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TOKYO | 일본 도쿄
이별 여행
w. 오전 (@A_M_0309_xx)
항상 행복하고 설렐 줄만 알았던 연애도 언젠가 위태로워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처음 만나 연애를 결정하기까지의 시간이 결코 짧지만은 않았기에, 서로가 만나 사랑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에는 꽤나 신중한 고민이 뒤따랐기에, 우리가 함께하기로 한 앞으로의 시간은 행복만 가득할 줄 았았다.
그게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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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첫 시작은 우리가 만난 지 4년이 지난 후였다. 캠퍼스에서 처음 만나 마냥 친한 선 후배 사이로만 지내왔었다. 그러다 점점 시간이 흘러갈수록 민윤기를, 또는 박지민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은 선후배를 대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꽤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마음을 전하게 되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부터 서로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선후배 사이였을 땐 편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왠지 어색함이 흐르는 대화로 변했고, 웃으면서 넘겼던 아무렇지 않은 서로의 장난이 하나하나의 설렘 포인트가 되기도 하였다. 별생각 없었던 스킨십마저도 서로가 하니까 괜스레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뭐든지 좋았고 네가 싫어하는 거라면 나도 싫어하던 우리의 풋풋한 연애 초반기였다.
박지민과 민윤기가 애인이 된 지 1주년에는 여행 계획까지 짰다. 여행지는 일본이란다. 기간은 2박 3일. 뭐, 지민이가 가고 싶어 했다나 뭐라나.
- 우와, 나 비행기 처음 타봐요!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어린아이처럼 비행기를 처음 타본다며 신나하는 박지민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한참 바라보던 민윤기가,
- 형, 우리 빨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재빠르게 짐을 정리하고는 어서 빨리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는 박지민을 보며 입동굴을 훤히 보이며 웃던 민윤기가,
- 으아, 나 취하는 거 가태요..
일본 술을 먹어보고 싶다고 민윤기를 끌고서 아무 술집이나 들어갔다. 도수가 5~8%짜리인 스파클링 사케 반 병을 겨우 마시고는 잔뜩 꼬인 발음으로 취한 것 같다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박지민을 예뻐하는 민윤기를,
- 여기 야경 진짜 예쁘다. 그쵸? 우리, 오래오래 헤어지지 말고 잘 만나서 나중에 여기 한 번 더 와요. 그때는 오늘을 기억하면서 여기 오는 거예요. 약속!
여행 마지막 날에 도쿄 타워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면서 야경이 정말 예쁘다며, 다시 한 번 오자고 말하는 네 입술에 짧게 입 맞추던 민윤기가,
그때의 민윤기가 너무 좋았다.
그때의 설렘이 너무 좋았다.
그때의 우리가 너무 좋았다.
그렇게 행복하기만 했던 나날들이 언제부터 차갑게 바뀐 걸까.
- 형, 내가 아무 데나 옷 벗어 두지 말랬잖아요! 빨래하기 힘든데..
- 미안 지민아, 좀 있다가 치울게
- 형은 맨날 그 소리야. 그래놓고 한 번이라도 치운 적 있어요? 없잖아.
- 내가 치운다고 했잖아.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하,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아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뭐? 무슨 일이냐고? 7주년에 집에 늦게 들어와놓고 선 아무런 선물도 없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데 내가 화가 안 나겠냐구..!’
긴 시간을 들여 손수 써 내려간 장문의 종이 편지를 다 찢고 구겨버렸다. 마음 같아선 서러운 맘 다 토해내면서 울었을 텐데 이젠 네게 눈물조차 보이기 싫었다. 너는 항상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냥 까먹었다 하겠지. 작년부터였다. 민윤기가 바쁘단 핑계로 기념일을 까먹은 것은. 5년 동안 잘 버텨왔는데 6년을 서로 지내다 보니 다툼도 많아지고 서로에 대한 애정도 식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버틸만했다. 가끔씩 보이는 네 다정함과 아직 다 식지 않은 애정은 우리 연애를 계속 이어가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7년째도 겨우겨우 버텼다..
