳤다. 저항할 틈도 없이 지민의 두 팔이 유헌의 부하들에게 잡혔다. 지민은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두 명의 힘을 한 번에 상대하긴 어려웠다. 지민의 머리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총구였다.
“또다시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는 않을 거야. 안 그런가?”
“... …내가 알려줄 것이 무엇입니까.”
윤기는 거의 포기하다 싶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는 너무 많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둘 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작전은, 계획은, 군대는 다음에 다시 모을 수 있지만, 지민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는 윤기의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불과 며칠 전 자신 때문에 소중한 이를 잃은 윤기에게는 옳은 생각이었다. 아니,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오게.”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 유헌은 윤기를 데리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윤기는 지민을 슬쩍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환하게, 아주 환하게.
“아… …”
지민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 일이 어떻게 계획되어진 일임은 태형을 통해 꽤나 자세히 알고 있었다. 비록 다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형이 아는 곳까지는 설명을 들었으니,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알았다. 윤기가 어떤 사람인지도 안다. 그러니 더욱 이래서는 안 되었다. 고작 나 하나 가지고 몇 년간의 노력을 그르칠 셈인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 했던 말. 후회되었다. 이리 될 줄 알았으면 하지 말걸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금 상황은 얼핏 봐도 자신과 윤기에게 불리해보였다. 조금 걱정도 되고 겁도 났다.
그렇지만 윤기의 미소를 보는 순간, 지민은 조금 느슨해진 팔을 세차게 뿌리쳤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을 빼앗았다. 워낙 빠른 움직임에 그들 또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역시,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워놓길 잘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윤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로 위험한 광경이었다. 일 대 다수로 지민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헌은 별 같잖은 일이 또 벌어지는구나. 라고 생각했는지 윤기가 지민에게 뛰어가자 그제서야 그곳으로 돌아왔다.
“괜찮아?”
지민은 아까 윤기가 했던 것처럼 환하게, 아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이제, 무를 수도 없겠네.”
“죽지만 말아요.”
“그래.”
윤기는 지민의 단호한 음성에 픽 웃었다. 윤기도 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둘은 서로 등을 맞대고 유헌의 부하들과 팽팽하게 대치했다. 이제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믿기로 했다.
“이런 이런. 이게 무슨 일인가.”
굉장히 안타깝다는 말투로 말을 건네는 유헌에 윤기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살려준다고 했건만… 일이 이리 되었으니, 어쩔 수 없네.”
“누가 살지는, 두고봅시다.”
“음, 일단 생포해라.”
유헌의 눈썹이 기분 나쁘게 꿈틀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하들이 하나 둘 윤기와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유헌이 지시를 내린 탓에 그들은 아직까지는 일체 무기를 쓰지 않았다.
그동안 서글서글했던 지민의 인상이 아주 날카롭게 변했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자 몇몇을 손쉽게 쓰러뜨린 뒤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라는 듯 탁 탁 손을 털었다. 크지 않은 체구인지라 급소만 공격해서 이기는 법을 배워둔 탓이었다.
윽. 그때 누군가 지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지민은 맞은 곳을 감싸며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를 틈타 상대가 지민에게 달려들었다. 지민도 이를 꽉 깨물고 맞섰지만 맞은 부분들이 아려왔다. 아무리 싸움을 잘한대도 이렇게 많은 사람과 한 번에 싸워본 적은 없었기에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민의 힘이 살짝 풀린 그 순간. 상대는 지민을 공격해왔고 이제 끝이구나. 싶었을 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쓰러졌다. 윤기였다.
“괜찮아?”
“네.”
지민은 겨우 힘을 내서 몸을 일으킨 뒤 다시 맞서 싸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헌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다시 지시를 내렸다. 총, 즉 무기 사용을 허용 한 것이다.
탕.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비록 그들을 비켜갔으나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윤기는 지민을 데리고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겼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성이 연달아 이어졌고 급기야 윤기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어깨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셨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꽤 깊게 박힌 듯 한 총알에 어깨를 움직이기 힘들었다. 덕분에 움직임이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윤기는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치료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윤기는 유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먼저 부하들을 지위하는 유헌을 없애야한다고 생각했다. 가는 동안 뒤에서 지민이 엄호를 해주었다. 둘의 호흡은 마치 몇 년간 같이 살았던 것처럼 딱 딱 맞았다.
