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SEOUL | 대한민국 서울
再灰
w. 린결 (@SJ_1322_)
홍연버스를 기반으로 합니다.
01
공중 속 흩뿌려진 연기가 지독했다.
알싸한 매캐함에 잔기침이 튀어나온다. 어깨를 들썩이며 몇번이고 기침을 터뜨리던 지민은, 코끝을 자극하는 허공의 흰색 곡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 하고 불면 허공을 돌아다니던 유려함은 사라지고 금새 뒤틀려버릴 그런-.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와 이따금 찰랑이는 물살이 내는 작은 소음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천천히 열린 지민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윤기형, 자? 메말라서 트고 갈라져 검붉은 피딱지가 군데군데 자리잡은 입술이었다. 목구멍에 겨우 틈을 내어 터뜨린 소리는 잔뜩 쉬어 중간에 픽 꺾여버리고 만다.
지민은 허공 어딘가에 닿아있던 시선을 흘긋 옮겼다. 힘없이 뜨인 눈꺼풀을 꿈뻑이며 아니- 하고 돌아올 윤기의 목소리를 기다리지만, 왜인지 답은 들리지 않았다.
"... 안 자는거 다 아는데."
"알면서 왜 물어봐."
"그냥- 형 목소리 듣고 싶어서."
이제 못 들을테니까. 조금이라도 담아두고 싶어서. 하긴, 이럴때 보면 바닷가에 소라껍질이 조금 부럽다. 소리란 것을 담고, 그에 기억을 담고 추억을 담을 수 있다는게.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
낮게 깔린 윤기의 목소리에 지민의 입가는 절로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면서 그는 실없는 대답을 하곤 맞붙은 윤기의 손을 매만지며 손장난을 친다. 수면 아래로 얽혀들어간 손가락들에, 단단히도 꼬여버린 붉은 실이 축축하게 젖은 채 묶여있었다. 피로 염색해 만든 듯한 빨간색 실. 그리고 그것이 이어버린 두 운명이자 연인. 곧이어 그는 찰랑이는 수면 위를 훑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한다. 작은 파동이 지민의 손가락 끝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하며 점점 그 크기를 키웠다.
"형은, 아직도 나한테 미안한가봐."
"..."
"괜찮다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괜시리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그리고 이런 지민의 말에 윤기는 차분하게 답을 할 뿐이었다.
"평생 미안해야지."
"..."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 안 까먹고 영원히-"
윤기의 말은 차마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버린다. 고개를 돌려 입술을 붙여버린 지민 때문이었다.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어 잠시 머금더니, 지민의 혀가 서툴게 사이를 가르고 들어갔다. 둘의 호흡과 타액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혼탁하게 섞인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두 살덩이는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며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두 입술이 떼어지며 지민은 내리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건 윤기의 차분하게 내려앉은 눈꺼풀과 속눈썹. 길고 까만 그 위에 매달린 작은 물방울들. 그리고 미치도록 붉은 입술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만다. 푹 꺼진 눈두덩이와 튀어나온 광대뼈가 안쓰러운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지민의 얼굴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분명 미소였다.
모두들 둘의 사랑은 썩었다고 말했다. 툭 건들면 부서질, 썩어빠진 더러운 사랑.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손가락의 붉은 실을 들어보이며 당당히 말했다. 이건썩은게 아니라 조금 다를 뿐이라고. 남들과 조금 달라서 썩은 것처럼 보일 뿐 결국은 다 같은 사랑이라고. 그들은 여느 연인들처럼 맞잡은 손의 영원함을 바랐고, 내 사람의 행복을 바랐고, 햇빛이 눈부시다고 칭얼거리는 연인의 이마에 입 맞춰주는- 그런 아침을 바랐다.
그 조그만 바램조차 짓밟혀졌지만. 덕분에 두 연인은 붉은 실 대신, 세상과의 연을 끊는다. 손가락의 이 홍연은 죽어도 잘라내지 못하니까. 윤기의 손을 더 단단히 그러쥐며 눈을 감았다.
이 정도면, 퍽 괜찮은 결말 아닌가. 지민은 살풋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02
2019년 서울
"아, 존나 덥네."
