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VENICE | 이탈리아 베네치아
Comforting ㅡ Venezia
w. 필연(@Pilyeon_twt)
“와, 예쁘다.”
어딘가 붕 들뜬 목소리가 공기 속으로 퍼져 청량하게 울렸다. 유려한 강물 곡선을 따라 건물 샛길 방향으로 한걸음 씩 나아가다, 이따금 곤돌라를 탑승한 현지인 또는 관광객과 눈이 마주치면 눈꼬리를 살짝 접어 올려 인사를 나누었다. 쨍한 햇빛이 물을 반사해 프리즘 효과를 낼 때면 대낮에 은하수를 보는 듯한 신비롭고 광활한 광경이 사방에 펼쳐졌다.
지민은 눈이 부신 것도 마다하고 카메라로 순간 순간을 담기에 바빴다. 동쪽 방향의 건물을 과거에 누가 지었고, 어떠한 역사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학습과 관련된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날아가지만, 지금 이 순간 저를 생생하게 스치고 지나간 철바람의 감촉만큼은 한평생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전부터 고수해오던 나름의 철학이긴 한데,
“…아빠는 평생 이해 못하겠지.”
그게 혼자만 떠난 여행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해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호의를 바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 줄 알았기 때문에.
셔터를 누를 때마다 여행의 기억들이 퍼즐 조각들로 저장되었다. 아치 모양의 아름다운 리 알토 다리를 건너며 그 위를 화려하게 장식한 아케이드 점포들을 멀찍이 서 구경했다. 은하수를 닮은 해수면을 건너며 곤돌라를 타고 보는 광장의 야경도 아름답겠지만 눈으로 대충 훑는 것은 느낌과 감정을 고스란히 받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른다. 간접적인 체험은 한국에서 배우는 세계 지리나 창체 시간에 진행하던 한국식 여행 교육, 이론으로도 족했다.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으면 다리 뒤로 보이는 웅장한 교회가 눈에 들어와 또 다시 셔터를 눌렀다. 천천히 다리를 산책하는 이들에게 서툰 이탈리아어로 전신 촬영을 부탁하면서 또 하나의 조각을 추가했다. 시끌벅적 하고 인구가 붐비는 대낮의 베네치아 광장. 지민은 그 풍경보다, 와인 없이도 운치 있게 베네치아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행위를 더 마음이 편안해 진다 생각하였다.
충분히 눈 휴식은 물론이며 사진까지 많이 담아서 만족할 즘, 지민은 당장 닥친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광장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유럽풍 건물과 작은 분수, 기타와 함께 들리는 감미로운 음색의 버스킹 뒤로 계단식 다리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는 음식점과 버스킹이 아니고도 귀금속과 가죽 제품 등을 파는 점포들,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관광객으로 붐볐다.
물론, 멍 때리고 있는 지민에게 휴대폰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게 계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Tre, due, Uno! (셋, 둘, 하나!)”
한 번의 촬영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완벽주의적 성격 탓에 두어 번은 다른 각도로, 다른 포즈를 요구하는 동시에 어떤 방향에서 찍을지 쉬지않고 구사했다. 그렇게 프로 급 사진 기술을 뽐내면, 관광객은 알아듣지도 못할 감탄사를 내뱉으며 표정이 활짝 피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 표정 변화를 지켜보자니 뿌듯했다. 아마도 신혼부부였는데, 부드러움과 투박한 억양이 함께 곁들여진 것을 보아 현지인은 아닌 것 같았다.
“Grazie Andremo! (감사했어요. 저희 그만 가볼 게요!)”
“Buon viaggio. (좋은 여행 되세요.)”
다시금 계단 구석에 주저앉아 종일 전원이 꺼져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알림이 밀려 있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골치 아픈 일이 얼마나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암전이던 휴대폰 화면에 드디어 빛이 들어오자 예상대로 휴대폰의 진동은 한순간에 몰아닥쳤다. 오죽하면 그 진동에 놀라 액정을 떨어트릴 지경이었다. 지민은 한국에서 날아온 문자를 일일이 확인할 기력도, 부모에게 말 없이 이탈리아로 떠난 경로를 설명할 마음도 없었다. 모든 게 충동이었다고 답하면 저를 정신병원에 밀어 넣거나 주치의를 불러 진료를 받게 할 것이 뻔했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물의 일렁임은 우울을 현상화 한 것 마냥 어두웠고, 그 빛깔이 멀리서도 선연하다. 제 감정이 담겨있는 것인지 혹은 위로라도 해주는 것인지 드리운 구름이 강물이 비춰졌다. 신비로운 잔상이 편안함으로 뒤바뀌어 저를 안아주는 느낌이다. 허공에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힘 오라기 하나 없는 몸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컨디션이 의식을 이겨 쓰러졌다고 하는데 사람이 독하게 살다 보면 그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 맞나 보다. 지민의 의식이 몸 상태를 이긴 지도 꽤 오래되었다.