연애 8년 차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위태로워진 우리의 사이를 다시 좋았던 그때로 돌려놓고 싶다면 너무 크나큰 욕심인 걸까. 다시 그때의 설렘을 너에게서 느끼고 싶다면 정말 욕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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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작년 12월에 멈춰있는 벽걸이 달력의 날짜를 3월로 맞추어 주고는 침대에 누웠다. 일하고 있는 윤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지민이 물었다.
- 바빠요?
그때 서로의 핸드폰에서 동시에 띠링, 알람이 울렸다.
| 민윤기님, 박지민님과의 8주년이 한 달 남았습니다.
| 박지민님, 민윤기님과의 8주년이 한 달 남았습니다.
8주년, 벌써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도 8주년이란 시간이 다가왔다. 작년에 대판 싸우고는 헤어질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사귀고 있다니. 새삼 ‘시간은 참 빨리 가는구나’ 를 느끼는 것 말고는 별 감흥이 없었다. 연애의 후반기에 다다르면서 서로에게 느꼈던 그 설렘이 점차 사라지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관계는 힘들어져만 갔다. 사랑하면 잔소리가 는다더니, 사랑하면 싸울 일도 많아진다더니, 요즘 우리의 사이는 너무나도 잔잔하고 조용해서 사귀는 게 맞나 싶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사소한 일로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젠 싸울 애정마저도 다 없어졌는지 너와 다툴 일이 없다.
사람이란 게 관계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원하지 않아도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기 마련이다. 그 마지막이라는 게 이제는 우리 사이에 찾아온 거 같다. 참 웃겨, 평생 행복하게 살 거라더니 결국 영원한 행복이란 건 없나 보다. 점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멀어만 가는 우리의 관계에 지쳐 시들어만 가는 내 마음에 물을 주려면 딱 한 방법뿐인 것 같다. 바로 우리가 헤어지는 것. 그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관계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이었기 때문이다. 이론 밍숭맹숭한 관계를 계속 이어가봤자 딱히 득이 될 건 없으니까 말이다. 서로에게 후회 없고 미련 없이 관계를 끝내려면 아무래도 서로가 `지금이 떠날 때구나`를 인지하고 상대방을 보내줄 때 끝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시기를 놓쳐 서로의 마음이 더 시들기 전에 헤어져야 한다. 시간을 더 끌면 끌수록 우리의 관계가 더 좋아질 거란 법은 없니까.
한참을 생각하다 우리의 마지막을 여행으로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여행, 너와 함께하는 이별이 좋은 추억으로 남길 원했다. 장소는 너와 내가 가장 처음으로 갔던 일본으로. 뜻깊은 추억이 남아있는 일본의 도쿄 타워에서 처음과 끝을 장식할 것이다.
- 형, 다음 달에 시간 비워둘 수 있어요?
- 왜?
- 아니 뭐.., 우리 요즘 둘이 같이 데이트도 많이 못 했잖아요. 8주년 기념으로 오랜만에 일본 가는 거 어때요? 여태 기념일 못 챙겼으니까 이번만큼은 챙기자구요.
- 일본? 어.. 그래 시간 되면.
여행의 목적인 이별이란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덕분인지 여행은 가기로 했다. 1박 2일동안. 여행 일주일 전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여행 당일, 가기 직전까지 제 손에 끼워져 있는 커플 반지를 한참 뚫어져라 쳐다봤다.
- 안 가?
- 응? 아 가야지..
공항에 도착에 비행기 표를 뽑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심장이 콩닥 콩닥거렸다. 우리의 마지막을 좋게 기억할 수 있길 바랬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에 올라탔다. 더 이상 나는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며 신나하지 않는다. 창밖에 멀어지는 땅을 구경하다 지민의 손을 잡아오는 따뜻한 윤기의 손이 퍽 다정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윤기의 행동은 마치 이미 다 눈치 챈 갓 같은 행동이었다. 이 여행이 평범한 여행이 아닌 이별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라는 것을 다 틀켜버린 것만 같았다.
