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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w. 랑니

 

* 본 글은 역사적 사실을 일부분 인용하여 꾸려낸 픽션이며 소설 헝거게임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1936년 소비에트 연방, 보로네시의 겨울.

 

 

 

 


 어깨 춤에 Agnus dei 라는 글자가 흰색으로 쓰인 짙은 고동색 완장을 찬 소년의 이름은 최연준이다. 나이는 올해로 열아홉. 1917년 9월 13일 생. game son의 참가 일원 중 하나였다. 그는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인 어머니와 둘이 살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소련인 아버지가 공장에서 사고로 어릴 때 돌아가셨지만 친가의 도움으로 부족함 없이 부유하게 자랐다. 그래서인가, 상처 많은 얼굴에도 귀티가 흐른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차를 이리저리 살폈다. 보름 뒤면 게임이 종료되는 탓에 3구역인 보로네시에서 종료 지점이 있는 1구역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성치 못하는 주머니 사정에 버려진 차를 중고로 구입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에잇, 똥차가! 신경질내며 타이어를 세게 걷어찬 연준은 급한대로 손에 든 랜턴을 입에 물고 가방 깊숙한 곳에 처박아뒀던 게임 지도를 찾아 보닛에 펼쳤다. 어디서 누가 총구를 들이밀지 모르는 상황에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빼먹지 않고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왔던 길을 붉은 펜으로 따라 그렸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행히 차가 멈춰버린 곳은 경기 구역이 아니었을 뿐더러 조금만 걸으면 모스크바였다. 날이 어둡기도 했고 경기 구역도 아니니 편히 쉬다 날이 밝으면 부지런히 걸어 가기로 한 연준은 펼친 지도를 가지런히 접어 여러 개의 총이 나란히 놓인 뒷자석으로 냅다 던져놓곤 운전석에 자리를 폈다. 헤진 담요를 목 끝까지 덮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세상에서 환한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여기까지 꾸역꾸역 온 유일한 이유였다. 곧 모든 경기가 끝나는 12월 5일이 올 것이다. 살아서, 살아서 어머니가 계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야만 했다.

 

 

 

 


 game son에 참가한게 된 것은 봄이 찾아왔을 무렵, 집으로 온 한 통의 우편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배달부들의 소리가 들려오고 막 새벽녘이 넘어가 밝아지는 방. 막 깨어난 연준은 제대로 닫지 않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한기에 몸을 잔뜩 구겼다. 니콜라이, 일어나렴. 아침이란다. 너에게 우편이 왔어. 나무 계단이 삐걱이는 소리가 나더니 곧 방문이 열렸다. 좋은 아침이에요, 엄마... 아침을 함께 할 사람을 찾고 계신다면 조금 이따 찾아와주세요... 아들은 조금 더 자고 싶거든요... 폭신한 이불 속에서 고개만 내민 연준은 푹 잠긴 목소리로 침대에 걸터앉아 제 얼굴을 만져오는 어머니를 반겼다. 젖살이 빠진 얼굴을 훑는 어머니의 손길은 덮고 있는 솜이불보다도 다정하고 따뜻해 얼굴을 부비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행동을 그저 어리광이라고 생각했는지 네가 좋아하는 사과 파이는 엄마 혼자 다 먹어야겠네, 엄포를 놓고는 몸를 일으킨다. 네게 온 우편은 여기 올려둘게. 니콜라이,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어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사과파이는 못 먹게 될 거야. 너무해요... 어머니가 방을 나갔다. 문이 열고 닫히며 달콤하면서도 사과의 상큼한 향이 들어와 코에 스며들었다. 연준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손으로 대충 눈곱을 닦아내고 입을 쩍 벌려 졸음을 토해내면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한결 잠이 달아난 기분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한 건 찬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로 닫는 일이었다. 창문의 밑엔 공부용 커다란 나무 책상이 있었는데 치우지 않아 엉망이었다. 불규칙적으로 놓인 책의 맨 위엔 어머니가 놓고 가신 우편물이 있었다. 조금 의아한 점이라면 편지봉투가 검은색이었고 공산당의 노란색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 심지어는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Цой. 어머니만 제게 부르는 소련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어디서 온 거야...? 불안감이 엄습했다. 최연준! 정말 아침 안 먹을 거니? 늘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목소리에 묘한 날이 서있었다. 간만에 집에서 조선 이름도 들려왔으니.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어느새 방을 감싼 상큼하고 달콤한 사과파이를 못 먹을 터였다. 우편만 확인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급하게 봉투 입구를 개봉해 내용을 살피던 연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갔다. 온통 노어로 적힌,

 

 

 

 


Это письмо является приглашением для игры.

