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 SEASONS
OF LOVE
The Magic of Winter
w. 무명
겨울이 왔다, 누군가에겐 시리고 아름다울 겨울이, 결국에는 오고야 말았다.
겨울이 오면 누군가에겐 따뜻한 음식도, 아늑한 집도 있지만, 지민에겐 있지 않았다.
나는 겨울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며칠을 굶는지 셀 수 없었다, 그저 주린 배를 움켜잡고 이 겨울이 가기를 견딜뿐이였다.
정말 이대로 얼어죽는게 나았을 법한데, 차라리 그랬으면 했는데.
수차례 원했었다. 살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용케도 못되고 질기게 살아남아 이제까지 버텼다.
부모없는게 죄라면 죄고, 가난이 죄라면 죄겠지. 지민은 광장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 기대 몸을 웅크렸다.
서서히 눈이 감겨왔다. 몸은 서서히 차가워졌고, 정신을 조금씩 잃었다. 차가운 공기가 지민을 뒤덮었다.
이제서야 이 끔찍한 계절에서 이제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조금은 좋았다.
이렇게 얼어 죽을 거라면 몇십 번의 계절들을 넘지 않았겠지만, 너무 늦었지만.
누군가를 사랑해보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게 다만 그게 조금은 후회됐지만, 지금은 상관없었다.
숨을 내뱉는 모든 순간이 이제는 멈추길 바랐다.
지민의 귀에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고, 흐려지는 시야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왜 자신에게 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운 지민의 볼에 차가운 겨울 공기가 달라붙었다.
얼어버린 지민의 몸과 지민의 몸보다 더 시린 몸이 지민을 감싸 안고는 이내 사라졌다.
***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든 순간이었다.
응접실 창문 밖으로 눈이 소복이 쌓인 풍경이 윤기의 눈을 사로잡았다.
평소에는 인간들이 많아 외출을 꺼렸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윤기는 성밖으로 나왔다.
하얗게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듣기 좋아 한참을 걷다 보니 인간들의 마을에 도착했다.
눈이 덮인 거리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하고 황량했다.
해가 지고 하얀 보름달이 파란 밤을 환하게 밝혔다.
윤기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자신처럼 시리고, 춥고, 조금은 외로운 이 계절이 좋았다.
자신 앞에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죽어가고 있던 작고 여린 그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
타닥타닥 타는 모닥불 소리가 지민을 깨웠다.
무거운 눈을 천천히 뜨자, 붉은색의 불이 보였다. 몸이 무거웠다.
고개를 내리니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두툼한 담요들이 눈에 띄었다.
도대체 몇 장을 올린 건지, 지민을 아주 꽁꽁 싸매고 있었다. 따뜻하긴 하지만 너무 불편해.
지민이 담요 뭉치에서 제 몸을 간신히 빼내려 몸을 움직였다.
이내 발소리가 지민의 귀를 울리자 지민은 깜짝 놀라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문이 덜컥 열리자 밝은 빛이 지민의 눈을 찔렀다.
뒤이어 문이 닫히고 터벅터벅 누군가가 지민에게 다가왔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이 지민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민이 누워있는 의자 옆 소파에 앉아 지민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지민의 볼을 쿡쿡 찌르며 웃음을 흘렸다.
"눈 떠, 자는 척하는 거 다 안다."
윤기의 말에 지민이 몸을 움찔거리며 눈을 떴다.
창백하게 하얀 피부, 그에 대조되는 붉은 입술, 까맣고 까만 머리.
그리고 어디서도 본 적 없던 피처럼 붉은 눈동자.
빠르게 움직이는 지민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짙고 따가운 눈빛에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그의 옷은 말할 것도 없이 고급스러움을 풍겼다.
"누구세요? 저는 왜 여기 있어요?"
"이 집주인. 내가 데려왔다."
"당신이 뭔데요? 왜 데려온 건데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나는 이번이 기회였다고요!"
