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물
w. santé
방에 발을 들인 수빈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이불 사이로 얇고 길쭉하게 쭉 뻗은 하얀 다리.
숨을 꾹 들이켠 채 새벽의 고즈넉함을 만끽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방. 아침 해가 들어올 것을 대비해 엉성하게 친 커튼을 꼭꼭 닫았다. 밝은데서 잠을 못 자는 연준이 혹여나 깰까봐. 어둠에 익숙해진 수빈의 눈이 연준의 다리를 좇았다. 움찔. 작은 움직임 하나마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매번 느끼는 거지만 연준은 언제나 새삼스러울 정도로 감격스럽다. 얼굴 보고 싶어. 수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급한 마음과는 달리, 화장실을 나오면서 제법 여유롭게 머리를 털었다. 빨래통에 수건을 던져넣고 침대로 기어들어 가는 일련의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수빈은 도톰한 이불 속에서 뜨끈해진 몸을 한껏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온. 익숙한 체향. 익숙한 내 사람. 품에 가득 끌어안은 연준의 얼굴에 쪽쪽 입을 맞췄다. 혀엉. 나 왔어요. 몸을 따듯하게 감싸 안는 손길에 연준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수빈을 맞이했다. 어어. 수비니네.
“언제 들어왔어?”
“좀 전에. 씻고 왔어요.”
“들어오는 것도 못 들었네.”
“기절해서 자고 있던데.”
많이 피곤하죠? 다정한 목소리가 물었다. 으응. 죽겠어. 편집 다 했어요? 음.... 거의? 한 80프로. 연준이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자기느은 촬영 잘했어? 푹 잠긴 목소리에 졸음이 묻어났다. 그리고 딱 그만큼 웅얼거리는 최연준 특유의 말투에 5년째 면역력 없이 쉽게 무너진다. 귀여워 진짜.
“응. 겨우요. 우리 어제 최다 테이크 기록 세웠다?”
“....그래? 얼마?”
한 40번은 찍은 거 같아. 어제 그 장면만 8시간 찍었어. 대답 대신 말랑한 볼살을 꾸욱 누르는 연준의 손은 익숙한 듯 빠르고 거침없다. 하얗고 말랑한 살을 검지로 쓸어내리기도 하고 가래떡 주무르듯 쭈욱 늘리기도 하고. 수빈 역시 그런 손길이 제법 익숙했다. 사귀기 전부터 뻔뻔하게 만져댔으니 7년이나 얼굴을 내어주고 있는 셈이다. 수제비보다 더 말랑거려. 언젠가 연준이 평소처럼 얼굴을 주물럭거리다 말고 남긴 감상평이 떠올랐다. 촉감이 너무 좋아. 그래서 미치겠어. 최 피디는 어떻게 관리받는 연예인보다 피부가 좋냐. 감탄에 가까운 감상평에도 수빈은 차마 웃지 못했다. 너무 진지해 보여서. 가끔 인격체가 아니라 무슨 살덩이 취급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지만. 연준이 좋다면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니. 연준이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쓰다듬고 예뻐해 주는 바람에 무의식중에 그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었다. 무서운 버릇이었다.
형이 안 만져 주니까 자꾸 더 보고 싶은 거 있죠.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수빈 때문에 연준이 킥킥 웃었다. 나도 그랬어. 손이 너무 허전하더라고.
Love Is So Nice
최수빈 최연준
수빈이 조연출을 맡은 드라마 촬영이 시작됐다. 괜히 현장 한다고 덤볐나 싶을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입봉을 앞둔 말년 조연출이 안 굴러본 현장판이 없건만, 어째 이번 촬영은 시작부터 빡세다. 미니 시리즈, 대하사극, 아침 드라마와 주말, 일일 연속극 등 숱한 작품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만큼, 수빈은 타이트할 수 밖에 없는 드라마국 촬영 스케줄을 제법 잘 소화해 내는 편이었다. 그래서 ‘액션은 현장이 존나 빡세. 당연한 말이긴 한데 진짜 죽음이야.’ 라는 문 선배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뚝심 있게 현장팀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물론 곧장 후회했지만. 연애에 브레이크가 걸릴 정도로 경우 없는 촬영 스케줄은 난생처음이라, <우리 형♥> 카톡 방에 흘려보내는 눈물 이모티콘이 마를 날이 없었다.