 

 

 

 


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공산당에서 1917년 생 남성들에게 일괄적으로 보낸 game son의 초대장이었다.

 

 

 

 

 

 

 

 

 


 신의 어린 양


 1936년 소련의 마지막 겨울

 

 


 랑니

 

 

 

 

 

 

 

 

 


 게임에 참가하고부터는 매일 같이 악몽을 꿨다. 그도 그럴게 하는 일이라곤 죽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것 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젠장... 오늘 꿈은 처음 죽였던 사람과의 재회였다. 네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나도 우리 엄마와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아침 단비의 이슬처럼 맺힌 눈물을 소매로 무자비하게 닦아내던 연준이 짧게 욕을 뱉었다. 얼굴이 얼얼한 게 보르네시를 떠나기 직전 총 없이 벌인 육탄전에서 생긴 상처를 실수로 건들인 듯 했다.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은 날, 상처가 생겨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 끝이 다가왔지만 연준은 충분히 지쳐있었다.

 

 

 

 


 game son은 1917년, 소련에서 태어난 혼혈 남아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게임이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던 1917년. 남아 출산이 폭등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아가 태어나는 비율은 작년과 같았지만 남아의 출생 비율은 기하급수적이었다. 이는 권력을 확실히 잡기 위한 통수의 여러 정책에 써먹기 가장 알맞은 소재였다. 러시아 제국이 멸망함을 슬퍼한 신이 내린 아이들. 소련 하늘 아래 신이 내린 아이들이 많다면 분명 혼란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핑계로 당은 game son을 만들어 열아홉 소년들에게 총을 쥐고 서로를 죽이라 했다. 게임에 참가한 인원의 이름 Agnus dei. 신의 어린 양들. 참가자 대다수가 혼혈임을 알게된 것은 4월, 연준이 살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다섯번째 친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을 때였다. 머리에 총구가 겨눠져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던 그 아이는 조선말을 썼다. 너, 노어 못해? 노어에 더 익숙한 연준은 끊임없이 노어로 질문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아마 노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듯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전에 죽였던 아이들 모두 노어를 할 줄 몰랐다. 연준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땐 의심일 뿐. 보르네시에 넘아가 이젠 두 손으로도 꼽기 힘든 수의 아이들에게 총질을 했을 때야 확신이 들었다. game son에 참가한 소련인은 없었다. 모두 저와 같은 혼혈아였다.

 

 

 

 


 연준은 이 시스템에 대하여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아도 불만이 대단했다. 단지 1917년에 태어난 혼혈아라는 이유로 제 손으로 사람을 죽이고, 자칫하면 자신이 죽었다. 그럼에도 순순히 따른 이유는 2구역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일찌감치 게임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챈 아이들은 총을 불태우고 더이상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의 그림자 뿐이었다. 총 4구역. 동유럽 지역을 넓게 쓰는 이 게임은 소름돋게 치밀했다. 게임에 반발하는 자는 모두 죽이고, 1917년 생은 당이 정해놓은 지역 외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다. 경기 구역 밖에서 5일 이상 머물 수도 없고, 게임 구역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사람을 죽이면 죽인 사람 역시 죽는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오직 하나. 경기가 종료되는 12월 5일까지 살아남아 처음 경기가 시작됐던 모스크바 경기장에 최후의 36인으로 남는 것뿐이었니.