뜨겁게 꽂히는 직사광선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아지랑이, 그리고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은 후덥지근함. 가만히 있어도 땀이 온몸을 적셔오는 오후 세시의 태양빛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 속의 달동네 슈퍼 앞 평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윤기는 신랄하게 욕을 내뱉었다. 땀방울이 구겨진 그의 미간을 간질이며 툭 떨어진다. 숨만 쉬어도 끈적거리는 8월의 하늘에는 그 흔한 구름 한 점조차 없어서, 꼭 코발트 블루 물감을 푼 물을 쏟아버린 수채화 같았다.
덥수룩하게 눈 위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 사이로 주륵 흘러내리는 땀 한 방울이 생경하게 피부 위를 간질인다. 햇빛을 받아 금방이라도 김이 날 것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길었다. 앞머리 끝이 눈을 따갑게 찔러왔다. 머리 좀 자르라는 동네 아줌마의 잔소리에도 여태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하나였다. 텅 빈 주머니 사정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급급한 처지인 그에게, 5000원짜리 동네 이발소는 사치였으니까. 늘 자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윤기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입을 쩝 다시며 그 생각을 고이 접곤 했다. 그깟 머리카락, 지금까지 그랬듯 집에서 대충 가위로 잘라버리면 그만이었다.
손에 들린 메로나 하나를 빨며 윤기는 짜증 가득한 손길로 축축한 옷자락을 펄럭였다. 장렬하게 꽂히는 태양광에 윤기의 손에 들린 소중한 메로나는 맥을 못추고 흐물흐물 모양새를 잃은지 오래였다. 끈적하게 녹아 손가락 위로 흘러내리는 액체를 혀로 핥아올리며 녹기 직전 남은 마지막 한 입을 입안으로 욱여넣은 윤기는, 곧이어 앙상하게 남은 나무 막대를 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러자 특유의 씁쓸한 나무 맛이 달큰함 사이를 비집고 혀를 자극해온다. 툭툭 튀어나오는 가시들은 씹으면 씹을수록 가늘어지고 거슬리게 입안을 맴돌았다. 그것들을 한참이고 씹다가 퉤 뱉어내버리며, 그는 깊게 패여있던 미간을 또다시 팍 찡그렸다. 귀찮아. 짜증 가득한 입술에선 짜증 가득한 투덜거림이 나온다.
결국 윤기는 잠시 벗어둔 탓에 바닥에서 나뒹굴던, 먼지 가득한 삼선 슬리퍼를 신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양 손에는 박스 테이프로 칭칭 감긴 2리터짜리 생수 묶음이 각각 들린 채였다. 초록 잎들이 듬성듬성 자라난 고목 가지에 붙은 매미들의 울음 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때린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 * *
새벽달이 반토막난 채로 구름 위에 살포시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윤기의 손에 들린 검은색 봉다리가 달랑달랑 춤을 춘다. 햇반 하나와 캔맥주 두 개, 스팸 한 캔이 만들어낸 묵직함은 윤기의 피같은 일당으로 얻어낸 양식이었다. 아까부터 그렇게 맥주가 땡기던 터라 윤기는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하며 슬슬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었다.
도심 한복판 속 외딴 섬처럼 자리잡은 동네, 그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곳이 윤기의 집이었다. 덕분에 그는 매일 허벅지가 뻐근해질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길과 수십개의 높은 계단을 올라야했다.
특히 이렇게 후덥지근한 날에 집을 가다보면 그의 온몸에서는 땀방울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것 뿐인가. 파란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대문은 자칫하다 머리를 부딪히기 일쑤였고, 걸핏하면 마당 호스의 물이 끊겨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 저런 곳에 궁둥이를 붙이고 사냐며 혀를 끌끌 찰지 몰라도- 윤기는 이곳이 나름 만족스러웠다. 밤만 되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그랬고, 간간이 들어선 주황빛 가로등이 주는 느낌이 그랬다. 열 시만 넘으면 꼭 짖어대는 아래 아랫집 백구의 컹컹 소리도 나름 듣기 좋았고. 아득히 들려오는 서울 도심의 소음 탓에- 동떨어진 또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소란스러움 속의 고요함도 만족스러웠다.
