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WALL STREET |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디어 마이 스위티
w. 김삼오 (@3_5hz_SJ)
부제 ( Sweet & Suga-r )
00.
뉴욕에 와서 지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수트를 한 벌 맞춰 입은 것이었다. 메리는 그런 말을 했다. 사람 구실을 하려거든 멀끔하게 해서 와. 구르다 만 깡통 같은 것은 필요 없으니.
깔끔한 넥타이에 다른 딱딱한 것들에 비해 젊은 느낌을 주는 네이비 스트라이프 수트. 넥타이는 언제나 목을 죄는 느낌을 주었다. 24시간, 매분 매초 교수형을 앞둔 사람처럼 목 매 죽기 직전의 상태로 숨 쉬는 기분은 역설적이게도 짜릿했다. 명품 넥타이가 언제든 그를 목졸라 죽일 수 있다는 그 소설 속의 은유와 같은 위험.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지민은 내일이네 내년이네 하는 속 편한 계획 따위는 세우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는 오늘만 보고 걸어. 나는 고개를 쳐들고 위만 쳐다보며.
박지민이라는 동양인이 월 스트릿에서 구르고 더러운 것을 삼키고 핥아가며 얻어낸 것은 어떻게 보면 고작 ‘그런 것’이었고 동시에 엄청난 무언가였다.
오, 스위티.
성인 남성에게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달콤하고 앙증맞은 그 애칭을 지민은 기다렸다. 그는 누구에게나 스위티로 불렸다. 그는 월 스트리트,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의 스위티가 되었다. 박지민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스위티를 모르는 사람은 없도록. 누군가 스위티- 하고 부르면, 설령 프라이빗한 상황에서도 눈부시게 웃으며 사랑스러운 키스로 화답할 수 있는. 비로소 지민은 그런 것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지민은 욕정과 애정, 그래 어쩌면 돈 놀음 하는 부자들이 진즉에 버려버린 낭만 따위의 것을 내세우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래, 내가 당신의 낭만, 로망스… 위험하고 달콤한 당신의 스위티.
박지민, 통칭 스위티의 생활 신조는 뉴요커 젊은이들의 캐치 프레이즈처럼 알게 모르게 유행을 탔다. 정작 그런 생활 신조를 만든 박지민은 저들끼리 키득대는 시시한 뉴요커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단 걸 꿈에도 모른 채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날랜 몸놀림과 분주한 행동, 그러나 반짝이는 눈을 가질 것.
-뉴욕의 낮에는 햇살같은 미소로, 밤에는 달빛의 그것과 같은 달콤한 키스로 답할 것.
한국에서 싸온 짐을 죄다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한국의 초록색 여권은 고급 라이터로 불질렀다. 더는 돌아갈 곳이 없도록, 괴로워도 도망칠 구석이 없도록. 여권은 처음 만들 때는 그 수많은 서류들에 숨이 막혀 죽을 것처럼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 종이 쪼가리들은 잘만 탔다. 활활, 아주 잘 탔다. 처음 입양이 결정 되었을 때 뉴욕으로 올 때 사용했던 그 여권이었다. 아직 젖내가 날 것 같은 얼굴의 소년이 여권 안에 있었다. 그 아이는 하얀 얼굴과 분홍빛 볼을 가졌지만 죽은 눈을 했다. 한국에서의 박지민은 그런 죽은 눈의 소년이었다. 그 얼굴도 불길 가운데서 활활 타올랐다. 어린 소년이 가엾어서, 지민은 여권을 태우다 말고 아주 잠깐 울었다. 유년기에 대한 애도였다. 불운했던 유년기에 대한, 동정과 애도.
여권을 태우는 것은 죽는 곳마저 이 곳 뉴욕이기를 바랐던 지민의 선택이었다. 메리는 그런 지민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제법 독하구나. 모름지기 성공하고 싶은 놈이라면 그래야지. 지민은 반쯤 불탄 여권 위로 두동강 낸 아이폰을 던지며 메리에게 속삭였다. 다시 하나 부탁해요. 박지민이라는 사람은 한국에서 죽은거나 마찬가지니까…
월 스트리트.
말로만 들었던 그 곳을 걷노라면 이따금 멈추어 서곤 했다. 그 거리에 멈춰선 것은 오롯이 자신 뿐이라는 것을 습관처럼 확인한다. 모두가 바쁜 걸음. 그리고 또 모두가 무감각한 죽은 눈. 그 인구의 파도 가운데 홀로 선 암초처럼 지민은 늘 꼿꼿하고 고혹적인 것이다.
어쩌면 손가락 하나 튕기는 것만으로도 건물이 하나둘씩 헐어졌다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는 곳. 사람 목숨보다 중한 정보들이 오고가는 곳. 파도치는 그래프의 기울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였다가 살리는 곳.
그래, 이 곳이 그가 동경하던 그 곳이었다. 내 망상 속의 목적지, 치기 어린 공상의 종착지. 스위티의 목적 없는 사랑이 정처없이 헤매이는 곳.
월 스트리트.
01.
별천지였다.
루프탑 바의 커다란 창 너머로 지민의 시선을 빼앗은 뉴욕의 밤은 그 단어를 쓰지 않고는 형용할 길이 없었다. 별천지. 길쭉하게 뻗은 갑갑하고도 무신경해보이는 빌딩들에 빼곡히 박힌 별들.
헤이, 스위티- 고개를 돌려보니 늘 서글한 얼굴을 한 바텐더, 성현이 손짓하고 있었다.
"스위티는 이 파티에 올 줄 알았어. 오늘은 뭐로?"
"글쎄. 안 정하고 왔는데. 추천할 만한 거 있어? 성현이 추천하는 걸로 할게, 오늘은."
"스위트 마티니?"
제법 재치있게 음료를 추천해주는 성현을 보며 지민은 푸슬 웃어버리고 말았다. 스위티는 스위트 마티니. 삼류 코미디언의 스탠딩 개그 같잖아, 그거 너무 달아. 지민은 부러 입술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성현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단 거 좋아하잖아? 언제는 혓바닥이 녹아버리게 단 걸 달라며.
"속이 쓰고 외로우면 단 걸 먹으라고 했잖아, 네가."
지민은 새초롬하게 답하며 테이블 바를 톡톡 두드렸다. 검은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은 지민의 손톱에 끄덕없다는 듯 딱딱 소리를 낸다.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보이는 행위. 그런 지민을 가만히 응시하던 성현은 느릿하지만 확실히, 그리고 대화를 하기에는 충분한 텀을 두며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위티는 테이블 바에 몸을 반쯤 기대며 입을 열었다. 성현, 이런 데 잘 안 오는 거 아니야? 파티는 소란스러워서 싫다며. 성현의 비싼 칵테일은 야심한 밤에 나만 시키는 게 좋은데… 언뜻 야릇한 의미를 내포한 듯한 지민의 말에 성현은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성현과 이따금 입술을 부비거나 나체의 몸으로 뒹굴기는 했었지만 그것도 아주 오래 전 이야기였다. 저스트 프렌드. 성현이 스스로의 포지션을 확실히 정한 것은 아주 똑똑한 처사였다. 스위티의 '애인'들은 죄다 유통기한이 짧았으니까.