 

 

 

 


 가방을 뒤집어 안에 있던 물건을 모두 바닥에 쏟았다. 거리가 가까우니 차를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쌀쌀한 초겨울 바람에 옷을 꼼꼼히 겹쳐 입은 연준이 여태 죽은 아이들에게 빼앗은 총에서 총알을 하나씩 꺼내 가방에 넣는다. 전부 다 꺼내 넣으니 가방이 총알로 반쯤 찼다. 한 움쿰 쥐어 왼쪽 오른쪽 주머니에 쑤셔넣곤 제일 멀쩡한 총을 골라 문을 닫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한 폭의 유화처럼 유난히도 푸르른 하늘이었다. 나무도, 새도, 뱀도, 곰도 잠든 진흙밭 숲속은 고요했다. 엄마가 말씀하셨던 유토피아는 이런 곳일까. 한참동안 푸른색에 취해있던 연준은 운전석 문을 열어 가방에 생수통과 검정 곰팡이가 핀 사과 파이를 총알 위로 넣었다. 생수통은 보르네시에서 샀던 것이고 사과 파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횡단 열차에서 먹다 남은 어머니의 사과 파이였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가방 문을 꼭 닫고 운전석 문도 닫았다. 부지런히 나아가야 늦지 않을 것이다. 이미 경기장 주변에 잡은 애들도 분명히 있을 터. 그 자리를 차지해야 남은 시간 버텨내기가 수월했다. 가방을 들춰맨 연준이 주머니를 뒤적여 총알 하나를 꺼내 장전한다. 총구는 양 옆으로 우거진 숲의 나무를 향했다. 탕- 마지막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지도 한 장만 붙잡고 가기엔 벅찬 길이었다. 잘 메꿔진 길이라면 조금 덜 힘들었을까. 질퍽한 진흙길은 무언가 알고 있는 건지, 더이상 나아가지 말라는 듯 발을 붙잡는다. 쌀쌀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땀이 뻘뻘 났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은 모스크바에 거의 도착했다는 것. 연준은 다시금 죽음의 문턱으로 발을 들이기 전. 정신을 똑바로 붙들어매려 뺨을 수십번 내리쳤다. 추위에 빨갛게 익어있던 볼 위로 청록색의 멍이 무늬처럼 새겨진다. 비틀거리는 걸음 걸이 옆으로 깨끗한 차 한 대가 스쳐갔다. 엔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뜨인 연준은 본능처럼 총을 들었다. 불과 몇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총에 익어 능숙해져 있다. 차가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섰다. 솜털이 바짝 서는 느낌. 벌써 모스크바에 들어온 건가...? 위치가 헷갈렸다. 장전 후 총구를 차로 겨눈 연준이 입술을 비릿한 맛이 날 정도로 세게 깨문다.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총을 들고 있지 않았고 어깨에 완장도 없었으나 긴장을 풀진 않았다. 남자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연준에게 다가왔다. 이 모든 세상이 자기 거라도 되는 듯. 여유롭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이마를 총구에 맞댔다. 여태 몇 명이나 죽여봤어요? 예쁘게 웃으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거였다. 미친놈이네. 얼굴은 일반적인 소련인 얼굴이 아니었지만 노어를 쓰길래 조선어로 읊조렸다. 그랬더니,

 

 

 

 


 조선에서 왔어요?

 

 

 

 


 조선어로 답했다. 총 앞에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아 게임의 참가자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장전된 총, 총구에 제 이마를 자발적으로 가져다 댄 이 남자는 연준의 어깨에 달린 Agnus dei 완장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질문에 답 좀 해주지. 벌써 두 개나 물었는데. 총구에서 떨어지며 칭얼거린다. 연준은 별다른 답 없이 그의 심장께에 총구를 가져다댔다. 정체가 뭐야, 너? 총을 빼앗긴 건 순식간이었다. 남자의 심장에 박혀야 할 총알은 파란 하늘, 연준의 유토피아에 쏘아올려졌다. 뜬금없이 하늘에 총을 쏜 남자는 또 예쁘게 웃었다. 볼 가운데. 푹 패인 볼 우물이 꼭 사막을 걷다 만난 오아시스라도 되는 듯.

 

 

 

 


 Ю́рий.


 ... 유리.


 어린 양, 그쪽은요?


 Николай...

