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게
w. PEACE
언제 즈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를 생각하면 후회가 많은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생각해오던 말. 이제 즈음 지겨울 법도 한데, 너를 만나고 벌써 10년이 지나버렸는데도 매일같이 너를 떠올리다니.
시간이 약이라고 했다. 사실 그 말을 믿지 못하다가, 그 사람을 말끔히 잊지 못했음에도 이제 즈음 입꼬리를 당겨 웃을 줄도 알았다. 최근에서야 알게 된 나의 웃는 얼굴을 거울로 보니 꽤나 낯설었고 시간이 약이라며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들기던 최범규의 말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나는 웃을 때 이런 모습을 하는 구나. 여전히 어딘가 씁쓸한 입안이 매우 텁텁하다는 걸 느꼈다. 언제 즈음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지만 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답답했다. 왜 항상 남겨진 사람만이 괴로움에 허덕이는지, 잊으려고 허덕이는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이 곳의 날씨는 따스한 듯 하지만 꽤나 후덥지근한, 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점차 쌀쌀해지고 있는, 겨울이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가을 날이었다. 그와 헤어진 건 오래 전, 기억에 남아있던 너의 잔상이 조금씩 아득해지기 시작하는, 나는 머나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벌써 10년이나 지난 날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10년 전의 기억들은 괴롭고, 불안한 내 자신이 어떻게든 지워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들이다. 사람은 본디 불안함 안에 갇히게 되면 진실을 왜곡하게 되고, 삭제하는 등 어떻게든 잊으려고 애를 쓰니까. 왜곡되고 삭제되는 기억은 그마저도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대로 짜집기를 하여 합리화시켜 버린다. 대학교를 다닐 적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면서 배운 인간의 심리, 전공서적 한 켠에 작게 써놓은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예시, 연준이 형에 대한 나. 내 스스로 생각하는 그 심리의 사례는 바로 내 자신이 되었다.
누구나 한 번 즈음 꿈꾸는 대학 캠퍼스에서의 생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대학 생활에 그 어떠한 로망도, 낭만도 품은 적이 없었다. 정말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공부도 나름 중간은 했으니, 이만한 대학에 온 거라고 생각하며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랫집 엄마 친구 아들은 재수한다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던데, 좋은 대학은 아니더라도 제때 고만고만한 대학에 온 것이 어딘가 생각이 되었다. 그만큼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가겠다는 의지도, 노력도 없었다.
공부를 왜 하냐고 내게 묻는다면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이 대주시는 돈으로 학원을 다녔으니까, 그리고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남들은 공부를 하고 있다니까. 나도 그런 것이었다. 못해도 남들처럼은 하자는 나의 인생관, 그 안의 나는 조금의 욕심도 없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그 어떠한 욕심을 표한 것 없이.
그런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욕심을 표한 적이 있었다. 어떠한 물건에 애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학교 정문을 통과할 적에 잠깐 스쳐지나간 사람을 보고 강한 이끌림을 받았다.
언젠가 이 강한 이끌림을 떠올리며 친구에게 말해줄 적에 친구 녀석은 뭐가 그리 웃긴 지 낄낄 웃어댔다. 정말 너가 그랬냐며, 거짓말 아니냐며, 꿈이라도 꾼 것 아니냐며 말이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관심을 던진 적 없고, 흘러가는 순리에 몸을 맡기고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관심을 표하는 그 날,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내 뒤를 돌았다.
나를 지나치는 그의 옆모습, 그리고 뒷모습을, 나는 그를 눈으로 쫓았고 멍한 정신으로 인한 머릿속은 사고 회로를 멈춘 지 오래였다. 나의 발걸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했다. 그 길로 다짜고짜 그의 손목을 붙잡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쉽게 이해가 갈 정도였으니까.
“……저기,”
“……”
“혹시 누구…”
이게 그와의 첫만남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이기도 했다.
붙잡힌 내 손목에 의해 엉겁결에 나를 마주한 그 사람의 얼굴에서, 나의 등 뒤로 내려앉던 눈부신 햇살로 인해 아름답게 빛나보였다. 안 그래도 뽀얀 얼굴에 더해진 햇살, 하필 옷도 흰색 와이셔츠, 나는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에 불만 섞인 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건네지 못했다.
강한 이끌림 끝에 무작정 잡은 한 사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느끼지 아니했다 하여도, 운명을 느껴본 적도 믿어본 적도 없는 나는 적어도 이를 운명이라고 느꼈다. 한편 할말이 있는 것처럼 저를 붙잡아놓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손목을 꼭 붙잡은 내 손을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안간힘이었다.
“죄송하지만 아파요.”
얕게 인상을 쓰며 내 손을 떼어내던 그, 좁혀진 미간과 일그러진 인상을 보고 나는 그제서야 손목을 놓아주었다. 놓아준 손목이 허공을 타고 아래로 툭 떨구어지고, 남겨진 내 손은 아쉬움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한다. 내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니, 그는 곧 자유로워진 손목을 부여잡았다.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미안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나의 손아귀에 붙잡혀 이리저리 쓸린 그의 손목이 얕게 붉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원래 이러시나요?”
원래 이렇게 모르는 사람 막 붙잡냐구요.