반짝였던 아까와는 달리 이제는 감정 없는 눈으로 기계처럼 손가락을 움직인다.
찰칵, 찰칵.
한 장은 흔들렸으나 한 장은 보랏빛 파스텔톤 하늘이 그대로 담겨 꽤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늘을 목적으로 찍으려 했던 사진인데 생각보다 하늘과 함께 담긴 조연의 요소들은 많았다. 여러 보트형 점포들과 현지인들의 발걸음, 강물 양 옆으로 보이는 흰색 조형물들의 혼합.
최상의 교통로이자 독특한 시가지, ‘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도시.
이 곳은, 베네치아다.
Comforting – Venezia
W. 필연
[태형이] 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선생님들이 교무실에서 네 얘기만 하는데 듣는 내가 숨막혀 죽는 줄. 무슨 대화가 박지민에서 박지민으로 끝나냐.. 담임 네 출결에 빗금 가서 존나 빡쳤대. 그리고 너네 아빠 오늘 학교에 찾아와서 교장 만났다더라ㅠㅠ
참나, 학교 제일 가는 모범생 하나가 며칠 째 무단 결석하니까 어지간히 불안했나 보네. 조소를 올리던 것도 잠시, 늘 똑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한국의 일상이 떠올라 두 눈을 꾹 감았다. 지긋지긋한 느낌에 말려들기 싫어 태형의 구구절절한 문자도 더 읽으려다 포기했다. 나 멀쩡해. 담임한테 내 얘기는 하지 말아주라. 라는 짧은 문자를 끝으로 휴대폰의 전원을 꾹 눌러 껐다. 입 안 쪽의 여린 살은 얼마나 깨물리고 짓이겨졌는지 다 헐어서 스칠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다.
태초에 스프링 효과라는 게 있었다. 사회와 부모로부터 너무 강한 억압을 받으면 역으로 튕겨져 나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수렁에 빠지는 비행 청소년들의 관용적인 현상. 성적에 눈이 멀어 지민이 받을 압박은 신경도 채 쓰지 않는 과목 선생님들과는 달리, 으레 상담 전문 선생님들이 지민의 눈치를 보며 건네는 상투적인 말이 있었다.
“지민아, 지금 사는 게 정말 만족스럽니? 힘들진 않아?”
제 삶이 언급될 때마다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지민이 자신의 삶을 거머쥐고 있다면 그 거머쥔 삶을 멋대로 조종하는 사람, 호적 상 아버지로 기록된 우리 박의원님 이었다. 방송에 얼굴 몇 번 비추며 참된 민주주의에 대해 멋대로 정의 내릴 때부터 대국민에게 욕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류층 비위나 살살 맞추며 개도 아닌 개 꼬리 역할을 해대는, 호적 상 아버지로 등록된 친부모. 혈연으로 맺어져 피붙이 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는 환멸이 났다. 그 인간 이름만 들으면 속에서 토기가 올라오고 눈 앞이 아찔했다.
굳이 정리하자면 이랬다. 아버지는 보여지는 것에만 신경 쓰느라 늘 정치인의 사명감을 상실했고 그 희생양이 지민이었다. 아빠 명색이 정치인인데 아들 자랑 떳떳하게 해야지. 언론에서 자랑할 만한 일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열심히 좀 살아라.
탕, 지민의 삶에 울렸던 새로운 신호음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했어도 네 앞에 누군가가 달리고 있다면 넌 죽어.
아빠 말고는 보호자가 없으니 이 미친놈을 제지해줄 사람 또한 없었다. 밥 먹으라면 먹고 공부하라면 하고 시험보라면 보는 따라가기 인생을 살았다. 와중에 아버지는 선거 시절을 맞아 궁극적인 목표를 상실한 공약을 무턱대고 내걸곤 했다. 물론 시민 의식을 상실한 시민 의원이라는 설정은 윗 대가리들의 환심을 사기에 더도없이 좋은 조건이긴 했지만.