 

 

 

 


 니콜라이. 니콜라이. 따분한 이름이네요. 유리는 자신의 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함께 가자 제안했다. 연준은 한사코 거절했다 발을 까딱거리며 제 이름을 따분하다 칭하는 유리와 함께 가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으니깐. 어쩌면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가 아닌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가 될 것만 같았으니깐.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살피다 빼앗아 갔던 총을 건넨다. 손과 손이 잠깐 스쳤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온기인가. 내 차를 타고 우리 집으로 가죠. 당신을 이 세상에서 숨겨주고 싶어요. 연준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얼마 못 가 차가 멈췄다. 날이 어두우니 차에서 하루를 새고 가자는 유리의 말에 대충 수긍하고 말았다. 연준은 그만큼 지쳐있었다. 따뜻한 사람 냄새에 홀려 제대로 된 신분도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타고, 한 시라도 빨리 모스크바에 가야 했지만 애꿎은 여유를 부려보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련의 겨울 밤은 살이 찢어질 듯 춥다. 담요를 목 끝까지 올려봤지만 오늘은 유독 더 춥다. 뒷좌석에 몸을 펴고 누워있는 연준의 몸이 앙상한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양 떨렸다. 운전석에 잠자리를 잡은 유리는 제 담요를 연준에게 줬다. 됐어... 너 덮어... 저는 익숙해서 괜찮아요. 한사코 거절하는 연준에 유리다 몸을 뻗었다. 담요를 둘러주고 꽤 많이 자란 머리를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며 노어로 말한다.

 

 

 

 


 모스크바에 가면, 미용부터 해야겠다.

 

 

 

 


 날이 밝자마자 온 집은 아담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그런 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제 집과 비교를 하던 연준은 반짝거리는 공화당 뱃지를 모아놓은 찬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모스크바에 들어서자 어깨에 있던 완장을 제멋대로 뜯어낸 유리가 잔뜩 화를 냈던 거에 나는 그래도 된다고 달랜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다. 아빠가 당에서 높으신 곳에 계세요. 아마 그 추악한 게임에도 조금은 우리 아빠의 입김이 들어가 있겠죠. 그래서요. 그래서 어린 양, 당신을 그 길에서 보자마자 도와주고 싶었어요. 유리는 조선어와 노어를 적당히 섞어 말했다. 누가본다면 비웃을 것 같은 대화 방식은 아마 조선말을 하던 저를 위한 일종의 배려 같았다. 날 배려한답시고 하는 거라면 그런 식으로 얘기 안 해도 돼. 노어보다 조선말이 더 서툴거든. 연준의 말에 멋쩍은 듯 웃는다. 우선 씻을래요?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몸에서 향긋한 비누 냄새가 났다. 유리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똑닮았다.

 

 


 너 혼자 살아? 가족들이 다함께 살기엔 집이 좁아보이는데.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새로운 헌법 제정 때문에 바빠요. 따로 방 구셨고. 형, 누나는 공부하러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던데.


 ... 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왔는데.


 정말요? 그곳은 어때요? 모스크바 보다 따뜻하다고 하던데.


 어. 모스크바 보다 따뜻해. 그리고 그곳은 행복해.


 꼭 한번 가보고 싶다.


 밥 값, 경기 끝날 때까지 도와주는 값 합쳐서. 1월이 오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데려가줄게. 연준의 말에 유리는 환히 웃었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웃음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티가 난다. 연준은 괜히 한번 자신의 얼굴을 쓸어봤다. 나도 만약 게임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저런 웃음을 짓고 있었을까. 간단히 배를 채우고 유리가 씻으러 간 사이 다시금 공화당 뱃지가 정열되어 있는 찬장 앞에 섰다. 전부 엎어버린다면. 유리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사람도 수십명을 쏴죽여놓고 이제 와서 무서운 게 생겼다. 다 쏟아 밟아버리는 게 맞는 건데. 하염없이 바라만 봤다. 엎어버리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그럼 당신 손에 죽은 사람들도 화가 좀 풀리지 않겠어? 연준은 소리가 난 뒷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젖은 머리의 유리가 고개를 삐딱하게 두곤 서있었다. 자신의 아버지의 업적을 엎어버려도 좋다는 말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하게도 한다. 유리의 인상은 참 신기했다. 웃는 걸 바라보면 세상을 전부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음이 사라진 얼굴을 바라보면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든다. 유리는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어제 밤의 다정한 손길로 젖은 머리를 넘겨줬다. 지금,미용할래요?