따져야겠다고 생각한 그의 입술이 부리를 만들고 내게 물었다. 손목을 보고 곧바로 사과를 건넸지만 그는 화가 단단히 난 듯 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장황하게 변명을 늘여놓을 것도 없는데, 머릿속에는 어쩐지 횡설수설 변명거리만 떠오른다. 그에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지워냈다. 정말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전혀 아니었어요. 연신 사과의 말만 내뱉었다. 그러자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있던 그는 어디론가 휙 떠나버렸다.
허망하게 그를 그냥 보내버렸다. 뒤로 돌아 원래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가는 그를 말이다. 급했는지 뽈뽈 걸어가는 다급한 뒷모습을 보니 더욱더 붙잡지 못했다. 많이 바빴나보다.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난 건가. 갈수록 미안한 마음이 태산이었다. 멀어지는 그가 한 줌의 점이 되어 보일까 말까 할 때 즈음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버스 번호를 보니 제가 사는 쪽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먼 곳에 사는 걸까.
그렇게 한참을 서있다가 단어 하나를 작게 곱씹었었다.
“…운명,”
맞을까, 운명.
맞다면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다. 사실 다시 만난다고 하더라도 딱히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우연이라도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마주하고 싶었다.
.
.
.
.
그래서, 운명이 맞았느냐고?
당연하다.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그를 만났으니까.
다시 만나는 그 날을 계기로 우리는 운명의 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으니까.
운명이 운명을 맞던 그때
W. PEACE
꽃다발을 품에 안고 옛날을 회상하다 드디어 도착지에 발을 내딛었다.
[ 추모 동산 ]
입구 앞에 세워진 큰 비석에 쓰인 네 글자를 보고 작지만 깊은 숨을 내뱉었다. 하, 그 숨을 길게 내뱉고 나니 낯익은 옥죄임이 나를 반겼다.
무언가가 목을 옥죄는 듯 답답했던 것이 요 근래 들어서 조금은 풀렸다. 그래서 그리 크지 않은, 작은 꽃다발을 품에 들고 이곳에 도착했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운명을 맞아 하늘의 천사가 되어 올라간 지 1년이 되고서야 찾아왔던 이 곳,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나는 이곳을 다시 찾았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정말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그냥 시간에 의해 조금 무뎌진 것일 뿐 괜찮아진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동산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도착하자마자 간만에 찾아온 이 낯익은 옥죄임이 나의 숨통을 갑갑하게 조이는데 딱 죽을 맛이었다.
“야, 최수빈.”
미간을 좁히며 이만 동산 한 곳에 위치한 납골당으로 향하려는데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와본 적이 딱 한 번뿐인 이 장소, 그래서 낯설 기만한 장소이지만 귀에 와 닿는 그 목소리는 굉장히 익숙했다.
“뭐야, 너도 왔냐?”
“당연하지. 설마 안 오겠냐?”
오늘 형 기일이잖아.
기일, 그 한 단어를 듣자마자 얕게 웃었다. 그래, 오늘이 바로 그 날이지. 애써 웃어보려고 하지만 결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던 나는 최범규 덕에 납골당에 위치한 그의 유골을 단번에 찾았다. 사실 헤맬까봐 걱정했는데, 평소에 저를 놀려먹는 것에 재미 들린 원수 같은 최범규를 만난 것에 어쩌면 감사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제 눈높이에 위치한 칸, 그 안에는 화장된 그의 유골함과 양 옆에 위치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놓인 여러 사진들, 그리고 작은 물품들. 벌써 몇몇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작은 꽃다발 몇 개가 붙여져 있었다. 형 지금 기분 완전 좋겠네. 내 말에 최범규는 대답했다. 이렇게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아서, 정말 기분 좋겠다. 최범규의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어떻게든 대꾸를 해주어야 하는데, 입에 풀이라도 발라놓은 것 마냥 꾹 다물려서 움직이지 않는다.
“벌써 10년이나 지났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그치?”
“그래, 아주 빠르지.”
“10년 전이라. 그때에 비하면 우리는 벌써 졸업도 하고, 취업도 해서 돈도 벌고. 얼떨결에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매달고 사회초년생 노릇했었는데, 이제는 어디 가서 아저씨 소리 듣는다니까? 삼촌 소리 들으면 다행이야.”
그 말에 묘하게 공감이 가서 씨익 웃었다. 맞아, 삼촌 소리 들으면 다행이지. 납골당 안이라 크게 웃고 떠들지는 못하고, 소곤소곤 속삭이지만 특유의 소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형의 유골함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고 품에 들고 있었던 꽃을 예쁘게 붙여주고는 이만 자리를 뜬다. 형, 나 갈게. 준비한 말들은 굉장히 많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간단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최범규와 함께 납골당에서 나오니 확실히 자유롭다. 목소리를 낮게 하여 속삭이지 않고, 평소처럼 대화하듯 그냥 얘기를 주고받으니 편했다. 오고 가는 얘기 중에 그렇게 특별한 건 없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는 세월의 흐름에 탄식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때가 조금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는 말. 이런 이야기를 매번 주고받지만, 같은 대학교 동기여서 그런지 만나면 이런 말들만 할 줄 안다. 그렇다고 주제를 바꾸어 대화를 해보자니 서로의 최근 근황을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매번 주고받는 이야기, 매번 떠올리는 그때,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우리는 대화를 짧게 하고 이만 각자가 몰고다니는 차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대학교 다닐 적에는 운전면허증 하나 따는 게 그리 어려워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지만, 이제는 그리 좋은 차는 아니지만 잘만 굴러가는 중고차를 사다가 자가용으로 몰고 다니는 ‘어른’이 되었다.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빼어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기어를 넣는 반대쪽 손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곧 기어를 넣었던 손이 핸들을 조정하고 다른 한 손으로 조수석 쪽 창문을 내렸다. 때마침 창문을 내린 최범규와 손 인사를 하고는 내렸던 창문을 다시금 올렸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멀어지는 추모 공원의 모습을 더는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쉽게 떼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었는데, 사이드미러를 통해 비추어지는 멀어지는 추모 공원을 바라보면 더는 볼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쫓아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무시하고 유턴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수도 없이 생각하며 준비했던 하고픈 말들을 기어코 기억해내어 쏟아부을 것 같아서.
