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THEATRE OF DIONYSUS | 그리스 디오니소스 극장
To Be Or Not To Be
w. 정인 (@lullaby_dear)
01. 민윤기는 진짜 좆같은 새끼다.
“야, 너 생각해서 그런 거야.”
“뭐, 이 개새끼야? 그게 날 생각해서냐? 엿 먹이려고 그런 거지.”
그나마 조금씩 가라앉던 화가 김태형의 한 마디가 다시 치솟았다. 날 생각했다고? 웃기는 소리. 그 새끼가 만약 나를 생각했더라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만약 그랬다하더라도 학과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서 말했으면 안 되었다. 그때 내가 느꼈을 수치는 어떡하라고. 다시 곱씹을수록 민윤기는 정말 재기불능(再起不能) 쓰레기 새끼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본래 소주를 잘 즐기지 않는 편이었으나, 기분이 더러우니 맥주보다는 소주가 훨씬 잘 들어갔다. 술이 달다, 달아.
민윤기, 개새끼. 머리 감다가 단수될 새끼. 길 걷다가 에어팟 한 쪽 하수구에 빠뜨릴 새끼. 중고로 노트북 샀는데 박스 안에 스티로폼 들어있을 새끼. 조금씩 아득해지는 시야에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 김태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신이 났는지 몰라서 두 눈에 힘을 주고서 김태형을 노려보았다. 사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름 취하지 않았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왜 웃냐, 너. 이유는 말하지 않고서 계속 웃어대는 김태형에게 짜증이 났다. 쯧, 나보다 덜 마셨으면서 먼저 미쳐버리다니. 한 잔을 더 마시기 위해 잔을 찾다 헛손질 몇 번을 했다. 술 마시면 이게 안 좋다니까. 더 마시고 싶어도 잔이 보이질 않으니 마실 수가 없다. 결국 내 손에 잡힌 건 소주병이었다. 소주가 찰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잔에 따랐다간 다 흘릴 것 같아 병 주둥이에 입을 대려고 했다. 누가 막지만 않았더라면. 갑자기 누군가 들고 있던 병을 빼앗았다. 처음엔 김태형인 줄 알았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김태형의 것이 아니었다.
“너 더 마셨다간 곧 길바닥이랑 키스하겠다. 작작 마셔.”
에엥. 민윤기? 이 개새끼가 왜 여기 있어?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뱉어졌다. 사실 별로 상관하지는 않았다. 그 새끼는 욕 좀 먹어도 되니까. 내가 민윤기 욕을 하면 할수록 김태형은 더 크게 웃었고, 민윤기는 한숨을 쉬었다. 근데 얘가 왜 진짜 여기 있지? 이젠 제대로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몸이 점점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졌다. 몇 번 앞뒤로 몸이 휘청거리다 갑자기 들렸다. 그러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섰고, 김태형인지 민윤기인지 모를 등에 업혔다. 와, 등이 넓다. 좋다! 신이 나서 몸을 흔드니 민윤기의 욕이 들렸다. 이 등, 무조건 민윤기 등이다. 김태형은 웬만해서는 욕을 잘 쓰지 않으니까. 업은 사람이 민윤기라는 걸 확신하자 몇 번 등을 세게 내리쳤고, 암전이었다.
숙취 때문에 깬 것이 아니라 정말 불편해서 깼다. 몸 위에 계속 무거운 게 얹혀져있는 듯해 눈을 떴다. 커튼 탓에 어두운 방에서도 무거움의 정체를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파악되자마자 온힘을 다해 민윤기를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정확히는 발로 찼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민윤기는 일어나더니 다시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아프지도 않은지 평화로운 얼굴로 자는데, 진짜 한 대 치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왜 아직까지 살려뒀는지 의문이 들 만큼 말이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한숨을 쉬니 민윤기는 그제야 눈을 떴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이 얌전했다. 허연 얼굴을 손가락으로 찔러대도 가만히 있었다. 너 집 안 가냐? 내 물음에 대답도 않고 민윤기는 앉아있는 나를 제 옆에 눕혔다. 여기가 네 집이지, 아주.
“좀 자자. 나 어제 너 업고 오느라 진이 다 빠졌어.”
“거기서 뒤지게 뒀어야지, 그럼.”
