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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이름

w. 헤즈밍

"... 민, 지민아. 일어나야지."
"으응... 조금만 더 잘래..."
"안돼. 너 오늘 1교시 있잖아."

윤기의 '1교시' 소리에 지민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물었다.

"헉, 지금 몇 시야?"
"8시. 밥 해놨으니까 빨리 씻어."

8시.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자취하는 둘에게는 밥을 먹고 바로 나가면 딱 적당할 시간이다. 지민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비척비척 욕실로 걸어들어갔다. 

"이게 뭐지?"

세수를 하려 잠옷의 소맷자락을 걷어올리던 지민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검은색의 이상한 자국. 누가 제 팔에 저도 모르게 낙서라도 한 걸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지민이 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막 일어나 아직 흐릿한 눈을 가늘게 뜨며 본 자국의 정체는, 네임이었다. 그것도 '민윤기'라 적힌. 지민은 그 네임을 보고서는 아연실색했다.

지민과 윤기의 부모는 서로 막역한 사이였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공교롭게도 둘은 같은 해에 태어나 뽀작뽀작 기어 다닐 적부터 같이 자랐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고 같은 초, 중, 고를 나왔으며 대학도 둘이 같은 곳을 지원해 합격했다. 서로를 알고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23년이었다.

충격이 꽤나 심했던 모양인지 지민은 계속해서 물이 흐르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네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지민! 너 욕실에서 뭐 하냐? 빨리 씻고 나와."

윤기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지민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앗, 어. 지금 나가..."

지민은 힘없이 욕실에서 걸어 나와 식탁에 앉았다. 오늘 아침 메뉴는 지민이 좋아하는 계란말이였지만 지민은 아직도 네임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그마저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기가 물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계란말이도 했는데 영 밥을 못 먹네."
"어? 아니, 그냥. 오늘따라 입맛이 없어서."

그날 하루 종일 고민했지만 지민은 이제 윤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

"지민아, 오늘 밥..."
"앗, 미안해. 오늘 태태랑 약속 있어서! 갈게!"

처음 며칠은 그러려니 했다. 연속으로 약속이 잡힐 수도 있지 하고.

"지민아, 오늘 공강 시간에..."
"어, 나, 그, 오늘 합창곡 연습이 있어서!"

나흘째 되는 날, 윤기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민아, 오늘..."
"나 오늘 조별 과제 있어. 미안!"

일주일. 윤기는 지민이 저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

박지민이 민윤기를 피하고 있다. 이 간단한 명제가 윤기를 혼란에 빠뜨렸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까지 무려 23년을 함께했는데 지민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피한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해봐도 자신은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는 결론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윤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몇 없었다.

1. 이 상황을 지속하며 지민이 언젠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2. 단도직입적으로 너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
3. 지민의 일기를 훔쳐본다(?)

윤기는 결국 2번을 택했다.

"박지민. 너 왜 나 피해?"
"뭐? 내가 언제 널 피했다고 그래..."
"너 나 피하고 있잖아. 약속 있다면서 요새 밥도 계속 따로 먹으려고 하고. 집에도 먼저 가고. 아니야?"

그에 지민이 뜸을 들이다 윤기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니야... 요새 진짜로 바빠서, 할 것도 많고... 그래서 그런 거야."
"... 알았어. 그런 걸로 해. 대신 나중에, 뭔진 몰라도 말할 마음이 들었을 때, 숨기지 말고 말해줘. 알았지?"
"응... 고마워..."

*

그 뒤로 꼬박 일주일이 더 흘렀다. 아직까지도 지민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 멍하니 길을 걷던 지민이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벚꽃이 활짝 핀 산책로까지 온 뒤였다. 요새 계속 넋을 놓고 다니는 자신의 상태에 한숨을 쉬며 지민은 앞을 쳐다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보다 속도를 내서 걸어가던 중, 자신보다 앞쪽에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윤기를 발견했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이 괜스레 마음에 들지 않은 지민이 오랜만에 장난이나 할까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윤기에게 다가갔다.