아빠의 프레임에 맞춰져 억지로 씌워지는 가면에서는 거부감은 물론이며 역한 냄새가 났다. 18년동안 그렇게 살아왔다면 자식이라는 명목 하나만으로도 꽤 많이 순응하고 휘둘려준 것 아닌가. 과거에 젖어 흔들리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지민 딴 에는 베네치아로 떠난 여행이 죽기 직전 한 번 꿈틀거려 보겠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한 마디로, 지민의 환상적인 일탈은 아직까지 성공적이었다.
“Hai una stanza vuota? (빈 방 있어요?)”
“Mi spiace, ma questo hotel è pieno. La prenotazione è possibile solo dopo 3 giorni. (죄송하지만 호텔이 꽉 찼어요. 예약은 3일 후에 가능하세요.)”
“Hai un posto? (자리 있나요?)”
“Il nostro hotel accetta solo gli ospiti prenotati. (저희 호텔은 예약 손님만 받습니다.)”
아무리 두서 없는 여행이지만 묵을 숙소나 호텔 정도는 사전에 찾아볼 걸 그랬나. 밤하늘이 점점 암흑으로 물들여져 가는 반면, 예상에도 없던 취침 문제가 발생하자 지민의 목은 타 들어갔다. 지리 상 주변 지역에 있는 호텔은 이미 만원이었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자니 시간 낭비였다. 무엇보다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미래의 자신이 죽는 꼴밖에 더 안보인다. 새벽부터 내내 걸었던 탓에 무릎 부근은 물론 허리에서부터 통증이 밀려왔다.
“아… 존나 망했다…”
2시간은 족히 넘는 도보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안타깝게도 길 잃은 어린 양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고, 그 누구도 보호자 없는 홀몸 미성년자를 받아줄 만큼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이젠 사진을 부탁하는 사람도 없는데, 말 다했지 뭐. 다들 집이나 호텔로 이동해 따뜻한 물을 받아 고단한 몸을 녹이고, 가족과 웃음꽃으로 대면하여 인사를 나누고, 우정 여행을 온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인생살이의 회의감을 떨쳐낼테고, 커플 여행은 지금 시각으로 시작해 불꽃이 확 달아오르는 밤이 되겠지.
타인과 제 처지를 비교하는 게 가장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좀처럼 남의 상황을 엿보지 않을 수 없다. 서러운 감정이 울컥 이성을 지배할 때면 눈가에 절절히 맺힌 눈물을 소매로 톡톡 두드려 덮었다. 무릎에 물이 찰 듯 다리가 아팠으나 결국 또 다시 목적도 시간 제약도 없이 정처 없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자유 갈망에서 시작했던 당돌한 베네치아 행진이 처음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복잡한 시가지에서 얻은 것은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려 구매한 초코 범벅 젤라또 뿐이었다. 사람 발걸음이 드문, 외진 계단에 쭈그려 앉아 결국 이 곳에서 잠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외로워서인지, 혹은 상황이 상황인만큼 힘든데 의지할 사람 하나 없어서인지. 젤라또를 쳐다보다 서러움이 울컥 하고 몰려와 지민의 머리를 울렸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강압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휴식을 누리자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아무리 학생 신분이래도 명색이 국회의원 외아들이었다. 설마 여행에서 빈곤의 경험을 껴안고 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물론, 힐링 여행이 아닌 “가난은 힘들다” 라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터득한 것일지도 모르나 그게 이 여행의 교훈이 아니기 만을 바랐다. 보통은 가출을 통해 ‘집 나가면 개 고생’ 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살던데 글쎄, 지민에겐 한국에서 살았던 모든 순간이 개 고생이었다. 여행이나 한국의 삶이나 똑 같은 고생이라면 개 같은 아버지 얼굴 마주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일이 좋았다. 타기업 자제들을 만나면 가식에 저를 감출 일도 없어 좋았다. 그 새끼들이랑 악수하는 것도 소름 끼쳐. 그 손으로 얼마나 더러운 일이 일어났으며 그게 조용히 덮여진 걸 생각하면 대신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아, 씨…”
멍 때리던 중 차가운 액체의 감촉이 손에 닿자 화들짝 놀라 젤라또를 놓쳐버렸다. 덕분에 젤라또가 보기 싫게 뭉개진 것은 물론이며 양 손에 진득하게 묻어 배낭을 열 수조차 없는, 말 그대로 끈적함에 의해 결박 당한 느낌이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젤라또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행히도 우겨진 젤라또를 깔끔히 처리할 만한 휴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계단 아래서 물이 가득 담긴 점포를 이제 막 접으려는 상인이 보였다. 사람이 긴박한 상황에 닥치면 심장이 다 쿵쾅거린다. 아슬아슬하게 그 긴 계단을 내려가려 할 때였다.