"라일라의 자선 파티잖아."
"근데?"
"라일라는 내가 고용된 호텔의 경영인이지."
까라면 까야지, 바텐더가 뭘 거절하겠어. 아하…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지민이 턱을 괴곤 웃었다. 너도 끌려왔구나? 꼴 좋네. 매번 나보고는 학교 가기 싫어하는 낙제생 같다더니. 성현이 움찔하곤 칵테일로 잔을 채운다. 스위티, 오늘 말이 제법 매섭네. 지난 밤에 상대에게 퇴짜라도 맞은 거야? 성현의 짓궂은 질문에 지민은 나른하게 웃었다. 나를 퇴짜 놓는다구? 으응…정말 그런 일이 있을거라 생각해? 당돌하고도 약간은 오만한 단어들, 그런 것들은 지민의 분홍빛 입술을 거치면 앙큼한 도발로 재탄생한다. 스위티의 능력은 그랬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와 숨이 달았다. 한 번 맛 보면 온 몸의 촉각이 삐죽 솟는 듯한 단 맛.
"스위티를 말로는 못 이기겠네, 정말. 그러는 넌? 라일라를 은근히 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글쎄… 그 사람 너무, 뭐랄까… 작위적이야."
그렇게 자로 잰 듯 네모반듯한 사람은 별로라구. 뭣보다… 그녀를 적으로 두고 싶지가 않기도 하고. 혹시나 밉보이면 큰일 나는 것쯤은 나도 알아. 지민이 답지 않게 몸을 사리는 듯 한 말을 하자 성현이 놀랍다는 듯 웃어보였다. 라일라가 정말 성공했나보네, 우리 스위티가 발톱 세워가며 경계하는 걸 보면. 지민은 빙긋 웃으며 스위트 마티니를 홀짝였다. 나야 뭐 별 수 있겠어… 한창 상승 주가인 라일라에게. 약한소리를 하면서도 늘 그랬듯 날카로운 눈으로 라일라의 주변을 훑었다. 전의 연말 파티에서 보지 못했던, 라일라의 팔짱을 낀 웬 청년이 보였다.
"라일라의 새 애인인가? 너무 어린 것 아냐?"
지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성현은 지민을 힐끔 쳐다보곤 시선 끝에 걸린 라일라와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뭐… 나야 모르지만. 혹여 애인이래도, 운명이니, 사랑이니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얼씨구… 사랑이 아주 천하무적 무기네. 하긴, 라일라 정도면 저런 젊은 남자도 낚아올려서 쉽게 홀랑 벗겨먹겠지."
요새는 라일라 명함만 보여줘도 콜보이들이 드로즈를 벗으려 든다며? 그런 놈들 실속이나 있는가 몰라. 쯧, 혀를 차며 다리를 꼰다. 스위티의 사소한 행동에도 움찔거리는 청년들이 숱하다. 다들 명문가의 자제나 젊은 CEO일텐데, 요 작은 체구의 동양인 하나에 안절부절. 스위티도 그 사실을 앎이 틀림없다. 그의 수트 아래로 하얀 발목이 보인다. 한 손에 꼭 잡힐듯한, 그래서 더 손이 가는. 어쩌면 욕망 묻은 뭇 사람들의 시선도 그 곳에만 꽂힌다. 새하얗고 얄쌍하게 빠진 그 것. 그것에 입맞춰보려 다들 스위티의 입맛에 맞게 설설 긴다. 스위티의 작은 왕국, 군림하는 가장 달콤하고 유약한, 그러나 매혹적인 군주.
"누가 대화 내용이라도 들으면 기절하겠어. 라일라에게 그런 소릴 하는 건 스위티밖에 없을걸?"
"허, 모르는 소리. 라일라의 행색이나 보고 말하시지. 그녀도 늙었어, 저 남자를 끼고 등장한 순간부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새로운 가십거리를 물어올린거야. 오, 라일라의 젊은 애인 봤어? 돈을 바라고 달려든 불나방이 또 있더라구, 블라블라… 뭐 이런 얘기 하겠지."
정말… 역겹네, 사랑이란 건.
그렇지 않아? 그렇게 대단하고 숭고한 것이면 다들 그리 함부로 말할 게 아닌데 말이야. 인상을 찌푸린 지민이 조소를 흘렸다. 성현… 내가 사랑에 빠진다면 어떨 것 같아? 난 그게 궁금해. 날 살게 하면서, 그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그런 거 말야. 사랑은 그렇다던데? 다들 그렇게 떠들어 대던 걸. 어쩌면 사랑은 함께 죽어가는 그런 것일지도 몰라… 낭만적이지. 시작과 끝이 함께라는 거잖아. 상대의 끝, 그 비루한 순간마저도 사랑하는 것이 낭만적이고, 그러나 동시에 추해. 뭐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걸까? 대체 뭐가 있길래, 그렇게 모순적이고 허점투성이인 것에 목숨을 걸게 만드는 걸까…
라일라의 새 애인은 의외로 저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실은 국적을 한번에 파악하기 힘들게 생긴 얼굴이었다. 엄청나게 새하얀 얼굴. 그러나 밝은 머리칼에 몸에 밴 사교 매너. 생각보다 날카로운 눈매와 얇은 입술로 잘 웃지 않는 그 사내는 라일라의 측근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곤 거대한 통유리 창 앞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이내 고개를 든 남자와 지민의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였다. 새카만, 소음 없는 눈동자. 지민은 스위티가 늘 그랬듯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까딱였고, 그 남자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나른하게 웃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
'Hi, Sweet sweetie.'
-
눈을 피했다. 손가락이 꿈틀했다. 스위트 마티니가 뇌를 녹여버렸나. 손 발이 저릿해… 무의식의 반응, 어떤 미지의 것을 조우했을 때 느끼는 심박수의 증가. 피가 빠르게 도는 것이 느껴졌다. 지민은 어쩐지 그의 스위티가 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에게 스위티는 욕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스위티를 알고 있다. 계산 범위 바깥의 남자. 새까만 고요의 눈을 가진 묘령의 인간. 지민은 스위티 마티니를 연거푸 들이키며 슬며시 눈을 피했다. 손 끝이 찌릿거린다.
02.