 

 

 

 


 벽 한 구석에 큰 거울을 기대 세우고, 식탁 의자를 끌어와 그 앞에 놓았다. 연준은 거울을 마주보고 앉아 유리를 기다렸다. 스스로 머리를 다듬는 일이 꽤 있는지. 유리는 미용 전용 가위를 가지고 나와 이게 뭔지 아냐 물어본다. 가위가 신기하게 생겼네... 서양에서 배 타고 넘어온 미용 전용 가위예요. 신기하죠. 일반 가위에서는 날 수 없는 소리가 연준의 흥미를 돋궜다. 목에 독특한 재질의 천을 두르고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꽤 전문적인 가위를 사용하면서도 손길은 퍽 서툴렀다. 까만색 머리카락이 무리지어 머리를 떠나 바닥에 떨어진다. 후두둑 떨어지는 머리칼들을 보며 유리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봤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앞머리 내어줄까요? 귀여울 것 같아서. 연준은 가까운 거리에서 허리를 굽히고 다정하게 눈을 맞춰오는 유리가 좋았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줘.

 

 

 

 


 잠은 유리의 침대에서 함께 잤다. 이불이 하나 밖에 없다며 전부 양보하고 나란히 누운 유리가 더럽게 신경 쓰인다. 연준은 이불을 유리에게 덮어줬다. 괜찮은데. 됐어. 같이 덮고 자. 유리도, 연준도 키가 큰 편이라 둘이 함께 덮기엔 이불이 턱 없이 작았다. 자꾸 발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왔다. 몸을 웅크리니 추워요? 물어온다.

 

 

 

 


 괜찮아, 버틸만해.


 이불 다시 가져갈래요?


 됐다니깐.


 고집은...

 

 

 

 


 그럼 이러고 있어요. 서로 따뜻하게. 유리의 뜨거운 손이 허리를 감싸왔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연준은 품을 더 깊이 파고 들어 가슴팍에 얼굴을 박았다.

 

 

 

 


 따뜻하네.


 몸이 차네요.


 원래 그래.


 꼭 죽은 사람 같아서. 맨날 이렇게 껴안고 자야겠어요.

 

 

 

 


 품을 벗어난 연준이 고개를 처들고 유리를 바라봤다. 굳은 표정이었다. 유리는 조금 당황한 눈치다. 농담이에요. 농담. 농담이라 무마해봐도 연준은 등을 돌렸다. 팔을 올려도 쳐낼 뿐이었다. 귀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제 몫까지 이불을 내어준 유리는 몸을 일으켜 나갈 채비를 했다. 볼에 짧게 키스를 하곤 잘 자요, 니카. 방을 나서는 유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침대에 냅다 몸을 뻗고 누웠다. 얼마만의 침대인지. 깜깜한 방 안은 유리의 온기가 남아 포근하다. 유리가 한 말이 농담이라는 정도는 연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너 꼭 죽은 사람 같다. 유독 몸이 찬 편이라 학교에 다닐 적에도 친구들이 자주하던 농담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언제 죽을지도, 언제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장난으로 받아 넘길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 따위 연준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 날 눈을 뜬 연준은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나던 사과 파이의 달콤하고 상큼한 냄새가 코에 스몄기 때문이다. 엄마? 잠을 깨우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차례였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유리였다. 익숙함에 절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댔다. 그렇지. 엄마가 여기 있을리가 없지. 무자비한 손길을 잡아낸 유리는 그렇게 닦으면 눈을 다칠 거라고 했다.

 

 

 

 


 혹시 사과 파이 좋아해요?


 응. 엄청.


 어제 농담한 거, 사과의 뜻으로 사과 파이를 좀 구웠는데. 함께 먹을까요?

 

 

 

 


 유리가 만든 사과 파이는 어쩌면 어머니의 사과 파이보단 더 예뻤고 맛이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연준은 입에 넣고 있는 유리의 사과 파이보다 어머니의 사과 파이가 그리웠다. 내색을 안 하려 했지만 유리는 눈치가 빨랐다. 사과 파이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어요? 아님 맛이 없나? 나름 열심히 구운 건데. 표정이 안 좋네요.

 


 아침마다 엄마가 해주시던 거라.


 ... 어머니 보고 싶어요?


 응.


 언제 볼 수 있는데요?


 죽지 않고 날짜 맞춰 경기장에 들어간다면, 곧.