“là. (저기.)”
“Sì? (네?)”
“…Se stai cercando di lavarti le mani, posso prestartelo? (...손 닦는 거 찾으시는 거면, 빌려드릴까요?)”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댔고, 어둠으로 그득한 악의 무리 안에서 또한 틈새로 들어오는 빛이 있기 마련이었다. 여행객이라 하기엔 쫙 빠진 올블랙 수트를 갖춰 입었으며,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닌 제 앞의 20대 남자.
그가 딱 그런 존재였다. 공허 속의 구원, 보호본능 자극의 미끼.
“Uh, if you have a wet tissue... (어, 혹시 물티슈 라도 있으시면…)”
당황한 나머지 이탈리아어도 아닌 영어가 툭 튀어나왔으나 역시 만국 공통어로는 별 무리 없는 소통이 가능했다. 그는 지민의 뒷 말을 잘라먹더니 처음 말을 걸었을 때의 차가운 표정을 줄곧 유지하며 물티슈 서너 장을 뽑아 건넸다. 후덥지근한 베네치아의 기후 속, 예상은 했다지만 젤라또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해 있었다. 찝찝한 흔적으로 덮였던 손이 말끔해 지니 기분도 훨씬 멀쩡해졌다.
“Thank you... I'll never forget this kindness. (감사합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 게요.)”
“Well, I have a question. (저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깜짝 놀랄 만큼 그가 맞받아친 영어 발음이 유창했다. 말 앞에 뜸을 들이면서 하고픈 말이 과연 뭘 까. 괜한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Please do say. (말씀하세요.)”
“…혹시 한국에서 왔어요?”
잠시만, 방금 뭐라고? 이탈리아 여행 내내 코빼기도 들리지 않던 모국어가 들린다. 가로등 빛이 확 들어오자 아까 전 대강 확인했던 구원자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여, 누가 봐도 동양인이라 주장하는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반갑다기보단 놀람이 먼저였다. 그걸 어떻게…
“동양인 별로 없잖아요. 설마 해서 물어본 건데 맞았어요?”
툭, 머리 속에 위태롭게 연결되어 있던 아슬아슬한 매듭이 동강났다. 그저 물 티슈만 주고받고 떠났으면 스쳐가는 인연으로 끝났을 만남이 덥석 붙잡혔다. 여행 줄곧 만나왔던 코 높고 눈동자 똘망한 이탈리아인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서유럽에서 열차 타고 온 키 큰 미남 또한 아니었다. 머리 속으로 지민이 피워내고 있던 망상이 점차 확신으로 굳어졌다. 누구든 타지에서 고생하는 같은 고향인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잘만 하면, 오늘 밖에서 잠을 청할 일은 없겠다는.
지민의 부탁은 성공적이었다. 제 볼 일 끝났으니 떠나겠다는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집이 없다, 사실 미성년자다, 좆 같은 집 구석에서 도망친 상황이다는 등 한참을 신세 한탄만 늘어놓았으니까. 솔직히 남부 유럽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베네치아라는 장소에서 한국인 만나기가 인연이 아닌 이상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고, 근본없이 횡설수설 한 것 또한 설득력에 큰 힘을 주었다.
“방 내어주는 건 하루만 가능한데.”
“상관 없어요!! 저… 진짜, 노숙했다가 눈 떴는데 장기 팔리는 곳에 와 있긴 싫어요…”
이미 도움을 받아 놓은 주제에 염치 없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으나 더 이상 별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긴장에 목이 말라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윤기에게 닿을까 무서울 뿐이었다.
무교였던 지민은 난 평생 처음으로 성경 비스 무리한 문장을 입에 올렸다. 전능하신 하나님, 비록 무교이지만 인생에서 딱 한 번 아룁니다. 제발, 부디 자발적 가출 청소년에게 하루 묵을 곳을 마련해주세요.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 제발, 제발, 제발…
“…이름이 뭐야.”