라일라의 자선 파티. 월 스트리트의 누구라도 초대장을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
라일라 코스메틱을 선두주자로 내세운, 통칭 L&L 컴퍼니의 회장격인 여성. 그녀는 바닥부터 시작한 성공 스토리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스스로를 매스컴에 꾸준히 알린 타고난 수완가였다. 그녀가 매해 베푸는 선행으로 인해 미국은 그녀를 신뢰하고 그녀의 것들을 사랑했으며… 그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곧 미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는 웃지 못한 명언까지 나돌았다. 지민은 그런 라일라의 절친한 친구인 '메리'의 딸에게 입양된 외손자였다.
지민은 머리가 비상했고, 늘상 사람을 레고 분해하듯 심심풀이 삼아 쪼개어 보곤 했다. 어떤 한 개인의 취향, 습관, 지병, 거짓을 말 할 때의 제스처, 그리고 그에게 풍기는 뉘앙스들이 지민에게는 퍼즐처럼 짜맞추어졌다. 그래서인지 지민은 늘 또래보다 많이 아는 소년이었으며 조숙한 미성년이었다. 그것이 때론 오만함으로 비추어질 때도 있었으나 지민의 분석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로저스 씨는 예쁜 들장미를 키우잖아요. 정원사를 들이지 않고 집사에게 관리를 부탁한다는 것 보니, 식물을 좋아하는 것 같진 않고, 딸인 로지를 위한 것 같던데… 다음 번 파티에는 노란 장미를 사다 로저스 씨에게 선물해주세요. 로지가 가장 좋아하는 장미랬어요. 곧 그녀의 콩쿨이 있잖아요. 이번 참에 그녀의 곡 하나를 받아오죠, 이번 공연에 추가하면 좋겠어요. 지민의 확신은 어느 정도의 논리와 추론에 기반했다. 단지 설명하기가 귀찮은 뭇 어른들에 의해 ‘눈치가 빠르다’라는 애매한 단어로 뭉뚱그려졌을 뿐이었다. 지민이 미국에 입양되었을 때부터 쭉, 이 더러운 토끼굴인 월 스트리트에 함부로 빠져들면 안 된다는 것을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지만 메리는 지민을 기꺼이 그 피 비린내와 악취, 그리고 고급 향수의 향내가 공존하는 금융권 한 가운데로 던져 넣는 것에 찬성했다. 지민을 싸고 돌지 마. 그 애는 재능이 있어. 그녀의 확신 또한 그녀 나름의 논리와 추론에 기반했다. 열 여덟 입양아가 메리의 눈에 들었다. 그야말로 센세이션한 일이었다.
지민이 열 둘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먹었던 눈칫밥은 미국에 입양이 되어서야 빛을 발했다. 국내 국지의 재벌 기업 장남이었던 사내와 스물 하나의 재능있는 무용수였던 여인. 아버지는 끝내 알량한 사랑 하나 지키지 못하고 어머니를 버렸지만 어머니는 지민을 버리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이지 않고 그를 낳았다. 그것만으로도 지민은 태어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머니를 동경하고 사랑했고, 동시에 아버지를 증오했다. 무용을 배워야겠다고 느낀 것은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날 때부터 어머니의 목숨 하나를 앗아간 생명. 스물 하나의 꽃다운 무용수가 그렇게 졌다. 뱃 속에 든 아비 없는 자식 하나 살리겠다고 그렇게 했다. 꼭 저처럼 아름답고 달콤한 지민을 세상에 개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덧없이 스러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머니의 그것 또한 사랑이었음을 알려주지 못했기에, 지민은 그저 얼굴도 못 본 제 죽어버린 혈육의 꿈을 어설프게나마 이어주려 미국에서의 고상한 취미로 무용을 배우기로 한 것이었다. 취미? 이왕이면 눈에 띄는 게 좋죠… 무용 어때요, 메리? 난 그게 좋아요. 왜냐구요? 그냥… 예쁘고 불안하니까.
이게 뭐가 그리 좋다고. 고작 이깟 잡스러운 것이 뭐가 그리… 중얼중얼 말을 뇌까리며 지민은 맨발로 무대에 서서 날아드는 장미 꽃잎 사이로 웃어보였다. 숨이 차올라서 흉통이 오르내린다. 손 끝부터 발 끝까지 심장 박동이 느 껴진다. 인사를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수많은 장미 꽃잎이 깔린 바닥과 하얀 발이 보인다. 그녀의 두 발은 나의 발보다 훨씬 험했을까. 그녀는 이 잡스럽고 별 것 아닌 행위에. 이렇게 5분 남짓을 몸을 부수고 숨을 쪼개는 행위를 사랑했을까. 이 두 발로, 싱그러운 꽃 같은 얼굴로 그렇게 살았을까.
제 엄마를 죽여 태어난 독한 것. 사랑보다는 증오를 먼저 배웠고 혐오를 피부로 체득한 소년. 그렇게 지독히도 불우하고 불행했던 소년은 영민하지만 그 속을 모를- 묘하게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 무용수가 월 스트리트의 가십 가운데에서 활개를 치는 주인공이 되었다.
'메리의 후계자' 라는 타이틀.
그 타이틀은 마치 호텔 프리패스용 VIP카드 같았다. 사교계에서의 모두가 저를 보면 놀라움을 표하며 웃어보였다. 메리의 후계자라고? 너무 어린걸. 그의 젊음은 무기가 되었다. 어느 여름날 누군가 제 눈에 건 안대를 스르르 풀어준 것처럼 지민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떴다. 욕망이 선연하고 타인의 질척한 시선이 따라붙는 사교계에서 지민은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알았다. 한 여인의 생명이 깃들어 꽃답게 피워낸 것. 질척한 시선을 받아내면 곧 질문이 따라왔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오, 비밀이에요. 우리는 아직 가깝지 못하니까. 그러나… 당신과 내가 가까워진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스위티가 되겠어요.
모두가 지민을 스위티로 부르기를 원했다. 지민은 모두의 스위티였고,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도 진정한 스위티로 살지 못했다. 그는 진짜 사랑 가짜 사랑 같은 … 이니미니마니모 어쩌구 같은 그런 수수께끼 같은 것들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트루 러브, 그것이 행복의 척도라면 지민은 여전히 한국의 그 불행하고 더러운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몸만 자라난 성인이었다. 더러운 것은 죄다 배워버린 성인이었고, 사랑 같은 미지의 영역에서 수줍고 서툰 것은 여전한 미성년이었다. 스위티의 그 묘한 분위기를 모방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의 것은 찰나인만큼 아름다웠기에.
03.
"아름다워요."
"…"
"당신은 너무 독하게 아름다워서 질리지가 않아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남자의 말이었다. 지민은 그 남자를 잠깐 사랑했다. 물론, 그의 성품이라던가 하는 플라토닉적이고 모럴 가득한 그런 것 외에…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재력과 그가 가진 것을 한때 잠깐 사랑했었다.