연준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PD 입봉작을 여행 버라이어티로 선택하는 바람에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르는 중이었다. 처음에야 좋은 기회라 여겨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건만, 어째 프로그램을 맡고 나니 다른 스튜디오 예능보다 배로 힘들었다. 괜찮아. 나도 이번 주 집에 아예 못 들어가. 다음 주 촬영 끝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여기도 문장마다 우는 이모티콘은 필수였다. 매주 색다른 여행지 자료조사와 더불어 신선하고 참신한 콘텐츠를 고민하느라 하루가 멀다하고 회의실과 편집실에 상주했다. 언젠가부터 연준의 카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는 <참신한 게임 제보 바람>이었다.
이렇게 스케줄이 안 맞을 수 있나. 번갈아 가면서 빈 침대를 지키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동거하면서도 제대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빨래통으로 겨우 상대방이 집에 왔다 갔음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보름 만에 겨우 마주한 얼굴이 감격스러울 수밖에. 형 보고 싶었어요. 수빈은 닿는 대로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어. 눈도 못 뜨고 칭얼거리는 소리는 못 들은 척, 마른 몸을 꼭 끌어안았다. 살짝 부은 입술 위로 입을 몇 번 더 맞추자 눈 한쪽을 겨우 뜬다.
“지금 몇 시야?”
“6시. 형 언제 들어왔어요?”
“나 한 4시쯤....?”
내가 톡 보내써어. 못 봔냐. 귀엽게 이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 아, 그게. 저가 생각해도 웃긴지 수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번 주에 빗속에서 질주씬 찍는다고 했잖아요. 어. 그거 오늘 새벽에 찍었는데 주머니에 핸드폰이 있는지도 모르고 촬영했거든. 어. 끝나고 보니까 완전 가셨더라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연준이 고개를 화들짝 들어 올렸다. 가셨어? 저세상으로? 네. 완전. 아무리 말려도 전원이 안 들어와요. 소품팀한테 쌀도 얻어서 넣어놨는데 소용없어.
“....새로 하러 가야겠네.”
“어. 안 그래도 오늘 하려고.”
폰 새로 하면 톡 할게요. 으응. 원하는 대답을 얻은 연준은 도로 눈을 감았다. 졸리죠? 귓불을 만지는 손길이 느릿해졌다. 아니. 듣고 있어. 자는 거 아니야. 졸음 가득한 목소리.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예쁘게 봐주기로 했다. 연준을 도로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괜찮아요. 자도 돼. 피곤하잖아. 8시 전에는 안 나가죠? 어엉. 그럼 오늘 오후에 나가? 아니. 10시에는 가야지. 왜 그렇게 일찍 가? 시사는 강 피디 답사 다녀오면 본다면서요. 꼬물거리는 몸을 끌어안은 채로 수빈이 물었다.
“예고 편집이 좀 덜 됐어. 승택이가 한 거 다시 손봐야지.”
“뭐야 왜 그렇게 일찍 가? 시간 좀 내줘요. 오랜만인데.”
“지금을 즐겨.”
“비싼 남자네, 최 피디님.”
연준이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손을 뻗어 마치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것처럼 수빈의 턱을 살살 만졌다.
“그러는 최 피디도 만만찮아. 오후에 다시 나가지?”
“어떻게 알았어. 완전 귀신이네.”
“척하면 척이지.”
얼마 못 자니까 빨리 와. 연준이 제 가슴팍을 툭툭 쳤다. 형이 안아줄게. 수빈은 군말없이 몸을 숙여 연준의 품에 파고들었다. 불편하게 웅크린 자세도 마다치 않고. 근데 진짜 오랜만이네. 뒤늦게야 존재가 실감 났는지 등을 토닥이는 손이 느릿해진다. 연준은 몸을 숙여 수빈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자기야 보고 싶었어. 진짜. 나도 보고 싶었어. 진짜. 귀여운 말장난 때문에 웃다가 금세 입술이 맞붙었다. 이불을 끌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얽히는 다리에도 온기가 엉겨 붙는다.
