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SAPPORO | 일본 삿포로
삿포로에 갈까요,
w. 멜팅 (@reallove_km)
12월의 일본은 한국보다도 추운 것 같았다. 지민은 네 겹이나 껴입은 옷을 다시금 여매고 칭칭 감은 목도리에 얼굴을 폭 묻었다. 아침 일찍 도착해 이 근방을 전부 돈 것 같았다. 사실 특별히 볼 것도 없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거리나 가끔가다 있는 작은 가게가 이곳의 전부였다. 뭐, 화려하고 풍성한 볼거리를 원했다면 도쿄 같은 곳으로 갔을 것이다. 지민은 이런 고요함을 즐기러 오타루에 왔다.
지민은 그냥 모든것에 지쳐 있었다.특히 인간관계나 반복되는 일상 같은 것들에. 그래서 졸업을 1년도 채 남기지 않은 이 시점에 휴학 신청을 하고 무작정 혼자 여행을 왔다. 주변에서는 왜 도쿄나 신주쿠 같은 곳으로 가지 않느냐 물었지만 지민은 일부러 오타루에 왔다. 사실 오타루는 거쳐가는 곳이고, 본 목적은 삿포로에 가는 거였다. 겨울의 삿포로가 예쁘다고 했다. 누가 그랬냐면 지민의 첫사랑이 그랬다.
지민의 첫사랑은 고등학교 3학년 1반 가장 첫번째 사물함에 적힌 이름이었다. 민 윤기. 지민이 첫 여행지로 삿포로를 선택한 건 윤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그 이름을 처음 듣고 첫사랑이라는 타이틀 답게 진득하게도 가슴앓이를 했다. 윤기는 밴드부에서 건반을 쳤다. 그가 있는 밴드부는 학생 수준이 아닌 실력과 자작곡들로 온갖 대회를 휩쓰는 유명한 동아리였다. 지민이 중학생 시절 찬조 공연에서 본 적 있는 선배였다. 쉽사리 동아리 신청서를 내지 못하고 음악실 주변을 맴돈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늘 알짱대는 조그만 일학년 남자애가 신경쓰였던 윤기는 교실 창문에서 까치발을 들고 기웃대는 지민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여기서 뭐해?”
“헙…”
그 선배다. 지민이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윤기가 그대로 도망치려는 지민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밴드부에 관심 있어?”
“네?”
“이번주에 밴드부 오디션 있어.관심 있으면 보러와”
윤기가 복도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켰다. 지민은 교복 가디건 끝을 매만지며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민의 명찰을 흘끔 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민이 꼭 와. 목소리 좋아서 노래도 잘할 것 같네”
그의 입에서 제 이름이 불려지자 지민의 얼굴이 새빨간 토마토처럼 익었다. 대답도 못하고 멍청히 서서 멀어지는 윤기를 바라만 보았다. 붙잡힌 손목이 뜨끈했다.
결론적으로 지민은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떨지 않고 나름 잘 불렀지만 나긋한 목소리가 밴드부의 색과는 맞지 않았다. 쪽팔리고 속상해서 학교 뒷편에서 우는 지민에게 손수건을 건넨 건 윤기였다. 나는 네 목소리가 좋았어. 네 목소리가 더 취향이었어. 지민은 태어나서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처음 봤다. 윤기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펑펑 울었다.
지민은 시시한 독서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그날 이후로 윤기와 가까워질 수 있었다. 방과후 음악실에 가면 피아노를 치는 윤기가 있었다. 평소 밴드 연주때 쓰는 키보드가 아닌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지민은 그게 윤기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노을이 드는 창가나, 선선한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 예쁘게 흐트러지는 윤기의 생머리가 좋았다. 피아노 의자 옆자리에 붙어 앉으면 노트에 무언갈 끄적이는 윤기의 연필 사각사각 소리가 좋았다. 지민은 윤기가 좋았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바쁘게도 뛰었고, 함께 있으면 폭신한 베개에 누워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윤기는 3학년이었고 지민은 1학년이었다. 윤기는 금방 졸업해버렸다. 바보같이 고백 비슷한 것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그리고 그를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다시 만났을 때, 지민은 윤기와 자신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윤기와 다시 가까워 지는데엔 무리가 없었다. 지민을 발견하고 눈이 커진 윤기는 그리웠던 예쁜 웃음으로 지민에게 인사를 했다. 지민이 더 예뻐졌네-. 나긋한 목소리에 지민은 그동안 멀쩡히 뛰었던 심장이 꼭 뛰지 않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서야 스위치가 켜진 기분이었다.
너네 사귀냐?
