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

w. 승화

*국민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역사적 인물 '진시황'을 배경으로 창작되었으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며 설정적인 부분이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0.
모두들 봄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모르겠다. 봄은 나의 모든 것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빼앗아간 계절이니까. 매년 봄 나는 무언가를 잃어야만 했고 불안에 떨어야 했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았다.


 


 



1. 두번째 생, 두번째 생명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르긴 했으나 아무도 나를 거두어주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큰아버지에 의해 산골 자기 한 보육원에 보내졌다. 좀 정상적인 보육원에 보내주지 그랬어. 사이비 종교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저희들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교육했고 말을 듣지 않거나 거부하면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뭐, 당연히 그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쉽게 세뇌를 시킬 수 있는 약을 몰래 버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쉬웠다.

그런데 벌레를 먹으라니. 그것도 살아있는걸. 벌레를 어떻게 먹어?

내가 지금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원래 벌레를 먹던 사람도 아닌데? 게다가 더 한건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이었다. 다들 정신머리들이 어떻게 됐는지 벽에 똥칠을 하고 다녔다. 역겨웠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아 도망치기로 했다.

보육원의 경비는 생각보다 많이 허술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도 남을 새벽 2시. 문은 잠겨있을 것이 뻔하니 창살이 없는 좁디 좁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밖엔 아무도 없었고 너무나 쉽게 산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길조차 사라진 산속의 수풀을 헤치고 빠져나오려 하니 곱고 희던 다리는 거친 풀들과 나뭇가지에 의해 쓸려 상처가 생기고 피가 맺혔다. 힘들게 수풀을 헤치고 나오니 고속도로가 나왔다. 고속도로에서 걸어 다니는 것은 분명 위험한 짓이지만, 다시 산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걷고 또 걸었다. 새벽이라 간간이 지나가는 차들이 나를 향해 크게 경적을 울렸다.

정신없이 쉬지 않고 걸었더니 거의 쓰러져가는 조그마한 집들이 언덕의 모양대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달동네가 나왔다. 차가 다니는 길거리에서 서성이느니 저 수많은 계단을 오르는게 훨씬 더 나을 듯 하여 계단을 올랐다. 끝도 없는 계단을 오르고 오르니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다. 최근에 먹은 것도 없어 빈속이 매우 쓰렸다. 왜 이렇게 인생이 서글프냐.

나이 11세에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빠져나와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사이비 종교에 빠져 평생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그 자식들에게 갖다 바쳤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춥고 아픈 것이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윽..."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어느 집 담벼락에 기대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폐가 같이 보이는 곳이 있었다. 조금 더 힘을 내 그곳의 대문을 열어보니 사람이 몇십 년은 살지 않았을듯한 으스스 한 폐가가 나를 맞이했다. 무언가에게 홀리듯 이끌려 나는 그곳에 발을 들였고 장판이 다 뜯어진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잠들었다.

 

 



"야 꼬맹이,"


"...."

 

"야 꼬맹이 일어나봐, 빨리."

누군가가 내 어깨를 발로 툭툭 차는 탓에 오랜 잠에서 깼다. 얼마나 잔거지? 밖엔 지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밖을 향한 시선을 다시 나를 발로 찼던 이에게 돌리니 온 몸을 문신으로 가득 채운 근육질의 한 남자가 있었다. 아, 깡패인가. 이 집이 저 남자 집인가봐. 나 이제 존나 쳐맞겠네.

"너, 엄마 어딨어?"

 

"그런거 없는데."


"아빠는"


"없다니까."


"뭐야 너 가족 없어? 같이사는 친구도?"


"없다고 그런거. 나 혼자야."


"그래? 어 그렇구나. 나가."

뭐야 이새끼는. 그 근육질의 남자는 나에게 질문을 퍼붓더니 들고있던 쇠파이프로 바닥을 탕탕 친 후 다 떨어져 닫히지도 않는 현관문을 가리키며 나가라고 했다. 나는 쇠파이프가 내는 큰 소리에 놀라 몸을 움크렸는데 아마 이 행동이 그 깡패 옆에 있던 쫙 빠진 슈트를 입은 키 큰 남자의 관심을 산 것 같다. 계속해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깡패의 손목을 잡아 그만하라고 말한 남자는 나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딱히 잘생기거나 착해보이는 사람은 아니고 그저 평범해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이 스며들어있다는것이 딱 느껴졌다.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나는것이 섬뜩했다.

"꼬맹아, 집 없어?"


"어."

하하하-
남자는 호탕하게 웃더니 나의 턱을 잡아 올렸다.

"너 마음에 든다. 패기가 좋아. 세상 다 살아본 사람을 보는 느낌이네. 너, 칼이나 총 배우지 않으련?"

남자가 잡고있는 턱 때문에 말을 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대답을 쥐어짜냈다.

"그러던지."

칼이나 총 가르쳐주면 밥이나 잠자리는 주겠지. 나는 그거면 된다. 살아남을수 있기만 하면 된다.

"이 집, 네가 써라 꼬맹이. 밥 못 먹은것 같으니까 이 돈으로 알아서 먹고 내일 여기 써져있는 주소로 와."

남자는 방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나에게 오천 원과 주소가 적혀있는 종이를 띡 던져주더니 창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몇 안 되는 깡패들과 돌아갔다. 창문 사이로 그 사람들이 계단 저 밑까지 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방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내 집...."

이제 이 집이 내 집이다. 열한 살에 부모를 잃고 사이비가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살던 민윤기에게 집이 생겼다.

내 집이다. 우리 집이다. 하나뿐인 내 편.

어디에 갔다 오든 나를 따듯하게 감싸줄 수 있는 곳.

 




2. 메로나

 


 왜인지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없는 돈을 털어가며 메로나를 사 먹으러 갈 정도로.

 

"아 뭐야 벌써 또 봄이네...? 뭐 또 가져갈게 남으셨나 이미 나는 다 잃은 것 같은데."

 

 "아조씨."


 "아니 무슨 아저씨야 아저씨는 내 나이가 스물인데..."


 "아조씨 나 집에 데려다 줘요."


 ".....지민"

잊고 있었다. 봄은 나에게 항상 무언가를 주고 빼앗아갔다. 이번 봄은 너였구나. 좋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왜 너를 봄에 만나야만 했을까. 왜 하필 너를 모든 것을 주고 빼앗아 가는 봄에 만나야만 했을까.






「 생전에 불로장생을 위해 노력했더군. 너에게 불로장생은 아니지만 전생을 기억할 수 있게 해 주겠다. 네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 요괴 때문에 불로장생을 꿈꾼 것이 아닌가? 그 아이를 만날 수 있게 해주마. 그러나 조건이 있다. 너에게 봄은 없을 것이다. 이건 상이 아니라 벌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라.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쳐라. 」


 

 




내가 신에게 그 말을 들은 이유가 무엇일까?

요괴를 사랑한 것이 그리 큰 죄란 말인가? 아무도 내게 요괴를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

 

한때 나는 당신들이 잘 아는 그 진시황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알려진 바 그대로 불로장생을 위해 큰 힘을 썼다. 연나라 출신 노생에게 불로장생한다는 영약을 구해오게 하고 서복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 멀리 동쪽에 가서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했다. 암살을 피하기 위해 수도 함양 인근에 궁전 270개를 짓고 지하도를 통해 드나들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숨겼고. 또한 거대한 지하 궁전을 만들어 죽어서도 영화를 누리고자 하였다. 이 또한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불로장생을 꿈꾼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발설해선 안되고 인간으로써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었기 때문에.


요괴를 사랑했다.

 

그게 이유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저하 이쪽으로 더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응, 알았어."

 

어릴 적 어머니가 사찰에 일을 보러 갈 때 따라간 적이 있었다. 호기심에 사찰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영롱한 빛이 새어 나오는 구석의 작은 건물을 발견했다. 주위 건물들과 겉모습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살짝 벌어진 문틈 사이로 보라색인지, 파란색인지 모를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어서 이 문을 열어달라 말하는듯하여 나는 무언가에게 이끌리듯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어젖힌 순간 안에서 어떤 어두운 기운들이 뿜어져 나와 하늘을 검게 덮었다. 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모래바람이 일었고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한 짐승이 회색빛 눈을 번뜩이며 나에게 뛰어들었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아 무서워 무작정 뛰었고 절벽에서 굴러 계곡으로 떨어졌고 그 이후로 정신을 잃었다.


"뭐야, 고작 그거 떨어졌다고 정신을 잃어?"

 

빛이 나는 꼬리들을 살랑거리며 여우가 말했다. 그 여우는 잠시 윤기를 살피는가 싶더니 스르르 털이 사라지고 주둥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온전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자마자 윤기에게 입을 맞추었다.

 

"기억할게. 너는 내 다섯 번째."





 

잠이 깨고 보니 어떤 음침한 동굴 안에 누워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박쥐가 날아다녔고 은색 머리의 사내가 옆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 뭐냐 너?"

 

"으음...."


그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다 눈을 뜨고 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머리 색과 같은 은색 눈동자 속에 당황한 나의 모습이 비쳐졌다.

 

 "어디 아픈 곳은 없니 아가?"

 

"너 뭐냐고."

 

"왜 그래 아가? 저 절벽 밑에서 쓰러져있길래 데려왔지."

 

쓰러져 있었다고? 꿈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제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나 보다.

 

"아, 미안 그랬구나. 고맙다.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작을지라도 상을 내리고 싶다."

 

"지민."

 

"뭐라고 했나?"


지민이 어린 윤기에게 가까이 다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만큼 거리를 두고 이야기했다.

 

"지민이라고. 내 이름, 그리고 내 얼굴 기억해줘."

 

"....."

 

지민은 윤기를 데리고 산에서 빠져나와 황궁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황궁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윤기는 지민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계속해서 쳐다보았다. 이것이 시작해선 안 되었던 인연의 시작이었다.
 


 


***
 


 


"아조씨! 나 집에 데려다줘요...."

 

그때의 윤기보다 더 어린 지민이었다. 한 여덟 살쯤 되려나? 지민을 닮은 개나리나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가방을 꼬옥 품에 안은 채 뚫어져라 윤기를 쳐다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서인지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으....흑...."

 

"뭐야 지민이 왜 울어."

 

"지미니 길 잃어버렸어. 쥬니 아저씨가 나 데리러 안 왔어.. 흑.."

 

"쥬니 아저씨는 또 누구야, 아니 지민아 데려다줄게. 집이 어디야?"

 

"몰라 모르겠어... 흐어엉.."


"하아...."

 

윤기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퍽 난감한듯했다. 얘를 집에 어떻게 돌려보내냐.

 

혹시나 하고 지민의 가방을 보니 다행히 전화번호가 있었다. 그 전화번호를 입력하여 통화 버튼을 누르니 어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아이가 길을 잃었다고 해서 전화드립니다.”

 

- 아, 네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어디시죠?




 

“아저씨 고마어 잘 가 안녕!"

 

어린 지민이 윤기에게 손을 흔들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시 봐선 안 되는 사람이다. 나로 인해 그 아이가 불행해질 것이다.

3. 첫번째 생, 하나의 생명


 

“자, 어서 빨리 마셔”

 

윤기의 맞은편에는 호석과 남준이 앉아있었다. 남준은 윤기의 친구였고, 호석은 그 남준의 친구였다. 남준이 윤기에게 술을 따라주며 어서 마시라고 손짓하였다. 지금 여기는 기생방. 갑갑한 황궁에서 몰래 뛰쳐나와 들린 곳은 기생방이었다.

 

“축하한다 야.”

 

“뭐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것도 아닌데 뭘.”

 

윤기가 남준이 주는 술을 받으며 도리질 쳤다. 공식적으로 말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첫째 황자의 바르지 못한 행실 덕에 황태자 자리를 박탈당하여 둘째인 윤기가 황태자 자리에 오를 것이라 그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 윤기가 황태자가 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황궁에서 몰래 나와 기생방에 들른 것이다.

 

윤기가 호석이 따라준 술을 한 모금 마시자 문이 열리고 기생 세 명이 차례로 들어왔다.

 

“지민이라 합니다.”

 

한 명은 분명히 남자였다. 왜인지 의아했지만 그의 얼굴은 남녀 상관없이 모든 이를 홀릴 듯 아름다웠다. 신이라 해도 믿을 법한 얼굴.

 

아니, 그전에 지민이었다. 어릴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했던 지민. 오랜 시간이 흐르고 잊혀도 절대 그의 이름과 얼굴은 잊지 못했다. 그런데 저 사내는 어찌 십 년이 지나도록 미모가 여전하단 말인가? 턱 선, 눈매, 심지어 눈동자의 깊이까지 모든 것이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인가?

 

지민은 그게 당연하듯이 윤기의 옆에 가 앉았고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안녕 아가. 나 기억해? 아, 이젠 아가가 아닌 것 같네.”