따듯해. 응. 따듯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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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핫. 아니 잠시만요! 뭐합니까!? /
연준은 무료한 표정으로 엔터 키를 몇 번 눌렀다. 몇 번째 같은 장면만 다시 돌려보는 중이었다. 이 부분 넣을까. 말까. 수십번도 더 본 장면이라 더 이상 객관적일 수가 없었다. 클릭 몇 번으로 날리기엔 시간을 꽤 공들인 부분이었다. 찍을 때도 편집할 때도. 미치겠네. 답답한 마음에 숨을 짧게 내쉬었다.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홀짝였다. 딸깍딸깍. 와하하. 하핫. 아니, 잠시만요! 오디오를 가득 채우는 웃음소리에 동조할 법 하건만. 연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뒤로 편집할 게 차고 넘쳤는데. 뇌는 까맣게 그을린 프라이처럼 탄내가 진동했다. 와. 진짜 한계다. 뭐가 웃기고 안 웃긴지 모르겠다.
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는데, 익숙한 카톡음이 울렸다. 카톡. 카톡. 카톡. A4용지들이 빈틈없이 깔린 책상 위로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찾았다. <수비니비니♥> 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형 저녁 먹었어?]
[난 이거 먹었어요 지금 후식으로 식혜 마시는 중]
[사진]
접시 가득 푸짐하게 담은 음식 사진. 연준이 소리 내 웃었다. 좋아하는 거만 먹었네. 수육. 떡볶이. 잡채. 사진을 확대해가면서 천천히 메뉴 하나씩 보는데 전화가 왔다. 어, 윤 작가 무슨 일이야. 스케줄 겹쳐? 어디? 응. 내가 홍 피디한테 잘 말해볼게. 지난번처럼 사녹 미리 떠줄 거야. 내일 아침에 전화해서 부탁하지 뭐. 이미 확정된 것처럼 굴었지만, 이번에도 홍 피디가 스케줄을 빼줄지가 의문이었다.
매니저님이 이번 주가 봄 특집 편이라고 뮤뱅쪽이 먼저라고 하시던데요. 타 그룹이랑 듀엣 무대도 있고 미리 연습실에서 녹화 떠 놓은 것도 많대요. 어쩌죠? 이미 저희 쪽에서 이번 주 출연 확정 기사 내보냈고. 공식 트위터 계정으로 <휴닝카이의 복불복 운명은> 투표도 아까 저녁에 올렸는데!
전화를 끊었는데도 윤 작가 특유의 쨍한 목소리가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최 피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이렇게 멋대로 스케줄 빼달라고 하는 거 진짜 곤란해. 정말 마지막이라며 쓸데없이 단호했던 홍 피디 목소리까지 떠올랐다. 아. 지난번도 같은 건으로 겨우 사바사바 했는데. 연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고개를 푹 숙여 테이블 위로 얼굴을 올리자 테이블 가득 늘어놓은 대본이 힘없이 얼굴 모양대로 구겨졌다. 아. 이 판국에 졸리기까지 했다. 눈치도 없이 찾아온 졸음과 겨우 사투를 벌이다 말고 날카롭게 울리는 벨 소리에 데인 듯 화들짝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여보세요? 최연준입니다. 발신자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형? 익숙한 목소리에 잔뜩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풀었다. 어어. 자기야. 뭐해요. 바빠?
- 전화도 안 해줄 거면 답장이라도 좀 해줘요. 비싼 남자야.
“어? 아니 그게! 뭐 먹는지 보고 있는데 윤 작가한테 전화 와서.”
- 편집실이에요?
“응. 지금 열심히 일하는 중이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대놓고도 곧장 사과했다. 그래도 미안. 귀여운 사과에 수빈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고. 맛있는 거 먹었던데? 식혜까지 먹었어? 풀어진 분위기를 틈타 자연스레 질문하자 물 흐르듯 대화가 이어졌다. 어. 오늘 밥차 후식까지 풀코스로 장난 아니에요. 연준은 편집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당 충전 제대로 했네. 바퀴 달린 의자가 살짝 뒤로 밀려나 벽에 톡 닿았다.
- 이제 쓰러 가야지.
“촬영 몇 시까지야?”
- 오늘 밤새요.