"스위티, 여전히 그렇게 방황중이야?“
인상을 찌푸린 성현이 지민의 목 언저리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고는 툭 말을 뱉었다. 지민은 슬 웃음을 머금고는 스위트 마티니를 홀짝인다. 보여? 가린다고 가렸는데, 유감인걸. 성현의 표정을 힐긋 올려다본 지민이 까르르 웃었다. 성현, 왜 그래. 내 베이비시터라도 될 셈이야?
옷을 벗고 체온을 나누고, 잠깐의 하룻밤이 모이고 그 사람이 내게 온전히 마음을 쓸 때. 그래서 나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멍청한 상태가 될 때가 가장 좋아. 나는 그런 상태의 멍청이들만 사랑해. 복잡한 건 질색이야.
"기억해? 내가 했던 말."
나는 사랑, 그거 자주 해.
내가 만나는 사람보다 더 빛나는 사람이 오면 말야. 나는 그의 시계와 차, 가진 것을 사랑하게 돼. 눈썹을 슬쩍 들어올린 지민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게 나쁜걸까? 내가 사랑을 자주 하는 것 말야… 사랑을 왜 그렇게 거창하게만 생각해. 에로스도 사랑이고 플라토닉도 사랑인걸. 욕정도 애정도 애증도 모두 사랑이야.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누가 내렸지? 그건 신만 할 수 있는 일인데. 성현의 사랑은 플라토닉이야? 에로스? 아님 그 사이의 무언가야? 나른하게 웃던 지민이 이내 표정을 싸하게 굳히곤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필요한’ 사랑만 해. 그게 내 사랑법이야…
"스위티, 그게 정말 사랑이라 생각해?"
"아니, 나는 어쩌면 사랑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몰라. 나는 너무 외롭거든."
"…"
"세상이 날 외롭게 해, 그래서 나는 자주 사랑하고… 자주 사랑받는 거야."
시선을 돌리면 널따란 창을 가득히 채운 도시의 야경이 온몸으로 쏟아져 내린다. 지민은 종종 그 풍경을 보며 항상 헛된 공상에 빠지곤 했다. 수억 번 사랑을 하면, 가장 높은 곳에 가게 될 것만 같은. 정신없이 침대 위에서 더운 숨을 뱉으며 질척한 키스를 하고 나면 뭐든 해결이 되어있는 지극히 어른스럽고 더러운 마법. 스위티는 샐쭉 웃으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저주에 걸린 걸까? 사랑을 하면서도 외로운 저주 말야.
04.
라일라의 자선 파티는 삼 일동안 이어지는 호화 파티이기 때문에, 주요 셀럽이나 다양한 인사들은 그녀의 더블 엘 호텔에 대부분 투숙하게 된다. 그날 밤도 꼭 그랬다. 평범한 여타 파티들과 비슷한 밤이었다.
발코니에 서서 서류를 대강 넘겨보며 스파클링 와인을 홀짝였다. 바람이 부는 곳이 좋았다. 귀가 멍멍해지도록 순식간에 조용해진 이 도시의 분위기도. 새벽 세 시의 뉴욕은 지민에게 고요하게 느껴졌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그 수많은 벌레들의 부재. 지민은 얇은 가운을 입고 발코니에 아슬하게 서 있었다. 쇄골을 타고 가슴께를 지나 가운 전체를 펄럭이는 밤바람에 옅게 웃음이 나왔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새벽 세 시의 뉴욕에 깨있던 건 지민뿐만이 아니었던 건지, 옆 발코니에서 웬 남자가 무심하게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똑같이 샤워 가운을 걸친 남자는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고개만 돌려 지민을 응시했다.
그 남자였다. 라일라의 새로운 애인. 하얀 얼굴이었다. 머리카락 색은 백금발에 가까운 밝은 색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새카맣고 깊었다. 그는 웃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동안 지민의 눈동자를 그의 눈에 새기는 것처럼 빤히, 시선을 맞춰올 뿐이었다. 그의 가운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몸보다 그의 묘한 얼굴에 더 눈이 갔다. 저 심연의 무언가 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다정했다. 누가 나를 이렇게 거리를 두고 찬찬히 봐 준 적이 있었던가. 섹슈얼한 것을 내포하지 않은 담백한 시선. 지민은 제 속에 든 것을 죄다 헤집고 끄집어내 보여주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처음 보는 이름 모를 사내에게 지민은 그토록 무방비하고 싶었다.
남자는 옅게 미소를 띤 듯 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은 와인이 있어요. 마셔볼래요? 그의 입술에 시선이 꽂혔다가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고민했다. 저걸 순수한 의도로 받아야 해? 그럴리가. 호텔 옆 방, 좋은 와인이 있다며 달콤하게 웃는 남자. 지민은 자주 사랑에 빠지는 타입이었기에 그토록 가벼운 사랑에는 도가 터 있었다. 이렇게 스파크 튀듯 한 눈에 끌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호텔 룸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들어와 저를 멋대로 다루어주길 바랐다. 심장이 목구멍을 두드렸다. 원치 않는 말들을 뱉어내도록 부추겼다. 당신은 라일라의 애인 아닌가요? 그녀를 두고 왜 혼자 룸에 있는거죠?
아무렴 어때. 라일라의 애인이라는 것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유명인의 애인과의 스캔들은 모 아니면 도, 라일라의 애인과 불륜은 어쩌면 이미지에 타격을 줄 지도 모르지만… 이 남자에게 만큼은 계산기를 들이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 남자는 충분히 예외적이었다.
"스위트한 취향일 것 같아서."
짧은 멜로디와 함께 열린 옆 방의 문 너머에서 그 남자가 천천히 걸어나오며 말했다. 가까워지니 그에게서는 은은한 허브 향이 났다. 조금 젖어있는 머리와 그보다 더 축축하게 젖어든 눈빛. 손에 든 와인은 비교적 달다고 정평이 난 레드와인이었고, 지민은 평소에는 그토록 잘 하던 매혹적인 시선 처리도 잊은 채로 그의 얼굴만을 빤히 올려다 볼 뿐이었다. 이윽고 남자는 목소리만큼이나 울림을 주는 듯 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봐요, 내 얼굴 닳겠어. 지민이 레드와인을 받아들자 그 남자는 복도의 벽에 살짝 기대 선 채로 지민을 지그시 내려다 본다. 당신과 내가 같은 것을 기다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만큼이나 달콤하지만 당신만큼 기묘한 것. 어쩌면 설명할 수 없는 육감적인 행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스위트 쪽에 가까워요."