 

고개를 돌리니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뛰었다. 이 남자가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오늘 밤 그를 안고 싶었다.




 

매일 그를 만나려 그의 집에 들렀다.

지민의 집에 가면 우리는 딱히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다. 밥시간에 맞춰 가면 소소하지만 정성이 담긴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평상 위에 누워 서로를 심장이 터질 만큼 꼭 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모질게도 서로를 사랑했다.

 

어느 날은 꽃을 들고 너의 집을 찾아간 적이있었다. 당신의 눈을 보며 말했다.

 

“사랑해 지민아.”

 

당신이 나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띨 때 나는 당신의 연인이 되었다.

 

“나도, 사랑해.”








 

4. Start


 

“이름 이현주.”

 

보스가 종이 뭉텅이를 책상 위에 툭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 그 종이에는 한 중년 여성의 사진과 이름 등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예?”

 

“죽여라.”

 

“혹시…”

 

“네 첫 임무는 한국에서.”

 

총과 칼을 다루는 법을 배운지 어언 10년. 드디어 첫 임무였다. 설렘과 동시에 내가 이 일을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짜는 다음 주 일요일. 그녀가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마지막 날. 임무는 그녀를 죽이는 것. 타깃인 그녀를 죽이기만 하면 증거 인멸은 그 부분에서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원들이 해 준단다. 첫 번째 임무 성공을 계기로 한국에서 자잘한 여러 임무들을 처리한다면 선배 조직원들과 함께 외국까지 나가 일을 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나도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멋지게 슈트를 입고 총을 쏘고 싶었다. 이것이 이번 생에 생긴 내 꿈이었다. 두 번째 생은 누군가에게 저번처럼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다.




 

치직-

 

- 뒤 쪽 모퉁이에 경호원 하나 있어. 다시 나와서 비상계단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윤기가 뒤를 돌아 타고 들어왔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비상계단을 통해 반대편 복도로 뛰어 들어갔다.

 

- 저쪽도 알고 있나 봐 경호원 몇몇 배치한 거 보면? 옆방 2315호 키 있지? 거기 들어가서 창문 통해서 가. 안전장치 잊지 말고.

 

“네.”










 

“지민이는?”

 

“나오고 있어요.”

 

큰 저택에서 초록색 모자를 쓴 지민이 가정부의 손을 잡고 차가 대기하고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니 역시 부잣집 아들이긴 한가보다.

 

“지민이, 오늘 모자 예쁘네?”

 

“히히 엄마도 오늘 엄청 예뻐요! 하늘만큼 땅만큼.”

 

가정부가 손에 들고 있던 어린이용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문을 닫자 자동차는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아빠, 이번에도 비행기에서 자요?”

 

“아니, 오늘은 간식 하나 먹으면 도착할 거야.”

 

“우와 어디 가는데요?”

 

“제주도.”

 

지민은 비행기를 오래 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신이 나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풍경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근데 갑자기 웬 봄에 여행이래요? 원래 봄에는 여행 안 다녔잖아.”

 

“그쪽에 볼 일이 좀 있어서. 저녁 먹고 지민이랑 당신은 호텔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어디를 못 갈 것 같네.”

 

“그래요? 무슨 일이길래.”

 

“있어. 지민아, 저녁때 엄마랑 같이 먼저 자. 알았지?”

 

“네!”

 

“아 그리고 당신, 자기 전에 문 꼭 다 닫고 자고.”


 

 






 

“창문 잠겨있습니다.”

 

- 알잖아. 따고 들어가.

 

윤기가 귀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에 따라 주머니에 있던 도구로 창문을 따고 들어갔다. 들어가니 침대엔 그 이현주라는 사람이 자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아들처럼 보이는 아이의 뒷통수가 보였다. 윤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음기가 달린 총을 이현주의 머리에 쏜 후 숨이 멎었는지 확인하고 들어온 창문으로 다시 나갔다.

 

옆방으로 다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던 때 이현주의 방에서 아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정말 골치 아프게 하네. 윤기는 여유 부릴 틈도 없이 빠르게 호텔을 빠져나갔다.

 

“처리했습니다.”

 

- 잘 했어. 어렵진 않았지?

 

“예, 뭐 딱히 어려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 그래. 지금 어디야?

 

“공항 거의 다 와 갑니다.”

 

- 조심해서 들어오고.

 

“네.”

 

- 수고했다.

 

 

 

5. 인연

너를 언제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인가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조그마한 슈퍼 앞에 앉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천년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너를 기다리는 나를 보니 참 비참했다. 나는 왜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어째서 이리도 네가 좋은 걸까.

 

지민이 나에게 아는 척을 안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괜히 걱정이 되어 너를 붙잡았다.

 

“아가,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을까?”

 

다정하게 아가라 불러주었던 그때의 너와 같은 온도로 너를 불렀다.






 

“아가, 또 만났네?”

 

“지민,”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을까?”

 

“유모가 죽었다.”

 

지민이 곧 울 듯 두 눈에 물방울을 그렁그렁 달고 조그마한 두 주먹을 꽉 말아 쥔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가, 유모가 죽어서 슬픈 거야?”

 

“응. 다시는 볼 수 없으니까… 내가 어른이 되어서 꼭 꽃을 사 주기로 했는데...”

 

“있잖아, 인연이 맞닿아 있는 사람이면 돌고 돌아 언젠간 다시 만나. 꼭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 생, 다다음 생에 만날 수 있어. 그때까지 네가 그 사람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내가 유모를 다시 만날 수 있어? 꽃을 줄 수 있는 거야?”

 

“응, 그러니까 울지 마. 네가 울면 내가 너무 아파.”







 

처음엔 나의 이익을 위해 일부러 인연을 만들었던 아이였다. 곧 죽어야 하는 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더 살아갈 시간을 주는 대신 나는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이 세상에서 살아왔을 때 다시 그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 사람 아홉 명의 간을 먹어 꼬리 아홉 개가 나야 사람의 몸으로 불로장생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의 몸으로는 사냥꾼들에게 쫓기며 힘든 삶을 살아야 하니까.

인간을 홀려 네 번째 간을 먹으려는 순간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한 사찰에 가두어졌다. 조그마한 집에 가두어져 지루한 시간을 천년 즈음을 넘기려고 하던 때 순수하게 생긴 아이가 내가 가두어진 집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적극적으로 그 아이에게 나를 꺼내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 아이의 운명은 이 문을 열고 도망가다 절벽에 떨어져 죽을 운명이었다. 그렇게 죽을 바엔 더 많은 생을 얻고 나에게 간을 내놓는 게 더 낫지 않은가?

 

“너는 내 다섯 번째.”

 

너를 내 다섯 번째 꼬리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랬는데….

 

“지민, 너를 보러 왔다.”

 

아이가 먼저 다가왔다. 어느 순간 나에게 완전히 스며들어버렸고 이미 스며든 그 아이를 내 인생에서 다시 없애버릴 순 없었다. 이 아이를 어찌해야 할까.

“내 이름을 모르지 않나? 나는 윤기다. 민윤기.”

아무리 하늘과 별에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 꽉 들어찬 아이를 나의 욕심을 위해 이용한다니,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여자, 남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홀릴 수 있는 기와 미모를 가졌다. 이것을 이용하면 간을 쉽게 빼앗을 수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적에 구미호였을 어머니를 잃고 혼자 사람이 되는 법을 알아냈다. 사람의 모습이 되어 불로장생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나와 인연을 맺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졌을 뿐. 인연을 맺어 정을 나눌 이유도,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고나 할까? 사람 목숨이 이리 아까운 적은 처음이었다. 어차피 길어도 70년 살다 갈 목숨이 아닌가.

 

“지민,”

 

“응?”

 

“내가 널 좋아한다.”

 

“... 뭐?”

 

“연모한단 말이다. 왜, 싫으냐?”

 

"글쎄."

 

그땐 몰랐다. 내가 너를 아끼는 마음이 그저 그런 동정이 아니었단걸.

 

어떤 이유였을까. 몇 년 동안 윤기를 보지 못하였다. 마음 한편이 항상 공허했다. 그리하여 기생방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지만 어떤 여자를 만나던, 어떤 남자를 만나던 그 자리는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이미 물들여진 천에 다른 물을 들인다고 해서 색이 완전히 바뀌진 않는 거니까.

 

“지민입니다.”

 

그렇게 공허한 시간을 흘려보내던 중 어른이 된 너를 만났다. 어릴 때의 그 모습은 하나도 잃지 않았지만 저와 비슷해진 키와 더 커진 손이 무언가 어색했다. 아, 어색했다기보단 끌렸다. 그제서야 알았다. 내가 당신에게 느꼈던 감정은 사랑의 감정이었다.

 

“안녕 아가. 나 기억해? 아, 이젠 아가가 아닌 것 같네.”


 

“지민아.”

 

“왜?”

 

“너는 어째 늙지를 않는 것 같다?”

 

“그래?”

 

“지민아, 나 좀 봐봐.”

 

윤기가 저의 앞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여러 색 색깔의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해 지민아.”

 

내가 당신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띨 때 당신은 나의 연인이 되었다.

 

“나도, 사랑해.”




 

“아가,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을까?”

 

“아.. 아조씨이…. 흐으…”

 

“뚝. 울지 말고 말해봐. 누가 괴롭혔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왜 그래?”

 

“엄마가 죽었어. 내가, 내가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지키고 있었는데 죽었어. 나 어떻게 해야 해? 엄마 이제 못 봐. 내가 커서 예쁜 옷 사주기로 했는데…”

 

“지민아, 인연이 맞닿아 있는 사람이면 돌고 돌아 언젠간 다시 만나. 꼭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 생, 다다음 생에 만날 수 있어. 그때까지 네가 그 사람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나를 따듯하게 안아주었던 그때의 너와 같이 다시 너를 안아주었다. 나에게 위로를 건네준 만큼 다시 돌려주었다. 너는 기억이나 할까? 네가 먼저 나를 안아주었던 것을.

 

“내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어른 돼서 예쁜 옷 사줄 수 있어?”

 

“응, 그러니까 울지 마. 내 말이 틀리지 않을 거야. 맹세해 .”

 

나는 말없이 지민의 손을 잡고 집 앞 슈퍼로 들어갔다. 슈퍼로 들어가니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누워서 티브이를 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메로나 먹을래?”

 

“그게 뭔데?”

 

“아이스크림. 맛있는 거.”




 

어째서인지 이 일 이후로 지민은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옆에 있으면 지민이 다시 불행해질 수도 있으니.

6.

오늘 보스한테 된통 깨졌다. 아니, 오늘 있는 거래 뒤집어엎으라고 해서 엎었다. 그런데 뭐? 물건을 안 갖고 왔으니까 다음 달에 가는 홍콩, 나 대신 다른 애 보낸다고? 하,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뒤집어엎으라는 말 밖에 안 했잖아. 안 가면 쉴 수 있는데 괜히 짜증이 나 툴툴대던 때 어떤 처음 보는 젊은이가 사무실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정국입니다.”

 

“보스, 누구야 쟤?”

 

“신입.”

 

“신입 더 이상 안 받는다더니, 왜 받았대?”

 

“실력이 좋아서.”

 

“나보다 좋아?”

 

“아니, 근데 어쩌면 너보다 좋을지도 몰라.”

 

내 실력, 우리 조직 내에서 꽤 인정받는 편이었다. 열심히 하면 보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다음으로 실력이 좋다고 할 만했다. 나만큼 빨리 보스 옆에 붙어있을 수 있을 만큼 실력을 키운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 했다. 근데 나보다 더 좋을지도 몰라?

 

외모로 봤을 땐 별로인데. 첫인상은 그저 동그란 토끼. 딱히 이 친구가 나랑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든 첫인상이 중요한데, 만만하게 생겼다고 현장 나갔다가 여러 사람 막 달려들어서 못 막고 혼자 뒤지는 거 아니야?

 

“오늘 한 건 더 있어. 쟤랑 다녀와.”

 

“쟤 뭔가 할 줄은 알아? 오늘 처음 왔잖아.”

 

"네가 가르쳐.”

 

“내가 쟤를 왜 가르쳐. 내가 누구 가르치는 거 봤어?”

 

“아니, 안 가르쳐도 될 만하니까 그냥 빨리 가라고. 시간 별로 없어.”

 

뭐야 진짜 얘. 이 판에 처음 손대는 거면서 안 가르쳐도 된다고? 뭐하다 온 새끼야. 우리 조직

 

“어디로 가는데요?”

 

“여기 가서 사진 보이지? 이 그림 훔쳐 오면 돼.”

 

내가 사무실 밖의 소파에 풀썩 앉자 정국이 뭐 하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나는 왜 안 가냐고 물어보는 거겠지.

 

“너 혼자 택시를 타던, 자전거를 타던 알아서 가. 난 내 차에 아무도 안 태워. 너 나올 때 즈음에 앞에 가 있을게. 그거 들고 올 순 없으니까”

 

“그러죠 뭐.’