순간 입으로 감탄사가 헉 튀어나오려던 걸 막았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꼬이는 걸 싫어하는 성격에 어쩔 수 없이 호의를 베푸는, 모순적인 표정과 말 뉘앙스. 특유의 그 사람 색깔인가 본데 오히려 흔쾌히 집을 내어주는 반응보다 믿음직스럽기까지 했다.
“진짜요? 진짜? 아 어떡해… 정말 감사…”
“어, 알겠는데 이름이 뭐냐고.”
“올해 고3이고 박지민이에요!! 아저씨는요?”
참, 수트 핏이 잘 받길래 멋대로 정한 호칭이긴 한데 아저씨란 말은 조금 무례했나. 그러나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거나 언짢은 표정을 보이는 것 없이, 차분한 말투를 유지하며 ‘민윤기’라 답했다. 뒤로 가기 할 것 없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 상황에 지민은 자연스레 콧바람이 나왔다. 역시 간절하면 뭐든 이루어진다는 지민의 철학은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황송함을 만끽한 나머지 눈물과 미소가 함께 실실 새어 나오는 기분. 저도 모르게 윤기의 발걸음에 의지해 호텔을 목적지로 쫄래쫄래 따라가고 있었다.
걸어가는 짧은 시간동안 지민의 친화력과 붙임성은 빛을 발했다. 아저씨 나이는 몇 살이에요? 애인은 있어요? 무슨 일 하고 살아요? 베네치아는 언제부터 있었어요? 수도 없이 몰아치는 질문이 시끄러웠는지 윤기는 눈빛만으로도 으름장을 놓곤 했는데, 살벌한 분위기 탓인지 지민은 종종 주춤하며 일정 거리를 유지해 걷곤 했다. 물론, 말 거는 행위를 자제하자고 다짐 해놓고는 다시 따라붙기 마련이었지만.
긴 발걸음 끝에 닿아 있던 건물은 은은한 네온 사인으로 빛나는 건물이었다.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 였으며, 겉면이 번쩍이는 대리석에 도배되어 흠집이라도 나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먼저 머리를 지배했다. 나름 돈 많고 잘 나가는 취급을 받고 자라온 지민으로서는 기세가 팍 죽을 만큼의 금칠이었다. 더군다나 입구 간판에 적힌 생소한 글자가 지민의 두려움을 치솟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Casino, l'accesso è limitato. (카지노, 제한 출입 제 실시 중.)
건물의 용도가 도박을 위한 것임을 알자 둘 사이를 감싸던 기류는 어색한 정적으로 그득찼다. 베네치아 카지노는 도박 외에도 볼 거리가 넘쳐나 종종 관광지로 꼽힌다는 것 즘은 가이드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실제로 발을 들일 줄은 스스로도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저, 그게, 왜 여기로…”
"...얘기 안했어?"
"네?"
여기가 내 건물인데. 매치가 안 되는 것은 물론 그 문장을 이해하기까지 약 5초 가량이 소모되었다. 입이 절로 떡 벌어졌다. 비싸 보이는 외벽 장관에 놀란 것도 있으나, 설마 번듯한 차림을 한 윤기가 카지노를 운영할 줄은 몰랐고 자신이 이 곳을 들어가도 되는가에 관한 온갖 의구심들이 피어 올랐기 때문에.
한국에서 아빠의 친목을 위해 내로라하는 연회장은 다 따라갔다. 학교 출결을 비우면서까지 러시아에서 개최된 리셉션은 다 참석한 전적을 가져왔고, 사치와 겉멋으로 가득한 행사들 또한 진절머리 날 정도로 익숙해졌다. 돈 많은 자제들과 악수를 나눈지 불과 한달도 채 안 지났는데 또 다시 가진 거라고는 돈 밖에 없는 도박꾼들 소굴을 지나치려니 우스웠다.
조건으로 미성년자 출입 불가가 붙은 탓에 카지노는 특유의 은은한 신비로움이 겉돌았으며 지민은 이미 그 광경에 휘말 린지 오래었다. 오죽하면 심장 박동수가 나노 박자로 나뉘어서 뛸 지경이었다.