바닥에 직직 끌리던 윤기의 걸음이 익숙한 파란 대문 앞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웬 낯선 갈색 형체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못보던 삼색고양이 한 마리였다. 배고프다 얘기하는 것처럼 냐, 하고 우는- 흰색, 갈색, 그리고 새카만 검은색이 섞여 털을 제각기 물들인 삼색묘. 잠시 질질 끌던 걸음을 멈추고 그 고양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윤기는 저를 올려다보는 초록색 눈동자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에메랄드처럼 오묘한 색의 커다란 눈동자와 그 한가운데에 박힌 동공이 꽤 예쁘장한 미묘다.
사람을 보고서도 도망을 안 가는 걸 보면 사람 손길을 퍽 타고 자란 놈 같은데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보던 윤기는 앞에 스윽 주저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야."
너도 배고프냐. 당연하게도 고양이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저 고개만 슬쩍 갸웃거리며 윤기를 쳐다볼 뿐이었다.
"근데 나도 줄게 없는데."
괜히 미안해지게시리. 고양이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 또다시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윤기의 검지 손가락이 그런 고양이의 턱 밑을 간질인다. 살살 긁어오는 그 움직임에, 고양이는 눈꺼풀을 내리감더니 이내 커다란 초록눈을 감춰버렸다.
고양이의 갈색 꼬리 끝에 붉은 실이 예쁘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03
"아줌마, 나 왔어요."
쌀쌀한 새벽 공기가 남아있을 때 눈을 뜬 윤기는 뒷목을 긁적이며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슈퍼 앞에 주차된 파란색 트럭을 지나쳐 낡은 미닫이 문을 밀어젖히자 익숙하게 그를 반겨주는 풍경이 딸랑이고, 높다란 그 소리는 잠결에 푹 잠긴 목소리와 섞여들어간다. 카운터에서 담배들을 종류별로 늘이며 정리하던 아줌마는 휙 뒤를 돌아 윤기를 훑더니, 이내 혀를 끌끌 찼다.
"니 대가리 꼬라지가 왜 그래?"
"아 이거. 잘못 잘랐어."
"그러게- 내가 니 그 꼴 날까봐 이발소 가라 했던거 아냐."
"나름 마음에 드는데."
"지나가던 사람들 붙잡고 물어봐라. 누가 널 스물여섯으로 봐? 꼬라지가 딱 일곱살 코찔찔이 같어, 너."
한심하단 듯 고개를 절레 흔드는 그녀에 윤기는 슈퍼 한 쪽 벽 붙어있는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이마 위로 내려앉은 까만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자니 조금 짧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들긴 했다. 어젯밤- 주방 가위를 뽑아들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던 윤기의 망설임 없는 손길에, 그의 긴 앞머리가 시원하게 싹둑 잘려나갔더랜다. 덕분에 눈썹뼈 위로 딱 걸쳐지게 된 짤뚱한 머리는 윤기가 봐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일곱살. 여사님 또 오바하시네.
"아저씨는요?"
"잠깐 요 밑에."
"납품 트럭은."
"이미 일찍이 왔다갔지."
"...그럼 밖에 저건 뭐야."
"누가 이사온 것 같던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기 수박이나 날라. 손목 아파서 들지도 못하겠드라.
담배곽을 분주히 쌓던 하얀 목장갑 낀 손가락이 한쪽에 쌓인 수박을 가리켰다. 바깥에 주차된 파란 트럭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잠시, 윤기는 어어- 하며 등을 돌린다.
윤기의 어깨 위에 이십키로 쌀포대가 턱 얹혔다. 맨손으로 하지 말고 장갑 좀 끼라는 슈퍼 아줌마의 말에, 땀차서 싫다고 했다가 등짝을 한 대 후려맞은 터였다. 아직도 얼얼한 그 부분에 윤기는 괜시리 궁시렁대었다.
"아줌마, 왜 이렇게 힘이 세. 쓸데없이 손만 매워서."
"시끄러, 이 화상아. 빨랑 가기나 해. 더 밍기적거리면 박 씨 아줌마 화 내니까."