 

뭐야 얘? 별로 놀라지도 않네. 처음 온 애인데, 이 일에 손 대본적 있는 거 같고. 보스도 별말 안 하고. 좀 이상한 애 아니야? 무슨 정보 같은 거 캐려고? 근데 우리는 정보 같은 거 캘 거 없는데. 손잡은 기업도 없고.




 

“윤기 선배님, 어디세요?”

 

“가는 중이야. 왜? 경비 못 뚫었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나올 즈음에 맞춰 온다면서요. 왜 아직 안 왔어요?”

 

“뭐 아직? 너 이동시간 빼고 들어간 지 20분도 안됐어."

 

“일처리는 빠르게 해야죠. 그러다가 들키면 어떡하라고요?"

 

당연히 경비를 못 뚫거나 위치를 찾지 못하거나 걸린 줄로만 알았다. 전화를 받기 전까진 코웃음만 쳤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이따가 보스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얘가 우리 조직에 해가 되면 어떻게 해.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똑똑-

 

차 문을 두드린 건 다름 아닌 정국이었다. 정확하게 손에는 사진과 같은 그림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도 많이 안 걸렸네요!”

 

“그림 트렁크에 싣고 앞에 타.”

 

정국이 의아하다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윤기의 말대로 그림을 트렁크에 싣고 앞 조수석에 탔다.

 

“너 뭐야?”

 

“네?”

 

“너 뭐냐고. 나도 여기 경비 뚫으려면 오래 걸려. 근데 네가 그걸 20분 만에 해냈다고? 말이 안 되잖아.”

 

"글쎄요 난 뭘까요?”







 

“보스, 얘 수상해.”

 

“뭐가.”

 

“이 회장 네 집 경비, 나도 뚫으려면 좀 걸리는데 얘가 20분 만에 그림 갖고 나왔어. 이게 말이 돼?”

 

“외국에서 데려왔어. 이쪽 일에 손도 대본 듯하고 사정이 딱해서 데리고 온 거야. 별 신경 안 써도 괜찮아.’

 

“.... 어.”

 

그런 거 있잖아. 똥 싸다 만 느낌. 지금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우리의 최고 우두머리가 걱정하지 말라는데 괜히 찝찝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정국.

***

오랜만에 예전에 살던 동네에 왔다. 풍경부터 냄새까지. 무엇 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어? 윤기 왔어?”

 

꽃무늬 냉장고 바지를 입은 아주머니가 나와서 윤기를 반겼다. 여전히 아주머니의 인상도 푸근하고 변함이 없었다.

 

“요즘에 안 보이더니, 이사 간 거야? 옷도 좋은 거 입네.”

 

“네, 돈이 생겨서 이사 가게 됐어요.”

 

“방금 전에 그 지민… 인가? 그 애, 왔다가 너 없어서 그냥 갔었는데.”

 

“지민… 이가요? 그.. 몇 년 동안 안 나타났던 걔가요?”

 

“그래. 네가 옛날에 되게 예뻐했던 그 애 맞아.”

 

윤기가 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슈퍼 문을 뛰쳐나왔다. 아까 슈퍼에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파란색 교복을 입은 학생인가, 아니면 갈색 가죽 가방을 들고 가던 흰 셔츠의 남자인가. 뛰쳐나온 슈퍼 밖에는 아까 보았던 그 누구도 없었다. 오월의 달빛이 윤기와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달님 어째서 신께선 저의 한순간의 욕심에 대한 벌을 이리도 길게 내리시는 걸까요.

 

아아, 달님 어째서 신께선 저를 이리도 미워하실까요.

 

아아, 달님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요.





 

「 기원전 230년에 진시황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한(韓) 나라를 멸망시키고부터 221년에 제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한, 조, 위, 초, 연, 제6개국이 잇달아 진나라에게 무너졌다. 」

 

“박지민! 당장 거기에서 나와.”

 

“왜?”

 

지민이 적군 기지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지민이 맞나? 어스름한 달빛이 비치는 숲길에 있는 저것은 무엇인가. 얼굴과 목소리는 분명히 지민이었는데, 이야기로만 들었던 구미호의 인영이 겹쳐 보였다.

 

당신의 입가에 묻어있는 것은 피.

 

당신의 손에 묻어있는 것은 붉은 핏덩이.

 

당신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것은… 피를 덕지덕지 묻힌 적군.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앞을 가로막은 적군은 길을 터주지 않았고, 우리는 전혀 앞으로 진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어서 앞을 가로막은 적군들을 뚫고 식량을 강탈해 오던지, 아니면 후퇴해야만 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도니 앞으로 진군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는 상황이었다.

 

“적군 하나 쓰러트리는 게 이리도 힘드니,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이제 힘들 듯합니다.”

 

장군이 하는 말의 의미는 후퇴였다. 하지만 이곳만 뚫으면 대륙의 통일은 금방인데….

 

장군의 말을 듣는 윤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도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알고 있을 테지만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일을 포기하긴 힘들 것이다. 표정이 좋지 않은 윤기를 보며 난 어떻게든 그의 오랜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뭐, 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적, 적군...!”

 

능력이라면 능력이고, 업보라면 업보였다. 적인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웃음 한 번에 입을 떡 벌리며 살살 녹아내리는 남자의 명치를 칼로 찌르니 힘없이 쓰러졌다. 넓은 범위에 페로몬을 내뿜어 적군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다음 칼로 찌르고, 물어뜯고, 목을 졸랐다. 페로몬 향을 맡지 못하게 해야 할 아군도 없으니 적군과 정면승부할 때보단 훨씬 적군을 처리하기 쉬웠다.

 

적군을 반 정도 처리하고 적군의 기지에서 빠져나오는 도중 윤기를 만나게 되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를 보고 당황한 것인지 제자리에 서서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폐하, 왜… 그렇게 가만히 서있어?”

 

“너… 뭐야?”

 

“뭐가… 무슨…”

 

“머리 위에 있는 그 귀와 꼬리... 당신 박지민 아니지?”

 

윤기가 칼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뒷걸음질 쳤다.

 

“나, 맞아. 박지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박지민으로 둔갑한 여우가 아닌가?”

 

“늙지 않는 내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느끼지 않았어?”

 

“네가 정말 박지민이라도 된단 말이냐?”

 

“나, 박지민이 맞아. 그리고 사람의 간을 먹어야지만 사람이 될 수 있는 구미호도 맞고.”

 

윤기가 지민의 몸 여기저기에 묻은 피를 재차 확인했다. 내 앞에 있는 저 남자가 정말 나의 지민인가, 아니면 지민으로 둔갑한 여우인가.

 

지민이 윤기에게 다가가기 위해 한 발자국 떼는 동시에 윤기도 뒤로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자신을 피하는듯한 윤기의 행동에 지민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그렇게 놀란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윤기의 오랜 소원을 이루어주려 한 것이 오히려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나한테 다가오지 마. 진짜 박지민 데려오기 전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

 

구미호이고 요괴이면 뭐가 좋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사람을 홀려 죽일 수 있는 일밖에 없는데….. 인간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감히 내가 넘봐선 안되는 곳이었다. 인간과의 사랑이라니.










 

7.

“태형아!”

 

“야 박지민 너 진짜 오랜만이다. 이제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온 거야?”

 

“응, 그냥 독일에 있으려고 했는데 뭔가 나랑 잘 안 맞더라고.”

 

“어휴, 그래서 그 아저씨는 만났어? 그 어릴 때 되게 잘 해줬다던 아저씨.”

 

“아니.. 갔더니 안 계시더라…”

 

지민이 태형과 이야기를 나누며 책상 가방걸이에 가방을 걸고 의자를 빼 앉았다. 학년이 다 끝나가는 때에 전학이라니, 당연하다는 듯 반 아이들의 시선이 지민에게로 향했다.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야, 야 좀 있으면 종 친다. 전학생한테 관심 끄고 빨리 자리에 가서 앉아.”

 

"아아 선생님, 왜요..”

 

“다음 역사다. 수업 시작할 거야.”

 

역사 담당을 맡은 석진이 갑작스러운 전학생에 의해 어수선해진 아이들을 자리에 앉힌 후 수업을 시작하였다.








 

「 진나라는 중국의 서쪽 외곽에 떨어져서 험준한 지형에 의존해 외침을 잘 받지 않으며 오랫동안 실력을 키웠다고 한다. 진나라의 황제인 시황제는 사람됨이 매우 잔인하고 냉혹했으며 헛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소중히 여겼다. 또 실수를 했다고 깨달으면 체면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시정했다. 」










 

“지민아.”

 

“어? 윤기… 아저씨?”

 

“어제 나 찾아왔었다며.”

 

“아저씨…”

 

지민이 윤기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근데 여기 학교 앞이잖아. 하교를 하는 학생들이 지민이 아빠라고 하기엔 너무나 젊어 보이는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너무나도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지민아, 지금 어디 갈 일 있니?”


 

“아니요 없는데…”

 

“그러면 아저씨 집에 올래?”

 

“좋아요!”




 

“아저씨는 차도 좋은 거 타네요. 어릴 때는 메로나 하나 사 줄 돈도 없었잖아요.”

 

“기억… 하고 있네?”

 

“그럼요. 그 일을 어떻게 잊어요. 엄마 잃고 나 따듯하게 안아준 사람은 아저씨뿐인데.”

 

지민이 죽은 엄마를 생각하며 달리는 차의 창밖을 보았다. 어릴 때 잃은 어머니는 얼굴조차 기억도 못 하는데

 

“신기해요. 같은 시기였는데 엄마 얼굴은 기억이 안 나고 아저씨 얼굴은 눈을 감아도 보이더라.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맑은 하늘에 괜히 인상을 찌푸려 보였다. 분명히 아저씨보단 엄마가 더 가까운 인물이었을 텐데…. 매섭게 스치는 겨울바람에 코가 아파 찡그렸지만 지민은 절대 창문을 닫지 않았다.

 

“다 왔다. 내리자 지민아.”

 

왜 그럴까. 나도 알 듯하지만 모르겠네. 운명? 그래, 그 운명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우와, 아저씨 집 진짜 좋아요! 어릴 때 아저씨 집에서 쥐나 바퀴벌레 많이 나왔잖아요. 그거 잡느라 진짜 힘들었었는데.”

 

지민이 윤기의 집 안의 물건들을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신기해했다.

 

“말해봐.”

 

“뭘요?”

 

지민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저 뒤에 있는 검은 슈트를 입은 윤기를 바라보았다. 꽤 고급 져 보이는 소파에 앉은 윤기가 알 수 없는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어디 갔다가 왜 이제 다시 온 건데. 그렇게 사라질 거면 그냥 오지 말지.”

 

“..... 내 맘이야.”

 

“너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뭐, 내가 아저씨 얼마나 많이 만나봤다고 그래요? 그냥 친한 아저씨였을 분이잖아요.”

 

“.....”

 

“독일 갔다 왔어요.”

 

지민이 저를 죽일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윤기의 강렬한 눈빛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왠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눈빛이었다.

 

“... 왜?”

 

“내가 엄마 잃고 너무 힘들어하니까. 아버지가 그냥 독일로 보내버리더라고요. 매정하게. 부성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

 

지민이 아무 의미도 이유도 없이 휴대폰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집에 몇 시까지 가야 해?”

 

“집에 안 들어갈 거예요. 그니까 아저씨가 나 재워줘요.”

 

“가출한 거야? 그 부잣집 도련님이?”

 

“응, 오늘부터.”

 

윤기가 곤란하다는 듯이 지민을 말렸지만 지민은 방 문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며 “내 방은 어디에요 응?”이라고 말했다. “야, 그렇게 막 열어보지 마.” 지민이 윤기의 말을 거스르며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다가 한 방문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

 

“박지민!!”

 

“네?”

 

“거긴 안 돼.”

 

“싫은데요?”

 

저를 잡으려 손을 뻗는 윤기를 피해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여러 사람들의 사진과 글자들, 이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될 무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 무기들이 다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저 나이에 윤기가 장난감을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었고, 장난감이라기엔 방 안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다 뭐예요…?"

 

“하… 내가 열어보지 말라고 했잖아.”

 

지민이 윤기의 총구를 만지작거리며 화가 난 듯한 윤기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윤기는 매우 당황스럽고 화가 나 보였다.

 

“아저씨… 막… 그런… 사람 죽이는...”

 

“킬러, 맞아.”

 

지민이 말을 하려다 멈추었다. 귀에 이명이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방 안에서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윤기.

 

“집에 갈 거야? 갈 거면 데려다줄게.”

 

차 키를 집으려는 윤기의 손을 붙잡은 지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여기 있을래요.”

 

“나 무섭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무서워서 도망가던데.”

 

“아저씨가 어떻게 무서워요.”