또? 연준이 늘어진 몸을 일으켜 앉으며 물었다. 응. 조금 있다가 추격신 찍으러 가. 대교에서 한다고 했던 거? 응. 한강. 허가 겨우 난 거라며. 안 그래도 스케줄 타이트하다고 영호 선배 스트레스 장난 없어요. 고생하겠네. 연준이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괜찮아요. 수빈의 목소리가 제법 비장했다. 연락 안 될 거야, 아마. 괜찮습니다. 애초에 될 거라는 기대도 안 했습니다. 연준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미리 보고 하는 거예요. 죽은 거 아니라고. 형은 오늘 밤새겠네.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던 연준이 몸을 세워 앉았다. 어떻게 알았어? 놀란 목소리로 묻자, 수빈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최종편집하는 날은 항상 밤새잖아요. 저녁은 먹었어? 어. 대충. 아까 범규가 사 온 빵 좀 먹었어. 핫바도 먹고.
- 뭐야 제대로 안 먹었네? 빨리 가서 저녁 먹어요.
“....코너 두 개나 남았어. 이것만 하고, ”
- 일단 먹고 해. 커피도 그만 마시고.
연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얘 어디서 나 관찰해?
아냐. 난 먹을 자격 없어. 수빈과 통화하느라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현실이 슬그머니 수면 위로 올랐다. 편집. 캐스팅. 다음 주 여행지 자료 검토. 새로 선보일 복불복 게임 시뮬레이션까지.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건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연준이 넋 나간 표정을 했다.
- 자격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왜 자꾸 굶어. 문장 끝에 차마 갈무리 못한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뭐가 됐든 한 번 맘 먹은 일을 시작하면 꼭 끝장을 봐야만 다른 게 눈이 들어오는건 타고난 성정이었다. 고칠 수도 없는. 연준의 그런 악바리 같은 면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곁에서 챙겨줄 수 없으니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싸우긴 또 싫어서 수빈은 답답하게 꽉 막힌 한숨만 흘렸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전에 비슷한 문제로 싸우기까지 했으니 말 다 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연준이 급히 타이른다. 알았어. 먹어. 먹으러 갈게.
- 누구랑요.
“누구긴. 범규. 내가 일 잔뜩 시켰어. 옆에서 울면서 편집하고 있을걸?”
- 최범규 있어요? 알겠어요.
저녁 먹으면 사진 찍어 보내줘요. 촬영 끝나면 확인할 거야. 무섭지도 않은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가 금세 다정함을 되찾는다. 알겠어. 몸조심하고. 괜히 나서서 먼저 하겠다고 하지 마. 왜. 언제는 현장에서 몸 사리는 애들 제일 싫다면서요. 제일 싫지. 그래도 넌 사려. 연준의 단호한 목소리에 또 한 번 실없는 웃음이 터진다. 웃지 마 진짜야. 넌 사려. 알겠어요. 또 다치지 말고. 그럼요. 하여튼 대답은 잘해. 생각보다 길어진 통화에 뜨끈해진 귓가를 생각 없이 꾹꾹 누르던 연준은 약속한 것과 다르게 자리를 고쳐 잡았다. 이거만 끝내고 먹자. 마우스를 딸깍이면서 편집점을 찾는 눈이 분주했다.
일 좀 하나 싶더니. 전화를 끊은지 10분도 채 안 되어 편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건 범규였다. 피곤한 얼굴에 불만스러움이 가득했다. 범규 역시 내년 입봉을 앞둔 짬밥 다 적립한 조연출이었다. 아니꼬운 표정을 마주한 연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오프닝 수정하라는 거 다 했어?
“아뇨. 지금 그거보다 훠얼씬 중요한 게 있다네?”
“그게 뭔데?”
“제가 누구님 저녁 좀 먹이라는 심부름을 받았거든요.”
“누구한테.”
“누구겠어요. 최수빈밖에 더 있어?”
범규는 눈을 흘겼다.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 한쪽만 삐쭉 끌어올린 입꼬리가 가관이다. 야, 최수빈이 뭐냐. 그래도 수빈이가 형인데. 멋쩍은 마음에 호칭을 지적하니 생일이 지나서 동갑이란다. 입사 동기인데다가 생일도 3개월 차이밖에 안 나고. 이건 뭐 거의 친구죠.
“일어나요. 밥 먹은 거 인증샷 찍어 보내래.”
하여튼 극성이야. 범규는 참을성 없이 연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아, 형 빨리! 예능국 콩가루라는 소문은 분명 내일이 없는 최범규 때문이다. 수빈의 호칭을 챙겨주기엔 제 밥그릇 챙기기도 바쁘지 싶다. 범규의 손길에 연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만 이거 좀 하고. 아, 안돼 안돼! 그러니까 누가 내 이름 팔래요? 빨리 가요. 나 비싼 거 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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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절할 것 같아.”
