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 SEASONS
OF LOVE
음성녹음_180829_1
w. 이지
- 민윤기 씨랑 무슨 사이였어요?
애인.
- 그럼 2018년 8월 2일에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진짜 다 똑같아. 이천십팔년 팔 월 이 일에 어디 계셨어요? 뭐 했어요? 민윤기랑 같이 있었습니까? 숨 쉴 틈도 없는 속도로 늘어놓는 뻔하고 헐거운 질문. 그만 좀 해요. 설령 뭔 일 있었다고 해도 내가 그쪽한테 털어놓을 게 뭐야?
- 그야 윤기 씨가,
알아요. 민윤기 뒈졌잖아. 자살은 아니라는데, 용의자는 안 나오고! 내가 누군지는 알고 나 조사하는거예요? 나 그 사람 애인이라구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지금 내가 여기저기 붙들려 다니면서, 사랑이 뭔지는 알까 싶은 인간들한테 내 애인 차에 받혀서 피칠갑으로 죽어가는 동안 저는 집에서 태평스럽게 자고 있었습니다- 하는 게 즐거울 거 같아요? 기분 좋겠냐고요.
-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어요. 그래도 민윤기 씨 최측근이 지민 씨라 지민 씨 진술이 필요합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더라도 윤기 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요즘 어땠는지, 최근 연락은 언제였는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도요.
시팔, 민윤기가 뭐 하는 인간인데 세상이 민윤기한테 관심이 이렇게 많아? 특별한 일도 아니고 교통사고잖아요. 아, 내가 힘이 없어서 그래요? 잘나고 높으신 분들은 사람 몇 죽여도 돈 처발라서 언론사 입 막잖아. 아 다 내 잘못이네. 윤기 형, 듣고 있어요? 내가 미안해 죽겠어.
- 민윤기 씨도,
그쪽이 뭔데 윤기 형 이름을 자꾸 불러? 뉴스에서 민 모 씨 이러는 것도 짜증나요. 대체 윤기 형이랑 한 번 마주친 적도 없을테면서 뭔 친분으로 이름 불러요? 그쪽들 예의는 밥말아드셨다니까.
- 그러니까... 애인 분도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길 바라실 거예요.
윤기 형이? 아마 절대 아닐걸요.
-
·
·
·
녹음을 시작합니다.
박지민입니다. 스물넷 청춘 나름 괜찮게 살고 있었고요. 민윤기 애인입니다. 얼마 전에 제 끝내주는 애인이 죽었는데요, 온 세상이 저더러 뭐라도 말해보라고 하는데 그 망할 놈의 형사들은 소리만 질러대고 기자들은 저 할 말만 하더랍니다. 답 정해놓고 내 입에서 그 답이 나오는 꼴을 안 보고서는 저승 못 간다는 투로 열불을 내요. 그런 인간들하고 대화는 못 하겠어서 녹음으로 해결하겠습니다. 뭐라더라 그,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입니다.
먼저 윤기 형은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저한테도 사랑한다는 말은 자주 안 했던 것 같고. 그런데 나름 여름 같은 사랑을 했습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왜냐면 여름에 사랑을 시작했거든요. 아 농담. 그래도 여름에 시작한 건 진짜예요, 2015년 6월 말이었나. 하여간 그때부터 사랑했는데, 이 사람이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눈빛 행동 말투에서부터 날 사랑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사랑이 여름 같았지, 뜨겁고, 쨍하고. 윤기 형의 사소한 거 하나하나 다 좋았어요. 그 사소한 것들이 뭐가 있었냐면, 음.
아 맞다 윤기 형은 옷이나 악세서리 같은 거 뭐 하나 꽂히면 한참 하고 다녀요. 그 추리닝 반바지 있잖아요? 옆에 줄 세 개 그어진 브랜드. 그것도 한참 입고 다녔고, 벙거지도 줄기차게 쓰고 다녔었어요. 아, 코트. 코트도 한때 입었었구, 아 그때! 귀걸이에 꽂혔을 때 진짜 대박이었어요. 양쪽 귀에 구멍을 몇 개를 뚫어가지고는 주렁주렁. 뭐 전 다 좋았죠. 솔직히 말해서 윤기 형한테 안 어울릴 게 있기는 한가요.
근데 이런 말이 수사에 도움은 돼요?
기자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요즘 어땠는지 시시콜콜한 거 다 말하라구 하셨으니까, 마저 말하는 게 맞겠죠 뭐.