지민의 울분이 섞인 말투에 윤기는 흠칫 놀랐다. 기껏 살려줬더니 듣는 소리가 겨우 이건가.
여태껏 자신이 알던 인간과는 달랐다. 그 아이의 마음은 참 어둡고 쓸쓸했다.
"다들 죽기를 거부하는데, 왜 넌 죽기를 바라는 거지?"
"어떤 이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제 자식을 팔아. 자기가 배 아파 낳은 자식까지도 말이야."
"그들은 살아갈 이유가 있나 보죠,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은가보죠. 하지만 난 달라요."
"난 살아갈 이유가 없어요."
살아갈 이유가 없다라, 윤기에게 지민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신기한 인간이었다.
이상하게도 흥미가 가는 아이였다. 갈색 눈동자 속 텅 빈 어두움이 윤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텅 빈 어두움을 채워주고 싶었다.
"그래? 그렇기엔 너의 몸은 살기를 바라던데. 내가 네 앞에 섰을 때 네가 그랬다, 살려 달라고."
"난 밥도 한 끼 제대로 먹어본 적 없고요, 따뜻한 집 따위 없어요.
밖에 나가면 부모 없는 고아라고 수군거려요. 난 그저 부모가 없는 것뿐인데,
고작 부모 없고 돈도 없는 거지새끼라는 이유로 온갖 괄시란 괄시는 다 받아요.
또 어떨 때는 더럽다며 온갖 더러운 것들을 빤 물을 내게 뿌려요. 그뿐인 줄 알아요? 가게만 지나가도... "
"그만, 그만해. 알았으니까."
너무도 담담하게 말하는 지민에 윤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민의 말을 가로막았다.
도와주고 싶었다. 하얀 달 밑에서 오들거리며 떨고 있는 아이를 안고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에 데려올 때부터,
윤기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지민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쪽은 그런 제게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보세요?"
지민은 어딘가 빛을 잃은 눈동자로 윤기와 눈을 맞추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윤기는 결국 지민을 자신이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처럼 외로운, 아니 자신보다 더 외로운 삶을 짊어진 지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럼 따뜻한 집, 많은 돈. 그리고 가족까지 생기면 그럼 살아갈 이유가 생기나?
"모르죠,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고 상상도 못해봤으니까."
고개를 젓는 지민에 윤기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더 진득한 시선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한가지 이유였다. 지민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생기도록 자신이 바꿔주는 것.
그저 그 한가지 이유뿐이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럼 이제 생각해보거라. 밥도 주고, 집도 주고. 네 가족 같은 것도 해보마"
"그쪽이 왜요?"
"그래야 네가 사니까."
지민을 당황하게 만든 대답이었다.
나를 위해서라니, 태어나서 여태껏 자신을 위해 무언갈해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고작 자신을 위해 책임감을 가지는 윤기가 이상했다.
"단지 나를 살리기 위해서요?"
"그래."
"왜 굳이 전데요?"
"네가 마음에 들어서."
열린 창밖에서 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달빛에 비추는 지민의 노란 머리칼과 그와 대조되는 하얀 실크 셔츠가 춤을 추듯 살랑거렸다.
그 순간, 윤기는 알 수 없는 향기를 맡았다.
아주 은은했지만 그 향기는 너무나 선명했다. 과일보다 달콤하고, 향수보다 매력적인 향기.
윤기는 홀린 듯 다가가 지민의 목덜미에 제 코를 묻었다. 틀림없는 지민의 향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둘의 심장이 닿을 듯 밀착된 몸에 지민이 벌쩍 뛰며 윤기를 밀쳐냈다.
윤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온전히 뱀파이어만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오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온전히 뱀파이어를 위한, 아주 매혹적인 향.
"미안하다. 네 몸에서 아주 좋은 냄새나길래.
윤기의 말에 지민이 제 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기를 쳐다보자, 윤기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관둬, 네가 못 맞는 냄새야."
지민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이 그랬다,
묻지 않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다.