지민은 얼어붙었고 윤기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꼭 사귀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사귀는 건 아닌 이상한 관계였다. 지민은 늘 은근히 마음을 표현했다. 저는 형이 이상형이에요. 형 미팅 나가지 마요. 싫어요. 하지만 윤기는 지민의 말에 미소를 짓고 다른 이들에게 철벽을 치면서도 고백 한번을 안했다. 지민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둘은 2년 가까이를 연인처럼 붙어다녔다. 처음에 지민은 관계에 정의를 내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냥, 윤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뚝뚝하고 표현도 서툴지만 가끔 불쑥불쑥 꽃 한송이를 내밀줄 아는 사람. 지민은 여전히 그런 윤기가 좋았고, 결국 어중간한 관계에 정의가 필요하던 시점이었다.
“우리 무슨 사이에요?”
어깨를 타고 주륵 내려가는 가방끈을 고쳐매고 물었다. 윤기는 당황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민이..너무 소중한 동생이지,형한테”
지민은 톡 톡 몇방울씩 싱겁게 내리는 비를 우산없이 맞으며 돌아갔다. 그날 이후 삼일 내내 열이 들끓었다. 홧병이 난 것만 같았다. 아님 뭐, 상사병이던가. 지민은 첫사랑을 길게도 앓고 있었다. 착각 안 하게 얼굴이라도 비추질 말던가. 윤기는 그런 지민을 삼일 내내 붙어 간호했다. 좋아해서 억울했다. 좋아한단 말 못 듣는게 억울했다. 형도 나 좋아하는거 맞으면서… 이럴때만 경상도 남자고 표현이 서툰 거냐고.
사람 인연이란게 참 허무하다. 그깟 운명이 뭐라고, 인연이 아니면 만나지 못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지민은 윤기가 제 인연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살아왔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겹치는 지인도 많지 않은데, 연이 아닌가 싶다가도 꼭 어떻게든 끊기지는 않고 이어졌다. 꼭 오래된 위태로운 실 같았다. 누구 하나가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당장이라도 톡 끊어질 것만 같은. 그런 부질없는 것 인것만 같았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누가 그랬었지. 장범준 씬가.
지민이 첫 여행지로 삿포로를 선택한 건 윤기 때문이었다. 그시절 윤기가 지민에게 늘 했던 말이 있었다.
“지민아. 우리…삿포로에 갈까?”
지민이 책에 고정했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이미 윤기에게 한껏 마음이 상해 뾰루퉁한 상태였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윤기를 바라보았다.
“뭐래요, 갑자기..”
“…아니. 규현이네 커플 이번에 일본 여행 다녀왔다는데 좋았대서…”
“형. 나 내일 쪽지시험 있어요.”
“…알겠어 임마. 지민이 요새 형한테 왜그러냐. 예전엔 선배~하고 쫒아다녀놓고“
“아. 가요!”
지민이 벌개진 얼굴로 씩씩댔다. 활짝 웃는 윤기의 입동굴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지민의 최약점인 웃음이었다.바보 같은 형. 나한테만 다정한 형. 근데 고백은 안하는 민윤기. 그래서 더 짜증나는 민윤기. 윤기는 정말 좋아한다는 말 엇비슷한 말 한번을 해주지 않았다. 늘 빨개진 귀로 예쁘네,귀엽네 달고 살아도 형이 너 좋아한다고 말 한마디를 못해서 지민을 아프게 했다. 제 마음도 모르고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놓는 윤기가 점점 미워졌다.
“지민아. 안추워?”
“네. 괜찮아요”
“…지민아,우리…”
“삿포로에 가자고요?”
“어? 어…”
“그만좀 해요! 형 대체 왜 그래요? 형 나랑 여행 안 갈거잖아요. 형 나랑 사귈 마음도 없으면서”
“지민아, 잠깐만”
“나 형 좋아해요”
“….”
“고등학생때부터 좋아했어요. 형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난 그랬어요. 근데 형은 맨날 농담따먹기나 하잖아요. 이상한 말만 하잖아요. 난 적어도 형이, 나랑 비슷한 마음일거라고 생각해서…”
“지민아, 그게 아니고”
“말 하지 마요. 듣기 싫어요.끝까지 말 돌리죠? 형 너는 진짜…”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차마 뒷말은 하지 못하고 뒤돌았다. 윤기의 무심함이 기어코 지민을 울렸다. 지민은 그 길로 윤기를 다신 보지 못했다. 당장 며칠 후 휴학했고 곧 군대에 갔다.그게 끝이었다. 끝. 이후 동기들을 통해 종종 들려오던 소식조차 끊겼을 뿐이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또다시 그런 말이 떠올랐다.