윤기 형은 음악 했었어요. 사람들이야 다들 대기업 사원으로 알고 있긴 하지만. 원래 음악 했어요, 하고 싶어했고. 그런데 어느 날 대기업 입사한다고 그러더라고. 될 놈은 된다고 민윤기는 날 때부터 될 놈이어서 그런지 입사하겠다고 선전포고 하자마자 대기업 붙었어요. 남들은 정말 대기업 사원 민윤기만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아티스트 민윤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은 있겠죠?
다들 민윤기 슈트핏만 오지는 줄 알겠지만 작업실에서 커다란 티셔츠에 반바지 입고 있는 것도 조집니다. 아 윤기 형 보고싶다. 윤기 형 음악 들어본 사람은 알아요. 거짓말 안 하고 진짜 좋다니까. 누가 들어도 민윤기 음악. 깔끔하고 온전한 비트에 군더더기 없이 자기 할 말 하는 가사, 전달력 쩌는 목소리. 아 가끔은 가사 없는 음악 뽑아서 스트릿 댄스 팀한테도 주고 그랬대요.
그런데 대기업 입사하려고 준비할 때, 윤기 형은 음악이 자기랑 안 맞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거 다 구라였다니까, 민윤기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고 잘 했는데 갑자기 안 맞는다는 게 말이 돼요? 그거 가족이 반대해서 그런 거예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알지만 윤기 형 부모님 다 큰 자식 일에 그렇게 참견하지 마세요. 진로도 그렇고 이런저런 거 다요, 왜 윤기 형이 그쪽 땜에 꿈을 포기해야 해?
...죄송합니다 잠깐 흥분했네요.
하여튼 간에 윤기 형은 음악 진짜 좋아했고, 실력도 끝내줬고, 음악을 하며 살 거라고 누누이 말해왔어요. 제가 거기다가 뭐라고 해요. 좋아 형, 형 하고 싶은 거 해. 형 음악 하는 거 난 좋아. 스무 살 박지민은 애인이 좋아하는 걸 할 때 빛나는 눈동자랑 간간이 피어오르는 눈웃음을 사랑해 마지않았으니까 달리 할 말도 없었죠. 아 물론 지금도 그래요. 난 윤기 형이 음악 하는 거 좋았지. 그런데 2년 전에 윤기 형 유일한 혈육이었던 형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말이,
- 음악 같은 걸로 힘들게 먹고 살 생각하지 말고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 가지고 살아라.
였습니다. 그분은 지금 돌아가셨어요. 윤기 형은 혈혈단신 천애고아가 됐고 그래서 내가 이런 녹음기에다 대고 구구절절 혼잣말 중이지. 그, 민윤기 애인 신분으로요. 그럴 만 해요, 윤기 형 친구라곤 몇 명 있지도 않아서. 내가 다 꿰고 있을 정도라니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윤기 형은 그 말 때문에 음악 그만두고 취직에 매달렸어요. 그리고 성공했지. 그쪽들이 알다시피,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 사원이잖아요.
네 기뻤어요, 기뻤지. 누구보다 축하했어요.
그런데 윤기 형 입사 후로부터는 우리가 예전같지 않았다고요. 지금까지 윤기 형과 저는 뜨겁고 쨍한 여름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여름을 벗어난 건 아녜요. 절대 그럴 리 없지. 그저 여름에 장마가 있듯이 우리는 눅눅하고 찝찝한 여름을 맞은 거예요.
요즘 들어 윤기 형은 회사에서 돌아오면 피곤하니까 연락도 적어지고, 만나는 날도 적어졌어요. 마지막 연락 언제냐고 물어봤죠? 잠시만,
8월 2일 오전 10시 26분에 마지막으로 연락했어요. 전화두 아니고 메신저로.
형 오늘 저녁에 만날 수 있어요?
미안 지민아, 형 선약 있어.
아... 어쩔 수 없죠ㅠㅁㅜ
그럼 넌 오늘 저녁 집에 있어?
넹.
알겠어 내가 먼저 연락할게.
응 사랑해요
나도
그래두 사랑한다곤 했네. 그건 다행이예요. 그래도 옛날에는 시도때도 없이 전화하고 메신저 하고 만나고, 만나면 맛있는 것도 먹고 입술도 맞대고, 분위기 좋으면 윤기 형 집이나 내 집으로 직행. 딱히 말하거나 묻거나 하진 않았어요 둘 다 눈만 마주쳐도 아니까. 서로 가만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입술 한 번 더 맞댄 다음 형은 내 허리에 팔 감아 끌어당기고. 그대로 가면 그만이였죠 뭐.
