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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에서

 


w. 에필

 


“야 박지민! 방학인데 어디 안 가냐?”
“가긴 어딜 가, 집에서 잠이나 자야지”
“됐고, 바다 가자 바다!”
“아 김태형 좀! 나 집 바로 가야 돼. 연락해라-”
“응 빡지 잘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태형을 뿌리친 지민이 태형을 향해 손을 흔들며 태형의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가 약 열번은 반복된 교장선생님의 기나긴 연설을 버텨내고 드디어 약 반 년을 기다려왔던 방학이다. 물론 방학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학교에 안 가는 것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 더운 여름에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로 충분히 기쁜 지민이였다. 당연히 여름 방학 계획이라고는 잠자기와 게임하기 정도밖에 없었지만, 그 정도면 방학치고는 충분히 부지런한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엄마 저 왔어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마자 상체를 숙여 신발을 벗으며 지민이 외쳤다.


“어 지민아! 아직 신발 벗지 말고 옆 집 좀 갔다와"
“옆 집 비었잖아?”
“아 어제 새로 이사 왔는데, 네 또래인 거 같더라. 가서 인사나 좀 하고 와. 방학이니까 좀 챙겨주고"


얼떨결에 신발이 반쯤 벗겨진 채로 떠밀려 나온 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발을 고쳐신고는 옆집 문 앞에 섰다. 


‘아무도 없는 거 같은데,’


띵동-


문 앞에서 1분 정도 가만히 서있던 지민은 다시 한번 벨을 눌렀고, 집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지민은 아무 말 없이 뒤로 돌아섰다.


“아악-!”
“누구신데, 저희 집 앞에 계세요?”
“그, 옆집 사람, 인데요… 어제 이사 오셨다고…하셔서 인사 드리려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에 흰 반팔 티, 검정색 반바지에 삼선 슬리퍼, 피부는, 엄청 하얗고… 눈이, 매력적이다.


“아, 죄송해요. 민윤기입니다. 뭐, 아시겠지만 어제 309호로 이사 왔어요.”
“저는… 지민이에요, 박지민. 여기 308호 살고... 아, 이 동네는 처음 오신거죠..?”
“네, 지민씨. 이 동네 잘 모르니까 종종 물어봐도 되죠?”
“아 그, 그럼요!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저 집에 계속 있으니까, 초인종 누르시면 도와드릴게요! 그… 안녕히 가세요-”


빨개진 얼굴을 들킬세라 인사를 하고는 급하게 집에 들어간 지민이였다. 


다급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는 지민의 집 문이 닫힌 이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지민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얼빠진 표정으로.


“허, 미치겠네. 쟤가 뭐라고 귀엽지,”


자신의 얼굴에 미소가 걸린 것도 모른 채 윤기는 자신이 느낀 감정에 대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전날과는 다르게 바깥의 햇빛은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 뜨거웠다. 
여름의 시작이었다.

 

 

 

 


-

 

 

 

 


띵동- 


“네, 나가요-”


벌컥-
벨을 누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아 옆집, 그, 박지민이라고 했나? 맞죠?”
“어, 어?? 네네, 맞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고 있었던건지, 지민은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며 있다가 윤기가 나왔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는 윤기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며 답했다.


“근데 저희 집은 무슨 일로…”
“아, 그 앞에 편의점 갔는데 아이스크림 투쁠원 하길래... 더우니까 하나 드리려..구요…”


머뭇거리며 말을 끝낸 지민은 부끄러운지 다시 시선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래서, 지민이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윤기의 집에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다시 보고싶었으니까.


첫 만남 이후, 윤기의 얼굴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렸고 바로 찾아가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윤기가 자신을 이상하게 볼까봐, 불편해 할까봐 등등의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한참을 고민만 한 지민이었다. 


이틀 동안의 고민 끝에 지민이 내린 결론은 ‘첫 눈에 반했다” 였고, 사랑에는 꽤 저돌적인 면이 있는 지민이었기에 어떻게 하면 윤기랑 더 친해질지 고민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메로나를 사러간 것이었다. 집에 돌아온 지민은 집 도어락에 손을 대고는 한참을 또 고민했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충동적으로 309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물론, 윤기 앞에만 서면 제대로 작동하지를 않는 사고회로 때문에 계획이고 뭐고 다 싸그리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단순히 윤기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충동적으로 윤기네 집에 간 지민을 윤기는 꽤나 다정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밖에 많이 더우니까 일단 들어올래요?”
“네, 네?”
“네라고 했으니까 발리 신발 벗고 들어와요"


무의식적으로 네라고 답한 것을 자각한 지민이 당황하는 사이, 윤기는 자연스럽게 지민의 손을 잡아끌어 집 안으로 들였다. 