 그게 언젠데요?


 12월 5일.

 

 

 

 


 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한참이나 눈을 마주치고 있더니 포크로 애꿎은 사과 파이만 푹푹 찍어댄다.

 

 

 

 


 우리 아빠도 참 잔인하네요.


 ...


 자기 아들 생일을 그런데에 쓰는 경우는 또 뭐람.


 ... 12월 5일이 네 생일이야?


 네.

 

 

 

 


 오랜 시간 정적이 흘렀다. 연준은 이 세상이 참 잔인하다,생각했다. 1917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에 참가해야만 했던 자신.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 제 눈 앞의 유리. 누구 하나 행복하지 못한 이 잔인한 세상이 미웠다.

 

 

 

 


 아마 기억 못할 거예요. 절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친아들이 아니니깐.


 ...


 난 조선인이에요. 친어머니, 친아버지는 빼앗긴 나라에 반발하다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조선에 계시던 선교사님이 소련으로 데려와 지금 부모님께 입양 시켜주셨고요.


 네 조선 이름은 뭔데?


 그쪽은요?


 네가 먼저 알려주면 나도 알려줄게.


 조선 이름도 없으면서 괜히 그러는 건 아니고요?

 

 

 


 
 유리가 환히 웃는다. 바라보고 있으면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그 웃음이다. 연준도 웃었다. 말 없이 사과 파이를 베어 물곤 난 최연준이야, 했다.

 

 

 

 


 아무도 불러주진 않지만. 내 조선 이름은 최수빈이에요. 빼어날 수 자에 빛날 빈 자 써서 최수빈.

 

 

 

 

 

 

 

 

 


*

 

 

 

 

 

 

 

 

 


 매일 아침을 수빈과 함께 했다. 사과 파이를 굽고 어린 양들이 득실거리는 모스크바 거리를 손 잡고 함께 걸었다. 부러 수빈의 옷을 입고 완장은 옷 안에 감췄다. 걸릴까봐, 걸려서 죽을까봐. 처음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때마다 수빈이 손을 꼭 붙잡아줬다. 눈을 맞추면 웃어줬다. 괜찮아요. 잠도 함께 잤다. 한 이불을 덮고 좁은 침대에 누워 따뜻한 품에 안겨 잤다. 수빈은 종종 노래를 흥얼거려주곤 했는데 제목은 모른다고 했다. 가사도 모른채 멜로디만 흥얼거릴 뿐이었다. 노래를 꽤 했다. 가슴팍에 귀를 대고 수빈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웅웅 귓가가 울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수빈이 유독 이상했다. 종일 멍 때리는가 싶으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 아픈건가?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도 연준은 도통 이유를 찾지 못했다. 수빈은 말하지 않았다. 그냥요. 이정도였다. 따뜻한 품을 찾아 파고들자 큼지막한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오늘은 매일 같이 불러주던 그 노래도 불러주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웃지도 않았다.

 

 

 

 


 너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 내일 우리 빵집에 가요.


 왜?


 12월 4일이니까.


 ...


 메도빅을 사서 먹고... 포도주는 마실 줄 알아요?

 

 

 

 


 연준은 답이 없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벌써 보름이 훌쩍 가버리고 수빈의 생일이 찾아왔다. 따뜻했던 품도, 달콤했던 사과 파이도, 마주 잡고 걸었던 모스크바의 거리도.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할 날이 성큼 다가왔다. 수빈은 하루종일 그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었다. 맞다. 나도 어린 양이었지. 연준은 잠시 잊고 있었다. 언제 죽고 죽일지 모르는 신의 어린 양. 울음 섞인 목소리로 총의 행방을 물었다. 완장은 자신이 따로 챙겨놨지만 총은 수빈이 챙겼었다. ...창고에 놓아뒀을 거예요. 내 가방은? 그것도 창고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게 고스란히 느껴져 불안했다. 급하게 창고에 내려가 총과 가방을 들고 나오는 걸 수빈은 막아섰다.

 

 

 

 


 어쩌려고요.


 경기장에 먼저 가야 해. 그래야 살아. 살아 남으면 널 블라디보스토크에 데려갈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수빈아?


 지금 가서 죽으나, 12월 5일에 가서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지예요.