지민이 나직하게 속삭이곤 고개를 기울인 채로 입술을 맞댔다. 아주 충동적이었으나 동시에 계산적이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밀어내지 못할 정도로만. 혀를 질척하게 섞는 것도 아니었다. 간만의 버드키스, 제법 담백한 입맞춤. 그 묘한 남자의 입술에서는 정말로 레드 와인 맛이 났다. 곧이어 혀가 달큰하게 들어왔다. 조금 놀란 듯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상치 못하게 구는 남자의 행동이… 굳이 형용하자면 좋았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처럼, 또 혀가 녹아버릴 만큼 달았다. 남자는 짧은 키스가 끝난 후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웃었다. 스위티, 당신 입술이 달아요. 지민은 고개를 들어 그 남자의 입술을 혀로 할짝이며 나른하게 말했다. 당신 입술도 달아요. 섹슈얼한 어필이 내포된 행동이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라일라의 애인이라는 점이 걸리긴 했지만 그는 앞뒤 잴 것 없이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픈 남자였다. 그 또한 무방비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방비하군요.
“나를 낮에 스위티라 부르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밤에 나를 스위티로 부르는 건 조금 어렵죠. 어때요? 오늘 밤에는 당신의 스위티가 될까요? 지민이 샐쭉 웃으며 속삭였다.
제법 능글맞은 듯한 남자는 슬쩍 웃으며 입술을 한 번 더 맞추곤 속삭였다. 남자의 눈이 어딘가 가라앉은 것 같아 지민의 눈썹이 꿈틀했다. 내 것이 아닌 것과 잠드는 취미는 없어서. 남자의 하얀 손은 지민의 허리를 쓸었다가 얼굴을 매만졌다. 뽀얀 볼이 남자의 손끝에서 눌렸다가 제 모양을 찾았다. 지민은 거부당했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고 무엇보다 거절 당했다는 창피함보다 아쉬움이 울컥 올라오는 제 심리 상태에 놀라고 있었다.
“…당신의 것은 라일라인가요?”
“…”
“하, 뻔하고 시시하네요. 라일라…그녀와는 진짜 사랑을 하나보죠?"
이런 레드 와인도 좋지만 나에게 줄 청첩장이나 꼭 챙겨야겠어요, 당신은. 분홍빛 편지지에 레이스도 주렁주렁 달아서요. 유치한 고등학생처럼 한껏 비아냥거리다 문을 도로 닫으려 몸을 돌렸다. 기만당한 것 같아. 그렇게 다정한 눈을 하고서는. 보기 좋게 낚여 올려져 목이 매인 듯한 불쾌감. 남자는 손을 뻗어 문을 잡고는 느릿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라진 것도 귀여우니 좋지만, 스위티- 내 이름은 민윤기에요.”
“그걸 왜 알려주죠? 앞으로 볼 일 없을 것 같은데요, 우린? 아, 당신의 결혼식에서나 보려나?”
“결혼식? 뭐… 그럴 수도 있죠. 기억해둬요. 앞으로 줄기차게 당신을 귀찮게 할 것 같으니.”
남자는 키득거리며 지민의 입술에 얕게 버드키스하곤 무심한 듯 말을 덧댄다. 나의 것은 라일라가 아니에요. 라일라에게는 와인을 선물한 적이 없거든요. 진짜 사랑 같은 단어를 알고 있다니 귀엽네요, 스위티. 내일 또 봐요.
닫힌 문을 두고 지민은 한참을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혼란스러움과 단어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라일라의 애인이 아니었나? 외도? 대체 무엇이지? 아니,
그보다 내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갛지?
양 손으로 얼굴을 식히며 퀸 사이즈 침대에 몸을 뉘인 지민은 살갗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이불을 구겨 잡았다.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내 표정이 어땠지? 너무 멍청해보이진 않았으려나. 키스는 황홀하게 하던걸, 제법 날리던 남자인걸까. 어쩌면 라일라같은 사람들만 잡아채는 콜보이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
마치 장난감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입 안에서 말을 굴렸다. 입 밖으로 내밀면 누군가에게 벌을 받을 것만 같은 못되고 앙큼한 말. 그러나 사춘기 소년처럼 순진무구하고도 투명하게 야릇한 언어.
-
…다시 한 번 키스할 수 있을까, 아주 질척하고 숨 찬 키스로. 못 견디게 달콤하게.
-
어릴 적 어른들 눈을 피해 먹었던 싸구려 솜사탕처럼 단어가 너무 달았다. 혀가 녹아 흐물거리고 뇌가 끈적해지는 기분. 독점 당하고 싶은 기분. 한 곳에 묶이고 매여 영원히 종착하고 싶은 기분. 그가 사랑이라는 것으로 저를 옭아매는 상상을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것도 사랑으로 쳐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 그 묘한 남자의 것이 되어… 질척한 진심이 오고가는 그런 달콤한 키스.
05.
파티가 진행되는 내내 민윤기라는 사내는 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조금 서운해질 정도였다. 마치 닳고 닳은 것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순전히 지민의 생각이었다) 윤기는 조금 오만해 보일 정도로 지민에게 매몰차게 굴었다. 샴페인을 나눠 마시는 자리에서도 모두와 눈인사를 나누던 지민이 유일하게 말을 트지 못한 것은 윤기였다. 윤기는 지민이 섞인 무리와는 섞이지 않으려 들었고, 라일라는 그런 윤기 옆에 딱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루 종일 그의 행동이 지민의 속을 긁었다.
“스위티-”
“아, 미스터 스콧…”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지민이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말 섞을 사람, 편한 사람 없나. 젠장. 스콧은 노령의 대부호였지만 파트너에 대한 예의는 글러먹은 작자였다. 손은 툭하면 파트너의 몸을 더듬어 여러 유명한 파티에서도 선호하지 않는 방문인이었다. 스위티가 사람 가리는 일이 있어? 메리의 말에 지민이 겁 없이 뛰어들었던 사교계의 첫 상대가 스콧이었다. 스콧은 스위티에게 푹 빠진 것은 확실했으나 노리개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도 손은 슬그머니 스위티의 허리로 향했다.
“아. 스콧, 다들 쳐다본다구요.”
“스위티답지 않게 거부하는 건가? 그 쪽도 나쁘진 않지. 앙칼진 것도 좋아.”
“라일라의 파티에서 잡음은 좋지 못해요, 스콧. 오늘은 내가 기분이 별로라. 나는 스콧의 호스티스가 아닌 걸 알잖아요?”
우악스러운 손길을 잡아내리는 지민의 말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스콧의 손은 점점 내려가 지민의 엉덩이 위쪽을 쥐어잡았다. 찌릿한 감각에 지민은 숨을 꾹 참았다. 팽팽한 정장 바지 위로 뜨끈한 손이 엉덩이를 주무르듯 움직였다. 스위티. 앙칼진 건 좋지만 건방진 것 좋지 못해. 내가 참을성이 별로란 건 알텐데. 젠장, 노망난 노인 같으니. 늘상 이런 작자라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지만 라일라의 수행비서가 라일라를 향해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라일라의 곁에 서 있던 윤기가 고개를 돌리곤 지민을 한참 응시했다. 목 뒤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그의 까맣고 고요한 눈에 의해서 모두 내보여진 기분.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른 이들은 괜찮았다. 나는 모두의 스위티니까. 그러나 그는 모두의 스위티인 지민을 거부한 첫 상대였다. 그리고… 차마 그를 정의하지 못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한 번도 내가 걷는 길이 수치스럽지 않았는데. 내 가벼운 사랑들과 그 수많은 밤들이 부끄러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는데. … 당신이 뭐길래 고작 어제 만났으면서 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건지. 내가 살아남는 법을 이토록 하찮게 느껴지게 하는 건지.