윤기의 크고 하얀 손이 자신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것을 본 지민은 윤기 몰래 얼굴을 붉혔다. 윤기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고, 깔끔한 집 안이 제 방과 비교돼 혼자 창피함을 느끼는 지민이었다. 


“여기 소파에 앉아요”
“아 네! 그 전에 이거, 아이스크림 녹을 거 같은데,”
“메로나네요, 나 메로나 좋아하는데.”
“아 정말요? 저두 메로나 엄청 좋아해요! 맨날 가서 메로나 사먹는데, 겨울에 사먹다가 감기 걸려서 엄마한테 등짝도 맞구, 어쨌든 저 메로나 매일 먹어요, 너무 좋아해서...”


윤기는 신이 난 듯 쫑알거리는 지민을 미소를 지은 채 바라봤고, 지민은 한참 쫑알거리다가 자신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윤기를 보고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메로나 사러 가면 나도 이렇게 하나씩 사다줄 수 있어요? 아니다, 같이 사러 가요. 편의점 갈 때 혼자 가면 외롭잖아.”
“엇, 그럼 저는 좋죠!”
“난 계속 집에 있으니까 아무때나 와서 벨 눌러요, 같이 가게.”
“네 좋아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은 둘이었다.


“아 근데 윤기씨는 몇 살이에요? 저는 이제 고2요!”
“음…저는 고3인데 학교는 안 다녀요.”
“아 정말요? 그럼 평소에는 뭐 해요?”
“음악해요. 가사 쓰고, 비트도 찍고, 랩도 좀 하고. 저기 방에 장비들도 다 있는데. 다음에 오면 구경 시켜줄게요"
“우와…멋있다… 고등학생인데 벌써부터 하고 싶은 일 하는 거, 너무 멋진 거 같아요"
“그래요? 멋있다니 기분 좋네요"
“아 근데 말 편하게 하셔도 되는데… 저, 형이라 불러도 돼요?”
“그럼 지민이...라고 부르면 되나?”
“응, 윤기형! 히히 좋다!”
“뭐가?”
“멋있고 잘생긴 형이랑 친해져서 좋아!”
“나 잘생겼어 지민아?”


마음 속에 있던 말을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을 깨닫고는 지민이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아...응, 잘생..겼어…”
“ㅋㅋㅋㅋㅋㅋ 고마워"


부끄러워 하는 지민이 귀여워 보여 윤기는 웃었고, 그의 웃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민이었다. 
둘의 행복한 순간을 방해한 건 지민의 벨소리였다. 


“앗! 나 오늘 친구랑 약속 있는 거 깜빡했어!”
“그래, 그럼 빨리 가봐. 내일 메로나 같이 사러 가자. 기다릴게, 지민아”
“응..알았어 윤기형..! 헉, 진짜 늦었다. 내일 올게! 여보세요? 어 태형아-”


지민은 급하게 인사를 하고서는 전화를 받으며 뛰쳐나갔다.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총총 뛰어나가는 모습이 꼭 병아리 같다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한 윤기가 가만히 있다가 혼자 웃었다. 


그러고는 지민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

 

 

 

 

 


“네- 나가요-!”


퍽-


“아악! 윽…”
“헉! 윤기형!! 괜찮아요? 문에 세게 부딪혔어요?? 아 어떡해- 집에서 얼음이라도-”
“푸핫- 지민아, 나 안 죽었어, 괜찮아.”
“아니 그래도.. 안 아파? 퍽 소리 났는데…”


미안했는지 병아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있는 지민을 본 윤기는 이마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미안하면 나 메로나 사줘.”
“알었어. 형 괜찮은 거 맞지? 아플 거 같은데..”
“어. 아파"
“아파?!? 약이라도 사올까??”
“아픈데 메로나 먹으면 나을 거 같아.”
“아 진짜- 장난치지 말구-”
“알았어, 알았어. 아 진짜 괜찮으니까 그만 물어봐도 돼. 나 녹을 거 같은데 편의점 좀 빨리 가면 안 될까?”
“어? 그래 빨리 가자, 이쪽이야!”


자신보다 앞서서 자신의 손을 끌고 가는 지민을 바라본 윤기가 지민의 손을 고쳐잡았다. 둘은 서로에게 발을 맞추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둘이 있는 그 순간의 행복은 한여름의 찝찝한 더위마저 잊을 정도로 달콤했다.

 

 

 

 


-

 

 

 

 


바깥의 온도가 올라가고 날씨가 더워질수록 둘의 감정도 깊어졌고,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매일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로를 알게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함께 있으면 편안했고, 서로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마치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서로를 향한 감정은 친구 이상이었지만.

 


안 그래도 더운 여름은 서로를 만날 때마다 뜨거워지는 얼굴에 유난히 더 덥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서로에게 붙어있는 둘이었다. 
매일 서로가 필요했다.
그냥.
여름이 너무 더워서. 