 너 무슨 말을 그렇게...!


 내일 아침에 사과 파이를 구워 먹고 모스크바 거리를 걷고, 메도빅과 포도주를 사다가 생일 파티를 해요. 침대에서 껴안고 있다가 몸이 달으면 섹스를 하는 것도 좋아요.

 

 

 

 


 그러니까, 하루라도 더 살아보는 건 어때요. 나랑 같이 하루라도. 딱 하루라도 좋으니깐. 수빈의 처절한 고백에 연준은 무너져 내렸다.

 

 

 

 


 그래... 그렇게 하자. 네 말처럼 생일파티를 하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반죽하는 수빈의 옆에서 사과를 깎고 파이를 구웠다. 아버지가 제일 아끼시는 거라며 찬장에서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접시를 꺼내 사과 파이를 놓고 함께 꺼낸 찻잔에 홍차도 우려 따랐다. 입이 녹을 정도로 달아야 할 파이가 이상하게 썼다. 수빈도 마찬가진 듯 했다. 아무래도 온도 조절을 잘못해서 탄 것 같아요. 억지로 꾸역꾸역 넣어봐도 도저히 먹을 게 못 됐다. 버리기 싫은데. 수빈의 만류로 반이 넘게 남은 사과 파이를 모두 버렸다. 메도빅을 사러 나선 길에는 눈 앞에서 어린 양이 신의 품으로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연준은 태연했다. 태연한 척 했다. 오히려 놀란 쪽은 수빈이었다. 이 잔인한 걸 어떻게 혼자 버텼어요. 달뜬 물음에 담담하게 답한다.

 

 

 

 


 살아야 되니까. 경기 구역에선 못 버티면 죽는 거야.

 

 

 

 


 슬픈 생일이었다. 파티였지만 참석한 사람은 둘 뿐. 어디선가 초를 가져와 불을 붙이고 보기좋게 메도빅을 잘라 놓았다. 전용 잔을 꺼내 포도주를 따르고 말 없이 여러번 잔만 부딪혔다. 연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또 뭐하기로 했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제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빈은 혼자 연거푸 포도주병을 기울이고 잔에 담긴 붉은 물을 입에 털어넣는다. 그만 마시고 너도 같이 생각해봐. 우리 뭐 하기로 했어. 제지하려고 잡은 손은 처음 그때처럼 여전히 뜨겁다. 눈이 나른하게 풀려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느리고 계속 비실거리며 웃어대는 게 포도주에 제대로 취한 듯 싶다. 섹스요. 우리 섹스하기로 했잖아. 정말 하려구? 응. 하고 싶었어. 아기처럼 칭얼거리는 수빈의 말에 정신이 좀 돌아왔다.

 

 

 

 


 그건 여자랑 남자가 하는 거잖아.


 남자끼린 하면 안 되나? 난 남자 좋아하는데. 연준씨 좋아하니까아... 그래서 저번에 여기에 키스도 했는데...

 

 

 

 


 제 볼을 느리게 두 번 찌른다. 두서 없는 말이었지만 수빈이 전하고픈 말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인 내가 좋고, 좋아해서 키스를 했으니, 섹스를 하고 싶다. 수빈의 손에서 포도주 잔을 빼앗았다. 남은 포도주를 한꺼번에 들이키다 흘러내렸다. 옷에 붉은 얼룩이 졌다. 수빈도, 연준도 그 얼룩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나 진짜 죽으려나보다. 네 말대로 죽나봐.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눈물을 머금은 짭찌름한 키스였다.

 

 

 

 


 얼얼한 엉덩이를 애써 무시하고 연준은 나갈 채비를 했다. 품이 큰 깔끔한 옷 대신 입고 왔던 꼬질한 제 옷을 입었다. 총알이 든 가방을 매고 총을 장전하려는데 수빈이 이건 안 챙겨요? 하며 완장을 흔든다. 고마워. 잊어버릴 뻔 했다. 데려다줄게요. 됐어. 짧은 대화가 오고갔다. 기어코 연준은 수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사격하기가 까다로울 거라고 경기장 바로 전까지만 가겠다는 걸 말릴 방도가 없었다. 손을 잡고 모스크바의 거리를 만끽했다. 경기장을 막 나왔을 땐 못 봤던 것들의 천지였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나무는 적당한 바람에 흔들렸고 겨울 햇살은 오늘따라 더럽게 따뜻했다.