“....많이 아팠어?”
“너 왜 그렇게 힘이 좋냐.”
이틀 밤 샌거 맞아? 어? 연준이 베개에 묻고 있던 고개를 겨우 들어 올렸다. 수빈은 대답대신 연준의 허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눌렀다. 혼자 뭐 하고 다니길래 그렇게 힘이 넘쳐. 뭐 맛있는 거라도 혼자 먹어? 새침한 표정을 마주한 수빈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 표정이래. 혼자 장어라도 먹었을까 봐? 아니, 뭐. 연준이 입술을 비죽였다. 저 원래 하체 힘 좋잖아요. 뻔뻔한 목소리에 연준이 동조했다. 그건 그래.
둘 다 똑같이 체력 깎아 먹었는데 수빈은 자진해서 애프터케어를 해주겠다며 나섰다. 그 모습이 괜히 예뻐보여 연준은 허리를 정성스럽게 마사지하는 손을 끌어다가 입을 맞췄다. 쪽쪽. 손바닥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다정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진 연준이 제법 아저씨 같은 감탄사를 뱉어냈다. 아이고오 좋다. 맹하게 풀어진 표정을 마주한 수빈이 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좋으세요. 최 피디님? 어어. 좋아. 수빈은 꾹꾹 누르는 손에 힘을 줬다. 식탁에서부터 옷 벗어 던질 기세로 서로 눈치 보느라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게 마음에 좀 걸렸다. 근데 형 배 안 고파?
“어? 어. 나 배고픈 거 같아. 피자 먹을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네.”
연준이 스프링처럼 몸을 발딱 일으켜 몸을 돌려 누웠다. 동그랗게 뜬 눈이 반짝였다. 피자 먹자 우리. 고개를 끄덕인 수빈은 금세 배달앱을 켰다. 다른 한 손으로 연준의 옆구리를 살살 쓸어내렸다. 늘 먹는 거요? 침대에 발라당 누워 다리를 동동 굴리던 연준이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으응. 치즈 크러스트로. 시켰어요 40분 정도 걸린대요. 연준은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등에 벽이 닿았다. 옆자리를 톡톡 치는 손길에 수빈이 누웠다.
“피자 시켰으니 예뻐해 주겠어.”
“뭐야. 피자 사줘야 예뻐해 주는 거야?”
야박하시네. 아주 자본주의 사회의 표본이야.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이마를 꾹꾹 누른 연준이 킬킬 웃다 말고 입술을 모아 허공에 뽀뽀하는 시늉을 했다.
“멀쩡한 입술 두고 왜 거기다가 해요.”
예뻐해 준다면서.
어정쩡하게 앉아있는 얄쌍한 다리를 잡아 밑으로 훅 끌어당긴 수빈이 침대 위로 발라당 넘어진 연준의 품에 안겨들어 쉴 틈 없이 입을 맞췄다. 정신없이 얼굴 이곳저곳 가릴 것 없이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 연준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폭격기처럼 내려앉는 입술 중 어째 쓸만한 게 하나 없이 죄다 불시착이다. 너야말로 멀쩡한 입술 두고 왜 거기다가 해. 눈을 가늘게 뜬 연준이 손을 뻗어 수빈의 볼을 꼭 잡아당겼다. 쪽쪽. 여기거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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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의 시작은 예능국이었다.
처음 배정받은 프로에서 1년 차 선배인 연준을 만났다. 연준은 막내 타이틀을 벗었다며 싱글벙글이었다. 수빈의 손을 꼭 붙들고 막내 생활 힘든 게 있으면 제가 도와주겠다며 사람 좋게 웃었다. 묘하게 웅얼거리는 말투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막내라는 이유로 둘은 자주 묶여 잡일을 도맡아 했다. 입사 후 죽어라 일만 했다. 말 그대로 일만.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아주 정직한 생활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딩때도 안 이랬는데. 수험생보다 더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하루 일과가 눈물 나게 투명했다.
아침 먹고 편집. 점심 먹고 편집. 저녁 먹고 편집.