8.

- 지민아, 나 그 내 책상 위에 있는 상자 좀 가져다줄래?

 

“검은색 상자요?”

 

- 어, 주소 보내줄 테니까 거리로 와주라.

 

“네 지금 갈게요.”

 

지민이 급하게 온 윤기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옷을 입은 후 상자를 챙겼다.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겁냐.

 

적혀진 주소는 버스 정류장과 많이 떨어진 곳이었다. 아무 간판도 걸려있지 않은 건물로 들어가니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지민을 멈춰세웠다.

 

“너 뭐야.”

 

“이거… 아저씨가 가져다 달라고 하셔서…”

 

지민이 검은색 상자를 들어 보이자 남자는 지민의 상자를 뺏어 열어보더니 다시 지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세요.”

 

“누가 시킨 건데.”

 

“윤기…”

 

“내가 시켰다 내가.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네. 그거 주고, 지민아 이리 와.”

 

지민이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너무나 무섭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윤기에게 다가갔다.

 

“얼굴 기억해. 오면 그냥 들여보내줘.”

 

“네, 알겠습니다.”

 

“저 아저씨 뭐야?” 지민이 엘리베이터의 5층을 누른 윤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 부하.” 윤기가 평소에는 만지지도 않는 머리를 정리하며 지민의 말에 대답했다. 힘주어 올린 머리카락이 윤기를 더 차갑게 보이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일반적인 회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긴 복도가 둘을 맞이했다. 총을 쏘는 사람들의 사무실은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배 냄새가 날것이라 예상했던 지민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긴장을 풀고 뒤에서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걸어오는 윤기보다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 누구야? 애인?”

 

“아니야 그런 거.”

 

엘리베이터 앞 데스크에 앉아있던 노란 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은 예쁘장한 여자가 일어서서 윤기에게 질문을 건넸다. 왠지 술집에 있을만한 비주얼을 가진 여자.

 

“뭔들 어때. 아, 맞다 손님 왔는데.”

 

“언제?”

 

“온 지 얼마 안 됐어. 빨리 가 봐.”

 

병아리같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지민을 붙잡아 함께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니 손님과 차를 마시고 있는 정국이 보였다.

 

“아, 형 왔어요?”

 

“안녕하세요.”

 

정국의 맞은편에서 윤기에게 인사를 건넨 이는 부잣집 사모님 같은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JK 그룹 회장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악수하자 손을 내미는 사모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장미 향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전화하고 오시지 여기까지 이렇게 힘들게 오셨어요.”

 

“꼭 얼굴 보고해야 하는 이야기라서요.”

 

“아…”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그쪽 조직, 저희 회사랑 손잡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예?”

 

윤기가 입을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되물었다. 이런 건 보스한테 가서 이야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건 저희 보스에게....”

 

“그쪽 두 분, 여기 조직원분들 맞으시죠? 자리 좀 피해주셨으면 하는데…”

 

정국은 윤기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문을 열고 나갔고 조직원은 아닌데 나가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있어야 될지 우왕좌왕했다. 밖에는 무서운 사람 많잖아.

 

결국 나가라는 윤기의 눈짓에 의해 지민은 정국이 나갔던 문으로 나갔고 사모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아, 이런 얘기는 당연히 그쪽 우두머리에게 말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그전에 당신에게 제안할 것이 있어서요.”

 

“보스가… 알면 안 되는 사실인가요?”

 

“당신의 실력이 그쪽 우두머리랑 맞먹는다 들었는데, 맞나요?”

 

“아, 아직 그 정도는….”

 

“내가 윤기 씨 우두머리로 만들어줄게요. 내가 그 새끼는 못 믿겠기에. 워낙 그 친구가 숨기는 게 많잖아요. 윤기 씨도 알고 있죠?”

 

무슨 일을 그렇게 부탁할 것이기에 이렇게 나에게까지 와서 말하는 것인가. 도통 표정을 보여주지 않아 어떤 속내가 있는지 읽어낼 수 없었다.

 

“그러죠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좋아요.”








 

“그쪽, 윤기형 애인이에요?”

 

“네? 아니요!!”

 

지민이 손사래를 치며 크게 소리쳤다. 애인이라니,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이 차이가 몇인데….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의 의미. 곧 사귀게 되거나, 혼자 짝사랑. 맞죠?”

 

“아….”

 

정국이 지민의 머리를 쓰담으면서 말했다.

 

“이름이… 지민 씨? 맞죠?”

 

“아, 네 맞아요…!”

 

“귀엽네. 몇 살이에요?”

 

“열여덟….”

 

“아, 나보다 한 살 많네요.”

 

정국이 지민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어깨에 얹었다. 뭐야, 이 사람.

 

“근데 아저씨 보고 형이라고 해요?”

 

“아, 원래 형님이라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꼭꼭 닫혀있던 사무실 문이 열리고 손님과 윤기가 밖으로 나왔다. 윤기는 지민의 어깨에 얹어져 있는 정국의 손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그 표정을 놓치지 않은 정국이 윤기를 피해 손님을 1층까지 모셔드린다며 따라나갔다.

 

“.... 집에 가자.”

 

“일 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집에 가자.”

 

윤기의 표정을 살핀 지민은 혹시 그 빌어먹을 사모님이 윤기의 기분을 나쁘게 했나? 하며 눈치를 보았다. 우리 아저씨 힘들면 안 되는데….








 

“아저씨”

 

“왜”

 

소파에 늘어져 무료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리던 윤기를 부른 것은 지민이었다. 아까부터 주방에서 계속 달그락거리더니 이제야 와서 저를 부르는 지민에게 윤기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아까 정국이 왜 지민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별 뜻 없겠거니 하며 참는 중이었다.

 

“점심 안 먹었잖아요. 배고프죠?”

 

지민은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았고 점심과 저녁은 학교에서, 또는 도서관에서 사 먹었기 때문에 지민과 윤기는 한 번도 서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없었다.

 

“왜?”

 

“아니…. 배고프실까 봐… 저도 배고프고 해서 뭐라도 만들려다가 재료가 없어서 같이 사러 마트 가자고요. 어떻게 사람이 사는 집 냉장고가 저렇게 텅텅 비었냐.”

 

“그러던지. 가자.”





 

“아저씨, 빨리 와요!”

 

마트에 온 게 뭐가 저리도 신이 나는지 지민은 재료를 담은 카트에 매달려 뛰어다니기 바빴다. 저렇게 뛰면 다칠 텐데..

 

아…!

 

지민이 짧은 소리를 내며 발목을 잡고 옆의 벽에 기댔다.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저렇게 뛰어다니면 꼭 다치더라.

 

“누가 그렇게 뛰어다니래.:

 

“힝…”

 

발목을 잡고 있던 지민의 손을 치우고 발목을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살펴보다 공주님 안기로 지민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저씨…! 사람 많은 데에서 뭐 하는 거예요!!"

 

쪽팔려 목부터 귀까지 토마토처럼 익은 지민이 자신을 안고 있는 윤기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그럼 사람 없을 땐 해도 돼?”

 

“아니요!!”

 

“지민이 다쳐서 밥해 먹기는 글렀네. 일단 이건 다 사고 외식이나 하자.”

 

시무룩해진 지민이 안겨있던 윤기의 품에서 나와 다시 서서 계산을 하고 나와 윤기의 차에 올라탔다.

 

“어디 음식점 갈 거예요?"

 

“뭐 먹고 싶은데?”

 

“고기! 소고기. 진짜 맛있는 걸로.”

 

윤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것은 꽤 고급 져 보이는 식당이었다. 이 아저씨 이젠 돈이 많아서 남아도나 보네…

 

메뉴는 스테이크. 아니 이렇게 좋은 고기를 사달라고 한건 아니지만 잘 먹겠습니다.

 

“많이 배고팠나 봐. 잘 먹네.”

 

“히히”

 

“많이 먹어.”










 

“아저씨, 나 아저씨가 배우는 일 하고 싶어요.”

 

등교 준비를 하던 지민이 넥타이를 매는 윤기를 불러 세웠다. 방금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 탓에 윤기는 놀라 사레에 들려 쿨럭댔다.

 

“야…!”

 

“아, 미안해요…”

 

지민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배우고 싶은 건 맞는데..” 윤기가 항상 차는 시계를 윤기 앞으로 들이밀은 지민은 말을 이었다. “너 내가 무슨 일하는지 알아?” 지민이 주는 시계를 받아 끼려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지민의 머리에 갖다 대었다.

 

“이렇게 나는 바로 너 죽일 수도 있어.”

 

“아저씨가 나를 죽이고 싶다면 죽이는 거죠 뭐.”

 

지민이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듯 제 머리에 총을 가져다 대고 있는 윤기의 총을 빼앗아 다시 윤기를 향하게 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나가지 않는 총을 대신해 입으로 총 쏘는 소리를 낸 지민은 히히 기분 좋은 웃음을 보이며 총을 다시 윤기의 재킷에 넣어주었다.

 

“너 거기에 진짜 총 있었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짓을 해?”

 

“나 이 총에 총알 없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아저씨가 나 절대 안 죽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





 

오늘 학교 끝나고 데리러 갈게. -오전 10:38

 

                                      오전 10:47- 왜요?

 

우리 쪽 일하고 싶다며. -오전 11:08






 

“야, 야! 김태형, 일어나 봐!!”

 

지민이 책상 위에 엎드려 퍼질러 자고 있는 태형을 흔들어 깨웠다. 갑자기 깬 탓에 비몽사몽 한 태형의 코앞에 휴대폰을 내민 지민의 표정은 무척이나 설레 보였다.

 

“아 뭔데, 너무 가까워서 안 보여.”

 

“빨리 읽어봐 봐!!”

 

졸린 눈을 비비고 인상까지 써가며 대화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태형이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묻자 지민이 태형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속삭였다.

 

“총.”

 

“총 뭐?”

 

“총 있잖아 총. 사람 죽이는 거. 그거 알려준대.”

“야 박지민 너 미쳤어?”

 

“왜?”

 

“너 그런 사람이랑 같이 사는 거야?”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닌데....”

 

지민이 등짝을 퍽퍽 때리는 태형을 피해 책을 챙겨 미술실로 도망쳤다. 아니, 그게 그렇게 나쁜 짓인가… 아저씨가 그 일 안 한다고 해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아저씨!”

 

“너 내가 분명히 말했다 저 아저씨랑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그 새끼보단 나아.”

 

“박지민!!”

 

“야 나 간다! 내일 보자. 안녕!”

 

지민이 황급히 자신을 붙잡는 태형을 피해 기다리고 있던 윤기의 차 쪽으로 달려가 조수석에 올라앉았다.

 

“어디 갈 거예요?"

 

“가보면 알아.”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산속의 시멘트로 만들어져 스산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한 건물과 넓은 운동장이었다. 건물로 들어가니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던 정국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윤기와 지민을 맞이했다.

 

“어, 형 왔어요?”

 

“오셨습니까.”

 

정국의 옆엔 전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보았던 그 여자가 품에 안겨있었고 불룩불룩한 근육을 가지고 있는 30대 초중반의 두 명의 남자가 정국의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가 윤기에게 인사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마.”

 

“알았어요. 근데 지민이 형은 무슨 일로 데리고 왔어요?”

 

“배우고 싶대.”

 

정국이 의외라는 듯 지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 몸으로 배우겠다고?”

 

“나랑 별반 다를 거 없잖아.”

 

“그렇기야 하지만 형이랑은 또 다르죠. 형은 이 자리까지 오랜 시간을 걸쳐서 올라온 거고, 지민이 형은 쉽지 않을 텐데?”

 

“당연하지. 그니까 몸쓰는 일 말고 다른 쪽으로 가르쳐.”

 

“그러죠 뭐.”

 

지민이 가만히 정국과 윤기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는 듯 다급히 말을 꺼냈다.

 

“나는 총 쓰고 싶은데…!”

 

“저랑 같이 데스크에서 일하실 거예요. 현장 나가는 일은 거의 없지만, 총을 아예 안 쓰는 건 아니에요”

 

정국의 품에 안겨있던 여자가 시무룩해하는 지민에게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어린 지민이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9.

어느새 지민과 동거한지도 5개월이 다 돼간다. 조직의 일을 배운다던 지민의 실력은 전보다 꽤 늘었고 데스크의 여자와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첫 느낌이 별로라는 이유로 멀리했던 정국과도 가까워졌고, 손을 잡자던 JK 기업의 사모는 아직 아무 연락도 없었다.

 

“아저씨! 태형이가 나랑 놀이공원 가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간대요. 근데 내가 태형이 표까지 다 끊어놨거든? 근데 그게 할인표라 환불이 안된대… 그래서… 같이 가주면 안 돼요?"

 

“안돼. 바빠.”

 

“아저씨 요즘에 별로일 나오지도 않잖아요!! 나는 매일 나가서 배우는데, 나보다 바빠? 아저씨 이번 주 토요일에 일 잡힌 거 없잖아.”