“후…”
드디어 윤기가 유헌의 앞에 다다랐다. 도대체 몇 사람을 죽인건지. 손에 피를 묻혀본 적이 없는 지민이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자신만큼 잘 싸우고 있는 지민의 모습에 한숨 돌리는 윤기였다.
유헌은 윤기가 온 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그의 옆에 있던 부하들은 진작 처리했고 유헌은 혼자였다. 윤기는 빠르게 그의 다리를 차서 무릎을 꿇게 유헌은 당황한 눈빛으로 윤기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표정. 정말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윤기는 그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었다.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름 돋는 말투에 유헌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는 윤기가 굳이 말을 안 해도 알아서 부하들을 저지시켰다. 열 댓 명에서 서 너 명밖에 남지 않은 부하들에 다시끔 놀란 유헌이다. 사방이 조용해지면서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과 시체, 앓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유헌은 겁이 났다. 심약한 사람이었다. 그저 돈 몇 푼 쥐어주거나 목숨으로 위협하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이 일을 오로지 자신의 공으로 돌려 더욱 좋은 관직을, 더욱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했었다. 그래서 다행히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유헌 뿐이었다.
이렇게 두려워 할거면서 뭣 하러 일을 벌였는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민이 슬쩍 몸을 일으키고는 윤기의 곁으로 달려왔다.
“제발, 살려줘.”
제발. 목숨만… 유헌이 애원했다. 아까의 그 자신 넘치던, 거만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처절한 광경이었다.
잠깐 고민을 하는 듯 한 윤기.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더니 검지손가락을 움직였다.
탕.
유헌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끝. 끝이었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난 것이다. 그의 부하들은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갔고 아마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윤기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허탈했다. 이렇게 끝날 것을. 이겼지만 모든 걸 잃은 기분. 문득 손에 따스한 감촉이 느껴졌다. 윤기는 자신의 왼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민의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괜히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긴장이 탁 풀렸다. 그와 동시에 아까 다쳤던 어깨의 고통이 몰려왔다.
“으, 윽…”
“뭐예요, 다쳤어요? 얼마나, 어떡해. 빨리 가요.”
윤기의 신음에 지민은 그의 어깨를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윤기는 지민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뇨! 총, 총알 박힌 거 아니예요?”
“... ...그래도 우리 죽지는 않았어.”
싱긋 웃는 윤기. 지민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그게 뭐냐며 투덜댔다. 윤기는 지민을 데리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뒤를 돌면서 그곳에서의 일은 떠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유독 맑은 하늘이었다.
둘은 병원으로 향했다. 피를 흘리며 걷는 둘의 행색을 간혹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흘끔 쳐다보기도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왔으면 이렇게 다치냐며 의사가 화를 냈다. 둘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총알이 깊게 박혀있지 않아서 예상보다 금세 치료를 끝낸 윤기다.
둘은 서로 마주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를 당기는 사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 있었던 다사다난했던 일들이 스쳐지나가는 것만은 확실했다.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것이 느껴졌다.
*
“형!”
“천천히 와.”
이제는 조금 더워진 날씨가 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윤기는 한껏 웃으며 달려오는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봄의 처음에 만난 둘은 끝자락까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윤기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진 않으며 조금씩 단체를 도왔고 지민과 더욱 자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참,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돌이켜보면 믿기지도 않는다. 뭐, 어차피 이어질 인연은 인정할 수 없는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이어진다고들 한다.
“형, 이것 봐요!”
예쁘죠? 언제 거기까지 갔는지 벌써 자신을 제치고 앞으로 뛰어가 꽃밭에 쭈그려 앉았다. 윤기는 신난 지민을 따라가며 피식 웃었다.
이제는 벚꽃보다 붉은 장미가 만개했다. 여전히 봄바람은 따스했고 벌과 나비가 날아들었다. 길가의 꽃잎이 흙먼지를 막아주는 듯 걸음의 느낌도 좋았고 숨을 들이쉬면 깊게 느껴지는 꽃내음도 좋았다. 수줍게 불었던 봄바람이 더욱 따스하게, 사랑스럽게 불어왔고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무엇보다 저 앞에서 옅은 홍조를 띄고는 밝게 웃는 지민이 윤기의 검은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나에게 지민은 그 해 봄의 선물이었다.
그 해 경성은, 내 생에 가장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 해 봄은,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