한참을 손을 꼼지락거리던 지민이 윤기에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제 가족 해주세요."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는 지민에 지민의 몸을 감싸고 있던 담요가 밑으로 흘러내렸다.
윤기의 앞에 다가와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지민에 윤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았다.
" 나 이름 알려주면 안 돼요?"
"내 이름..?"
"네!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저는 박지민이에요."
"예쁜 이름이구나, 박지민."
"내가 지은 이름이에요. 하도 이 거지새끼라고 불러대서. 나도 이름 있다고 얘기하려고 내가 지었어요."
"이제 그쪽 이름도 알려주세요!"
"내 이름..?"
사실 윤기에겐 이름이랄 게 없었다. 줄 곳 혼자였고, 또 혼자여야 했다.
윤기와 함께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무료한 시간에 지쳐 가끔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면,
모든 사람마다 다 각자 다른 이름이 있다는 걸 알게됬다.
어떤 이는 누군가의 이름을 사랑했고, 어떤 이는 누군가의 이름을 동경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행복해했다.
그 모습을 본 윤기는 한편으론 의아했고, 또 한편으론 씁쓸했다.
요람에 누워 제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는 한낱 어린아이에게도 이름이 있는데.
왜 자신은 없을까, 괜히 자신이 안쓰러웠다.
그 후부터 인간들의 마을에 내려가는 빈도를 줄였고,
홀로 남아 인간들의 날짜를 새며 해마다 자신에게 윤기는 선물처럼 자신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가 영생의 삶을 사며 지은 이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여러 이름들이 많았지만 윤기는, 민윤기. 그 이름 석자를 생각해 내었다.
"민윤기,"
"그게 내 이름이야."
"이름 예뻐요. 되게,"
윤기를 보며 지민이 밝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 윤기는 괜히 지민을 괴롭힌 인간들이 미워졌다.
그토록 동경했던 인간이었지만 이 작은 아이의 미소에 윤기는 괜스레 싫어졌다.
이리 고운 아이를, 이리 여리고 연약한 아이를. 그들이 무슨 수로 짓밟을 권리가 있은 것일까.
차가운 달이 지나고 따뜻한 태양이 조금씩 일어났다.
밤하늘이 비치던 창문은 어느새 짙은 커튼으로 가리어졌다. 지민이 커튼을 열기 위해 손을 뻗자,
윤기의 하얗고 차가운 손이 그를 막아새웠다.
"안돼."
"너무 어두워요"
"걷지마."
"왜요?"
"알면 다쳐."
윤기는 지민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답하고는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자신이 덮었던 담요를 정리하던 지민은 윤기를 따라 내려갔다.
윤기를 따라 지민이 도착한 곳은 부얶이였다.
뱀파이어는 식욕 대신 피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만,
윤기는 평상시에는 인간처럼 음식을 먹는다.
물론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고 인간처럼 허기를 달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대신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피가 필요한 날엔 참고 참았다가 들짐승의 피를 마셨다.
그것마저도 윤기는 싫었다. 자신도 평범한 인간처럼 살고 싶었다.
완벽하게 똑같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비슷해지길 원했다.
윤기는 선반에 꽂혀있는 요리책 중 한 가지를 골라 지민을 위해 요리를 준비했다.
지민이 고기를 잘라 굽는 윤기 옆에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윤기도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원래는 모든 게 혼자였지만 외로운 자신에게 함께 해줄 친구가 생긴 샘이었다.
조금 뒤 넓은 식탁 위에는 꽤 그럴싸해 보이는 음식들이 올라왔다.
지민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자신이 한 번도 먹어보지도,
구경하지도 못했던 음식들이 넓은 식탁을 가득 채웠다.
"밥 먹게 손 씻고 와, 손 안 씻으면 안 줄 거다."
윤기의 으름장에 지민은 재빠르게 손을 씻고는 화려하게 수놓인 의자 위에 앉았다.