온갖 다른 언어가 묻어난 웅성임 속 슬롯머신과 같은 카지노 장비들의 효과음이 섞여 들린다. 술잔이 부딪쳐 챙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동전이 짤랑 이는 소리는 뒤엉켰다. 미성년자인 지민의 신분으로서는 상당히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 한 쪽에서는 포커게임과 기싸움이 함께 섞여 농담 따먹기를 하느라 웃음이 가득했고, 한 쪽은 돈 뽑는 소리와 마블을 두고 칩이 뒤섞이는 소리만이 들려 나오는, 그야말로 광란의 장소. 잠을 자기에 마땅한 곳이 아님은 일찌감치 알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라는 게 처음 보는 문물을 접할 때면 경험하거나 만져보고 싶은 게 욕구 아니던가.
마침 미동 없던 지민이 흠칫 놀랄 만큼 느긋하게 잡아 끄는 목소리가 있었다.
“Beh, se sei qui per giocare a poker, hai un posto sul nostro tavolo. (저, 포커 즐기러 오신 거면 저희 테이블에 한 자리 비어요.)”
붉은 큐빅이 박힌 자켓을 단정히 차려 입고 왼 손에 빈 와인 잔을 든 젊은 남자. 딜러들은 옷을 통일해서 입었기 때문에 많은 도박꾼들 중 한 명이 아닐까 추측했다. 저를 보며 비즈니스 웃음을 짓는 게 꼭 사업을 하다 보면 만나는 능구렁이 부류와 비슷했다. 본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가면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가식적인 집단. 나름 숨긴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언행에서 속내와 인성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사람 면전에 대고 깔끔하게 거절하는 건 지민의 특기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같이 온 윤기의 눈치가 보여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잘못 대답했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
“하고싶으면 해도 되는데.”
“…”
“할 줄 모르면 안 하는게 좋아.”
그러다 너 다 뺏긴다, 남은 돈.
의외의 대답이었을 뿐만 아니라, 줄곧 차가움의 의인화라 할만큼 표정 변화며 말의 높낮이며 똑같았던 윤기가 아까와는 달리 한껏 풀어져 잔뜩 능글대는 말투로 변했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지민을 대신해 명색이 이 건물 주인인 윤기가 부드러운 억양으로 악수를 건넸다.
“Mi spiace, ma prima ho qualcosa da vedere con la squadra (죄송하지만 일행과 먼저 볼 일이 있어서요).”
윤기의 한 쪽 손이 자연스레 제 어깨에 올라갔다는 것도 그제서야 눈치챘다. 점점 품으로 잡아당기는 약한 힘이 그릇된 무언가로부터 지민을 보호하는 움직임으로 느껴 지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불쾌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분명, 오늘 처음 본 사람이고 의심을 풀어서는 안되는데.
“Se vi divertite insieme, sarà un'alba più divertente… Peccato. (함께 즐기시면 더 재미있는 새벽이 될 텐데… 아쉽군요.)”
윤기의 손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그 이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베네치아 카지노에는 외국 카지노와는 유독 다른 아름다운 경관과 야경을 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투어에 최적화된 집합형 구조였다는 것이다. 호텔 내부가 성대한 호텔 식 구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2층부터 3층까지는 방이 빼곡히 들어찼고 4층은 갖가지 관광 시설을 엿볼 수 있었다. 지민 눈에 가장 들어찼던 시설은 소형 수로였는데, 이를 이용하면 배를 탑승한 내내 경이로운 야경을 구경할 수 있어 주로 신혼여행지로 꼽히곤 했다. 물론 새벽 2시를 맞아 취침 목적으로 호텔에 입성한 고등학생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장소일 뿐이었다.
일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침없고 황홀한 일탈, 내일이면 고마웠다는 인사를 끝으로 베네치아를 떠나려 했다. 종착지를 벨기에로 틀고 혼자만의 감상에 젖는 게 지민이 택한 방황의 다음 역이었다. 그 유럽투어의 시행착오 속 유일하게 구원의 손길을 건넨 ‘어른’. 뭐 크게 한 건 없어도 지민에게는 보호자였다. 저를 일으켜 세워 주기도 했고, 악의 구렁텅이에서 감싸주기도 했으니까. 그 날 밤, 둘은 그렇게 아름다운 서사로 인연이 마무리할 참이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저 내일이면 떠나느라 길게 인사 못 드릴 것 같아서요.”
“혼자라면서. 계획이 있었어?”