바람이라도 쐴 겸 편의점 의자에 앉아 저녁을 먹는 게 당시 삶의 낙이었다. 불빛도 안 들어오는 편집실에서 9시간이나 쌔빠지게 일하고 먹기엔 초라하기만 한 사천 원 짜리 도시락도 맥주 두 캔이면 이게 인생이지 싶었다. 맞은편에 앉아 아사히를 홀짝이는 연준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예뻐 보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 피디 난 이상하게 외제 맥주가 더 맛있더라. 비싸니까 그런가? 수빈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올린채 웃었다. 연준이 잘 마시기에 따라 마시기 시작한 아사히를 홀짝이면서. 삶이 팍팍하면 사랑 같은 건 못 할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가 보네. 숨 돌릴 틈이 생기면 그 시간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연준이라는 게 좋았다. 계속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좋아해요.’
‘....어?’
그러니 일 년이나 지나 터져 나온 고백이 실수일 리가. 제가 선배 좋아한다구요. 사전답사차 방문한 유명한 조개구이집에서 미쳤다고 소주를 까마신 그 순간부터 몽글몽글 마음이 풀어진건 사실이지만, 수빈의 고백엔 목적이 분명했다. 짠내가 나는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파란 머리칼. 조개 특유의 고소한 냄새. 지글거리는 소리. 매캐한 연기. 전부 마음을 자극하는 것밖에 없어서.
‘선배. 나랑 연애할래요?’
가게 앞에 묶여있는 누렁이가 컹컹 짖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렸지만 수빈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 들리지 않았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마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노이즈 캔슬 버튼을 눌러놓은 것처럼. 연준이 만들어내는 소리만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시멘트 바닥에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멈추고 놀란 얼굴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수빈은 잔뜩 헝클어진 연준의 파란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
‘너 나 좋아해?’
왜? 뭘 보고?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고백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것도 딱 수빈이 아는 최연준이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기억 안 나요. 그냥 언젠가부터 예뻐 보이던데요. 아니 그냥이 어딨어. 연준은 애매한 걸 싫어했다. 수빈은 고민했다. 그저 어느 순간 늘 함께있는 사람이 다른 의미로 소중해졌음을 알아차린건데. 언제라고 딱 정의하자니 막막했다. 음. 우리 편집할 때 파일 변환하고 그림 모으고 자료화면 검토하고 막 그러다 보면 새벽 다섯 시잖아요. 어, 그치. 그 이른 새벽에도 옆에 있는 게 선배여서 좋아요. 막내랑 새 봤는데 선배만큼 안 좋았어. 연준은 하하 웃었다.
그래. 하자. 연애.
“근데 우리 그날 그러고 숙소 들어가서 일 하지 않았냐?”
“당연하죠. 아마 밤 샜을걸?”
우리 그날도 밤 샜어? 장난 없네. 연준은 캔을 입가를 대고 흐흐, 웃음을 흘렸다. 사실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이었다.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이기엔 둘 다 닳고 닳은 나이기도 했고. 현실은 무심하리만큼 늘 굴러가던 대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면 그렇지 뭐. 둘은 늘 그렇듯, 눈에 불을 켜고 자료 조사를 했고. 수북한 자료를 들고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 촬영 보조를 하는 와중에 밤잠 쪼개가며 죽어라 편집을 해야했고. 방송이 송출되면 쉴 틈도 없이 곧장 다음 촬영 준비를 했다. 쳇바퀴처럼 여유 없이 바쁜 하루에도 옆을 보면 연준이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면, 몰래 쳐다보다 걸리면 물음표 가득한 표정이 아닌 예쁘게 웃는 표정으로 돌아본다는 것 정도. 물론 캄캄한 숙직실에서 몰래 입 맞추는 일도 생겼지만.
“뭐야. 우리 처음엔 무드가 한개도 없었네.”
연준이 킬킬대며 중얼거렸다. 처음엔이요? 지금은 있나? 수빈은 해탈한 표정을 했다. 어쭈. 이게 무드 아니면 뭐야. 연준이 반쯤 비운 캔을 살살 흔들었다. 어? 사랑하는 우리 님과. 맛 좋은 맥주랑. 시원한 바람 솔솔 들어오는 베란다가 있는데 말이야. 습관처럼 입술을 쭉 내밀고 턱짓을 한 연준이 혀로 딱 소리를 냈다. 로맨틱한 저 빗소리는 보너스. 그것도 안 먹히는 것 같으면 미니 리퍼턴 러빙유나 틀어봐. 없던 무드도 생긴다. 랄라라라라라 러어빙 유우. 누가 예능 피디 아니랄까 봐. 쭉 내민 입술을 슬쩍 밀어낸 수빈이 웃었다. 뭐예요, 진짜.