[ 잠시 후, 우회전 입니다. ]
내 상황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모를 내비게이션 안내양은 한없이 친절하다. 내비게이션만 눈치가 없는 줄 알았더니, 마찬가지로 내 마음 같은 건 전혀 헤아릴 줄 모르는 하늘은 오늘따라 더욱 화창한 것 같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나만 빼고 모든 사람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 거.
내가 모는 차는 곳 익숙한 도로를 내달렸다. 오랜만에 이 길을 지나가지만 낯선감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저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그때 많이 갔었던 분식집이 없어졌다며 한탄한다. 신호를 받고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음 신호가 오기를 기다리며, 더운 차 안의 내부를 환기시킬 겸, 창문을 내렸다. 사실 환기시킨다는 것은 거의 핑계나 다름없었다. 무리하게 목을 내빼고(아주 위험한 행동임을 잘 알고 있다) 바깥에 위치한 대학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여기는 안 변할 줄 알았는데…,”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대학가, 예전에 내가 재학하고 졸업했던 대학교의 앞에 위치한 대학가는 내가 알고 있던 모습들과 많이 달랐다. 예전에 자주 찾아갔던 음식점, 그리고 물고기 방, 모두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흘러간 세월만큼 여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구나.
내가 운전석에 앉아서 대학가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왼쪽을 틀었을 때, 반대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변함없는 대학교 정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그대로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추억들의 배경인, 이곳은 여전히.
차 안에 혼자 있으니 속으로 삼켜질 뻔 했던 말들이 혼잣말로 터져 나온다.
그때부터였다. 그때의 향수가 강하게 일어난 것은. 그때의 향수가 내게 훅 끼쳐오면서 깊숙이 숨겨두어 비로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정문에서 형을 처음 만났지, 그리고 이 정문 앞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에서 형이랑 장난도 많이 쳤었지. 자취를 드러낸 기억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떠올리면 괴로울 걸아는 내가 이 기억들을 잊기 위해 자그마치 10년이나 걸렸는데, 이렇게 쉽게 일어나는 기억들에 헛웃음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으면서도 가득 떠오르는 그와의 추억에 잠겨 오랜만에 크게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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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내가 그를 보고 떠올린 단어.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우연이라도 한 번만 더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강하게 이끌렸었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정확하지 않다. 내 옆을 지나간 그 날에, 어쩌면 친구를 만나러 이 대학교에 왔을 수도 있으니 같은 대학교에 다닌다는 확신도 딱히 없었을 뿐더러, 나는 그의 얼굴만 알고 있었을 뿐 이름 석 자를 몰랐다. 그 넓은 대학교에 다니는 많은 학생들 중 그를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마치 사막에서 바늘 찾는 정도랄까. 그런 현실을 마주한 나는 피식 웃곤 했다. 운명은 개뿔, 잠시나마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내가 웃기다면서 말이다.
“신입생 학우 분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 년도 학생회 회장을 맡은….”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얼마 뒤, 나는 정식적으로 입학 절차를 밟고 이 대학교의 재학생이 되었다. 난생 처음 대학교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내가 듣고 싶은 강의를 듣기 위해 수강 신청이란 것을 해보았고, 이제는 선생님이 아닌 교수님과 마주하며 강의를 들었다. 같은 의미이지만 고등학교에서 쓰던 단어들과 대학교에서 쓰는 단어들은 조금씩 달랐다. 앞서 말했듯이 선생님이 아닌 교수님, 수업이 아닌 강의, 숙제가 아닌 과제, 생각보다 많은 말들이 달라짐으로써 대학교에 입학했음을 실감했다.
입학식을 마친 우리는 입학 당일, 선배들이 마련한 개강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실 이런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슬쩍 빠지려고 했는데 명단을 체크하겠단다. 이런 거는 자유로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형식적으로는 자유였지만, 사실상 반강제나 다름없었다.
개강파티가 이루어진 곳은 학교 앞에 위치한 고기 집이었다. 듣자하니 이곳이 가장 맛있다나 뭐라나. 별 흥미 없이 술잔을 받아들고 불판 위에 올려지는 고기들을 보았다. 치이익,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가 맛있게 익어가고 옆에 있던 처음 보는 얼굴의 친구는 대뜸 내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아, 진짜 마시기 싫은데. 1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소주 한 병도 거뜬한 터라, 그 발언을 떠올리자면 조금은 웃겼다. 그렇게 순수할 때도 있었지, 참.
“자, 여러분. 오리엔테이션 때 미션을 주었었죠?”
“네!”
“그때 우리 신입생 학우 분들 사이로 숨어든 노란카드 선배님들이 있다고 했었죠. 혹시 찾으셨나요?”