 

지민이 제발 자신과 놀이공원을 가 달라며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드는 바람에 결국 놀이공원에 오게 된 윤 기었다.

 

“아저씨! 나랑 저거 타러 가요!”

 

입장을 하자마자 갑자기 고양이 머리띠를 사서 쓰라고 하질 않나, 게다가 손목을 잡아끌며 이 놀이기구를 타자, 저 놀이기구를 타자며 끌고 다니기 바빴다. 아니 왜 그거 몇 분 타려고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는 건데.

 

“아저씨, 나 탈 때 손잡아 주세요.”

 

“왜?”

 

“무섭단 말이야. 응?”

 

“이게?”

 

아파트한 채의 높이 정도는 되어 보이는 자이로드롭을 탈 때 즈음 지민은 윤기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을 잡아달라 말했다. 윤기는 이게 뭐가 무섭냐며 콧방귀를 뀌고 지민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 손 따듯하다.”

 

“그러면 차갑겠니”

 

서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던 도중 자이로드롭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끝에 다다랐을 즈음 지민이 윤기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아저씨 손 놓지 마요. 알겠죠?”

 

“....”

 

“아저씨?”

 

“야, 말 걸지 마.”

 

아니, 이 아저씨가.

 

지민이 윤기가 있는 쪽을 돌아보니 무서운 건지 윤기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안 그래도 흰 얼굴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떠는 것을 보니, 몇 년 치 놀려먹을 거리가 하나 생겼네.

 

 


 

“야, 나 안 탈래.”

 

“아니 사람도 죽인다는 사람이 고작 이런 걸 무서워하면 어떻게 해요?”

 

깔깔 웃으며 자신을 놀리는 지민에게 윤기가 꿀밤 한 대를 날렸다. 그러나 꿀밤이 꽤 아팠는지 지민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떻게 해요… 흐엉…”

 

“아, 지민아 왜 울어? 많이 아팠어? 아니 내가 그렇게 세게 하려던 건 아니고 네가 계속 놀리니까… 야 울지 마…”

 

눈물을 흘리는 지민 때문에 당황한 윤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하자 지민이 윤기의 눈치를 살피더니 눈물을 슥 닦고 하하 웃었다.

 

“아저씨 진짜 순진하시다. 어떻게 이걸 속아? 별로 안 아팠어요.”

 

“뭐야”

 

“뭐긴 뭐야? 연기지.”

 

“쓸데없는 데에 재능 있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려던 윤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지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갑작스레 닿은 윤기의 손에 놀란 지민이 얼굴까지 붉혀가며 움찔 떨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윤기가 살포시 웃어 보였고 와, 저거 맛있겠다! 하며 억지로 화제를 돌린 지민이었다.





 

“빨리 와요. 좀 있으면 여기서 퍼레이드 한단 말이야.”

 

“알았어, 알았어.”

지민이 윤기를 이끈 곳은 퍼레이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장소. 사람들의 통행이 통제된 후 곧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지민은 화려한 꽃들로 장식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입을 떡 벌리며 구경했다. 그런 지민이 귀여웠는지 꽃바구니를 든 외국인이 지민에게 장미꽃을 건넸다.

 

“지민아, 좋아?”

 

“네! 정말 좋아요."

 

지민이 받은 분홍색 꽃의 향을 맡다가 꽃 향이 정말 좋다며 윤기에게 꽃을 건넸다. 지민의 말대로 꽃을 코에 가져다 대 향을 맡으려 했으나 그 손은 지민에 의해 저지당했고, 바로 지민의 입술이 윤기에게로 곤두박질쳐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나, 아저씨 좋아해요.”

 

놀란 윤기가 눈을 크게 뜨고 말없이 지민을 쳐다보자 지민이 주위의 큰 소리들 때문에 윤기가 잘 못 알아 들었나 하며 다시 크게 말했다.

 

“아저씨 좋아한다고요."

 

웃고 있는 지민이 윤기의 눈에 들어왔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윤기는 지민을 꼭 안고 대답했다.

 

“나도.”

 

그 입술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이때야?’

 

놀이공원에서 돌아온 후 지민은 바로 곯아떨어졌고, 거실의 소파엔 윤기만이 남았다.

 

왜,

 

왜 오늘이야?

 

조금만 더 일찍 이야기하지.

 

조금만 더 늦게 이야기하지.





 

“그 요괴랑 잘 돼가고 있어?”

 

“왜 오늘이야?”

 

“왜냐니. 오늘이 타이밍이 딱 맞는 것 같아서 그랬지 뭐.”

 

“김석진…!”

 

윤기밖에 없는 거실에서 윤기에게 말을 건 사람, 아니 존재는 김석진이었다. 윤기를 그 지옥의 구덩이로 빠트린 그 김석진.

 

“왜? 너 박지민 죽기 전에 나한테 제발 지민이 만큼은 살려달라고 했었잖아.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지금 만나게 해 준 거지. 너무 오래 기다려서 화가 나셨나?”

 

“몇 십 년 만에 나타나놓고 지금 나보고 감사를 바라는 거야?”

 

“그럼.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줬잖아.”





 

***

 

 



 

“서복에게 인력은 충분하게 대 줄 테니 당장 불로초를 찾아오라 하라.”

 

“예, 폐하.”

 

윤기가 아무도 없는 밀실에서 한 신하에게 불로초를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린 후 옆에 있던 지민을 껴안았다.

 

“지민아, 내가 그 불로초만 찾고 네가 사람의 간을 두 개만 더 먹으면 우리는 평생 행복하게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어.”

 

“근데 그 책에서나 나오는 불로초가 진짜 있긴 한 거야?”

 

“있으니까 책에 쓴 거겠지. 지민아.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가 불로초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내 옆에 있어줄 거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 난 우리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제 스스로 목숨을 끊어 가는 길 외롭지 않게 같이 갈 거니까 계속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어.”

 

지민과 윤기가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데도 신하가 나가지 않자 윤기가 신하에게 나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신하가 머뭇거리자 윤기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며 물었다.

 

“그러나 폐하, 불로초가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 그 산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산입니다. 자칫하면 그곳에 들어가게 될 죄 없는 어린 백성들이 다칠 수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불로초를 찾아오는 이에겐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다시 한번 내 말에 토를 달 시엔, 자네에게 불이익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알아라.”

 

어쩔 수 없이 윤기의 명령을 받들게 된 신하는 곧장 서복에게 가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주고 불로초를 찾아오라 했다. 그래, 그 많고 많은 백성이 문제야?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저 자들이 불로초를 찾아오면 나도 보상을 받으니까.

 

 

 

한 달, 두 달, 세 달이 지나고 불로초에 대한 아무 소식이 없을수록 윤기는 더더욱 초조해졌고, 불로초를 찾는 이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불로초는 아직이더냐? 사람을 보낸 지 석 달이 지났다.”

 

“그것이…”

 

“왜 뜸을 들이는 것이냐? 당장 말해보거라.”

 

“아무에게도 기별이 닿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별을 전하러 간 이조차 돌아오지 않았…”

 

“... 그러면 다른 이들를 다시 보내거라.”

 

“폐하… 그러다간… 백성들의…”

 

“다른 이들을 보내라 하지 않았느냐.”

 

“예… 폐하…”

 

 








 

“요즘 폐하께서 이상합니다.”

 

“그러면 뭐 어떻습니까. 이게 기회지요.”

 

“대감, 그게 무슨…”

 

“황가의 성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기회 아닙니까?”

 

“…!”

 

“제가 들은 바가 있사온데… 황후가 구미호인데, 황제를 홀려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단 소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황제께서 황후를 무척이나 아끼지 않습니까? 그 소문으로 황후를 폐위시키면 황제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지요.”

 

김 씨가 호탕하게 웃으니 정 씨도 그의 비위에 맞춰 웃기 시작했다. 내 아들을 황 좌에 앉힐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께 새 나라의 최고 고위직을 드리리다.





 

황궁 밖에선 황후가 구미호라고, 황제는 구미호에 홀려 제대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뻥튀기처럼 또 부풀리고 부풀려져 황후가 황제를 조종하고 있다며, 황후가 곧 황제를 죽일 거라며.또는 요즘 일을 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없어지는 이유가 그 구미호인 황후가 간을 빼먹어 사라지는 거라고. 소문은 덧붙여지고 또 덧붙여져 황제의 귀까지 닿게 되었다.

 

“폐하, 황후 전하께 강력한 처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폐하. 반역을 꿈꾸는 대역죄인일지도 모릅니다.”

 

“구미호라니요, 당장 사약을 내리셔야 합니다.”

 

“알겠다, 알겠어. 알았단 말이다!!”

 

신하들의 강력한 주장에 윤기도 어찌 손쓸 수도 없이 지민에게 벌을 내려야 하는 상황까지 와 버렸고 이른 새벽, 지민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다.

 

“지민아, 내가 꼭 너 찾으러 갈게.”

 

“빨리 데리러 와야 해.”

 

“응, 어서 빨리 가.”




 

“김대감..!! 대감의 말이 맞았습니다 오늘 새벽 황후가 달아났고 지금 황후를 죽이라 사람을 보냈습니다.”

 

“잘했네, 잘했어.”




 

황궁으로부터 도망쳐 멀리 나왔을 때 즈음 숨을 좀 돌리려 바위 위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힘이 들면 사람들이 나를 쫓아와도 힘들어서 절대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바람결을 따라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대나무 잎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대나무 잎을 스쳐갔던 바람은 다시 지민의 땀을 식히고 지나갔다.

 

바스락, 바스락

 

바스락.

 

바람이 잎을 스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무언가가 바닥에 있는 낙엽을 밟은 소리.

 

산속의 동물, 아니면 자신을 잡으러 온 자객.

 

“.... 아”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날 죽이러 온 자객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랑이었다.

 

비록 내가 구미호이긴 해도, 대대로 산속의 정기를 먹고 자라는 호랑이를 이길 순 없었다. 급하게 여우의 모습을 꺼내 보여 페로몬을 풀어도 호랑이는 아무 타격도 입지 않았다. 차라리 자객이 나았을 수도. 인간은 한없이 약한 존재니까 다루기가 쉽지만 그것도 산속의 왕중 왕이라는 호랑이는….

 

 



 

“영감,”

 

“그래, 그 황후는 죽였느냐?”

 

“죽었습니다.”

 

“그러냐?”

 

정 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검은 복면의 사람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희의 손으로 죽인 것이 아니오라… 도망치던 도중 맹수를 만난듯합니다.”

 

“그래? 그러면 그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더냐? 나는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황후는 죽고. 일석이조이구나!”

 

검은 복면의 사람이 물러가고 정 씨는 서둘러 김 씨를 만나러 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 어디 가십니까?”

 

정 씨의 아들, 호석이었다.

 

“황후가 드디어 죽었다. 너와 내가 지금보다 더 높은 관직을 얻는 것은 시간문제야...! 일이 잘 되었다. 잘 되었어.”

 

정 씨는 호석을 뒤로하고 문밖을 나섰다. 황후의 죽음이라니, 호석은 황제가 즉위하기 전 기생방에서 윤기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황후라면, 그 지민이라는 사람인가? 그 사람 아니, 요괴는 남에 손에 죽을 정도로 그렇게 멍청한 요괴가 아닐 텐데?

 

호석은 영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죽은 이들을 볼 수도 있었지만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 저 자가 어떤 사람인지 판별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미호가 사람을 홀려 간을 빼먹는 요물이라 여겼지만, 지민에게선 그런 면이 전혀 없었다. 그때 당시에 윤기와 지민이 옛적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이처럼 사랑의 기류가 흘렀기 때문에.

 

근데, 구미호는 구미호인가 보다. 의도치 않게 사람을 홀려 이렇게까지 망친 것을 보면.

 

호석은 서둘러 황후의 죽음을 윤기의 벗인 남준을 통해 윤기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윤기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그렇게 쉽게 세상을 떠날 이가 아니라며 지민이 도망쳤을 산으로 찾아갔다.

 

“정호석, 너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찾아도 시신이 나오질 않아.”

 

“그럴 리가. 우리 아버지께서 직접 이야기하셨는데.”


 

호석과 남준이 대화를 하는 사이 빨리 지민을 찾아야 한다며 사라진 윤기는 피로 범벅이 된 지민의 시신을 발견했다. 너무 늦었다. 지민이 어떻게든 호랑이에게서 벗어나긴 했으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몇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상처를 많이 입은 상태의 지민은 자신을 찾아준 윤기의 얼굴을 쓸었다.

 

“지민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어.”

 

“뭐가 미안해, 아가.”

 

“아가….”

 

“너 아가라고 부르는 거 싫어했잖아. 근데 이번엔 좀 봐주라. 내가 몇천 년이나 더 살았는데…”

 

넌 어떻게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아름다울까.