버럭하는 그 목소리와 등을 떠미는 억센 손길에, 결국 본전도 못 찾은 채 발을 질질 끌며 오르막길을 오르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거의 기어가다시피 간다는 게 맞으려나. 어깨 위를 짓눌러오는 무게감이 상당하다. 그의 두 발은 불규칙적인 계단들에 늘어붙기 직전이었다. 슬리퍼가 직직 끌리며 모래알과 마찰 일으키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겨우 걷기 시작한 보람도 없이, 그는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또다시 멈춰섰다. 어젯밤에 대면식을 가졌던 그 고양이가 햇빛을 받으며 갸르릉거리고 있다. 초록색 눈동자가 눈길을 확 끄는게- 분명 어젯밤 걔가 맞았다. 다만 어제와 다른 점 하나를 꼽자면,
"야옹아, 좋아?"
그 보드라운 황갈색과 흰색의 털을 살살 쓰다듬으며 눈까지 접히게 웃는 한 남자 정도였다.
빤히 꽂히는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눈동자를 데룩 굴린다. 그런데 이 사람, 시선을 피할 줄 알았던 윤기의 예상과는 달리 허공에 생긴 투명한 끈을 오랫동안 붙잡고 놓지를 않는다. 사람 민망하게. 졸지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윤기는 머쓱함 속에서도 곧이 곧대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눈동자 진짜 까맣다, 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도 무심코 하면서 말이다.
남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파도치듯 흔들렸다. 왜인지는 모른다. 그저 눈에 띄게 위태로울 뿐이었다. 그러니까,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글펐다. 애처롭다는 게 더 맞으려나. 그의 얼굴에는 분명 서글픔이 묻어나왔다. 쌀포대 들고 꾀죄죄하게 서있는 꼬라지가 슬픈건가. 저렇게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표정을 지을건 또 없는데.
슬슬 윤기의 왼쪽 어깨가 뻐근해져 올 때쯤, 남자가 무릎을 펴고 일어서더니 윤기에게 다가왔다. 한참을 머뭇거리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가 싶더니, 그는 조심스레 운을 뗀다.
"여기... 슈퍼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 아세요?"
"...저 밑으로 쭉 가시면 돼요."
"아, 네. 감사합니다."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
말하는 그 짧은 찰나 그의 눈에 무언가 그렁그렁 차오르더니, 마지막엔 흘러넘쳐 빠르게 광대 뼈와 유난히 통통한 볼살을 훑고선 턱선을 타고 부드럽게 굴러 떨어졌다.
"저기,"
"아, 죄송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무거우실 텐데 붙잡아서 죄송해요."
저가 오히려 더 당황한 듯, 남자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빠르게 살결 위를 닦아내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급하게 휙 돌아서는 그를, 윤기는 그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왜인지, 새끼손가락 마디가 저릿거렸다.
#
역시 이번에도, 기억 못하는구나.
입가에 해탈한 미소가 걸렸다. 이번에는 알아볼 줄 알았는데. 이쯤 됐으면, 아무리 장난질을 좋아하는 신이라고 해도 인연이라는 실을 이어줄거라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아니었나보다.
"...너무하네, 진짜."
지민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 눈동자가 다시금 머릿속에 들어차 가슴을 쿡쿡 찔러왔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지민이 스스로 모든 걸 끝내면 꼭 잠에 든 것처럼 어디론가 가라앉곤 했다. 그러다 어느순간 눈을 뜨면, 지민은 스물넷의 누군가였다. 그는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사는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자취방을 못 구해서 쩔쩔매는 대학생이었으며 춤에 미친 무용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껏 이 모든 생에서- 지민은 윤기를 찾았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저를 기억은 하는지, 아니- 지금 살아있기는 한건지. 그 어느것 하나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찾아갔다. 몸이 이끄는대로, 시선이 이끄는대로, 실이 이끄는대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처음엔 서툴렀던 기다림도 차츰 익숙해져 갔다.