입술을 콱 짓이기며 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스콧을 밀어낼 재력이 없었다. 그게 가장 분했다. 견디자, 견뎌야 올라가니까. 지민은 참을성있게 눈을 감았다. 아마 라일라의 파티에 온 모두가 저를 가십거리로 씹어댈 것이다. 스캔들의 주인공, 사랑을 팔고 돈을 얻는 저급한 놈. 견뎌야… 견뎌야만. 아, 젠장. 울 것 같잖아. 내 인생은 결국 구질구질해. 한국에서는 그 운명이 구질구질했고 이 빌어먹을 뉴욕에서는 살아남는 생리가, 그 수단이, 너무 구차하고 구질구질해. 지민은 입술을 아프게 물어대며 스콧의 손바닥에서 나오는 역겨운 온기를 받아내고 서 있었다. 꼿꼿한 암초처럼. 우는 암초가 세상 어디에 있겠냐마는 지민은 울고 싶어졌다.
“미스터 스콧?”
“…?”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스콧의 손은 지민의 둔부에서 떨어졌고, 지민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그의 품에 안기듯 보호받고 있었다. 누구지? 지난 달에 손 봐둔 그 주식회사의 둘째 아들? 아니면 그 패션쇼의 모델인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대부호의 모욕적인 행동에서 저를 구해줄 만큼 무모하고도 다정한 이는 없었다. 대체 누가… 시원한 향이 목덜미에서 나는 남자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허브향이 잘 어울리는 하얀 얼굴이 있었다. 윤기의 단단한 팔이 지민의 허리를 감아 안고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웃고있었다. 그래, 그는 웃고 있었다. 마치 제 공주를 찾은 왕자처럼 당당하고 영웅적인 얼굴로.
“스위티를 모르나보군. 새로운 얼굴인 것 같은데.”
“스위티를 모르는 건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쓸모가 없는 말인 것 같군요. 라일라의 자선 파티에서는 누구도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허, 젊은이가 혈기가 왕성한 건 알겠지만… 스위티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구. 사교계는 처음인가?”
“무지한 사람도 당신의 손길이 모욕적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여기 세상 물정 모르는 정의로운 피터팬이 또 있군. 스위티가 어떻게 저 자리까지 올랐겠나? 응? 동양인 나부랭이가 돌연 사교계에 뛰어들었을 때는 메리의 후계자란 소리에 다들 그를 비행기 태웠지. 그래, 그런데 그 다음은? 날고 기는 선수들 사이에서 스위티의 포지션이 어디였다고 생각해?”
아, 제발. 지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하지 마, 이 늙다리야. 지민은 윤기의 품에서 양 손을 덜덜 떨었다. 분노와 모멸감. 자기 혐오와 합리화가 뒤섞여 오는, 또렷하게 빛나던 가치관의 혼란.
“스위티는 우리의 인형이야. 모두의 인형. 그의 무용을 본 팬인가? 스위티의 팬들 중에서 당신같이 이상에 빠진 꼬맹이들은 트럭 세 개를 꼬박 채울게야. 그는 모두와 사랑을 하지. 자네의 그 영웅적인 행동도 스위티에겐 호구 잡힌 놈의 발악일 뿐이란 거야.”
“언사는 여전히 무례하시네요, 스콧 씨. 그건 스위티의 무용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라고. 아, 아니면 당신도 스위티를 가지고 싶은가? 그럼 그를 가지게. 내 오늘밤은 혈기왕성한 자네에게 양보하도록 하지.”
스위티, 제법 인기가 좋군 그래. 그렇지만 젊은 놈은 속이 비었단 걸 알잖아. 마음 풀리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킬킬대며 저질스러운 농담을 던진 스콧은 손을 뻗어 지민의 허리를 툭툭 두드리곤 자리를 떴다. 윤기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든 순간이었다. 지민은 양 팔로 그를 세게 밀치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놔, 놔요. 난, 난 아무것도… 나는…”
“스위티, 괜찮아요?”
“난… 난 정말…”
제대로 된 언어를 상실한 기분이었다. 변명? 핑계? 혹은 뻔뻔함? 상황을 개선할 만한 선택지가 없었다. 윤기의 눈에 비춰질 스스로가 충분히 못났고 구질구질했다. 지민이 울컥 쏟아지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젠장, 이번 파티는 끝장이야. 병신처럼 울기나 하고.
“...스위티. 울어요?”
“오지 말아요, 충분히, 충분히 좆같아서 죽고 싶으니까.”
“스위티, 그렇지만-”
말을 씹어뱉듯이 하며 얼굴을 자꾸만 문질렀다. 고개를 들어 윤기의 얼굴을 확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찡그린 표정은 무엇을 뜻하더라? 분노, 증오, 짜증, 귀찮음… 아, 혹시, 동정이려나. 이럴거면…, 처음부터 당신에게 입 맞추는 게 아니었는데. 어젯밤부터 내가 돌아버린 게 틀림없어. 그렇지?
“스위티, 울지 말아요. 놀랐어요? 나랑 잠깐 호텔로 돌아가 쉬어요.”
“왜요?”
왜 나에게 그리 다정하게 구는 거죠? 당신도 나를 원해요? 당신의 스위티, 그런 좆같은 별명, 당신도 필요하냐구요. 아니면 사랑? 다 줄 수 있어요, 나는. 나는 그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그런 것 밖에 몰라, 난. 나를 동정하는 거죠, 지금? 지민은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독하고 쓴 물이었다. 입술을 죄다 짓무르게 하고, 그 심장을 끈적하게 녹여버리는 것. 한국이 태생인, 어미의 목숨을 틀어쥐고 나온 동양인 청년, 박지민의 언어는 그랬다. 스위티의 언어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민윤기 씨, 나는 평생을 다해도 온전한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어요. 지민은 몸을 비틀어 입술을 짓이긴 탓에 고인 핏물을 내뱉곤 일그러진 얼굴로 속삭였다. 나는 나를 조각내서 사랑했거든. 나는 모두의 스위티니까, 모두에게 나를 나누어 줬어요. 당신이 바라는 동화 속의 온전한 사랑 같은 건 없어. 그냥 조각조각 걸레짝이 된 내가 있을 뿐이지. 지민은 악에 받친 표정을 하며 웃었다. 뭐? 성공에 눈 먼 내가 더러워? 좆까라 그래, 나만큼 열심히 구르고 뒹군 새끼가 여기 있을 것 같아요?