정중앙에 서서 발언하는 학생회 회장, 그의 질문에 안 그래도 시끌벅적 했던 가게 내부가 더욱더 소란스러워졌다. 대충 누구인지 알겠다며 이름 몇 개를 대는 친구 하나와, 정말 모르겠다며 앓는 소리를 내는 친구 하나, 그리고 단톡방에서 너무 나댄 것 같다며 후회에 쌓인 친구도 보였다. 가게 내부를 둘러보던 회장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함박웃음을 지은 채다.
“자, 여러분. 대충 알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몇몇 보이는데요. 지금부터 손을 들고 맞추면 그 선배와 단 둘이 앉아서 얘기하는 시간을 주도록 하겠어요.”
목소리에 장난기가 다분해 보이는 회장의 말에 옆에 있던 학생회 선배들이 어이없으면서도 웃긴지 포상이 겨우 그거냐며 깔깔거린다. 한편 같은 학번 동기들과도 친해지지 못한 아이들은 선배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거라는 말에 쉽사리 손을 들지 못한다. 그래서 한동안 가게 안에 작은 정적이 일었고, 모두 어떡하냐는 듯 눈치보고 있었다. 뭐야, 아까 알겠다고 한 사람 누구야. 빨리 대충 맞추고 치우지. 테이블 위에 한 손을 올려두고 무심히 턱을 괴고 있던 내가 무미건조하게 속으로 얘기하던 그때였다.
띠링, 가게 입구에 위치한 유리문에 달려있던 종소리가 가게 안을 경쾌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돌아간 고개, 시야의 끝에 위치한 들어오는 한 사람을 스윽 보다가 말던 나는 곧 눈을 키웠다.
“…어?”
그때 그 사람이다.
늦게 와서 죄송하다며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네는 그는 분명,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저 사람이 학과 신입생이라고? 나는 생각 회로를 돌려본다. 분명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던 그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학교를 들어가고 있을 때, 그 사람은 학교 밖으로 나가고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학과 동기는 아니었다.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던 그 와중에, 신입생 사이에 섞여 있었다는 노란 카드 3명 중 2명이 밝혀졌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은 정말 모르겠다며 몇몇 아이들이 불만을 토로한다. 나중에는 찍어서라도 맞추자 싶었는지 생각나는 이름 몇 개를 계속해서 던져보지만 말하는 족족 틀린다. 그때의 나는 저 멀리 자리 잡고 앉은 그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설마, 아주 혹시나 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위로 들어올렸다.
“네, 맨 끝 쪽에 앉은 검정색 후드티 입은 친구?”
모두가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유일하게 든 손, 나의 대답을 기대하는 듯 나를 바라보는 회장, 그의 어깨너머로 앉아있는 그에게 눈을 두며 들었던 손으로 그를 가리켰다.
“저 분이요.”
내가 당당하게 그를 가리키자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배들은 적잖이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누구요? 내가 가리킨 사람이 아니길 바랐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땡을 외치던 회장은 말까지 더듬으며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확실히 대답했다.
“저기 맞은 편 테이블에, 늦어서 죄송하다며 들어왔던 분이요.”
머리는 파란색이고,
검정색과 흰색이 섞인 가로 줄무늬 티를 입고 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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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를 내는 도어락,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온 나는 신발을 벗었다. 불이 꺼진 적적한 방 안은 이제 막 저녁이 되어가는 바깥 노을 덕에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현관을 벗어난 나는 불을 킬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집에서 추모 공원까지 거리가 조금 있었던 터라 피곤했다. 안 그래도 어제 직속상사가 계속해서 일을 미루다가, 끝내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놓으라며 무책임하게 자신한테 던져준 파일 건으로 잠을 몇 시간 이루지 못했다. 그 때문에 더욱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네.
습관이 되어버린 혼잣말, 똑딱똑딱 시곗바늘은 자신의 정해진 길을 따라 바쁘게 달려갈 뿐이었고, 빠른 일몰에 아까까지만 해도 빛이 조금 들어오던 방 안에는 슬슬 어둠이 지기 시작했다.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어두워지는 방 안을 밝게 밝혀줄 형광등을 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방으로 들어가 한 켠에 놓인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캔을 구비해두는 곳을 살폈다. 편의점에서 싸게 행사하기에 옳다구나 몇 개 집어온 것이었다. 벌써 다 먹었네. 그때 분명 6캔 산 것 같은데 지금 손에 쥐어진 캔이 마지막 맥주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손에 쥔 맥주 캔은 소파로 다시 걸어가는 길에 치익 따버린다. 안에 갇혀있던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귓가에 닿자마자 안에 있던 거품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어어, 급하게 입으로 거품을 막아 모두 목구멍 뒤로 넘긴 나는 진정이 된 맥주 캔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아, 맥주 거품 안 좋아하는데.
딴 맥주 캔은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두지 않고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다가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피곤함과 고단함이 섞인 날에 이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씻고, 침대에 누우면 딱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포상이 있을까. 맥주 한 캔으로 잊었던 소소한 행복을 되살린다.
맥주를 한 입을 들이켰다. 알코올이 몸속에 들어오니 아까 지나왔던 대학교 정문과 대학가가 생각난다. 하, 최범규가 10년이 지났다고 했지. 맥주를 뜯고 처음 내뱉는 혼잣말이었다. 어두운 방 안을 보고 이제는 형광등을 켜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탁자에 맥주 캔을 놔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형광등을 키려고 보니 그 앞에 진열해 둔 꽃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니 소소했던 행복은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꽃병에는 아무런 꽃도 없다. 꽃병에 꽂혀있는 것은 오로지 꽃을 감쌌던 화려한 포장지뿐이다.