그날은 지금도 선연히 기억에 남겨져 있다. 빨강 장우산이 보였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맞이하는 빨간색 장우산이 회색빛 하늘 아래 선명히 보였다. 살짝 기울어진 틈을 타 우산 밑의 두 사람도 보였다. 마주보며 웃는 두 연인. 검은 우산을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민의 손에서 손잡이가 스륵 빠져나갔었다. 굵은 빗방울이 얼굴 위를 툭툭 두드리며 눈물을 감췄다. 지민은 입을 꾹 다문 채, 빗방울이 저를 감춰주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무말 없이- 주위를 감싸오는 시린 비를 받아들였었다. 그 장면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탓에.
손가락에 걸린 붉은 실뭉치가 너무 외로워 보였다. 짝 잃은, 정확히는 짝이 보지 못하는 인연의 실만큼 외롭고 시린 게 있을까. 손가락 뼈마디가 괜히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땀에 절고 목덜미가 늘어난 티셔츠, 종아리까지 걷어올린 7부 회색 트레이닝 바지와 먼지 가득한 삼선 슬리퍼까지. 여전히 날 선 눈빛과 새카만 눈동자도, 왜인지 눈썹뼈까지 오는 짧은 앞머리도 전부 새겼다.
변함없는 자신과 다르게 망각이란 변화를 겪은 윤기를 가슴 속에 깊다랗게 새긴다. 새길수록 지민은 아파갔다. 또다른 생을 위해, 윤기가 회상과 기억이라는 또다른 변화를 겪을 그 순간을 위해. 지민은 다시금 눈을 감아야 했다.
어느새 주륵 흘러내리는 눈물이 지민의 볼을 적셨다.
04.
일주일이 윤기를 지나쳤다. 그 틈에 장마가 오려는지 날씨는 꿉꿉해졌고, 하늘의 물감은 코발트 블루에서 회색으로 제 색을 바꿨으며 그 위에 걸린 구름의 채도 또한 높았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그것은 곧 비를 뿌릴 듯 아슬아슬했다.
그날 이후로 며칠째 새끼손가락 끝이 계속 아팠다. 겉으로 보기엔 상처 하나 없는데도,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가끔씩은 견딜수 없어 자다가도 움찔거리며 깨기도 했다. 아줌마는 병원에 가보라고 귀에 딱지가 얹도록 잔소리를 해댔지만, 윤기는 무슨 이런 걸로 병원을 가냐며 귓구멍을 후비적거릴 뿐이었다.
넋을 놓는 일도 많아졌다. 머릿속으로는 이번 달까지 하면 월세가 얼마였더라- 하는 생각과 함께 계산기를 두들기며 말이다. 그렇게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멍하니 앉아있다 보면, 꼭 그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기에 이른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처음 그를 본 날, 말이 원체 많은 슈퍼 아저씨는 윤기가 배달을 마치고 오자마자 그 사람에 대한 오만가지 정보를 쏟아냈다. 개중에는 그 남자의 이름이 박지민이며, 나이는 스물넷,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이 동네서 살았었다는 사실도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훌렁 떠나버리더니, 왜인지 저 혼자 돌아왔다고. 집은 애초에 안 팔고 비워놓기만 했다고 한다.
윤기는 바닥을 뒹구는 박스들의 테이프를 뜯어내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관심없는 척 그 얘기를 주워담으며 유일하게 배달가본 적 없는 갈색빛 대문의 그 집을 떠올렸다.
지민이라고 했다. 박지민.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다였다. 이렇다 할 특이한 점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때 보였던 그 눈빛이 신경 쓰였을 뿐이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냐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저 망상일 뿐이겠지만. 그리고 느껴지는 이상한 기시감이랄까. 왜, 인생 살아가다 보면 순간 방금 일어난 일을 꿈에서 본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던가. 딱 그런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러나 어디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 그런.
그리고 윤기가 하루하루를 멍하니 보내는 동안, 초록빛 눈의 삼색고양이는 꼬리에 묶인 매듭을 이로 깨물어가며 조금씩 풀어내렸고, 하늘의 회색빛은 짙어져갔다.