둘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다섯 발자국 정도를 남겨놓은 채 윤기에게 지민이 손을 뻗던 그 순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인 것 마냥, 봄바람이 윤기의 옷자락을 가볍게 들추고 지민의 시야에 들어온 그의 하얀 등의 허리께에는.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보면, 대학에 들어오기까지 윤기는 단 한 번도 애인을 사귄 적이 없었다. 지민이 그 사실을 언급하며 윤기를 모태솔로라고 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의 반응은 담담했다. 아니, 약간은 서운한 표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윤기와 지민이 전공 빼고는 시간표를 전부 맞추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같이 밥을 먹으며, 동거까지 한다는 사실에 놀란 지인들이 둘이 사귀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 때 지민은 그저 소꿉친구일 뿐이라며 일축했지만, 그때 윤기의 표정은 어땠던가.

*

"민윤기!"

지민이 크게 소리쳐 윤기를 불러 세웠다. 그 소리를 들은 윤기가 돌아서 저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지민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윤기야. 나랑 얘기 좀 해."

윤기가 그 말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얘기할 마음이 들었어?"
"응. 나... 나 있잖아,"

무작정 불러 세웠기에 지민에게는 아직 대화를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조금 뒤, 무언가 결심한 듯한 지민이 자신의 팔을 들어 천천히 소매를 걷어올렸다. 자신의 네임을 본 윤기가 지민의 팔을 붙잡고 아무 말 없이 그 위를 쓰다듬었다.

"너 등에...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는 네임 없었잖아. 무서웠어. 박지민은 흔한 이름이라서, 어쩌면 네가 내 네임이 아닐까 봐. 이걸 보여주면 네가 내게서 멀어질까 봐."
"... 바보야. 언제부터였는데?"

윤기의 대답에 울 것 같아진 지민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괜히 윤기를 타박했다.

"음, 아마도 고등학교 때?"

*

윤기가 처음 자신의 네임을 발견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샤워하고 나서 하의만 입은 채로 돌아다니다가 스친 거울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아른거렸다. 처음엔 거울에 뭐가 묻었나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등에 뭔가 묻어있다는 뜻이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는데 뭔가 묻었다는 게 좀 이상했지만 뭐 어떠랴.

등이 보이도록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돌려 겨울에 비친 것을 확인했다. '박지민' 세 글자가 유난히 선명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등은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는 힘든 부분이니 발견한 것은 오늘이지만 나타난 것은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네임을 확인한 윤기는 지민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이야 이미 지민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걸 보여주면 친구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지민이 자신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아니, 어쩌면 이 '박지민'이 제가 사랑하는 박지민이 아닐 수도 있다. 윤기는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이 너무 무서웠다. 

그 후로 윤기는 자신의 등을 철저히 숨겼다. 체육복도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고 가족들이 괜히 보고 설레발칠까 봐 집에서도 꼭 상의를 입고 다녔다. 

아무도 없는 산책로에서 윤기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애써 울음을 참던 지민의 얼굴은 윤기의 말이 계속될수록 일그러져만 갔고 결국 윤기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지민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윤기가 당황하며 지민을 토닥였다.

"지민아, 왜 울어? 응? 눈물 그쳐봐."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너 피해 다니기만 해서."
"쉬이. 괜찮아. 다 지난 일이잖아. 너 이제 더 이상 나 안 피할 거잖아. 그렇지?"

자신에게 변함없이 다정한 윤기의 말에 지민은 결국 윤기의 품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

"...크응...훌쩍"
"이제 다 울었어?"
"웅..."
"있잖아 지민아,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 거야?"
"...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민이 윤기의 얼굴을 붙잡고는 슬쩍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윤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홧김에 저질러 놓고서 반응을 살피던 지민은 윤기가 미동도 없이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부루퉁해져서는 그대로 윤기의 품에서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아무래도 삐진 모양이다. 어버버 거리던 윤기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지민을 뒤쫓아갔다. 

"지민아! 잠깐만, 같이 가!"

바야흐로, 봄이었다.

fin.

© 2018 by SUJIM Four Seasons, presented by @EPILOGUE_sj & @Love_maze_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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