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R SEASONS
OF LOVE
가을은 잎이 불그스름한 옷을 입는 계절이다. 열매들이 익어 가지에서 떨구어지는 계절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자, 아름답기 그지없는 네가 태어난 계절이다.
그리고 내가 네게 이별을 고할 계절이자, 너와 내 이야기의 종지부가 될, 계절이다.
이렇게 끝나는 것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좋다는 것을 우리는 둘 다 알고 있다. 그냥 서로 나쁜 새끼는 되기 싫기에, 재미 없고 지루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 뿐이다.
..라고 나는 너에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나보다 훨씬, 훨씬 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고, 너의 미소는 나를 살렸듯이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것이다.
나를 잊어야만 네 이야기의 끝은 아름다울 것이다.
너를 절대 잊지 못할 내 이야기의 끝은 비극일 것이고.
leaves-taking
w. 루나
J's story
중요하게 생각할 일이 있다며 날 만나길 거부하던 당신이, 드디어 내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만나자고, 그 한마디에 내가 얼마나 뛸듯이 기뻤는지 당신은 알지 못하겠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거울 앞에서 옷을 고르며 행복한 상상으로 혼자 조용히 웃었는지 당신은 알지 못하겠지.
알았다면, 나에게 그렇개 말할 수 없었을 거야.
나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너도 그렇지 않냐고 묻는 덤덤한 당신의 목소리와 눈빛에, 나는 그만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나는 당신을 이 모든 우주 만물보다 더 사랑하는데,
너무 갑작스럽고 놀란 탓에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눈물만 흘렸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내 맞은 편에 있던 당신은 온데 간데 없었고,
차게 식은 아메리카노만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S's story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암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내가 너무 늦게 병원을 찾았다며,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곁을 항상 지켜주겠노라고 말했는데,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한없이 우울했고, 더없이 미안했다.
사실 세상 모든 것들은 우리의 관계를 저주했다. 길 가면 뜨거운 눈총 받는건 일도 아니고,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아예 대놓고 우리에게 욕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 당당해졌다. 그리고 지민은 그런 나에게 의지했다. 우리는 행복했기 때문에. 다른 연인들처럼, 우리는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어느 날, 지민의 어머니는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아셨는지 다짜고짜 나에게 전화를 거셔서 비난하고 저주했다. 그리고 지민이에게는 선을 보게 했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만 그의 인생에서 퇴장해야 했다.
J's story
그 날 이후로 나는 정말 할 수 있는 구차한 일은 모두 했다. 그에게 수백 통의 전화를 걸고, 그보다 더 많은 개수의 문자를 보냈다. 그의 자취방을 찾아가고, 그의 친구들에게 모두 물어봤다. 민윤기, 어디 있느냐고.
그리고 내게 돌아온 것은, 대답 없는 문자, 꺼져버린 휴대폰, 텅 빈 자취방과 그가 대학을 자퇴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달리 내가 또 무엇을 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나를 동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뒤에서 비웃어댔다. 그러니까, 게이 새끼들이 뭐 잘될 리 없다고.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그가 내가 싫어졌다는 건 말이 안된다. 바로 며칠 전에 나와 섹스하며 나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다정하게 속삭이던 사람이었으니까. 내 손을 꼭 잡고 환하게 웃으며 같이 산책하고, 이따금씩 갑자기 입을 맞추던 사람이었으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정말 여기까지가 맞는건가. 그렇게 사랑했던 우리는 더 없는 건가.
조금씩 붉은색으로 변하는 단풍잎마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놓으라고.
S's story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주일, 길게는 한달 정도였고, 나는 그 안에 정리할 것이 많았다. 작업하던 음악을 대충 갈무리하고, 가족에게도 미리 말해주었다. 친구는 되도록 옛날 친구, 지민이가 모를 놈만 만나서 사정을 얘기해줬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죽음에 더 덤덤해졌다. 언젠간 죽겠지, 하다 보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사망 예정일이 성큼 다가와서, 나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새삼, 실감이 나지를 않아 피식 웃었다. 지금쯤이면 열라 과제를 하고 있거나.. 아, 이쯤이면 중간고사 준비를 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바쁘게 살던 내 삶은 어차피 이 넓은 1인실에서 마무리될 걸, 왜 그렇게 아득바득 살았나 싶었다.
혼자 누워 있는 시가닝 길어지니, 박지민 생각이 안날 수가 없었다. 실은 3초에 한 번 지민의 얼굴을, 그 맑은 미소와 함께 접히는 눈꼬리를, 귀여운 손과 청아한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은, ' 이쯤 되면 나 찾는 일은 포기하려나. ' 였다.
J's story
살고 있지만 사는 것 같지 않고,
별 다를 것 없는 내 인생이지만, 큰 상처가 생겼고.