내 사랑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아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제발. 나한텐 사랑 같은 거 향수나 립스틱 같은 사치품이고 소도구일 뿐이야. 입술을 아득 깨문 스위티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윤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겼다. 스위티의 뒤를 쫓는 발걸음은 단단하고 주저함이 없었다.
06.
병신. 양 손으로 세팅한 머리를 헝클어버리곤 뉴욕의 S백화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뉴욕에서 한적한 곳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을 뿐더러, 그 빌어먹을 장소에서 벗어나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청승떨고 있고 싶지 않았다. 스위티는 늘 너무도 외로웠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파도가 늘 스위티를 외롭게만 했다. 사실 지민은 어느 한 곳에서도 오롯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국에서도, 심지어 이 뉴욕 바닥에서도 하얀 몸과 붉은 입술을 사랑할 이는 있을지언정 더러운 속까지 까뒤집어 사랑해줄 이는 하나도 없음을……
욱, 올라오는 울음을 몇 번이나 삼켜냈다. 지민은 이방인이었다. 그는 늘 이방인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저들만의 소속을 가진 이들이 환하게 웃어왔다. 가족, 연인, 친구… 가진 것 없는 지민은 늘 이방인이었다. 울타리 하나 없는 곳에 서 있는 개체.
백화점은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조금만 걸으면 관광객들과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붐볐으나 층수가 높아질수록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사람들의 옷은 값비싸졌다. 이내 지민이 스카이 라운지에 앉아 난간을 쥔 채로 숨을 들이마셨을 때는 지민의 주변에 그 누구도 없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은 했었다. 나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당신들의 스위티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그 애정의 파도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에게도 다정을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이 하필 라일라의 자선 파티, 그렇게 수많은 가십이 오고가는 곳에서 울음으로 터져버리는 것은 판단 미스였다. 완전히 웃음거리가 될 거다.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그저… 그저 행실 가벼운 어린 놈의 객기 정도로 취급당하겠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고급 에나멜 구두에서는 광이 났다. 뽀얀 두 볼과 입술 언저리까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은 충분히 따듯했고 온전한 지민의 것이었다. 스위티가 흘려야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지민은 오롯이 스스로의 운명을 동정하며 울었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나에게, 이렇게라도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하는 위로.
스위티는 가엾게도, 늘 외로워.
07.
“스위티, 한참 찾았잖아요.”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어렴풋이 당신이 잡힌다. 헛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그 모든 상황을 보고서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다정하고 확신 가득한 얼굴로, 어떻게.
자꾸 못난 얼굴로 울게 된다. 숨을 깊게 내쉬려고 해도 자꾸 뚝뚝 끊긴다. 윤기는 마치 익숙한 듯이 손을 내밀어 지민을 품에 안고 속삭였다. 괜찮아요, 더 울어도.
머리를 울리는 말이었다. 어쩌면 나를 더 울게 하는 말이었다. 아, 어쩌면 당신은 운명이 내게 준 ‘위로’같은 것이었을까. 당신은 나를 위해 준비된 유일한 나의 울타리였던가. 소속감을 주는 무언가, 운명 같은 나만의 것…
그랬기를 바랐다. 신과 친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신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나를 뒤쫓아온 민윤기와 눈이 마주친 찰나, 그 짧은 시간동안 수없이 애원했다. 나에게도 만약 남은 ‘행운’이나 ‘위로’… 아니, ‘사랑’ 따위가 있다면.
양 손으로 윤기의 목에 팔을 감아 안았다. 제 멋대로 굴었다. 스위티가 아닌 지민의 의지로 그렇게 했다. 내게 남은 사랑이나 그런 낭만 비슷한 것이 있다면,
꼭 이 사람이기를.
윤기는 눈물로 젖은 지민의 볼을 쓸어주다 그의 허리를 감싸안아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이렇게 있어줄게요… 허리를 꽉 안고 놓지 않는 지민의 등을 토닥여주다 그의 머리칼에 입술을 지그시 눌러 맞추며 윤기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의 체온이 위로로 다가왔다. 그의 다정한 손과 뛰어온 건지 조금 불규칙적인 숨, 그리고 머리카락에 닿는 따듯하고 온전한 입맞춤에 지민은 비로소 온전히 무언가에 소속된 듯한 감상을 느꼈다.
“당신의 것이 되고 싶어…”
나는 너무 외로워서, 너무 아프게 외로워서… 뒷말은 차마 뱉지 못했다. 지민의 말에 윤기는 살며시 웃으며 입술을 맞대왔다. 간간이 떨어지는 입술과 호흡 사이로 다정하기 그지없는 말을 섞었다.
얼마든지요, 나의 스위티.
08. Suga - r
“잘 봐둬, 곧 나오니까.”
“누가요?”
“메리의 입양아.”
“오…”
“표정이 왜 그래?”
아, 같은 처지라 신경쓰이는거야? 라일라는 늘 그렇게 빨간 입술 끝을 한쪽만 올려 웃었다. 카메라들 앞에서는 양 쪽 입꼬리를 쉼없이 올리며 상냥히 웃었지만 적어도 윤기에게만큼은 그렇게 도도하고 당당하게 피식 웃었다. 윤기는 고개를 까딱하곤 손목에 찬 스위스제 시계에 눈을 옮겼다. 향수 냄새로 메워진 공간이었다. 머리가 띵하게 아팠고 윤기는 이렇게 샹들리에가 달린 주렁주렁한 공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알량한 미술가의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었다. 윤기가 보고 듣는 것은 윤기의 손에서 그림으로 재탄생 될 때 가장 아름다워야 했다. 그는 본질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가 그린 그림 속의 매개물만을 사랑했을 뿐이었다.
같은 처지.
라일라의 말을 곱씹다 어깨를 으쓱하곤 분침의 움직임을 좇았다. 9시 42분. 이내 오케스트라가 잠잠해졌다. 모두의 숨소리와 웅성이는 소리가 백색 소음을 만든다. 윤기는 라일라의 입양아였다. 라일라는 그녀의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작’ 출산 같은 일 따위로 그녀의 커리어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라일라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녀의 회사를 물려받으란 뜻은 없었다. 단지 라일라는 라일라 그녀 만큼이나 영악하고 똑똑하지만 제법 감성있는 놈을 찾을 뿐이었다. 그녀는 남편과는 다른 일생의 동반자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의 작은 보육원에서 미술 천재로 이름을 날리던 윤기를 입양해 온 것이었다.
‘윤기, 민윤기? 이름이 제법 어려운 걸. 미국에서는 개명을 해야겠어.’
‘개명은 필요없어요. 저는 필명을 쓰니까.’
‘필명? 어린 게 제법 맹랑한걸. 좋아, 네 필명은 뭐니, 꼬마 화가님?’