그렇다면 포장지에 감싸져있던 꽃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시들어서 남겨진 잔해를 치우다보니 어느새 텅 비어버린 꽃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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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고작 몇 잔을 마시고서 알딸딸하게 취해있던 개강파티 날의 나는 옆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다. 그가 노란카드였다는 것을 내가 맞춘 덕에 선배와의 대화 시간이라는 보상을 받아 연준이 형은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주량이 왜 이렇게 약하냐며 연신 나를 살피던 형(나는 아직까지도 그 날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뭐라고 얘기하던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지만 개강파티에서 작은 사고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형은 술에 취한 나를 몇 번이고 흔들어 깨운다.
“…야, 수빈아.”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는 끄덕이면서도 막상 대답은 안 한다. 그를 본 형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것 참 난감하네. 형의 한숨에 멀리 있던 회장이 다가왔다.
“왜 그래?”
“수빈이가 좀 취한 것 같아. 이즈음에 취해보이는 아이들 데려다가 밖에서 바람이라도 쐬게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형의 말에 회장은 그러라며 허락을 내린다. 그러자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안을 주욱 훑었다. 얘들아, 일어나. 분주하게도 움직이는 뒷모습을, 나는 술김에 고개를 꾸벅이다 깨어난 정신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이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아이들을 깨울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을 붙잡았던 걸로 기억한다. 얼마 전, 무심코 그의 곁을 지나가다 강한 이끌림에 홀려 그의 손목을 붙잡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손을 붙잡으니 형은 모든 행동을 멈추고 느리게 뒤를 돌아 나를 마주했다. 당시 내가 형의 손을 잡았을 때의 형 표정이 술김에 기억나지 않지만 훗날 형은 말했다. 술에 취해 붉게 오른 얼굴을 하고 제게 다가와 손을 붙잡는 너를 보고, 일주일 전 지나가다 무작정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던 그 사람과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고.
“…선배,”
“수빈아.”
“연준 선배.”
둘이서 잠깐 나가요. 딱 우리 둘만.
나는 형의 깊은 두 눈동자와 마주했다. 술김에 잠겨있던 나는 그때 마음을 다 잡는다. 어떻게든 형의, 최연준의 곁에 있을 것이라고.
그 날, 술김에 밖으로 나가서 형과 단둘이 걸었던 그 날, 고깃집 옆에 위치한 큰 공원을 돌면서 나누었던 대화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주제 하나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뚝 끊기고, 정적이 길게 이어지다가 다시 주제 하나로 대화하다가 뚝 끊겨버리고. 형과 나의 이야기를 듣던 몇몇 사람들은 술집에서 단 둘이 나가자고 했던 내 발언을 듣고 웃음꽃을 피우다가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웃음꽃을 져버린다. 그게 뭐냐며, 단 둘이 밤을 거닐 때 대쉬든 고백이든 했어야 한다며 아쉬움 섞인 투로 말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 날 형에게 관심 있다는 말 한 마디 정도는 던졌어야 했는데. 우리는 어쩌면 짧은 시간에 결실을 맺을 수 있었음에도 멀리 돌아서 온 것 같다.
그럼에도 그리 크게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술집에 들어가기 전, 형이 넘어질 뻔하여 그를 부축한 적이 있었다. 말이 부축이지, 사실상 내 품에 안기다시피 뒤로 넘어져서 조금 민망했지만.
수빈아, 역시 잔뜩 민망해하며 벌떡 일어나던 형은 내게 고맙다고 말했고,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첫인상보다 다르다고 했다.
이후, 형의 눈에 제대로 뜨인 것인지 지나갈 때마다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형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도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볼 적이면 황급히 눈을 피해버리지만 나는 그걸로도 족했다. 연애란 걸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걸로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바보같이. 내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걸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형은 내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다며 헷갈려 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형의 옆에 있던 학생회 선배들은 말했단다. 원래 헷갈리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너를 진정 좋아한다면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고. 형은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의기소침해져 있는데, 때마침 소문 하나가 귀에 들어왔단다.
“야, 연준아. 우리 동기 중에 되게 별난 여자애 한 명 있잖아.”
“아, 유사희?”
“어, 걔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 찍었다던데?”
“뭐? 저번에 사겼다던 그 선배는?”
“헤어진 지 오래잖아. 몰랐냐? 구라치고 헌팅포차 갔다가 들켰대. 사랑하니까 고쳐보겠다고 말했다던데, 그 성격 어디 가냐.”
와, 대박이네. 연준이 형은 오지랖 넓은 자신의 친구 덕에 학과 내에 굴러다니는 소문들을 다 주워들을 수 있었단다. 그런데 학과 내에 사건 사고가 좀 많아야지, 이번에도 많고 많은 소문 중 한 개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한 개의 소문이 있었단다. 사귀었다고 하면 7일이 최대인 같은 학번 여자 동기, 성격이 별난데다가 소문도 화려하게 많으니 단연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고작 3일 후, 그 여자 동기가 점찍은 신입생이 최수빈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단다.
“수빈아!”
동기에게 소식을 듣자마자 계단을 뛰어내려오다시피 내려온 곳에는, 내 팔짱을 끼고 콧소리를 내는 여자 동기와 난감해하는 내가 있었단다.
“쟤네 진짜 사귀냐? 팔짱 끼고 다 하네.”