“별 건 아니고 벨기에로 떠날 생각이에요. 외가댁도 거기 있고…”
“…”
“사실 아저씨가 걸어가면서 그랬잖아요, 이탈리아 여행은 목적 없으면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
“그런데 저는 목적 없는 여행을 하려고 온 거거든요. 그래서 떠나는 거예요.”
철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은 대사를 남기고 지민은 김이 빠지게 웃어 보였다. 목적 없이, 목표 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고 싶어서 위험천만한 벨기에로 장소를 바꾸다니. 오죽하면 듣던 윤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챌 지경이었다.
“굳이 가야겠어?”
“네?”
“방황과 자유는 달라. 넌 꼭 헷갈려 행동하는 것 같아서.”
“…”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말해줄 수는 없는 거야?”
주변을 떠들썩하게 맴돌던 태풍이 천천히 잠잠해진다. 사려 깊은 윤기의 말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 했지만 한국에서 수십번은 반복한 이미지 트레이닝 때문인지 아까와 별 다를 게 없는 눈동자를 유지했다. 의지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딛고 일어서야 한다. 몇 번을 소리친 모토이건만 결국 눈 앞의 다정함에 휩싸여 마음이 동하고 만다. 주위 환경이 만든 지민의 방황은 그 가운데 기둥이 우뚝 받혀주지 않으면 복원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둥없이 태풍과 폭풍우가 몰아치기를 벌써 몇 년이 흘렀는가. 지친 나머지 버티기를 포기하고 그 바람결에 자신을 맡겨 젖어 들었다. 비가 내리면 흠뻑 젖은 자신을 자책하고 해가 내리쬐면 따갑게 태워진 피부를 벅벅 벗겨내면서까지 자신을 혹사 시켰다. 그게 지민의 생활이었고, 주변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 빈 공간에 뜬금없이 나무 하나가 들어섰다. 예고없이 우뚝 들어선 경로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지만, 늘 공허했던 자리가 들어차며 양 쪽 어깨가 편안해 졌다. 눈물을 흘리면 닦아줄 것만 같고 삶에 지쳐 떨어져 나갈 때면 주저앉지 말라며 품에 담아 안아줄 것만 같다. 확신 없는 이 도박에, 지민은 남은 제 여행을 걸어 보기로 했다.
“…지금 당장 말하기엔 얘기가 좀 긴데.”
“…”
“정 궁금하면.”
“…”
“내일 저랑 놀아주세요.”
잠깐이었지만 윤기는 지민에게서 애정 결핍을 보았다. 외로움이란 거미줄에 얽매여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가엾은 나비. 딱 그 나이대를 닮은 쾌활한 성격과는 달리 종종 일찍 철이 든 아이와 말 하는 기분이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어른스러워 보이려던 청소년의 응석과 투정일 뿐이었다. 혹은 어른스러움을 주입시킨 환경 탓이기도 할까. 복합적인 생각이 한 문장으로 정의되지는 않았으나 당장 안아서 감싸주면 그 행위만으로 위로를 받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고딩이었다.
굳센 척을 하려는 눈빛인데 전혀 강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힘 오라기 없는 들판의 이삭 같았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누가 뽑아 채기라도 하면 그대로 으스러지기 쉽상인 위태로운 상황. 어느새 지민의 눈가는 벌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같이 있어준다고 하면, 그 땐 얘기해 줄거야?”
바람의 방향과 속도에 따라 이리저리 휘청이던 줄기가 더 큰 폭풍을 맞기 시작했다. 툭 치면 눈물방울이 흘러내릴 정도로 지민의 눈물샘이 젖었다. 왜 울먹이냐 물으면 피곤함에 지쳐서 라 대답할 것이 뻔해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저 제 앞의 고등학생에게 그동안의 고충을 잊을 수 있을 빌미를 제공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상태 보니까 더 얘기했다가 쓰러져 자겠다.”
입술을 두어 번 가리키는 윤기의 제스처 탓에, 지민은 긴장이 될 때면 늘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자신의 버릇을 떠올렸다.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 내리자, 있던 피딱지마저 전부 뜯겨 한껏 거칠어진 입술 표면이 따가웠다. 비릿한 피 맛이 혀 끝을 살짝 맴돌았다. 시덥잖은 농담이자 분위기를 풀어주는 말이었지만 피식 웃음이 새어 나갔다.