지민의 앞에 윤기도 함께 앉았다. 각자의 접시 위에 놓인 똑같지만 조금은 다른 요리가 놓였다.
지민의 앞에는 잘 익은 소고기와 구운 양파, 토마토 등 질 좋은 채소들이 정성스럽게 플레이팅 되어있었다.
반면 윤기의 접시에는 약간 걸쭉한 농도의 붉은 액체가 와인잔에 담겨있었다.
"우와.. 맛있겠다 윤기님은 안 먹어요?"
"나는 아까 먹어서. 식겠다, 얼른 먹어라."
윤기에 말에 지민이 고기를 크게 잘라 한 입에 넣었다.
고기를 씹는 지민의 모습이 윤기에겐 꽤나 귀여웠다. 혼자였던 넓은 식탁에 누군가와 있다는 게 낯설었다.
윤기가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은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스테이크를 먹던 지민이 윤기 앞에 놓인 와인잔은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말했다.
"혹시 윤기님.. 뱀파이어에요?"
지민의 말에 윤기가 사레에 걸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 바람에 하얀 셔츠에 붉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혔다.
"뭐, 뭐라고?"
"왜, 그 책에서 나오는 뱀파이어 말이에요. 막 햇빛에 닻으면 다치고,막 피 마시고.."
"그런 거예요?"
"네가 그런걸 어떻게 알아?"
"예전에 잠깐 도서관에서 청소 일을 했었는데, 착한 주인아저씨가 가끔 책도 읽게 해줘서 봤었거든요."
윤기가 입을 꾹 다물고는 제 몸을 닦던 냅킨을 내려놓고 지민을 쳐다봤다.
지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윤기를 보며 덤덤하게 다시 고기를 잘라 입에 넣었다.
"맞구나. 아무 말 못하는 거 보니까, 윤기님 거짓말 못하죠?"
"도망 안 갈 거야?"
"네. 멋지잖아요"
윤기가 지민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참 신기한 아이야.
"네가 너를 잡아먹을 수도 있는데도 멋진 건가?"
"잡아먹을 거면 진작에 잡아먹겠죠, 이렇게 밥까지 차려주겠어요?"
"내가 그랬잖나, 너한테 냄새난다고. 내가 만약에 네 목덜미를 콱 물면 어떡할 건가?"
"만약에잖아요. 가끔 먹어도 돼요.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지민의 말에 윤기가 어처구니가 없는 듯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너무나 담담한 모습에 사실 윤기가 더 놀랐다. 엄청 무서워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윤기의 배려가 무색할 정도로 지민은 윤기를 너무나도 평범하게 대했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설거지까지 끝낸 윤기가 응접실에 앉아 소설책을 읽었다.
지민이 제 몸보다 더 큰 의자를 끌어다가 윤기 옆에 옮겨놓고는 그 의자 위에 앉아 윤기를 구경했다.
윤기가 지민을 빤히 보곤 말했다.
"지민. 너 진짜 여기 있을 거냐? 기회는 이번뿐이다. 갈 수 있을 때 얼른 도망가"
"안 갈 건데요?"
"허? 장난하는 거 아니다, 얼른 가."
"안 나가요 안 나가, 아니 가족 해준다면서 밥 한번 먹이고 땡인 거예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그것도 못해줘요?"
"분명히 경고했다.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들의 하루는 항상 같았다.
아침이 되면 윤기는 지민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고,지민은 윤기를 위해 햇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커튼을 쳤다.
점심이 되면 책이 가지런히 꽂힌 응접실에 앉아 서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밤이 되면 윤기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지민을 위해 밤새 모닥불을 살폈고.
지민은 폭신한 침대에 누워 윤기의 손을 꼭 잡고는 매일 밤 잠에 들었다.
그렇게 윤기와 지민은 서로를 위해 움직이고, 배려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가끔 윤기는 갈증을 침대 옆 산으로 올라갔고, 지민은 그런 윤기를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윤기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했지만,
지민은 윤기와 함께한 생활이 너무나 행복했다.