“그러게. 야, 남자애 행복해보이지 않냐.”
비꼬는 투로 이야기하며 낄낄대지만 형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소문은 무서웠다. 특히나 학과 내에 도는 소문이라면 더욱더. 꼬인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오지랖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 오지랖이 넓은 이들은 소문에 헛된 바람을 넣는 것에 재주를 보인다. 왜곡된 사실이 마치 진짜인 것 마냥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헛된 소문. 당시의 나도 그랬다. 전혀 관심도 없는 선배와 사귄다느니, 뭣도 모르고 행복해 보인다느니. 멀리서 바라보는 형의 마음은 어땠을지 생각하면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형은 그때를 기준으로 나를 멀리했다. 더 이상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허공을 응시했고, 나는 강의를 듣기 위해 단과대 건물로 들어와 중앙 계단을 이용했다면, 형은 건물 맨 끝 쪽에 위치한 좁은 계단을 이용했다. 그렇게 허무하게 3개월을 날렸다. 정말 과장 하나 안 보태고 형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다. 형은 그토록 철저했다. 나를 만나지 않겠다는 것에.
보이지 않아 멀리서도 바라보지 못하는 나의 운명,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지기도, 헛된 소문에 짜증과 환멸이 나기도 하여 더는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휘말리다니. 여자 선배는 여전히 제 곁을 꿰차고 다니려고 안간힘이었고, 이제는 같은 학번 동기들도 내 등을 떠밀며 그 여자 선배에게 보냈다. 싫다고,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신경질을 부리지만 잘못된 소문을 문 하이에나들은 좋으면서 뭘 그러냐고 말한다.
그러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여 체념하던 어느 날이었다.
“수빈아,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네?”
“누나 어떻게 생각하냐구.”
응? 말해 봐.
기대에 가득찬 선배의 얼굴, 그런데 그녀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가 뛰어가는 걸 보았다. 정말 선배에게 한 톨의 관심도 없던 나는, 내 눈을 뛰어가는 누군가에게 자동으로 빼앗긴다.
그러다 보았다.
“…선배, 정말 미안한데요.”
선배한테 관심 같은 거 없어요.
나를 마주하던 여자 선배를 지나쳤다. 다급했고,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두어야 내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뛰어갔던 그 길을 떠올리며 있는 힘을 다해서 쫓았다. 왜 울어, 울면서 어딜 뛰어가는 거야, 달리다 보니 학교 반 바퀴를 돌던 나는 차는 숨을 가쁘게 고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형,”
어디 있어.
여자 선배의 긴 머리 너머로 뛰어가던 사람은 분명 연준이 형이었다. 다만 울고 있었다. 옷소매로 격하게 벅벅 눈물을 닦아내며 숨을 어디론가 향하는 듯 다급하게 뛰어갔다.
어서 그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급해죽겠는데,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붙잡고 놓아줄 것 같지 않던 여자 선배는 역시나 저를 가로 막았고, 그를 보며 나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관심 같은 거 없다고. 그렇게 내버려두고 간 것이 조금은 미안했지만, 그때는 30분이 넘도록 형을 찾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애가 타, 이대로 말라 비틀어져도 무색하다고 생각했다. 마른 입술을 혀로 몇 번이고 축이지만 애가 타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마른 목은 물을 간절히 원했다.
“연준 선배!!”
그 마른 목으로 형을 찾았다. 큰 소리로 형을 불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나중에는 목이 아파왔다.
일주일 중 수업이 늦게 끝나는 유일한 날, 목요일. 목요일에 수업이 늦게 끝나는 학과는 얼마 없어서 한산한 학교 내를 계속해서 달렸다. 형을 찾겠다는 집념 하나 만으로. 타는 목으로 목청껏 형을 불러보았지만 왜인지 형이 보이지 않았다. 하, 어떡하지. 힘들고, 숨은 차고, 목은 아프고. 애꿎은 건물 벽면을 발로 세게 찬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여 이도저도 못하던 나, 그러다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어지던 그 날, 개강 파티 때 잠시 술집을 나와 단 둘이 걸었던 그 날을 떠올렸다.
- 수빈아. 혹시 우리 학교 내에 있는 작은 연못 알아?
- 연못이요? 큰 호수 같은 건 알아요.
- 호수 말고. 도서관 앞에 있는 작은 연못 있잖아.
- 아, 죄송해요. 아직 도서관을 못 가봐서….
- 그래? 언젠가 도서관에 가게 된다면 작은 연못을 찾아봐. 아까 네가 말한 큰 호수는 우리 학교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곳이지만, 그 연못은 사람들이 잘 몰라. 인적이 아주 드문 곳이야.
나는 우울하거나 슬플 때면 그 연못에 가.
마음이 편해지거든.
회상을 돌리며 형이 했던 말을 따라 똑같이 곱씹은 나는 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큰 도서관 건물의 옆 모퉁이를 돌아, 도서관 뒤 쪽에 위치한 작은 연못, 인적이 드문 곳이라 훼손된 것 하나 없이 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어 학교와는 전혀 다른 곳에 와있다고 생각되게 만드는 곳, 이곳이 바로 형의 작은 비밀 정원이었다.
“…선배,”
여기서 뭐해요.
형은 거기에 있었다.
“한참 찾았잖아요.”
유일하게 마련된 벤치에 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보내는 형,
그날따라 작아 보이는 그의 여린 등을 품에 안고 작게 토닥였다.