“애인이 다른 남자랑 술을 마시는데, 그것도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데 그걸 가만히 둘 미친놈이 어디 있냐.”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람.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술을 마셨는데. 조금은 황당한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니, 민윤기는 피곤하다며 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피곤하시면 본인 집 가시지, 왜 여기서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민윤기는 금방 잠에 들었다. 꿈쩍도 않는 탓에 의도치 않게 나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아침부터 피곤한 새끼.
결국 강의 하나를 날렸다. 1교시 수업이 아니라 여유를 부린 탓이었다. 어제 술을 마신 것도 있고 따뜻하니 몸이 절로 노곤해졌다. 노곤해지니 졸음이 몰려왔고, 잠깐만 잠이 든다는 게 한 시간이나 자고 말았다. 그때 준비해서 가도 강의에는 별로 늦지 않는 시간이었으나, 그 다음 강의를 위해 미리 뽑아야 할 자료가 있었다. 그러나 그걸 뽑았다간 강의엔 늦고. 뽑지 않고 가면 그 다음 강의는 안 듣는 것과도 같다. 나는 자료를 뽑았고, 그 전에 있던 강의는 지각했다. 교선보다는 전필이 더 중요한 법이지. 늦게 강의를 들어가니 김태형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강의 끝나고 도망가면 뒤져, 너.
이리와, 개새끼야. 지각 때문에 강의가 끝나고 잠시 교수님께 들르던 중, 몰래 도망가려던 김태형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차피 다음 강의도 같은데, 도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강의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자 갑자기 화가 차올라 뒤통수를 한 대 내리쳤다. 아프다 소리를 치면서도, 내 눈치를 보는 게 잘못한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지. 강의실에 들어서서 가방을 놓고 앉으니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내가 걔 때문에 빡친 걸 알면서도 내 뒤처리로 걔를 불러? 그냥 네가 데려다놓고 가면 되는 걸 왜 그 새끼를 불러서 더 빡치게 만들어.”
“안 불렀을 때 뒷감당은 어떻게 하라고. 네 지랄은 감당할 수 있는데, 아.”
김태형의 말이 끊긴 것은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게 확실하다. 교수 보니까 더 짜증나. 정확히는 민윤기라서. 평소와 다름없이 올블랙으로 입고 온 걸 보니, 저 셔츠 내 셔츠가 분명하다. 왜 자기 옷 놔두고 내 옷 입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인간이다. 출석도 대충 답하고 바로 엎드렸다. 이거 들으려고 프린트하러 일부러 남쪽 1층까지 다녀왔는데 얼굴 보니까 의욕이 뚝 떨어졌다. 아, 강의 듣기 싫어. 차라리 아까 김태형한테 신경질 낼 때가 더 나은 거 같다. 물론 민윤기가 쳐다보는데 느껴지기도 하고 김태형이 툭툭 치기도 하지만, 알 바냐. 내가 더 보기 싫다는데.
필기는 다했다. 재수강은 엿 같았기에 성적은 소중했고, 장학금은 더 소중했다. 그리고 전 강의를 지각한 만큼 프린트를 한 게 아까운 것도 있었다. 이게 오늘 마지막 강의였던지라 강의가 끝나면 술을 마시러 가려고 했는데 나가려는 우리를 민윤기가 붙잡았다. 애들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더니 문까지 닫았다. 강의 내내 짓고 있던 무표정한 얼굴을 금세 지워내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이 저 새끼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고민하다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나한테 뭐라고 할 줄 알았건만 민윤기는 김태형을 불렀다.
“재수강하고 싶냐?”
저 시발 새끼 지금 뭐래니. 재수강이 말이 쉽지, 그걸 또 들으려면 얼마나 곤욕인데. 지는 그냥 똑같은 내용 떠들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그걸 또 공부해야하는데 뭣도 모르고 함부로 짓거리지. 김태형도 같이 놀랐다. 이래서 교수들 월급 주지 말아야 해. 짜증나서 째려보니 째려보지 말라고 한소리를 한다.
“둘이 술 좀 마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내가.”
“어이, 아저씨. 우리 엄마도 나한테 그런 잔소리 안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장모님 대신에 해주잖아.”
“엄마가 너 싫대요. 야, 가자.”