지민에게 윤기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이, 그 존재가 좋을 뿐이었다.
윤기는 처음으로 지민에게 곁을 내주었다. 그래서 윤기에게 지민은 어딘가 조금 특별했다.
아끼는 물건처럼 그저 소중하기만 한 것이 아닌, 인간의 감정. 소위 말하는 사랑을 느꼈다.
사무치게 아름다우며, 때로는 사무치게 아픈 사랑을 느꼈다.
윤기는 지민이 너무나 특별했다. 윤기는 지민에게만 곁을 내주었다.
지민은 윤기의 친구,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그래서 지민에게도 윤기는 특별했다. 지민은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윤기처럼 사무치게 아름다우며, 때로는 사무치게 아픈 사랑이 아닌. 윤기와는 조금 다른,
너무나도 여리고, 붉은 장미꽃 위에 하얗게 쌓인 눈처럼 하얗고 순수한 감정을 느꼈다.
그들에게 서로는 너무나도 특별한 사람이었다. 아니,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윤기는 두려웠다. 그들은 온전하게 사랑만을 생각할수가 없었다.
지민과 윤기는 달랐다, 윤기와 달리 지민은 영생의 삶이 없었다.
지금은 행복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지민의 곁은 윤기의 자리가 아니었다.
지민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한 사랑을 해야 했다.
적어도 윤기에게는 그랬다. 자신 같은 괴물과는 함께해서는 안되는 아이였다.
이미 너무 늦었지만, 윤기는 지민을 보내줘야 했다.
***
태양이 어느덧 산을 넘어가던 시간이었다.
응접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는 생각했다.
최소한으로 윤기의 감정을 들키지 않고 지민을 내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민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을지 알고 있다. 윤기는 지민이 자신을 떠나길 바랐다.
너무 아름다운 아이라, 너무 여린 아이라, 윤기는 지민을 보내주어야 했다.
"내가 시작했으니 내가 끝낼게, 내일 날 밝는 데로 다시 마을로 내려가."
"갑자기 왜요, 왜 그래요?"
"그냥 가."
"이유라도 알고 갈래요, 갑자기 잘 지내다가 왜 그래요? 전에도 그랬잖아요."
"여기 남는다고 결정한 건 나에요."
"난 허락하지 않았어, 네가 멋대로 남겠다고 한 거다."
"네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가."
"당신이 데려왔어요, 윤기님 당신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라고요."
"제멋대로 데려와서 사람 흔들어 놓고, 제멋대로 나가라는 거잖아요 지금."
지민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도 윤기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닫혀있던 마음을 열었다.
윤기는 제멋대로 지민의 마음에 들어와 지민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마음의 움직임을 멈추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지민은 윤기없이 한시도 살 수없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요? 이제 나가라는 거잖아요 봤으니까 나 같은 건 필요도 없다, 뭐 그런 거예요?"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나 지금 울잖아요, 왜 눈물 안 닦아줘요? 내가 지금 울고 있는데, 한 번만이라도 안아주면 안 돼요?"
지민의 눈에서 참아내던 눈물이 기어코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윤기는 지민의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지만 다시 손을 거두었다.
윤기는 그저, 자신이 지민 곁에 있으면 지민이 다칠 거라고 생각했다.
피를 마시고, 가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게 너무 싫었으니까.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그 아이를, 눈처럼 순수한 그 여린 아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민이 제 옷으로 눈물을 벅벅 닦아내었다.
자신과 눈도 맞추지않는 윤기를 한번 안고는 응접실을 나와 침실로 향했다.
침대 위에 누운 지민은 불과 어제만 해도 함께 누워있던 윤기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워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그 하얀 손이, 자신을 안아주던 윤기의 품이 너무 그리웠다.
지민은 그렇게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이불을 안 덮고 있지 않아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지민이 부스스 눈을 떴다.
어제 윤기가 했던 말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윤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지민이 침실을 나와 무작정 윤기를 찾아다녔다.