내가 진 것 같지만, 그보다 잃은게 더 많고,
당신을 아직 사랑하지만, 예전보다 더 아프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숨 쉬겠지만, 같은 공간에 있지 않잖아.
S's story
확실하지만, 확신은 없고,
웃어보지만, 행복하지 않고.
당신을 구했지만, 나는 놓쳤고,
당신은 계속 빛날 것이지만,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만, 다른 끝을 만날 거야.
J's story
만나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고는 한다. 모두들 내가 너무 힘들고 초췌해 보인다고 하며 나를 걱정했다. 그와 연락이 끊긴지 정확히 16일 만의 상황이다.
이젠 모든 나무들이 울긋불긋하게 염색을 했고, 몇은 벌써 잎을 후두두 떨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살고 있다.
무기력하게 집에 누워 멍을 때렸다. 그를 찾는 게 소용 없을 거라는 걸 깨달은 이후 생긴 내 버릇이다. 멍때리기.
바로 그때, 밤중에는 울릴 일이 없는 핸드폰이 울렸다. 큰 병원으로 취직했던 간호학과 석진 선배였다.
“ 여보세요? 지민아! ”
“ 네 선배. 오랜만이네요. ”
“ 그.. 내가 말할까 말까 하루 종일 고민을 많이 했는데, ”
침을 한 번 꿀껄 삼켰다. 뭔가 끔찍한 일이 있을 것 같다고, 내 촉아 말하고 있었다.
“ 윤기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더라. ”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귀 옆에 딱 붙여놓은 핸드폰에서 선배가 무슨 말을 더 하는데,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흐릿한 단어들 속에서 제대로 들은 한 글자,
‘ 암 ’
결국 나는 밤 11시 반에 겉옷과 지갑, 핸드폰을 빠르게 챙기고 집을 뛰쳐나갔다. 제발 그가 잘못 본 것이기를, 빌고 또 빌었다.
S’s story
사망 예정일이 살짝 넘어간 탓에, 내 옆에는 간호사 분이 붙게 되었다. 내 신경이 이상 상태를 보일 경우, 급속진통제를 주사해서 내 고통을 덜어 주겠다는 병원 측의 배려 아닌 배려였다. 알겠다고 의사에게 동의하자 들어온 간호사는,
“ 민윤기..? “
김석진이었다.
사정을 설명했다. 지민이와의 일도 모두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제발 지민이는 모르게 해달라고. 그냥 날 미친놈으로 생각하고 빨리 잊어버리게 도와달라고. 그는 생각하는 듯 하더니 탐탁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했다.
그날 밤 오후 10시쯤 잠에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번쩍 눈이 뜨였다.
삐삐삐- 거슬리는 소리가 빠르게 울렸고, 나는 그때 직감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갑자기 따끔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석진이 내 팔에 주사를 놓고 있었다. 진통제. 내가 동의했던 그 주사를 놓으면서 그는 울고 있었다.
머리가 살짝 띵 하더니 몸을 짓누르던 고통과 긴장이 한 번에 탁 풀렸다. 가쁘던 호흡도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고 아득했던 정신도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보고 싶은 건,
“ 박지민... “
J’s story
석진 형이 취직했다던 그 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펑펑 울었다. 병원 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면서, 중환자실을 찾고, 뛰어다니면서 방패를 하나하나 읽었다. 그러다가 찾은 ‘민윤기’라는 이름에 나는 다짜고짜 문을 열었다.
“ 박지민... ”
“ 형!! ”
마침내 마주한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 ..천사가 마중나와 줬나 보네.. 왜 얘가.. “
“ 형.. 형 나 진짜 박지민이에요.. 정신 차려봐..! ”
그는 잠깐 상황을 파악을 하더니 픽 웃고는 중얼거렸다.
“ 김석진 개새끼가 진짜.. 말하지 말라니까. “
“ 왜 나한테 말 안했어요? 내가 얼마나!! ..형. ”
그는 졸린 듯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저 잠을 자면 영원히 일어날 수 없을 텐데. 아까부터 줄줄 새던 눈물이 더 흘렀다.
“ 지민아.. ”
“ 형, 형 이거 아니잖아, 이거, 이렇게, 아닌데, “
그 말을 하고 웃는 그를, 난 도저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 눈을 감는 그를 따라, 난 그의 하얀 손을 붙잡고 눈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곧이어 삐- 길게 울리는 신호음이, 내게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곧이어 띠링, 하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소리가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왔다. 핸드폰 전원을 꺼 놓을 심정으로 집어들었는데, 나는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멋진 윤기형❤️ 10. 13 00AM
(발신인이 설정하신 예약문자입니다.)
생일 축하해 지민아. 사랑하고, 미안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