어쩔 줄을 모르는 놈을 끌고 나왔더니, 김태형은 정말 자기 재수강하면 어떡하느냐며 걱정했다. 애초에 나는 그 말이 별 의미 없는 말인 줄 알았으나 김태형은 그걸 모르니까.
“그냥 하는 말이지. 신경 쓰지 마.”
“난 진짜 교수님 아직도 너무 어렵다.”
어렵긴. 그냥 좆같은 새끼지.
02. 나는 나를 가장 원망한다.
따끔거리는 두 눈에 잠시 안경을 벗고서 두 눈을 감았다. 건조해지는 눈에 인공눈물을 넣고 깜빡이니 그나마 나아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4시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아, 1교시 수업 있는데. 지금 과제 상태를 보니 밤을 새서 가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물론 오늘 내야하는 건 아니지만 며칠을 붙잡고 있어야 겨우 완성할 만큼 빡센 과제라 힘에 겨웠다. 민윤기 개새끼만 아니었다면 이 짓을 안 해도 되었을 텐데. 갑자기 다시 써오라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그 전날 싸웠으면 그냥 보복한다 싶어서 열 받으며 썼겠지만 같이 와인도 마시고 섹스까지 했으면서, 플롯이 잡히지도 않고 내용이 뻔하다라고 날 엿먹였다. 긴 한숨이 나왔다. 이거 쓰는데도 나흘이나 걸렸는데, 다시 쓰려니 막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정하고, 구체적인 스토리를 쓰는데도 하루다. 뒤를 돌아 자고 있는 민윤기한테 책을 집어던졌다. 쟤는 잘 때 아무리 건드려도 깨지 않지만, 괜히 깨우고 싶었다. 애인이 지금 못 자고 있는데, 너는 잠이 오냐.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을 덮었다. 더는 못하겠어. 졸려. 이 상태로 썼다가는 어차피 까일 테니 차라리 자고 맑은 정신에서 쓰는 게 나았다. 침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민윤기를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그 옆에 따라 누웠다. 아우, 피곤해.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근데 옆에 이 새끼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일주일 중 겨우 하루 정도만 제 집에 있고 나머지는 내 자취방에 있기에 차라리 그 집 팔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헤어지면 제 거처가 곤란하다고 안 된다고 말했다. 재수 없어.
내가 이 대학에 온 건 오로지 민윤기가 교수로 있기 때문이었다. 민윤기를 알기 전까지, 그러니까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꼭 닮고 싶은 작가였다. 어릴 때부터 작가를 꿈꿔오며 수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그 중 당연히 민윤기의 작품도 있었고, 진부하지 않은 묘사와 입체적인 인물들은 그를 동경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일부러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 대학에 온 것인데, 미친놈인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인터뷰에서나 대담에서는 당연히 정상적인 부분만 나오니 본래 성격에 대해 알기란 어렵다. 사귀기 전에도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더니, 사귀기 시작하니 숨김없이 다 드러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몰랐을 때가 나았던 거 같다.
김태형한테 사귀는 걸 고백했을 때, 김태형은 민윤기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부러워했다. 나도 꽤 자랑스럽게 말했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괜히 김태형한테 신경질을 부린다. 왜 말리지 않았느냐면서.
그래서 지금 결론이 뭐냐면 그 새끼를 동경한 내가 한심하고, 원망스럽다. 민윤기는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장수할 거 같으니까 내가 빨리 사라져야지. 내가 다음 학기에 민윤기 강의를 신청하면 인간이 아니다.
“야, 나 자퇴할래.”
[난 전과. 차라리 휴학을 할까.]
“돌아왔는데도 있으면 어떡해. 그럼 괜히 시간 낭비잖아. 아, 건들지 좀 마.”
중간 대체 과제로 작가론을 써야만 했다. 이 과제 누가 냈냐면, 내 옆에서 심술부리고 있는 민윤기 새끼가. 김태형이랑 전화를 하고 있노라면 지금 애인 옆에 두고 다른 남자랑 통화를 하냐며 투덜대고, 무시했더니 건드리고. 아주 다섯 살 먹은 꼬맹이가 따로 없다. 내일이 공강이면 뭐하냐, 민윤기가 우리집에서 안 사라지는데. 강의가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왔더니 여즉 안 가고 침대에 누워있는 민윤기가 보였다. 그냥 저기 묶어 버릴까봐. 저건 작가야, 교수야, 굼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