윤기가 오래 있던 응접실도, 함께 밥을 먹던 오래 있던 어느 곳에도 윤기는 없었다.
지민은 헐떡거리는 숨을 가라앉히곤 마지막 방을 향했다.
지민과 윤기가 처음 만난, 빨간 모닥불이 피어나던 방.
지민은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윤기가 지민을 구해주었던 그날처럼.
방안을 둘러보니 모닥불 곁에 쪼그려앉아 무릎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윤기가 보였다.
"한참을 찾아다녔네.. 왜 여기 있어요, 일어났는데 윤기님 없어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지민이 윤기에게 손을 뻗자, 윤기가 지민의 손을 획 뿌리치고는 지민에게서 떨어졌다.
두려움이 서린 윤기의 붉은 눈동자가 지민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지민의 눈에 윤기의 붉게 부은 눈두덩이 눈이 들어왔다.
그 모습에 지민이 싱긋 웃으며 윤기옆에 바짝 붙어 쪼그려 앉았다.
"내가 진짜 떠나길 바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못 가요."
"내가 윤기님을 너무 좋아해서, 금방이라도 안 보이면 너무 보고 싶고 불안해서 못 가요."
"....."
"평생 나 안 볼 자신 있어요?나는 윤기님 안 볼 자신 없어요."
윤기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민은 조금은 서운했다.
지민은 윤기가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것 말고는 다른 건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윤기는 지민에게 떠나라고만 했던 것이다. 아무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다.
"지민아... 난"
"가족 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살 수 있게 해준다면서요, 근데 왜 지금 도망쳐요?"
윤기님이 선택했어요, 먼저 손 내밀어 놓고 다가오니까 이제 다가오니까 도망가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지민아, 난 네가 다칠까 봐.."
"나한테 살게 해준다고 했잖아요. 근데, 윤기님이 세상을 살 이유를 주고 나서 이렇게 가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요?"
지민이 눈물을 글썽이며 모든 말들을 쏟아내었다. 꾹꾹 참았던 눈물이 지민의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민의 말에 윤기가 당황하며 지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왜 또 울어, 울지 마"
"뭐라고요?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우는 건데... 그런 말이 나와요?!"
"너 울면 내가 아파. 그러니까 울지마."
"안 울면 뭐해줄건데요?"
"네가 원하는거면 모든."
"나한테 절대로 나가라고 하지 않기로 약속해요. 하기 싫어요? 이젠 나 우는것도 아무렇지 않나봐요?"
"어, 어.. 그래 약속할게. 그러니까 얼른 뚝 그쳐"
"약속 한 거예요! 절대 무르기 없기!"
얼떨결에 지민에게 약속을 해버린 윤기였다.
씩 웃는 지민이 벙쩌있는 윤기의 입술에 제 입술로 콕 도장을 찍었다.
따뜻하고 말랑한 감촉에 윤기의 입술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민은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로 윤기에게 말했다.
" 사랑해요, 내가 많이 사랑해요."
그래, 조금만. 조금만 더 함께하자. 너는 나와, 나는 너와.
이 순간이 영원할순 없더라도, 너와 나의 추억, 사랑, 감정은 영원할 것이니.
그저 너의 행복과 나의 행복만을 생각하자.
" 나도 너무 사랑해. 지민아"
윤기의 말이 끝나자 지민이 윤기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윤기와 지민의 입술이 맞닿았다.
서로를 멀리하기에 윤기와 지민은 너무나 잡아끌었다, 서로에게 주었다. 감정, 마음, 그리고 사랑.
그 둘에게 서로는 없어서는 안될 아주 소중한 사이였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에 만났다. 살고 싶어 하지 않던 한 소년은,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얻었다.
자신을 두려워할까 무서워하던 인간이 아닌 한 남자는 한 소년을 통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법한 뜻밖의 행운처럼, 한 겨울의 마법처럼.
그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다.
_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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