***
모기에 물렸다. 자는 동안 얼마나 귓바퀴 근처에서 앵앵대던지. 윤기는 퀭해진 얼굴로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새벽에 휘영청 기울어 넘어져버린 달이 아직 중심을 못 잡은듯 하늘을 붙들고 늘어져있는 시각이었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 젖히자마자 반 정도 남은 2L 삼다수를 집어들어 단숨에 들이키고서야 윤기는 다시 몸을 뉘였다. 아직까지 어딘가 남아있을 모기 새끼가 거슬려서인지, 뻑뻑한 눈꺼풀을 감아도 신경이 온통 곤두서 잠이 오질 않았다. 발밑에서 선풍기 한 대가 털털거렸지만 그마저도 소용이 없어 땀에 가득 전 몸은 이리저리 뒤척이기 바빴다.
시계 초침이 시간이란 자취를 남기며 똑딱거리는 소리마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세상의 모든 소리에 스피커라도 달아놓은 것마냥 끈질기게 윤기의 고막을 두들긴다. 결국, 윤기는 나즈막히 욕을 내뱉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하품을 하며 비틀비틀 걸어나오자, 왜인지 사람들로 가득한 낯선 광경에 눈이 절로 굴러간다. 원래 같았으면 쥐죽은듯 고요할 시간인데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골목길마다 가득했다. 조금 내려가보니 집주인 아주머니가 연신 입을 가리며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뭔 일이래 이게."
"그러게나 말야. 멀쩡한 청년이-"
저 밑쪽 갈색 대문 앞에 몰린 머릿수가 꽤 되었다. 잠시 뒤에서 그 복잡한 광경을 지켜보던 윤기는, 어느새 멍청하게 서있는 그를 발견한 아줌마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어머 윤기야, 여기 좀 와서 도와.
희미하게 저 멀리서부터 사이렌이 들려왔다. 불안함이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무언가가 엇갈렸다는 불안함. 며칠 전부터 꾸준히 느껴지던 기시감. 그의 미간이 구겨지고,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조각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작고 먼지같은 조각들이 하나씩 자리를 찾아갔다. 유리 알갱이처럼 날카롭고 투명한, 필름같은 조각들이 점차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 천 사이로 툭 떨어져버리는, 홍연 가득한 팔들이 보였을 때. 새끼손가락 끝에 묶인 빨간 매듭이 보였을 때.
비로소 그림은 완성되었고, 눈에 차오른 눈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끌어내려졌다.
05.
부슬비다. 애매하게 오는 부슬비였다. 내릴듯 말듯 애태우던 비가 거짓말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이명처럼 울리는 사이렌이 귓가에 맴돈다.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기억이란 놈에 소름 돋을 틈이 없었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세상의 소리가 멀게 느껴졌고, 머리 위로 한두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차갑다는 것만 느껴질 뿐이었다.
욕조, 담배연기, 키스, 그리고 연인.
날카롭고 정교하게 조각된 기억의 편린은 아팠다. 기어코 흘러내리는 눈물이, 점점 가빠오는 호흡이, 터질것만 같은 심장이- 지랄맞게 아팠다. 쏟아져내리는 건 기억이라는 비였고, 그 빗줄기는 조금씩, 가랑비가 옷 적시듯 윤기를 흠뻑 적셔버렸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린다. 다리가 훅 풀려버려 주저앉아버린 그의 손은 쓰라린 가슴께를 붙잡았고, 뚝뚝 끊기는 호흡 사이로 겨우 내뱉어지는 것은- 차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어 잇사이로 흘려보내는 신음이었다.
차라리 실이 파고들어 잘라버리기라도 했으면 좋을만큼 실이 묶인 손가락 마디가 아팠다.
'형, 나는 후회 같은거 안 해요.'
'내가 한 선택이야.'
'...사랑해.'
그는 분명 웃었다. 세상의 모든 걸 가진 것처럼 그는 환하게 웃었다. 내 사랑이었던, 연인이었던. 한없이 쓰라린 그속에서도 지민은 웃어주었다. 뼈마디밖에 남지 않은 손을 붙잡아주었고, 고집스레 그 손을 놓지 않았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내 옆에서, 끝까지 나를 웃음짓게 만든 사람이었다.
삼색고양이가 갈색 꼬리를 흔들거리며 울었다. 부슬비가 아주 조금씩,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굵어져 갔다.
06.