“어? 알지. 뽀샤시 효과 주고 러빙유 48초부터 틀면 그대로 연애 플래그 꽂는 거야.”
“일벌레인 거 티 내요? 초 단위로 기억하고 있어.”
“이거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최 피디도 알잖아!”
편집할 때 그 노래를 좀 써먹어? 모를 수가 없지. 설마 잊었어? 지금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최 피디 뿌리는 예능국이라는걸 잊지 마. 어? 알겠어!? 우리 예능국을 잊으면 안 돼. 연준이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 그거 아니면 나빌레라. 연준이 손바닥을 모아 짝 쳤다. 그게 약간 우리 감성인데.
“나빌레라? 장난해요? 그게 언제적거야.”
“왜 너무 옛날이야?”
“<사랑을 그대 품안에> 오프닝 곡이거든요.”
심지어 차인표 신애라 결혼하기 전에 나온 드라마라고. 선곡이 왜 이렇게 올드해요.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장난스런 목소리에 연준이 불만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그럼 젊으신 최 피디가 대신 선곡해보시든가. 원스 나온 거요. Falling Slowly. 최신 곡인데 아시려나. 뭔 소리야. 그 영화 내가 대학생 때 봤는데? 그것도 15년 전 영화다, 야. 연준이 웃으면서 일갈했다. 취기가 오른 붉을 불을 꾹꾹 눌러내렸다. 하여튼 최수빈이 진짜.
“겨우 한 살 차이로 젊은 척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래도 난 아직 초반인데? 형은 꺾였잖아.”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죽여 말어? 진지하게 고민하는 험악한 표정의 연준을 두고 수빈의 눈가가 휘었다. 아이고 어르신. 놀릴거리 하나 잡았다는 표정이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전에 백터맨이 더 재미있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진짜 이러실 줄은 몰랐어요. 나빌레라라뇨. 가슴팍으로 날아든 주먹에도 수빈은 계속 웃기만 했다. 어쩜 우리 형 손에 힘도 없네. 어깨를 살살 쓸어내린 수빈이 자연스레 연준을 품에 끌어당겼다. 어정쩡하게 품에 안긴 연준은 혀를 찼다. 저리 비켜. 혀어엉.
“소용없거든. 이제 와서 애교야.”
“에이. 아니에요.”
수빈이 익숙한 손길로 연준을 달랬다. 장난친 건데. 삐지지 마요. 연준은 뚱한 표정을 유지했다. 맥주 좀 더 가져와 봐 그럼 봐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고. 불퉁한 목소리에 수빈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예예,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얼른 다녀오거라. 짐이 많이 목이 마르다.
연준은 베란다 밖을 내다봤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기분이 좋았다. 만족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리를 끌어모아 팔로 감았다.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로 창문가에 붙은 물방울을 따라 고개를 갸웃 숙였다. 그 순간, 겨울에 자주 쓰는 빨간색 체크무늬 담요가 등을 휘감았다.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 어? 연준이 어깨를 더듬거렸다. 당황한 연준 앞에 맥주를 대령한 수빈은 방황하는 손을 잡아 캔을 손수 쥐여주었다. 짐이 잘 마시겠네. 연준이 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내일 저녁 촬영이라고 엄청 달리네. 응? 이제 겨우 3캔인데? 하나 더 마실 거야. 그래요. 수빈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준의 어깨를 슬슬 쓸어내렸다. 무리하지 않는 거면.
“내일 해장한다고 일찍 일어나겠네.”
“자기는 언제 나가. 아침에 나가는거 아니지?”