형, 괜찮아.
나 왔어.
-
형은 그때도 어린 나이였지만, 그보다 더욱 어린 나이에 많은 아픔을 감당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울고 있던 형이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게 말해준 가족사, 그 날 형이 울었던 이유는 자신을 키워진 유일한 가족이 하늘나라로 가셨단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소방서에서 일하던 소방관이었단다. 소방 계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엘리트였다고 했다. 직장에서 만난 두 분은 많은 위험을 마주하지만 굴하지 않으셨단다. 그런 두 분을 우러러보며 자라온 형은 존경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일에 대한 것이 더욱 큰 건가 생각되었단다.
어느 날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고 했다. 그리 고층은 아니었지만, 꼭대기 층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화재가 발생하고 만다. 관할 지역에서 일어난 화재를 신고 받고 두 분이 투입되었지만, 불길이 생각보다 쉽게 사로잡히지 않아 고생이 이어지던 끝에 잠시 실종이 되었다가 겨우 형체를 알아볼 정도의 시신으로 돌아왔단다. 알고 보니 발화 지점인 10층, 그 아래층 안방에 있던 여자 아이와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두 분이 들어가셨다가 아이와 강아지를 급히 내보내고는 떨어지는 잔해물에 맞고 숨졌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불길이 아래층까지 번져, 뜨거운 불길 속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돌아가신 듯 했다.
“…신도 참 야속하시지.”
고생만 하던 그에게 조금의 행복을 선사할 생각은 못하고 병을 주었으니.
형은 그래도 살아온 삶에 대해 불만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의 행복을 신께서는 선사했다고 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때, 나를 만나고 난 이후로 주욱 행복했었다고 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소주병, 남아 있던 액체를 모두 한 잔에 털어 넣는다. 빈 병을 괜히 흔들어보던 나는 빈 맥주캔 옆에다가 놓았다. 어쩌다가 술 한 병도 마시게 되었네. 주량이 한 병인데, 맥주 한 캔까지 마셨으니 이미 주량이 오버된 상황이었다.
어째 알코올이 목을 타고 몸속에 들어올 수록 한 켠에 꽁꽁 숨겨두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운 마음에 핸드폰 갤러리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숨기기 기능에 들어가, 숨겨진 항목 하나를 눌러 숨기기 기능을 해제시킨다. 곧 뒤로 가는 버튼을 눌러 다시 갤러리에 들어가니, 원래 있던 앨범들 중에서 근 10년간은 보지 않았던 사진 앨범을 손가락으로 망설이다 이내 눌러버린다. 그 사진 앨범 속에는 형과의 모든 추억, 그리고 조금씩 잊혀지던 형의 얼굴이 보였다. 꽤나 오랜만에 보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확대도 해보고, 떠오르는 추억을 곱씹으며 작게 웃기도 한다.
“…형,”
지금은 어때? 행복해?
속마음으로 행복하냐고 묻던 나, 곧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곧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어깨춤도 잘게 흔들리다 어두운 방안에서 작게 흐느끼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홀로 하늘을 누비고 있을 형, 형은 과연 행복할까. 만약 형이 내게 행복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핸드폰에 띄워진 사진은, 10년 전 장난치다가 실수로 찍은 사진, 또는 그만하라며 제대로 찍어주겠다며 내 폰을 뺏어가서 찍은 사진, 화질이 현대보다는 좋지 않지만 그래도 형의 모습을 상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진들. 나는 이만 터져버린 눈물을 아래로 툭 떨구었다. 이후에는 먹먹해진 가슴을 내리치며 목이 멜 정도로 울어댔다. 술기운에 어지러웠던 정신은, 울다 못해 오열하는 덕에 깨질 듯이 아파왔다. 결국 몇 백 장이 있던 사진들을 모두 보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언젠가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형의 마음이 편치 않을까봐 꾹 참아왔는데, 그래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형을 지우기에 급급했는데.
- 우와, 이게 뭐야?
오랫동안 썸을 탔다. 공익인 형과는 달리, 육군을 제대한 나 때문에. 내가 제대하던 그 날에 형은 내게 사랑을 고백했고, 우리는 결국 사귀게 되었지만 연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형의 손에 들려있던 13송이의 장미, 내게 선물을 준다며 애써 웃어 보이지만 왜인지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생각이 되어 일단 장미 13송이를 받아들고는 환히 웃어보였다.
- 샀어?
- … 어, 내가 샀어.
처음으로 내게 선물을 주던 형의 표정에는 수줍음과, 왜인지 어둡게 그늘진 것이 공존했다.
장미 13송이를 받아들고 집으로 오던 길에 왜 그랬을까 궁금했고, 왜 하필 장미 13송이를 주었는가 궁금했다.
[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
형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
수빈이에게.
수빈아, 안녕.
액자 속에서 담긴 내 모습 어때? 사진 잘 나오지 않았어? 이 사진과 액자는 내가 미리 준비해둔 거야. 병원에서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정리할 거, 준비해 둘 거, 모두 구분하고 이제는 여행을 다닐까 고민하고 있어.
갑자기 연락이 안 되어서 많이 걱정했지? 미안해. 내가 말없이 떠나던 날, 너에게 장미 13송이를 주었어. 혹시나 네가 그 뜻을 헤아렸을까 모르겠지만, 장미가 13송이가 되면 당신을 증오한다는 뜻이 된다고 해. 매몰차게 너를 떼어놓기 위함이었지만, 그건 내 진심이 아니야.