약 2시간을 달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 마저도 첫 여행지와 같은 곳이었다. 짐을 플고 침대에 누웠다. 행복했던 연애 초반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땐 숙소에서 짐 풀자마자 배고프다며 밥 먹으러 가자고 여행 처음해본 티는 다 내고 다녔는데..’
- 배 안 고파? 밥 먹으러 갈까?
- 벌써 7시네요. 피곤하니까 얼른 나가서 밥 먹고 숙소 와요.
4월, 7시면 좀 어두울 때 쯤이다. 언제봐도 영화속 장면같은 저녁의 화려한 도쿄 거리를 윤기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대충 식사를 때우고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 2캔을 사들고 숙소로 들어갔다. 맥주 한 캔씩을 따고 테이블에 앉았다.
- 우리 처음 왔을 때 생각 엄청 나네요. 그땐 모든 게 다 신기했는데.형이랑 몇 번 와봤다고 그세 익숙해졌나봐요. 벌써 몇 년전인데.
- 그러게. 너 예전엔 술도 잘 못 먹으면서 그 스파클링 사케 반 병 겨우 마시고 엄청 취했었지.
- 언제적 얘기 해요. 이젠 늘었어요. 이거 한 캔 다 마셔도 아무렇지 않다니까요?
피식, 웃어보이는 네가 또 한 번 다정해서 가슴이 저릿했다.
- 벌써 깜깜하네, 내일 돌아다니려면 얼른 자야겠어요. 나 먼저 잘게요.
괜히 말을 돌렸다. 네 다정함을 계속 보다보면 마지막이란게 자꾸만 떠올라서 눈물이 날 거 같았다.
- 그래, 난 이거 다 마시고 잘게.
- 그래요..
침대에 누운 지민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안주없이 남은 맥주를 홀짝거리던 윤기가 이내 자리에 일어나서 침대로 향했다. 눈을 감고 일정하게 숨을 쉬는 지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 미안해 지민아.
한참을 지민의 머리를 쓸어주던 윤기가 한숨을 푹 내쉬고 이불을 덮었다. 윤기는 아마 지민이 깨어있었단 걸 모르는 듯 했다. 제 이마에 입 맞추고 미안하단 말을 하는 윤기의 목소리를 듣고 눈물이 났다. 배게를 축축히 적시며 소리없이 울다가 지민도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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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요, 형. 오늘 마지막 날이야. 짐 정리해야죠.
마지막 날이라는 말이 이렇게 가슴 저릿한 말인지 몰랐었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나는 윤기를 가만 보다가 짐을 정리했다. 씻고 나와서 숙소에서 제공해주는 조식을 먹고 체크인을 했다.
도쿄 시내를 함께 걸으며 이곳저곳 구경했다.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멍때리다가 저녁이 다 되어가서야 정신을 겨우 차렸다. 그 전까지 뭘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어두워진 저녁의 도쿄 시내를 걸으며 다시 한 번 도쿄 타워로 향했다. 마지막 일정이다. 예쁘게 빛나는 도쿄 타워의 야경을 감상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 형, 그거 기억나요? 내가 예전에 그랬잖아. 우리 여기 다시 오면 예전에 그때를 기억하면서 오자구요.
- 응 기억하지.
- 우리 8년이면 진짜 오래만난거죠.
- 응.
- 그래서 말인데요. 8년이란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요즘 우리 사이가 많이 힘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오래 만나면서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화날 때도 행복할 때도 있었죠. 근데 요즘에는 그마저도 느껴지질 않아요. 형도 어느정도 눈치챘을거라 생각했어요. 오늘 이 여행이 앞으로 우리의 마지막일 거라는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별 여행이죠. 나는 8년이면 꽤 오래만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더 힘들어지기 전에 이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여행을 오기로 한 거구요. 우리의 첫 여행과 마지막 여행을 도쿄 타워에서 보내길 바랬어요. 또 좋은 추억으로 남길 바랬구요.
그러니까, 우리 이제
헤어져요 형.
오랜시간 내 손에 끼워져있던 너와 맞춘 반지를 조심스레 빼내고 네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게 너와 보낸 8년의 시간이 끝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