“9시 전에. 형 밥 먹는 거 보구요. ”
얼굴은 보고 나가겠네. 뭐야. 진짜 아침 촬영이야? 연준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응. 서울역에서 하나 찍고 부산 내려가야지. 담담한 수빈에 목소리에 연준이 허리를 바짝 세워 앉았다. 아니, 야. 나 막 지른건데. 너 지금. 아침 촬영이면 말을 했어야지! 지금 11시야! 수빈은 부산스럽게 몸을 들썩이는 연준의 팔을 부드럽게 끌어당겨 도로 자리에 앉혔다. 괜찮아요. 12시 전에만 방에 들어가면 돼. 마저 마셔요. 계속 맥주 마시고 싶다고 노래 불렀잖아. 뭐래 그 정도는 아니거든. 수빈이 팔을 뻗어 툴툴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품에 끌어안고 살살 쓰다듬었다. 그럼요. 그럼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만 같은 말투에 연준은 매번 할 말을 잃는다. 허. 허. 헛웃음을 흘리는 축 처진 눈꼬리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진짜 괜찮아요. 담요 안으로는 살짝 찬 손을 꼭 잡는다.
“안 추워요? 담요 하나 더 있는데 가져다줄까?”
다정한 걱정도 잊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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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발을 들인 수빈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이불 사이로 얇고 길쭉하게 쭉 뻗은 하얀 다리.
“왔어?”
“....혀엉.”
“어쭈 술 많이 마셨네.”
수빈이 발을 질질 끌고 침대로 다가갔다. 냄새날 텐데. 반쯤 남은 이성으로 걱정은 하면서도 금세 침대 바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 침대맡에 앉아있는 연준과 눈을 마주친 수빈의 눈이 예쁜 모양으로 휘었다. 가만 앉아만 있는데도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얼마나 마셨길래 이래. 수빈은 드라마 첫 방 기념으로 제작자 측에서 준비한 회식에 참석했다. 사실상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연준이 턱을 살살 만지며 물었다. 몇 병 마셨어? 으음. 모르겠어요. 야. 그걸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연준은 웃으면서 타박했다. 수빈은 기분이 좋은 듯 가만 눈을 감았다. 어이고? 좋단다. 응. 형이 만져줘서 기분 좋아요. 부드러운 손길을 따라 더 만져달라며 수빈이 고개를 푹 숙인다. 얼마 전 호기롭게 염색하겠다더니.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머리칼이 죄다 딱딱해졌다. 다행히 평소와 같이 아침 인사를 하며 머리칼을 만진 연준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곧장 트리트먼트 몇 가지를 챙겨주긴 했지만. 그 후로 시키는 대로 최대한 관리를 잘했는지, 보라색 머리칼이 윤기 있게 찰랑거렸다. 촬영 시작 전만 해도 머리칼이 짧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언제 손에 가득 차게 됐을까.
“최 피디.”
“으응. 네.”
“첫 방 8프로 축하해. 반응 좋던데?”
봤어요? 그럼 당연하지 첫 방인데. 알콜에 절임 당한 뇌로 대답을 곱씹던 수빈이 뒤늦게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난 첫 방이라고 술 먹었는데. 어쩔 수 없었어. 알잖아. 먹고 싶어서 마신 거 아닌 거! 수빈이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취해서 애교가 늘었다. 연준이 괜찮다는 듯 계속 머리칼을 쓸었다. 알아. 알아. 수빈이 어린애처럼 굴 때. 연준은 더 놀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꼭 지금처럼.
“그래서 내가 대신 본방 사수했잖아. 이 주정뱅이야.”
“에이, 주정뱅이는 아니다아.”
“씻지도 않고 이러는 게 주정뱅이라는 증거야.”
저기요 최정뱅이씨. 씻고 오시죠? 얼른 자게. 단호한 목소리에 수빈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다 말고 몸을 일으켜 연준의 품에 포옥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생각지도 못한 무게에 그대로 침대에 눌린 연준이 결국 웃음을 터트리며 익숙하게 힘을 풀었다. 수빈은 제 덩치를 생각 못 하고 안겨드는 버릇이 있었다. 몰라요. 주정뱅이여도 예뻐해 줘요. 수빈은 맨들거리는 얼굴에 입술을 마구 내렸다. 목이 늘어진 티 덕분에 훤히 드러난 흰 목덜미에도 가볍게 쪽쪽. 연준은 몸을 살짝 움츠리며 킬킬댔다. 예뻐. 우리 수빈이 예쁘지. 졸린 목소리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나 조금만 이러고 있다가 씻을래요. 냄새 많이 나? 아니. 하나도 안 나. 괜찮아.
이틀 밤새고 고기 먹고 왔는데?
괜찮아. 예쁘니까 봐준다.
우리 형 나 많이 사랑하나 보네.
그걸 이제 알았어?
Love Is So Nice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