 

 

 

 

 


-

 

 

 

 

 


첫 만남에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하얀 피부에 말랐지만 굵은 체격, 매력적인 눈. 게다가 성격도 좋았고. 어쩜 이렇게 내 이상형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났는지. 한 순간도 빠짐없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형 얼굴 때문에 매일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만날 기회를 찾았고 함께하는 순간이 말도 안 되게 달콤해서, 너무 행복해서, 떠나는 순간이 슬펐다. 혼자 있는 순간에는 항상 내가 말실수 한 건 없는지,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아닌지 생각하다가 이불을 차곤 했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형의 시원한 손길이 생각나 다시 얼굴을 붉히곤 했다. 
매년 덥고 찝찝해서 불쾌하기만 하던 여름이었는데. 처음으로, 기분 좋은 여름이었다. 

 


*

 


처음 너를 본 순간, 머리를 한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원인도 이유도 몰랐지만 너에게 끌렸고, 그런 감정에 그냥 끌려가는 나였다. 매일 새로운 핑계를 대며 나를 찾아오는 너를, 나는 아침 일찍부터 기다렸고,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할까. 오늘의 너는 어제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 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날들의 연속이였기에, 행복했다. 나를 보며 부끄러워 하는 너,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마다 머뭇거리는 너, 내가 귀엽다고 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 너. 
내가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너. 

 


*

 


날이 지날수록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형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매번 붉어지는 얼굴과 두근대는 심장은 익숙해지기는 커녕 더 심해졌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사고회로가 작동을 하질 않았다. 내가 형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형이 나에게 갖고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와 비슷한 감정인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

 


너는 보면 볼수록 새로웠고, 그런 너를 보면 볼수록 내 감정은 깊어만 갔다. 자꾸만 내 머릿속에 들어와 내 생각을 헤집어놓고 가는 너였고, 그런 일들에 익숙해져가는 나였다. 
너를 볼 때마다 내 심장은 주체할 수 없이 뛰었고, 미친듯이 뛰어대는 나의 심장소리가 혹여나 너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순간들이 반복되었다. 이 감정이 흘러넘쳐 숨길 수도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상관 없었다.


이 감정은 너를 향한 것이었고, 너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신했으니까.
사랑이였으니까. 

 

 

 

 

 


-

 

 

 

 

 


“윤기형- 나 배고픈데 우리 뭐 사다 먹자"
“편의점 반대편에 스시집 생겼던데, 스시 먹을까?”
“그래!! 스시하구 아이스크림도 사줘!”
“그러자. 어어- 신발끈 풀렸다 가만히 있어봐"


자신의 운동화끈이 풀린 것도 모른채 들떠서 걸어가던 지민을 윤기가 멈추고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지민의 신발끈을 조심스레 묶어주었다. 
예쁘게 리본 모양으로 묶인 자신의 운동화끈을 보고 환하게 웃은 지민이 윤기를 일으키고는 윤기의 손을 꼬옥 잡고 걷기 시작했다. 


“지민아. 곧 비 올거 같은데. 조금 서둘러야겠다.”
“어? 어 진짜네. 빨리 가자 형,”


한손에는 스시가 들어있는 쇼핑백, 다른 손에는 지민의 손을 잡은 윤기가 한층 어두워진 하늘을 보더니 걸음을 재촉했다. 비가 한 두 방울씩 머리 위로 떨어지고, 서둘러 걷던 둘은 근처에 있던 정자로 가 잠시 비를 피하기로 했다. 


빗방울이 굵어졌고, 시원한 비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말이 없어진 지민과 윤기였다.

 


“비 온다.”
“그러게"


윤기의 말과 함께 둘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흘렀다. 
투둑투둑- 떨어지던 빗소리가 어느새 커지기 시작했고 내리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둘은 그렇게, 그저 그렇게 있었다. 
아무 말도 오고가지 않았지만 그 침묵만으로 좋았다. 무언가를 얘기하지 않아도 좋았고 그냥 서로 옆에 있다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 좋았다.
무엇보다 둘 사이의 간질간질한 느낌이, 그 느낌이 좋았다.


물방울이 맺힌 자신의 하얀 운동화 끝을 향하던 지민의 시선이 조금씩 움직이다 윤기에게 닿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윤기의 몸이 지민의 쪽으로 서서히 기울더니 마침내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둘은 서로가 되었고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5초도 채 되지 않는 순간은 5분, 5시간 같았고 둘은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랐다. 


둘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고 서로를 바라본 둘이 살풋 웃었다. 
“사랑해, 지민아.”
“나도, 사랑해"


더운 열기가 씻겨내려간, 모처럼만의 시원한 어느 여름날이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둘은 그렇게 함께했다.

© 2018 by SUJIM Four Seasons, presented by @EPILOGUE_sj & @Love_maze_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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