 

 

 

 


 나 그 완장 한번만 차보면 안 돼요?


 위험해.


 섹스도 한 사인데. 그럴 거예요?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나 지금 연준씨 대신 기꺼이 죽겠다는 얘길 하는 거예요.

 

 

 

 


 따라나온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저를 대신 죽어주겠다는 말을 하는 이 남자는 또 그 웃음을 짓고 있다. 바라만 보면 세상을 전부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그 웃음. 손을 내밀고 완장을 달라한다. 연준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애써 눈을 피했다. 완장을 주는 자신과 고집부리는 자신. 이성의 충돌이 일었다. 살고 싶었지만, 수빈을 지키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지만 살고 싶었다.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수빈은 단단했다. 수더분하게 생겨서는 꽤나 듬직하고 껴안는 품이 컸다.

 

 

 

 


 당신의 삶은 귀하잖아요. 살아서 어머니 보러가야죠.


 네 삶은 안 귀해? 최수빈, 네 삶도 귀해... 귀하고 소중해서... 소중해서...


 나는 사는 게 지겨워요. 누구 덕분에 이제야 살 것 같았는데, 그 사람이 제 발로 죽는 길을 걷겠다잖아요. 우리 아빠가 일하는 곳에서 만든 말도 안 되는 게임으로. 잔인한 세상에 너무 지쳐서, 그만하고 싶어요. 완장 주고 연준씨는 돌아가요.

 

 

 

 


 블라디보스토크로. 연준은 또 한번 수빈을 따랐다. 이렇게 슬픈 이별이 또 있을까. 세상에 이렇게 슬픈 말이 있을까. 얼마나 슬프면 눈물도 메말라 나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라올까봐 마주보지도 못했다. 수빈이 뒤에 껴안아 온다. 깍지를 끼고 손가락에 여러번 입을 맞춘다. 오늘 하늘 진짜 푸르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하늘이 이렇게 예뻤죠. 노래 불러줘. 무슨 노래요? 맨날 불러주던 거. 제목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는. 수빈의 다정한 허밍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

 

 

 

 


 눈을 감으면 등 돌려 걸음을 몇 발자국 떼지 않아 총성이 들렸던 그날이 떠오른다.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그게 수빈일까 두려워 뒤돌아 볼 수 없었던 모스크바의 12월 5일을 떠올린다. 수빈이 아니길, 아직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살아 돌아온 연준을 어머니께서 끌어안고 한참을 우셨다. 그제야 나지 않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엄마, 엄마... 저...목숨을 지키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 같아요... 더이상 어머니의 사과 파이를 먹을 수 없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파이의 냄새만 맡으면 사과의 뜻으로 파이를 매일 같이 구워주던 수빈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속상해 하시는 어머니께 죄송해 입에 억지로 구겨 넣으면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죄송해요, 엄마. 저 바람 좀 맞고 올게요.

 

 

 

 


소련에도 봄이 왔다. 약속한 봄이 왔는데도 여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엔 연준 홀로였다. 그렇게 바라왔던 모스크바 보다 따뜻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집, 그리고 어머니.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꽤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들이 모두 곁에 있는데. 끝자락에 만났던 최수빈만 없었다. 마지막으로 불러줬던 그 노래를 흥얼거려봤다. 며칠 전, 어머니께서 조선 노래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조선 노래예요? 응. 사의 찬미잖니. 1926년에 나온 윤심덕의 사의 찬미. 죽음을 아름답게 칭송하는 노래라...

 

 

 

 


 노래를 멈춘 연준은 오늘도 야속하게 푸른 하늘을 상대로 눈을 감았다.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곳들이 유토피아였기를.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불과했기를.


 그렇다면, 우리는 손을 맞잡고 블라디보스토크에 함께 올 수 있지 않았을까.


 겨울이 가고 찾아온 봄의 내음을 맡으며 행복하지 않았을까.


 너의 뜨거운 손을 한번만 더 잡을 수 있게 해달라, 하늘에게 빌고 또 빌어본다.

 

 

 

 


 1937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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