솔직히 말해 윤기에 대해 믿음과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껏 해야 24시간도 채 안되는, 그러니까 만남에 있어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 한들 가족보다 더 보호자 같은 사람, 갈피 잃은 저를 받아주고 내일을 기약해준 사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 그 ‘도움’에 딱 걸맞는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 구원을 어떻게 자신이 외면할 수 있을까 란 의문이 지민의 뇌리를 스쳤다. 놓치면 안 되겠다는 강한 신호.
“…내일 이곳저곳 놀러 다니자, 너 가고 싶은 곳이면 다.”
“…”
“대신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서러운지, 꼭 얘기 해줘야 해.”
윤기의 손길이 지민의 머리칼을 다음으로 눈가에 맞닿았다. 두 손으로 제 눈물을 쓸어 내려주는 행위가 오랜만에 챙김을 받던 느낌이라 울컥 서러움이 샘솟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위태롭게 우는 지민을 윤기가 한 발자국 뒤에서 보듬어주며, 상처를 쏟아내고 그 자리에 노랗게 피어난 감정들을 집어넣을 때가 되어서야 지민이 겨우 방의 현관문에 주저 앉았다.
그 노란 감정의 서사가 이어질 기미가 보이는 것, ‘내일’을 기다리기가 너무 오랜만이라 잔뜩 뒤섞인 감정들이 복잡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치유에 관한 일련의 과정이 자꾸만 기억에 맴돈다는 것이었다. 윤기의 손길이 머리칼을 거쳐 볼을 어루만지고, 자연스레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을 마치 공감이라도 한다는 듯 다정하게 닦아준 장면이 자꾸만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그게 뭐 그리 위로가 되냐며 질타 받을 수 있겠으나 결국 그 위로로 인해 지민은 울음 멈추는 법을 망각했다.
간 밤에 지민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Split
[외전] W. 필연
“투 페어.”
딜러의 음성이 들릴 때마다 땀으로 가득 찬 지민의 손은 손톱으로 꾹 눌려 벌개진 자욱을 남겼다. 첫 카드에 하이 카드가 떴을 때부터 망했다 싶었지만 설마 원 페어가 계속 연속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거다.
테이블을 심판하던 딜러는 물론이며, 주위를 구경하는 한두명의 사람들은 지민을 마주한 상대에게 눈을 흘기며 언짢은 눈빛을 난사했다. 보안팀은 그들만의 언어로 아주 빠르게 신호를 주고받던데 지민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가엾은 제 처지만에 집중해도 모자를 판이었다.
“…Non è troppo? (너무한 거 아니에요?)”
“Devo darti anche le carte matte, per cui mi diverto. (와일드 카드라도 줘야 판이 재미있어지겠네.)”
그냥 칩을 그만 배팅하면 끝나는 문제 아니야… 져 준다는 뉘앙스의 말은 예의일 뿐이었고 그 속에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릴 때까지 단물 빨아먹으며 계속 포커게임을 재개하겠다는 속셈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지민이 쌓아온 학교의 학문적 지식과 대비되는 포커 게임에서의 머리싸움, 그리고 유흥의 주도권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앞에 앉아 카드를 두는 제 애인을 바라보았다. 교활하기 짝이 없었으나 원래 카지노에서는 교활한 자만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튀어나온 입 부리를 합 죽 집어넣고 있는 힘껏 윤기를 노려보았다.
“와, 진짜 나빴다. 좀 봐주면 안돼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아저씨 애인이 지금 울 지경인데 카드가 눈에 들어와요? 대박이다. 헤어질래.”
윤기가 힐끔 시선을 틀자 잔뜩 울상으로 뒤덮인 지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미성년자 나이 벗어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감정 조절을 못 하네. 결국 카드가 쓰레기라는 핑계로 패를 두 번 늦추자 드디어 지민의 입에서 기쁨으로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마치 수학여행 레크레이션 1등 상을 타온 것 마냥 영락없는 환호성이었다.
“It's straight, right? No complaints and no objections. I won, right? (스트레이트 터진 거 맞죠? 불만이랑 이의 제기 없고, 제가 이겼죠?)”
결국 딜러나 윤기나 힘 빠진 웃음으로 지민의 제패를 빛 내주었다. 곧 카드 게임은 그만두고 밤 하늘이나 구경하는 게 어떠냐는 윤기의 제안이 따라왔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이기기 전 까지는 진정한 우승이 아니라는 지민의 논리 탓에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의 밤이 다른 의미로 빛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