비가 지붕을 뚫을 것만 같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마냥 세차게 내려치는 빗방울이 조용한 동네를 전부 씻어내릴 것처럼 쏟아졌다. 짙은 회색빛이 되어 비명을 질러대는 하늘은 무언가를 토해내듯 비를 뱉어내었고, 그 덕에 빗소리가 많은 것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집마다 흘러나오는 것은 잡음 섞인 라디오의 기상예보뿐, 가게들은 전부 문을 걸어닫은지 오래였다. 그렇게 득실거리던 쥐새끼조차 다 죽어버린것 마냥 자취를 감추고 제 보금자리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골목길 벽에 기대어진 주인 모를 자전거의 안장은 흠뻑 젖어갔다. 매일 습관처럼 앉았던 나무평상도, 슈퍼 앞 목장갑을 매달아 놓던 빨래줄도 전부 빗물을 머금는다. 고목에 붙어 목청 터져라 울어대던 매미는 날개가 젖은채 바닥에 떨어져, 얇은 다리를 바르르 떨며 물기 가득하고 딱딱한 바닥에 마지막 남은 숨을 토해낸다. 푸르른 이파리들은 빗줄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가지와의 작별을 고하였으며, 전봇대 위에서 펄럭이던 대출 전단지는 갈기갈기 찢어진다. 동네 떠나가라 짖어대던 백구는 어느새 목줄에 묶여버렸고 파란 대문 앞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초록빛 눈동자가 참으로 어여뻤던 삼색 고양이는 자취를 감추고 어디론가 멀리 숨어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흔적을 지우기에, 놓쳐버린 타이밍을 돌려놓기에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날이었다.
윤기는 유려하게 뻗어진 흰색 곡선을 후, 하고 불었다. 금새 일그러지다가도 다시금 제 모양을 되찾는 하얀 연기. 공중 속에 흩어진 그 연기는 참으로 지독하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불 붙은 담배 한 개비의 익숙한 감촉에 픽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상하지. 태어나서 이런 거, 손에 쥐어본 적 한번이 없는데도 이렇게 익숙하다는 게. 혀로 입술 끝을 슥 핥으며 그는 입꼬리를 더욱 끌어올렸다.
결국 그의 선택은 리셋이었다. 완벽하게 엇갈려버린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을 기약하기로. 빨간 끈은 분명 아직 끊기지 않고 두텁게 이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리셋 버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빨간색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였다. 조금만 힘을 주어 누르면 바로 끝나버릴 그런-
하얀 손가락 새에 끼워진 담배가 스륵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고, 눅눅하게 젖은 흰색 종이가 손가락에 아슬아슬 맺힌다.
기나긴 호흡을 내쉬었다.
씁쓸한 혀를 굴리며 침을 꿀꺽 삼키고,
차가운 날 끝과 손가락의 실을 쓰다듬고,
울컥 차오른 기억이란 놈을 목 뒤로 넘기고,
마지막으로는,
얼굴 위에 눈물길 하나를 있는 힘껏 새기고.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끝내-
하얀 타일 위에 불똥이 튀어올라 갈색 그슬림을 남기고서는 빠르게 사라졌다. 툭 떨어진 하얀 종이 막대 한 개비는 살짝 튕겨져 올라오나 싶다가도. 벌써부터 퍼지기 시작한 물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추락한다.
바닥에 고였던 물이 붉은 향기를 머금고 깊게 스몄다.
공중 속 흩뿌려진 연기는, 참으로 지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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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빌딩으로 가득 둘러싸인 대로변에 위치한 카페에서 리드미컬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소란스런 사람들 틈 사이에 앉아 노트북을 두들기며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지민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손목의 은색 메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미팅을 늦다니, 누군지 몰라도 매너는 일단 탈락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는 다시 서류가 띄워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쪽으로 꼰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무료하게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움직이던 찰나, 하얀 손등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갈색 나무 테이블을 똑똑 두들긴다. 카페 조명을 받아서일까, 유난히 손등이 하얬다.
"박지민 씨?"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고 느리게 끄덕거리자, 그의 입이 다시 열린다.
"... 찾았다."
왜인지, 키보드를 두들기던 손가락 끝이 저려왔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