 

“아가라고 불러. 계속해서 쉬지 말고 불러줘.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불러달란 말이야.”

 

“아가… 나의 아가….”

 

“아, 안돼 지민아….”

 

“하… 이게 하늘이 정한 법칙이야… 아역... 아가.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 요괴는 인간을 사랑하지 못해. 사랑하면 이렇게 어떻게든 죽게 되어 있어.”

 

지민이 감기려는 눈꺼풀을 애써 붙잡은 채 윤기를 더 꽉 껴안았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품으로 파고드는 지민을 더 꽉 껴안는 윤 기었다.

 

“아가, 사랑해….”





 

너랑 나랑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있었는데, 내가 불로초만 일찍 찾았어도 같이 도망갈 수 있었는데. 부귀영화는 아니더라도….



 

어야 디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 허노 어-허노   어- 허노야 어- 허네--


 

이렇게 따스한 봄날에, 너무나도 따스한 봄날에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낼 것이라 상상이라도 했을까.

 

지민의 분홍빛 볼을 닮은 벚꽃잎 한 장이 색색의 천들로 꾸며진 관위로 떨어졌다. 그 벚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윤기의 눈에선 폭포수 같은 눈물이 멈출 틈 없이 계속해서 쏟아져내렸다.




 

‘있잖아, 인연이 맞닿아 있는 사람이면 돌고 돌아 언젠간 다시 만나. 꼭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 생, 다다음 생에 만날 수 있어. 그때까지 네가 그 사람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폐하, 그러다가 병나십니다.”

 

매일같이 지민의 묘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라가 무슨 상관이야. 내 몸이 무슨 상관이야. 자결하는 것이 무서워 지민을 따라 죽지도 못하는데.

 

“차라리 병이 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구나.”

 

“민윤기.”

 

“.....”

 

“내가 네 오랜 친구로서 말한다. 죽을 거면 그냥 빨리 죽고, 죽지 않을 거면 다시 네 자리로 돌아와.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재상이 네 자리 노리고 있는 거 알아? 제발, 다시 돌아오라고.”

 

“죽여주라.”

 

“... 뭐?”

 

“죽여달라고. 따라가게.”

 

“.... 난 그런 거 못 해. 갈게.”

 

다시 지민의 묘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은 윤기뿐이었다. 지민을 위해 울어주는 것도 윤기뿐이었고, 지민을 그리워하는 것도 윤기뿐이었다.






 

“폐하, 불로초를 찾았습니다.”

 

“버려.”

 

“예?’

 

“필요 없단 말이다.”

 

"하나 이 불로초에 수천 명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

 

“관심 없어.”








 

울다 잠들었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엔 흰 안개가 자욱했다.

 

“이름, 민윤기.”

 

“예?”

 

윤기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 보이지 않는 이가 화려한 옷을 입고 윤기의 앞에 서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아, 나 죽었구나. 다행이다. 편하게 죽어서.

 

“생전에 불로장생을 위해 노력했더군.”

 

“....”

 

“네가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 요괴 때문에 불로장생을 꿈꾼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네가 구해 오라던 그 불로초가 신들의 것이라는 걸 정말 몰랐던 것이냐?”

 

“.... 예”

 

“그 불로초에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이 서려 있다는 건 알고 있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 그럼에도 그 아이가 그렇게 보고 싶더냐?”

 

“.... 그렇습니다.”

 

“그럼 그 아이를 만날 수 있게 해주마. 그러나 조건이 있다. 너에게 봄은 없을 것이다. 이건 상이 아니라 수천 명의 목숨에 대한 벌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라.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쳐라.”











 

10. 봄날


 

…. 아!

 

지민이 짧은 신음을 내었다. 아마 칼을 다루다 칼에 찔린 듯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칠칠맞게…”

 

윤기가 서랍에서 반창고와 연고를 꺼내 와 지민의 상처 부위에 발라주었다. 밥해준다고 그렇게 설치더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요리 잘 하지도 못하면서 매번 다치기나 하고.

 

“아저씨, 뽀뽀.”

 

지민이 반창고를 붙여주는 윤기에게 입술을 내밀었다. 윤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민의 입술에 직행했고 가벼운 뽀뽀를 생각한 지민의 의도와는 다르게 윤기의 뜨거운 혀가 지민의 입속을 잔뜩 헤집어 놓았다.

 

“하…”

 

오랜 키스 탓에 숨이 찬 지민은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미쳤어 진짜. 밥이나 드세요.”

 

윤기가 입동 굴까지 드러내며 하하 웃었다.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애가 나한테 다시 왔을까.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긴 할까?

 

“아저씨! 내일 무슨 날인지 알죠?”

 

계란말이를 집어먹으려는 윤기를 지민이 불러 세웠다.

 

“그럼.”

 

내일은 지민과 윤기가 연인이 된지 백일째 되는 날이었다.

 

우리 참 오래도 달려왔다. 현재 윤기의 연애생활은 전생에 꿈꾸었던 딱 그런 생활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고, 할 일을 다 하고 돌아와선 안부를 묻고 포옹을 하며 함께 따듯한 저녁을 먹고 다시 상대의 곁에서 잠드는 것. 이런 생활을 하는 게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

 

“지민아, 내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영화 보고, 케이크 만들러 가요!”

 

“그래, 그래 그러자.”





 

방학이라 그런지 영화관엔 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게다가 작년에 꽤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의 속편이 나온 탓에 영화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저씨 팝콘 먹을 거예요?"

 

“아니, 난 안 먹어.”

 

“그러면 나 먹을 거만 산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들뜬 지민이 팝콘을 사 윤기와 손을 잡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지민아, 나 진짜 행복하다.”

 

“뭘 또 새삼스럽게. 당연히 애인이랑 있는 시간은 행복해야지.”

 

윤기가 지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마치 고양이의 털을 만지는 것 같았다.




 

“아, 뭐 해요!”

 

윤기가 생크림의 지민의 볼에 묻히자 지민이 소리치더니 똑같이 손가락에 생크림을 찍어 윤기의 볼에 발랐다.

 

사람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항상 행복한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지루한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법이라고, 지민과 함께한 시간을 돌이켜보면 꽤 빠르게 흘러갔다.

 

“아저씨, 저번에 그 JK 기업 사모님 오셨는데.”

 

데스크에 그 여자 옆에 앉아 뭐가 그리 재밌는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지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윤기를 보자 얼른 사무실에 가 보라며 말을 걸었다.

 

뭐, 맡길 일이 있다더니. 그 아줌마는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나. 땅으로 꺼진 줄 알았네.




 

“아, 윤기 씨 왔어요?”

 

“아, 예.”


 

사모가 윤기에게 사진 몇 장과 정보들이 적힌 서류봉투를 윤기에게 내밀었다. 아마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겠지.

 

“사실, 이번 건은 사람 죽이는 건 아니고 뭔가를 좀 가져와줬으면 하는데.”

 

“뭘요?”

 

“우리 기업 경쟁사 알죠? 거기 비밀문서에요. 외국까지 나가야 하는데... 비행깃값이랑 숙식비는 내가 다 대줄 테니까 수고 좀 해 줘요.”

 

사모가 서류봉투 옆으로 흰색의 봉투를 내밀며 뭐, 이 정도면 충분하죠? 하며 얼른 열어보라 재촉하였다. 봉투 안에는 당연히 고액의 수표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비행깃값이랑, 숙식비, 수고비까지다. 아, 그리고 그쪽 우두머리는 모르게 해줘요.”

 

“그건… 왜?”

 

“윤기 씨 보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죠? 우리 기업 경쟁사 핏줄이에요, 그 사람.”

 

“아….”

 

“윤기 씨, 부탁드려요.”





 

“왜 이번엔 어디로 가는데?”

 

사무실에서 윤기가 나오자 지민은 다시 휴대폰을 끄고 윤기에게 달려가 안겼다.

 

“외국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어디?”

 

“일본.”

 

“나도 데려가.”

 

“그러지 뭐.”

 

어차피 지민은 자퇴했기 때문에 학교는 갈 필요가 없었고, 의뢰를 받아 조직원들에게 일을 분배해 주는 일도 그 여자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 지민이 외국에 나가는 것엔 별문제가 없었다.







 

문서를 훔치는 것은 몇 년 동안 이 일에 찌들어 살아온 윤기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가져온 돈도 충분해 지민과 실컷 데이트도 하고 유명 호텔의 스위트룸도 예약했다.

 

“와 나 이런 호텔은 처음 와봐요.”

 

그런데 문제는 호텔의 샤워부스가 투명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떤 버튼을 누르면 불투명으로 바꿀 수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다.

 

“하하 샤워하지 말고 자야겠다. 빨리 발 닦고 자야지.”

 

지민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애인이랑

단둘이서

호텔에

투명 샤워부스라니.

 

“너 오늘 땀 많이 흘렸잖아. 가서 씻어.”

 

“저기서 어떻게 씻어요!”

 

“남자 끼린데 뭐 어때.”

 

“그게 아니지!!!”

 

절대 씻지 않겠다며 떼를 쓰는 지민을 끌어다 그러면 같이 씻자~ 하며 지민의 옷을 하나 둘 벗기기 시작하였다.

 

“뭐 어때.”

 

“부끄럽단 말이야…”

 

“그럼 불 끌까?”

 

“불을 왜 꺼!!”

 

수상하게(사실 속내가 다 보이게) 빙글거리는 윤기를 지민이 계속해서 째려보았다. 그거… 그니까 그걸… 오늘 하게 될 것 같단 말이야.

 

“너 싫다는 짓 절대 안 해.”

 

윤기가 너 그렇게 째려보다가 가자미눈 된다. 하며 지민의 이마에 버드키스를 했다. 결국 둘은 함께 씻기로 했고, 욕조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 탓에 욕실 안은 뜨거운 공기로 가득했다.

 

“할래?”

 

“.....”

 

아무 말 없는 지민을 살피더니 윤기는 웃으며 지민의 혀를 감쌌다. 입 안을 헤집어 놨다가 윗입술, 아랫입술을 빨았다. 좀 거칠게.


“흐으.. ㅈ잠시마안...숨차…”

 

지민의 입술은 그새 부어서 발개져 있었고, 윤기의 침이 묻어 번들거렸다. 지민은 자신을 더 꽉 끌어안는 윤기에게서 떨어지려고 허리를 바르작댔으나 윤기가 허리를 더 꽉 감싸 안았다.

 

“어딜 도망가려고.”

 

“아저씨!! 이거 놔줘요…”

 

열심히 발버둥을 치는 지민이었지만 윤기는 그대로 지민을 들어 뜨거운 물이 담겨있는 욕조에 함께 들어갔다.


“왜?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에…”

 

윤기가 지민의 입에 한 번 뽀뽀를 해 주더니 목에 고개를 묻었다. 숨을 한 번 깊이 내쉬더니 즴인이 목을 빨기 시작했다.


“읏..! 아저씨이..!”

 

윤기가 지민의 배부터 쓸기 시작하더니 손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희고 찬 윤기의 손이 지민의 유두를 살짝 스쳤다.

.
“흐응..!”

 

윤기는 지민의 유두를 입에 물고서 깨물었다가 혀로 감쌌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지민은 몸을 베베 꼬았고, 그런 지민을 지켜보던 윤기가 유두를 입에 머금은 채로 지민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었다.

 

“아읏... 아저씨이... 이거 싫…. 흐, 느낌이 이상해요… 응ㅇ…”

 

지민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던 윤기가 손을 옮겨 긴 손가락을 지민의 뒷구멍에 쑤셔넣었다. 처음이라 그런지 뻑뻑한 구멍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아, 읏… 아파..”

 

“지민아, 힘좀 빼 봐.”

 

아파하는 지민의 힘이 조금 풀리자 윤기는 아까 하던 일을 이어서 했고 꽤 깁숙히 들어간 순간

 

“...!! 흐아앙..!”

 

찾았다.

스팟을 제대로 찔린 지민이었다. 지민이 자신이 낸 소리에 놀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지만 윤기는 멈추지 않았다.

 

“흐으응...! 응, 흐윽…”

 

계속해서 손가락을 휘적거리던 윤기가 손가락을 빼었다. 허전한 느낌에 아쉬워하던 지민의 뒤엔 손가락보다 더 큰 윤기의 것이 쑥 들어왔다.

 

“아아… 하으… 하앙..!!”

 

천천히 들어오다 갑자기 퍽 쳐올리는 윤기에 스팟을 제대로 찔린 지민이 큰 소리로 신음을 내질렀다. 그 이후로부터 윤기는 한시도 쉬지 않고 세게 자신의 것을 지민에게 박아댔다.


“하앙!  하읏, 윽, 흐앙! 하아앙, 아져, 읏, 씨이.., 으하앙, 좋아요, 읏, 흐응,?”