윤기는 말없이 4B연필 끝을 캔버스 귀퉁이에 가져다 대고는 서명을 시작했다. 또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호한 손과 눈이었다. 그는 영문 필기체로 ‘S’를 큼지막하게 쓰고는 그 아래에 나란히 알파벳을 그렸다.
Suga.
‘슈거? 귀여운 이름이긴 하지만, r이 빠졌단다, 꼬마야.’
‘일부러 뺀 거에요. 미완의 단어가 훨씬 아름다워요.’
라일라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제법인걸, 넌 합격이야. 라일라의 그 말 한마디로 윤기의 인생 전체가 바뀌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골의 고아에서 미국의 저명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로또 당첨이나 다름 없는 허무맹랑 하고도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
“네 그 슬럼프 덕에 내가 이런 공연도 와 보는구나.”
“요즘 세상은…”
아름다운 걸 찾기가 힘들어서요. 다들 너무 팍팍할 정도로 완성된 것들 뿐이라. 윤기의 말에 받아치듯 라일라가 속삭였다. 미완의 아름다움이 없다? 윤기는 큭큭 웃으며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라일라의 붉은 입술이 즐거운듯 휘어졌다. 네 그 괴짜같은 성정에 만족하는 뮤즈를 찾는 게 더 어렵단다, 설탕 꼬마야. 라일라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윤기는 뮤즈를 잃어버린 예술가였다. 그는 현존하는 것을 아름답게 느낀 일이 없었다. 동틀 무렵의 태양도, 겨울 바다 지평선 너머의 그 온전하고 깨끗한 수평도 윤기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없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구, 미성숙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긋지긋한 갈증.
“오, 공연의 클라이막스야. 곧 스위티가 나오겠는걸.”
“스위티?”
윤기가 말을 굴렸다. 스위티. 라일라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것이 이 공연에서 가장 주목받는 무용수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그 무용수가 요즈음 월 스트리트의 뭇 젊은이들, 심지어 노신사들의 마음까지 훔치는 사교계의 꽃이라는 소식도. 스위티… 이름 따라 가는 건가. 그 가볍고도 발칙한 이름에 웃음이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올라오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그 달콤한 별명이 오르내렸다. 정말 스위티의 무대라구? 운이 좋은걸, 최근에는 공연을 가지지 않았잖아.
그러게 말야. 톰슨과 헤어져서 실의에 빠진 줄 알았더니. 스위티가? 스위티는 톰슨같은 놈들 오백명이 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위인일걸. 저들마다 낄낄대는 걸 보니 기분은 유쾌하다기 보다는 그 반대에 가까워져 갔다. 가십거리일 뿐이군그래. 하루종일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나랑은 안 맞아.
윤기가 그렇게 섣부른 판단을 내리곤 다시 벽에 걸린 고급 벽시계의 분침을 좇으려 할 때, 느린 멜로디의 선율이 흐르고 벨벳 커튼이 걷혔다.
어쩌면 그 눈일지도 모른다.
그 완벽하게 미완성의 경계에 있는 눈. 성숙과 미성숙의 공존. 소년인지 청년인지 모를 그 아름다운 것은 늘씬하게 빠진 몸으로 몸이 부수어질 것처럼 춤을 추었다. 손 끝이 공기를 만지는 것처럼 움직였다. 윤기는 숨을 참고 그에게 시선을 빼앗긴채로 멍청하게 무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스위티. 수십의 관중들의 시선이 오롯이 그 미성숙의 아름다운 몸에게로 꽂혔다. 아주 공개적이지만 은밀한 몸짓. 그는 마치 그런 사실이, 수백 개의 눈이 제 몸을 끈적하고 질척하게 훑어 내리는 것이 지극히 즐거운 놀이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의 입꼬리는 한 쪽만 올라가 있었다.
“…아름답네요.”
“뭐?”
라일라가 당황한 표정으로 윤기 쪽을 돌아보곤 혀를 쯧 찼다. 이런… 첫 눈에 반했다는 멘트를 치면 오늘 밤은 길거리에서 재울 줄 알아. 라일라의 농담 섞인 협박에 윤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길거리에서 잘까요? 라일라는 아주 즐거운 듯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을 하는 멍청이는 아닐 줄 알았는데… 뭐, 예술가는 그런건가? 마법같은 미완의 사랑? 어때, 쟤가 너의 뮤즈니? 라일라의 말에 윤기는 느릿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나는 그를 그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는 아름다워서, 내 좁은 캔버스에 온전히 담기지 않을 거에요… 그 미완성의 무용수가, 윤기, 저 스스로의 그림보다 아름다운 첫 본질이 되는 순간이었다.
피날레.
모두의 꽃이 그 작은 사람에게로 날아들었다. 장밋빛 비를 맞으며 내리는 꽃잎 사이로 스위티, 아니 지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무용수는 나른하게 웃었다. 기쁨에 도취된 것 같지 않았다. 공연을 무사히 해냈다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는, 오히려 무언가의 속죄를 위해 무용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죄책감과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부터 옥죄어진 것들에 대한 속죄. 마치 꿈을 꾸는 듯 풀린 눈과 약간 벌어진 입술, 쉼없이 더운 숨을 내뱉는 작은 흉통. 그 야릇하게 달뜬 표정이 아름다웠다. 상기된 두 볼에 대비되어 묵직하게 가라앉은 그 죄악감 묻은 서정적인 눈망울이 아름다웠다.
윤기는 꽃을 던져주려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라일라에게 말했다.
“얼마 있으면 자선 파티가 열리지 않나요?”
“그렇지. 올해도 엄청난 돈을 쏟아야겠어. 성가셔 죽겠다니까-”
“그 곳에는 월 스트리트의 모두가 모이겠군요.”
“그렇지. 너는 그 때쯤엔 오하이오에 있으려나? 네 이번 전시에도 꽃을 잔뜩 보내야겠는걸.”
“아뇨…”
몽환적인 얼굴의 그 무용수가 무대를 내려가자 윤기가 빙긋 웃었다.
“드디어,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낼 일이 생겼네요. 어때요, 라일라?”
“오, 세상에.”
라일라는 경악하는 표정을 짓곤 윤기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표정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설마 저 스위티 때문은 아니지?”
“뭐… 유감스럽게도 정확해요.”
지저스! 내 아들이 이런 표정도 짓다니!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 만나겠다고 네 그림 전시회를 포기하겠다고? 러브 액츄얼리야?! 라일라가 고개를 저으며 깔깔 웃었다. 라일라가 이런 극적인 러브 스토리의 매니아라는 것을 윤기는 잘 알았다. 그는 느릿하게 마주 웃어보이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그는 충분히 아름다워요…”
윤기는 무용수가 지나간 자리를 가만 쳐다보다 바닥에 흩어진 장미 꽃잎을 발로 대충 쓸어모으며 나른하게 웃어 보인다.
“…아름다운 나의 스위티로 만들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