장미의 꽃말은 불타는 정렬한, 열렬한 사랑이야. 흔한 꽃말이라 잘 알고 있지? 내가 너에게 준 13송이의 꽃은, 이내 다 시들어버리겠지만 한 송이만은 꼭 시들지 않고 최대한 버텨줬으면 좋겠다. 너를 매몰차게 떼어놓았지만, 사실상 내 마음은 아직도 너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너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내가 아파하는 걸 너에게 보여줄 수가 없었어. 걱정 많이 할 거고, 네가 걱정하는 것을 보면 내 마음도 편치 않으니까. 너도 많이 고생할 것 같아서 차마 말하지 못 했어. 이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거,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잠수 이별을 당하고 똥 밟았다 생각하고 다른 좋은 인연을 만나서 살아갈 너를 그리며,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빌었는지. 이후에 내가 하늘의 별이 되어, 이 편지를 네가 보게 되더라도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줘. 이렇게 쓰고 보니까 너무 이기적이네, 나란 사람은.
그래도 즐겁다고,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일생에서 너라는 빛이 나타나 어두운 내 인생을 밝게 비추어준 것. 수빈아, 나는 너를 만나고 가장 행복했어. 이 편지를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내가 눈을 감은지 오래더라도, 내 마음의 나침반은 항상 너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줘. 하지만 그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라는 걸림돌에 걸리지 않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럼 족할 것 같아. 네 곁에 내가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겠지만.
수빈아, 사랑해.
정말, 아주 많이.
추신,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정작 쓰려니 기억이 안 나네.
긴 편지를 쓰고 싶었던 연준이 형이.
.
.
.
.
형의 바람을 이루어졌어, 알아?
편지를 들고 있던 나, 이미 편지는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었다.
꽃병에 꽂아두었던 장미 13송이는 금방 시들어버렸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 피어있던 장미꽃 한 송이는 거의 보름을 버텼다. 편지를 읽고 난 나는 이 꽃에 형의 마지막 염원이 깃들었음을 깨닫고 처참히 무너진다.
형이 아무런 통보도 없이 사라지고 꼬박 1년이 지나서야 형을 찾았다. 하지만 형은 이미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들 형이 죽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아보여서 혀를 쯧쯧 찼더란다. 그렇게 아껴하던 사람이 운명을 맞았는데 저렇게 아무 것도 모른 척 태평하다고. 나와 같은 학번 동기인 최범규는 나를 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단다. 같은 학생회 사람으로서 형을 믿고 잘 따랐던 최범규, 그를 믿은 연준이 형은 더 이상 믿고 맡길 직계 가족이 없다며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액자를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단다. 그 사람이 바로 최범규였고, 최범규는 1년이 지나고 아무 것도 모르던 내게 액자를 보여준 것이었다.
받은 액자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진정할 줄 모르고 그저 울기만 했다. 얼굴이 엉망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품에 안은 그 액자가 헤어지던 마지막에 한 번이라도 안아보지 못한 아쉬움과 허망함에, 연준이 형이라고 생각하며 꼬옥 껴안는다. 많이 후회되었고, 또는 원망스러웠다. 그 누구도 내게 얘기하지 않은 것이 우연이었다지만 원망스러웠고, 숨긴 형도 미웠고,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그 날에 꼭 껴안지 못해 아쉬워서 무너진다. 아쉬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잘해줄 걸, 형을 행복하게 해줄 걸. 혹시나 내가 너무 못해줘서 형이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처음에는 형이 미웠다가, 이제는 모두 내 잘못으로 느껴졌다. 자책과 자학이 섞인 것들을 토해내던 나는 실수로 액자를 떨어뜨렸다. 눈물을 훔치며 다급하게 액자를 다시 집어올린 나는 끼워진 편지 하나를 발견했고, 편지를 다 읽어 내려간 끝에는 소리 내어 울지 못하던 것들도 엉엉 울부짖었다.
술을 마신 탓에 더운 기운이 몸을 타고 돌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살짝 열어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어버렸고, 열린 넓은 틈으로 타고 들어온 바람이 나의 앞머리를 매만지며 지나갔다. 하, 시린 바람을 맞으니 나갔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올 기미가 보인다.
“…형, 보고 싶어.”
뜨거운 숨과 함께 뱉는 말.
지금 제 앞머리를 매만지는, 제 몸을 휘감다가 이내 지나쳐버리는 바람이 형의 손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형의 잔상이 아른거린다. 형은 웃고 있었다. 허나 제게 다가오지 않고 한없이 멀어지기만 한다. 나는 손을 뻗어 붙잡을 생각도 못하고 작게 웃음을 지은 채 바람을 맞았다. 10년이라는 힘든 지난 시간을 버텨서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웃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알고 있다. 술기운을 빌려 웃을 수 있다는 것.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손을 길게 뻗어 그 잔상을 어떻게든 잡으려고 애썼겠지.
아직까지도 작은 틈 하나 치유되지 않고 곪아서 썩어버린 마음, 한 켠이 매우 아려왔다. 마음은 아프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어보려고 애쓴다. 멀어지는 형의 잔상이, 꼭 형과 마지막으로 인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아서. 취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몇 십 분이고 바람을 맞았다. 형의 잔상이 아주 사라질 때까지.
앞으로도 이런 나날이 반복되겠지.
운명을 맞아, 하늘을 걷고 있을 나의 운명과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