 

“어, 시발. 존, 나, 흐윽, 좋으니까, 하아. 계속, 후윽, 울어봐, 지민아.”

 

“앙! 흐앙! 흣, 으윽, 히잉,히아! 하응...!”

 

지민의 신음소리에 따라 윤기의 속도도 찔퍽찔퍽, 점점 빨라졌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좀 부드럽게 박아주려고 노력했다면 이젠 지민의 배를 뚫고 나갈 것 처럼 박기 시작한다.


“흐앙! 항! 좀만,,,흐아아,,,천천히 해요,,,흐아앗,,,!너무,,,빨라,,,!아응!”

 

지민을 들어 자신 위에 앉히고 허리를 꽉 잡아 쾅쾅 박아대는 윤기에 지민은 죽을 지경이었다.

 

“....! 자,,잠깐,,,! 아져씨이,,! ㅇ..이제 그마안,,! 항! 흐앙! 항!”

 

윤기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흔들리던 지민의 안에 윤기가 따듯한 액체를 내뿜었다.



 

지민아, 사랑해.

 

응, 나도요.








 

11. 이래


 

“윤기가 애인을 데려왔다더니, 그게 너 박지민이었어?”

 

“아, 큰아버지…”

 

“당연히 아버지는 모르시겠지. 알면 어떻게 될까?”

 

“하, 아버지? 난 그런 거 없는데.”

 

“뭐, 친자식이 아니니 별 신경도 안 쓰겠지.”

 

호기심에 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마주친 것은 윤기가 보스라고 부르는 이었다. 그 보스가 집을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큰아버지였다. 큰아버지라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를 잡아 다시 그 어두 컴컴한 감옥 속으로 집어넣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다시 그 악의 소굴 속으로 들어갈 순 없다. 어떻게든 그를 피해야만 했다.

 

“.... 닥쳐.”

 

“아, 큰아버지한테 말버릇이 안 좋네.”

 

“내가 그 감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그래, 그래. 그니까 누가 그렇게 엄마를 찾으래. 왜, 겁나? 다시 거기로 들어갈까 봐?”

 

다섯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난 독일에 유학을 간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새어머니를 맞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새어머니는 집에 들어온 후로부터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아이를 낳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내 진짜 어머니에 의해 입양된 나는 자연히 눈 밖으로 밀려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이니까.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다. 그런 나를 달래지는 못할지언정 아버지는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 나를 가두었고, 하루에 한 번씩 밖에 나오지 않는 밥으로 생을 연명하던 도중 그 빌어먹을 동생이 감사하게도 방 문을 열어주어 우리 집 기사로 있었던 남준이 나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 살았다.

 

열여덟이 되던 해 남준은 아버지에게 걸려 나를 꺼내주었다는 이유로 어딘가로 끌려갔고, 나는 도망치고 또 도망쳐 윤기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았고 어릴 때 친했던 태형이 다니는 학교에 같이 다니며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을 보냈는데 이렇게 다시 허무하게 그 감옥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어. 나 정말 겁나. 그곳, 나한테는 지옥 같은 곳이었거든. 빛 한줄기 보지 못하고 가끔가다 찾아와 말 걸어주는 김남준만 기다리면서 낮과 밤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갔으니까.”

 

“너 어릴 땐 몰랐는데 되게 예쁘게 생겼다.”

 

“.... 뭐?”

 

“민윤기 애인이면, 그런 것도 많이 해봤을 거 아니야?”

 

“.. …야 박민재”

 

“나랑 한번 해주면, 아니. 가끔가다 한 번씩 해 주면 네 아빠한테 안 찌르고 네가 그렇게도 아꼈던 김남준 찾아줄게.”

 

“... 꺼져.”

 

지민이 들고 있던 뜨거운 녹차를 보스의 얼굴에 뿌렸다.

 

“... 시발”

 

보스는 화가 났는지 지민의 머리채를 잡고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악..! 이거 놔. 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이거 놓으라고!”

 

지민이 열심히 발버둥 쳐보았지만, 8층에는 사람이 잘 오지 않으니 지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윤기는 현장 나갔단 말이야.

 

“왜? 그 뒷구멍 나한테도 한번 대주라니까.”

 

“흐윽… 싫다고… 저리 가!”

 

“어어? 왜 이러실까?”

 

보스가 지민을 강제로 갈색의 가죽소파에 던지듯 뉘여 셔츠를 잡고 뜯었다.

 

아, 나 이제 어떻게 해.





 

-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뭐야, 박지민 왜 전화 안 받아?”

 

윤기가 피가 묻은 가죽 장갑을 벗어 활활 타오르는 불에 던져버리며 다시 지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아까와 같은 대답을 내놓는 휴대폰에 윤기는 이상하다, 얘가 휴대폰 두고 화장실에 갔나? 이렇게 전화를 안 받을 애가 아닌데…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하며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야 전정국 너 박지민 어디 있는지 아냐?”

 

- 몰라요 아까 막 돌아다니던데?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고?”

 

- 그거야 난 모르죠.




 

♡아저씨♡

 

보스가 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수신인을 확인하더니 옆 커피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아저씨 하트가 뭐야 하트가. 촌스럽게.”

 

띠링-

보스가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녹화를 시작하는 음이 울렸다. 보스의 휴대폰에는 상의를 벗고 눈물을 흘리는 지민의 모습이 비쳤다.

 

“예쁘네.”

 

“하지 마.”

 

“너 계속 반항하면 이 영상 너네 아빠한테 보낼 거야.”

 

“더러워.”

 

“더러워지는 건 너지 내가 아니야.”

 

지민은 보스의 시선을 피했고 그런 지민에게 콧방귀를 뀐 보스가 지민의 상체를 핥기 시작했다.

 

“으, 읏.. 하지 말라고.”




 

전정국

 

다시 지민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그러나 보스는 지민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고 있어 뒤에 있는 휴대폰을 보지 못했고 지민은 손을 뻗어 통화를 연결했다.

 

- 지민이 형 어디에요?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보스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정국아 나 여기 빨리 좀…!”

 

“개 같은 년이”

 

아-

황급히 욕을 하며 전화를 끊은 보스가 지민의 뺨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너무 세게 맞아서 그런지 귀가 윙윙거렸다.

 

“너, 다시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러지?”




 

“뭐야, 보스가 왜 박지민이랑 있어?”

 

정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민이랑 연락돼?”

 

“보스랑 있는 거 같던데.”

 

-에? 보스랑 왜 같이 있대? 지민이가 뭐라고 했는데?

 

“어… ‘정국아 나 여기 빨리 좀!’이라고 하고 보스가 ‘개 같은 년’이라고 하고 끊겼는데요”

 

- 야 전정국

 

“왜요”

 

- 빨리 보스 찾아.

 

“아니, 왜..”

 

- 딱 들어도 감이 안 와?

 

정국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윤기의 전화를 끊었다. 보스 그 양반이 어디 가겠어? 있어봤자 지 사무실에 있겠지.

 

 


 

쾅-

보스의 사무실 문쪽에서 쾅 소리가 나자 지민이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 소리쳤다.

 

“뭐야?”

 

다시 한번 쾅 소리가 나자 꼭 잠겨있던 문이 열렸고 정국이 달려 나와 보스에게 주먹을 갈궜다. 벌게진 채 피를 뚝뚝 흘리는 뺨을 잡은 채 당황해 가만히 서있는 보스를 지나 반나체 상태가 된 지민을 정국이 데리고 나왔다.

 

“형, 다친 데는 없어요?”

 

보스가 너무 세게 잡은 탓에 시퍼런 피멍이 든 지민의 팔목을 발견한 정국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민의 다른 곳을 살폈다. 다행히 팔목 외엔 다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정국이 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민이는?

 

“그러네 형 말이 딱 맞아들었네.”

 

윤기가 실소를 터트리며 작게 욕을 읊조리더니 전화를 지민에게 바꾸어달라고 이야기했다.

 

- 지민아 괜찮아?

 

“아아, 아저씨...”

 

- 하…. 정국이한테 집에 좀 대려다 달라고 해 줘. 내가 지금 바로 집에 갈게.

 

“응..”







 

“지민이 형”

 

“....”

 

“보스랑 무슨 사이에요?”

 

“... 아무것도… 아니야.”

 

“형, 빨리 말해봐요. 그 사람이 그냥 아무나 그렇게 막 데려다가 하는 사람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잖아.”

 

눈물 범벅이 되어 떨어진 단추 때문에 잠그지 못한 셔츠를 여미며 지민이 정국을 째려보았다. 아, 충격 많이 받았겠구나. 평소에 눈치가 없는 정국이 내가 잘못된 질문을 했구나 깨달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지민아.”

 

지민이 집에 들어오니 윤기가 초조하게 지민을 기다리고 있었고, 현관에 발을 들이자마자 윤기는 지민을 꽉 껴안았다. 긴장이 풀려 정신을 잃은 지민은 힘없이 윤기에게 쓰러졌고 결국 윤기는 집으로 의사를 불어야 했다.




 

JK 기업 사모님

 

잠든 지민의 옆을 지키며 살피던 도중 윤기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JK 기업의 사모. 사실 전화를 받을 기분은 아니었으나 어찌 되었든 고객이니 그렇다고 전화를 씹을 순 없었다.

 

“예, 민윤기입니다.”

 

-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지민 군, 무슨 일 당한 거… 맞죠?

 

“그걸 어떻게….”

 

 - 아, 그건 나중에 차차 설명하고. 박민재, 그 새끼가 지민 군 건드린 거 같은데

 

 “박민재가 누굽니까?”

 

- 하도 가명을 많이 써서 모르나 보네. 박민재, 그쪽 우두머리.

 

“아…”

 

보스가 가명을 많이 쓴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신에게까지 가명을 쓸 줄은 몰랐던 윤기는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윤기가 알고 있는 보스의 이름은 김재민. 역시, 김재민에 대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정보가 나오지 않더라니.

 

- 이제 시작이에요. 윤기 씨가 보스 자리를 갈아 치울 날이 온 거죠 뭐. 아, 맞다. 지민 군이랑 박민재랑 무슨 사이인지는 알고 계시려나?

 

당연히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지민은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그런 부잣집 아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기사는 전생에 저가 가까이 두고 지냈던 벗이었고, 지민은 독일에 갔다 온 것이 아니라 어두운 지하실에 몇 년 동안 갇혀 살았다는 것. 또 박민재는 지민의 큰아버지. 아, 그리고 제일 충격적이었던 건 지민이 JK 기업의 경쟁사 재하 그룹의 아들이라는 것.

 

재하 그룹. 지민이 사라졌던 그 해에 재하 그룹 회장의 아내를 죽였다. 지민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지민의 어머니를 죽인 것이다. 내가 지민의 어머니를 죽여 회장은 재혼을 했고 지민이 어두운 지하실에 몇 년 동안이나 갇혀 살게 된 것. 다, 모두 다 내 탓이었다.

 

- 윤기 씨 몇 년 전에 재하 그룹 회장 아내 죽인 거, 맞죠?

 

“... 예.”

 

- 그 일, 의뢰자가 박민재라는 건 알고 있고요?

 

“네?”

 

- 박민재 그 친구 꽤 독한 친구예요. 재하 그룹 회장 갖고 노는 사람이 지 뭐. 걔네 가족, 박민지 앞에서 꼼짝도 못 해요.

 

“그래서, 저한테 전화하신 이유가 뭡니까?”

 

- 내가 얘기했잖아요 윤기 씨. 그쪽 보스 만들어드리겠다고. 박민재 죽이게 해 드리겠다고.

 

“어떻게…?”

 

- 그 새끼 마약 하는 건 알고 있어요?

 

“아, 몰랐습니다.”

 

- 쉬워요. 그거 이용하면 돼요. 마약 밀거래 관리하는 거 윤기 씨잖아. 아 맞다, 보스 갈아엎는 거 정국 군한테는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해요. 정국 군도 꽤 복잡한 인물이니까.






 

***





 

“무슨 이유로 그렇게 걔한테 잘해주는 거야?”

 

석진이 희정에게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너만 신이야? 나도 신이야. 내가 점지한 내 아이라고. 벌을 줘도 적당히 줘라 제발.”

 

“걔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 몇천 명이나 데려다가 이용해먹은 사람이야. 알아?”

 

“그렇다고 윤기가 눈에 넣어서 아플 아이도 아니잖아.”

 

희정이 석진에게 살포시 웃으며 잔에 든 위스키를 원샸했다. 술이 좀 씁쓸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는  희정이었다.

 

“그 JK 기업 사모한테 빙의 자주 하지 마. 그러다가 그 사모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인간관계 다 꼬인다고.”

 

“알았어. 내가 알아서 잘 할게. 나 간다.”