요즘에는 제가 사랑하는 윤기 형의 모습이 점점 피폐해지고 탁해져 갔어요. 왜 그랬을까. 결국 여름 장마철의 착 가라앉은 공기 밑바닥을 유영하는 듯한 감정을 맞닥뜨렸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진심이 물이 섞인 것처럼 흐리멍텅해졌습니다.
민윤기는 음악을 해야 할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한테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 굴러가는 게 버거웠을 거예요. 그래요. 얼마 전에 나한테 묻더라구요. 이렇게 사는 게 맞을까? 형이 맞다고 생각하면 맞는거예요. 맞아 지민아 고마워. 무미건조하고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마찬가지인 대답.
윤기 형은 음악을 만들 때, 들을 때, 내뱉을 때 눈이 반짝였습니다. 진짜 흔한 얘기라지만 좋아하는 걸 할 때 예뻤어요. 자기의 우주를 담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전 그 눈빛을 사랑했어요. 그런데 윤기 형의 눈에 이젠 그 우주가 없었어요. 대형마트 냉동 코너에 늘어서 있는 생선들의 눈깔처럼, 어느 감정도 보이지 않는 탁한 눈을 한 사람이 한때 나와 여름 같은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헤아릴 수 없는지.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작가의 <빅픽처> 라는 책을 읽어 본 적 있어요?
' 누구나 인생의 비상을 갈망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덫에 더 깊이 파묻고 산다. 가볍게 여행하기를 꿈꾸면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한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걸 축적하며 산다. 다른 사람 탓이 아니다. 순전히 자기 자신 탓이다. 누구나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
그 책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예요. 맞아요. 윤기 형은 비상을 갈망했으면서도 너무 많은 의무를 지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 비상하지 못한 건 순전히 윤기 형 탓인 거예요 그래 내 탓이 아녜요 순전히 자기 자신 탓이예요 내가 윤기 형을 차로 친 것도 윤기 형에게 인생에서 탈출할 기회를 준 것 뿐이겠죠 윤기 형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요 물론 고의는 아녔지만 말예요 그래, 그럴 거예요 더글라스 케네디의 말처럼 탈출을 바라지만 의무를 저버리지 못하고 원치 않는 굴레에 갇혀 사는 건 자신의 선택이고 순전히 자기 탓이죠... 잠시만,
...아.
녹음을 종료합니다.
·
·
·
-
[속보] ○○동 뺑소니 범인, 피해자의 연인으로 밝혀져...'충격'
기사입력 2018. 05. 29 오후 05 : 32
[방탄일보 김남준 기자]
사람들을 놀라게 한 ○○동 뺑소니의 범인이 피해자 민 모 씨의 연인임이 밝혀져 다시 한 번 소란을 일으켰다.
범인 박 모 씨는 본인 승용차로 집에 가는 중 의도치 않게 피해자 민 모 씨를 쳤고, 당황한 나머지 차를 집에 주차해 놓고 다시 범행 장소로 나와 119에 연락한 것으로 진술했으며 ···
-
박지민의 여름은 아마 뜨겁고 쨍했을 것이다.
박지민의 사랑은 아마 뜨겁고 쨍했을 것이다.
그는 사랑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빛나는 민윤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결백하다 여겼다. 그러나 지민은 몰랐다. 다른 색의 민윤기를 사랑하는 방법을.
윤기에게 꼭 어울리는 색이 있지만서도 이것 또한 민윤기가 선택한 색깔인데 그걸 온전히 사랑할 줄 몰랐다. 제 마음이, 상대의 마음이 자리잡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릴 줄을 몰랐다.
지민은 윤기를 두고 돌아서던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지민은 그 시간이 윤기의 인생에 탈출구를 열어둔 시간이었다 합리화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두 그 시간은 빨간 얼룩으로 지민의 속에 평생 남아있을 것이다.
박지민의 사랑은 이제 미적지근하고 찝찝할 것이다.
박지민의 여름은 이제 미적지근하고 찝찝할 것이다.
·
·
·
그 날의 민윤기는 지민의 집으로 가고 있었고
그 날의 박지민은 윤기의 회사 앞을 서성이다 돌아오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거짓되게 사랑한 적이 없었는데
만나지 못한 그날 밤 미련이 남아 서로에게 향하다가
어긋나 부딪히고 만
피에타가 따로 없는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