 

 


 

***



 

어, 갈치야. 그 정기적으로 마약 거래하던 미국 노란 머리들 있잖아, 걔네들한테 미안하다고 앞으로 12월까진 거래 무르자고 해라. 싸움 날 수도 있다고? 그러면 애들 더 보내줄게. 진짜 이번에는 마약 받아오지 마라. 알겠지? 어, 수고해라.

 

JK 기업 사모의 전화를 끊은 후 마약 거래를 무르라고 전화를 돌리는 데에만 세 시간이나 걸렸다. 거래처가 이렇게까지 많았나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약물을 투여하지 못한 박민재는 하루 만에 금단증상을 나타내었다. 공항 보안이 심해져서 마약을 들여오기가 힘들어졌다 대충 둘러댔더니 별말 하지 않은 채 혼자 끙끙 앓았다. 이럴 때가 기회지. 금단 증세가 매우 심해졌을 때 즈음 마약을 대신해 몸에 매우 치명적이라는, 먹으면 바로 즉사라는 독을 갖다 주었다. 윤기는 울컥 피를 토하는 박민지를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그를 구타했다.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박민지가 죽었다.

 

그 일이 일어난 후로 지민은 집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박민지가 죽은 이후로 마약 거래를 다시 재개해야 하니 나는 바빠서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있었고, 한가한 정국이 지민을 자주 돌봐주었다.








 

12. 꽃샘추위

어, 지민아. 미안. 이번엔 외국에 오래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언제 오냐고? 모르겠어. 좀 큰 건이라... 그래도 최대한 빨리 올게. 응, 나도 사랑해

 

전화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0:30 오늘 하루 지민과 통화한 시간. 휴대폰 요금 폭탄을 맞을 정도로, 휴대폰이 뜨거워져 손을 델 수 없을 정도로 떨어져 있기만 하면 몇십 시간을 통화했을 때와는 매우 많이 달라진 온도차였다. 내가 요즘 지민이에게 신경을 못 써줘서 그런가? 이번에 외국에 갔다 오면서 지민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사 와야지.

 

아, 그리고 요즈음 좀 이상한 일들이 많다. 뭐라고 말해야 할진 모르겠는데 여하튼 좀 이상하다. 의뢰를 수행하는데 좀 힘들어진 느낌이랄까? 가끔 이런 일이 있긴 했었으나, 이렇게 잦은 적은 처음이었다. 정보가 새어나가는 느낌. 요즈음 그 JK 기업 사모의 의뢰를 자주 맡아서 하는데 분명히 일을 평소대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의뢰한 건마다 항상 수사대가 하루도 되지 않아 따라붙었다. 이번 건도 아무 증거도 나타나지 않아 결국 수사대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그들이 이렇게 금방 현장을 수사하러 온 것도 처음이었다.

 

“형, 이번에 홍콩 가는 거 있잖아 나 그거 못 갈 것 같아요.”

 

“왜? 너 없이 우리끼리 하려면 좀 힘든데.”

 

“아… 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정 못 올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지. 중간에라도 들어와.”

 

“네 그럴게요.”

 

사무실 문고리에 기대어 문이 움직이는 대로 왔다갔다거리며 윤기에게 소식을 전한 정국이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회장’이라고 적혀진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정국입니다.”

 

“어, 그래. 잘 돼가고 있니?”

 

“예, 말씀하신 대로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 끝까지 잘 부탁한다. 들키지 말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네게 꼭 사례를 해 주마.”

 

예.라는 말과 함께 정국이 전화를 끊었다.




 

홍콩 출국 당일, 이른 새벽이라 곤히 자는 지민의 이마에 키스를 한번 하고 조심스레 어제 싸놓은 물건들을 들고 나왔다. 행여 나중에 꼬리라도 잡힐까 함께 가는 조직원들은 함께 가지 않고 각각 다 다른 항공사, 시간대, 경로로 하여 당일 현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내가 아니, 우리 조직에서 맡았던 사건 중에선 가장 큰 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타깃은 JK 기업의 경쟁사인 재하 그룹의 회장을 죽이는 것. 지민은 내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러 간다는 것을 모른다. 어쩌면 그도 내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에 대해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지민의 아버지라는 그 사람은 지민을 그토록 못되게 대했으니까. 그래도 아버지는 아버지이니 뭐, 말을 안 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피곤한 탓에 홍콩에 도착한 후 며칠 내내 호텔에만 처박혀있었다. 옛날에 지민과 함께 일본에 갔을 때에는 조금이라도 놀러 다녀서 꽤 좋은 추억을 만들었었는데 혼자 있으니 할 일이 없었다. 홍콩의 야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저기 저 불빛의 가시들이 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의 심장으로 날아와 꽂혔다. 옛날엔 몰랐는데, 혼자라는 게 이리도 쓸쓸하구나.




 

***



 

“아… 갔구나.”

 

아침 일찍 잠이 깬 이유는 왠지 모르게 찬바람이 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윤기가 떠난 집안은 보일러의 온도를 올리고 또 올려도 지민에겐 따듯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띵-동

역시나, 정국이었다.

 

“형, 일어났어요?”

 

“응.”

 


 

윤기가 홍콩으로 떠난 지 몇 달이나 지났다. 윤기가 대포폰만 들고 간 탓에 처음에 있던 그 자리에 있는 윤기의 휴대폰의 잠금 화면은 웃는 지민의 얼굴 말 비춰주며 꼭꼭 잠긴 채 무언가를 보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스와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부터 정국은 바쁜 윤기를 대신해 매일 내 옆에 있어주었고 윤기가 없는 지금도 매일 나를 찾아와주었다. 어떨 때에는 그렇게 없으면 죽고 못 살던 윤기가 아예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그를 잊고 있나 보다. 어떻게 연락이라도 한번 해 주면 좋을 텐데.



 

한 달이 한 계절이 되고, 한 계절이 몇 년이 되었다. 성인이 되어 술도 마시고 클럽도 다닐 동안 윤기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연락 하나 없었다. 일 때문에 그런 것은 안다. 혹시 나를 두고 일을 탓하며 외국으로 떠난 것은 아닐까? 이 정도면 그냥 이별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 정국이 고백했다. 나를 좋아한다고. 나도 나를 그렇게나 끔찍이 생각해주는 정국에게 사실 마음이 조금 있었던 건 사실이다. 윤기형은 나에게 연락 한번 해주지 않는데, 내가 정국이랑 사귀게 되어도 윤기가 알까? 날 이렇게 방치하는 사람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내 곁에 붙잡아두고 싶었다. 버려진 기분이었다. 그냥 지금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기대어야겠다.




 

***




 

“형님, 비가 오는데 괜찮을까요?”

 

드디어 당일. 윤기의 방에 모인 조직원들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행여 실수라도 생길까 걱정하였다.

상대는 재하그룹의 회장이다. 그만큼 경호도 심할것이고, 적들에게 많이 노출되는곳일수록 경호가 더 붙을것이다. 2시간 전 회장이 예상대로 윤기의 방 바로 위층에 체크인을 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예상대로라면 앞으로 1시간 후에 회장은 호텔에 딸린 카지노에 발을 들일것이다. 경호가 가장 많이 붙지 않는 순간은 회장이 게임을 하는 시간. 그 때를 노려야만 한다.



 

- 준비 다 되었습니다. 신호 주시면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방 안으로 회장과 경호원 세명이 들어왔다. 게임은 시작되었고, 게임은 카지노 딜러의 진행에 따라 진행되었다.

 

“あ,家に帰りたい。(아, 집에 가고싶다.)”


 

윤기가 말을 꺼냄과 동시에 방 밖에서 총성이 울렸다. 회장 주위의 경호원이 문 밖으로 달려나간 사이 윤기가 총을 꺼내기만 하면 게임은 끝난다.

 

“손들어.”

 

카지노 딜러가 윤기의 목에 차가운 칼을 갖다 대었다. 목 부근이 쓰라린 것이 상처가 났나 보다. 이번엔 정말 철저히 준비했는데 왜지?




 

재하 그룹의 회장이 당황한듯한 윤기에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영상통화가 걸려진 휴대폰을 게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예, 회장님

 

“어, 지금 내 앞에 민윤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쟤가 나를 죽이려 들더라고. 죽일까 말까?”

 

“전정국?”




 

「운하 건설을 책임지고 있던 정국이라는 사람이 한나라의 첩자임이 밝혀지자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사가 ‘진나라는 대대로 외국인들을 우대하여 발전해왔다’ 고 반론을 올리자 진시황은 어쩔 수 없이 의견을 수락하고 관리들의 말에 따라 외국인 인재를 중시했다.」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왜 그것만 잊고 있었을까

 

인연도 되풀이됨과 동시에 역사도 되풀이된 단 걸 모르고 있었을까

 

익숙함에 속아 왜 난 지금 벌을 받고 있다는 걸 잊었을까

아아, 정국아 너도 날 결국 떠나갈 거야?

 

박지민 너는 내가 왜 좋아? 난 널 좋아하지 않는데. 날 좋아하지 마. 사랑하지도 마. 그 병신 같은 민윤기한테로 가.


 

지민아, 네가 아무리 애타게 날 찾아도 난 네 기도를 들어줄 수 없어. 왜냐고? 너는 하늘과 땅의 이치를 어긴 신의 실수로 만들어진 한낱 요괴일 뿐이니까.

 

너희 엄마가 왜 죽은 지 아니?

 

민윤기가 죽였어.

 

전생에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인 민윤기가 또 사람을 죽이고 있네. 난 분명히 기회를 줬는데.

 

지민아 빌고 또 빌어. 나 좀 구원해달라고.

- 아, 형님 오랜만입니다. 몇 년 동안 소식도 없으시더니 땅으로 꺼지신 줄 알았네.

 

“너 뭐야”

 

- 뭐긴 뭐야 민윤기이지. 지민이 형 형도 윤기한테 인사할래?


 

지민의 몰골은 말도 아니었다. 눈 밑으로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에 한껏 흐트러진 옷가지며 지민의 팔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주사기. 그 주사기를 들고 있는 덜덜 떨리는 흰 손까지.

 

- ... 민윤기? 아… 그 새끼… 윽, 죽은 거 아니었어?

 

- 윤기야 내가 박지민 잘 봐주고 있었어. 어때? 박지민의 망가진 모습을 본 기분이?

 

“박지민, 당장 그 새끼한테서 벗어나.”



 

탕-

총성과 함께 회장의 몸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고 영상통화가 걸려져있는 휴대폰을 들고 곧장 공항으로 뛰었다.


 

지민아 내가 지금 갈게.

한국은 지금 봄이잖아

우리 같이 벚꽃 구경 가자.

나, 두 번은 너 못 잃어.

내가 구해줄게.











 

아, 약물 과다 복용입니다. 근데 그 약물이….
















 

“당신 박지민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늦은 밤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건 태형뿐이었다.

 

“3년 동안 박지민 연락도 안 됐어. 근데 3년 만에 온 전화가 사망 소식이더라? 당신 박지민 애인이라며.”











 

또다시 무덤 앞에서 탈진이 될 때까지 울었다.

그러나 신은 다시 나타나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 열심히 살았더라면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하루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한 계절이 되어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지민이 잠든 푸른 잔디 위로 지민의 발그레한 뺨을 닮은 벚꽃잎이 떨어졌다.

 

"지민아, 내가 왜 봄을 싫어하는지 알아? …. 다들 봄이 좋다고들 하는데 나는 모르겠어. 봄은 나의 모든 것을 주고 빼앗아갔거든. 너조차도. 생각해보니까 너랑 한 번도 벚꽃놀이를 안 가봤네. 너랑 못 해본 게 너무나 많아서. 그래서….”

 

윤기를 위로해주는 듯 벚꽃잎을 올려놓은 윤기의 손바닥 위에 벚꽃잎이 하나 더 떨어졌다. 그리고 윤기의 맑은 눈물도 떨어졌다.















 

13. 벚꽃은 피고 지고를 반복하고, 봄이 온 다음엔 다시 봄이 온다.


 

“오, 윤기야 오랜만이다!”

 

달동네 밑 슈퍼 아줌마가 윤기를 반겼다. 윤기도 아줌마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 지내셨어요? 네.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밥도 잘 먹고요. 요즘 기다리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 사람이 언제 올까 매일 창밖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괜히 웃음이 나와요. 별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살다 보니까 어릴 때의 저만큼 힘든 사람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이번 주 주말에도 자원봉사 나가요!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이 전보다 저를 더 많이 좋아해 줄까요?





 

우리의 봄은 시리도록 추웠다. 마치 꽃샘추위처럼. 그러나 그 추위가 다시 멎는 것처럼 내가 너를 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만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만남이 절대 해피엔딩 일순 없기에 애처로울 뿐이다.



 

fin.

새벽녘의 노래 - 다즈비
00:00 / 00:00
병명은 사랑이었다 - 다즈비
00:00 / 00:00

© 2018 by SUJIM Four Seasons, presented by @EPILOGUE_sj & @Love_maze_0309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