차라리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몰라. 그 때 그 음악실 앞에서 마주치지 않았다면. 울고있는 자신을 윤기가 달래주지 않았다면. 아니, 최소한 잊으려고 발버둥 치는 와중에 대학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꼭 애틋한 인연인 것 처럼 굴어놓고선, 이제와서 툭 끊겨버린 실이 허무하고도 화가 났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결국 끝은 줄이 끊어지던가 내가 떨어지던가 둘중 하나일텐데 그걸 알면서도 몇 년동안을 균형 잡는데에 허비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동안은 포기하려 할때마다 정말 운명인 것 처럼 나타났으면서, 정작 이렇게 중요할 땐 아무리 기다려도 다신 나타나지 않는 윤기가 원망스러웠다. 인연이 아니라 쾅쾅 못박은 운명이 참 얄미웠다.
…뭐, 그건 어디까지나 첫사랑 이야기이고. 벌써 수년전 이야기다. 지민은 그동안 애인도 몇 명 만났고 나름 잘 지냈다. 떠올리기만 해도 아팠던 기억도 이젠 마냥 아련하고 가끔은 남들에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철없던 어린시절 헤프닝이 되어 있었다. 여느 첫사랑이 그렇듯이 지민의 첫사랑도 그닥 오래 갈 인연은 아니었던 거다. 끊어진 채 다시 이어지지 않는…
“박지민?”
…어?
벤치에 앉아 멍하니 신발을 눈 위에 부비던 지민이었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 낮은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심장이 멎은 것 같았다. 떨리는 동공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진짜 오랜만이다. 살 많이 빠졌네”
“형이 왜 여기서 나와요…?"
“나 여기로 이민 왔잖아”
“뭐? 진심이에요?”
“옛날에 그랬잖아. 일본에서 살고 싶다고”
그런 거 기억 안난다고. 지민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을 동동거리며 꿍얼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어떻게 민윤기가 내 옆에 앉아 있냐….
“뭐 하고 지냈어. 혼자 여행 온거야?”
”…예. 저는 그냥 뭐.. 학교 다니고 있었죠”
“휴학하고 온거야? 졸업 얼마나 남았다고…자유도 좋지만 할 건 해야지”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그게 다에요?”
“아니이. 형뚜 니 나이 겪어봤잖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지민은 윤기가 하는 말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웃기시네 겨우 두살 많은 거면서. 근데 원래 이런 이미지였나 민윤기? 분명 지민의 기억속 윤기는 다정하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시절 지민의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눈 앞의 민윤기는… 그래, 솔직히 그냥 꼰대 같았다. 지민이 기억하는 모습은 추억 보정이 되어 있던 걸까. 하긴 애초에 겉모습 부터가 옛날 알던 윤기와는 백팔십도 달랐다. 까맣던 생머리는 노랗게 탈색되어 있었고 귀에는 피어싱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와, 근데 너 진짜 변했다. 볼살 왜이렇게 빠졌어? 완전 성숙해졌네. 옛날의 빡지미니가 아니네”
“형이 할 말이에요?! 형이 더 다르거든요?!”
“…아, 그른가”
윤기가 머쓱한듯 제 까칠한 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대학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두사람은 함께 눈길을 걸었다. 어색함이 차가운 공기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지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 걸으면서도 제 옆의 윤기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울렁이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여기야? 숙소?”
“네”
“우리 집이랑 가깝네…내일 술 한잔 할래?”
“저 내일 떠나요”
“…아. 한국으로?”
“아뇨. 다른 지역이요. 그…삿포로로 가요”
윤기가 움찔거렸다. 지민은 괜히 윤기가 오해할까 싶어 주절주절 쓸데없는 사족을 붙였다. 겨울 삿포로가 좋다고 하잖아요. 풍경도 예쁘고. 주변에서 다들 추천 하더라고요…
“이제서야 가는거야?”
“응?”
“서운하네. 옛날에 내가 그렇게 가자고 할 땐 무시하더니”
지민이 표정을 굳혔다. 사실 지민은 윤기가 오래전 했던 말 하나에 삿포로를 선택 한 것이 맞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싫어했다. 정말 지겹도록 삿포로 타령을 해 댔으니까.
“…형. 이제와서 물어보는 건데. 대체 그때 왜 그랬어요?”
“뭐가?”
“몰라서 물어요? 왜 나한테 고백 안했냐고요. 형도 나 좋아했던 거 맞잖아요”
“…너 많이 당차졌다”
“…형은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네요”
“있지, 지민아. 내가 그 날 작게 사고가 났었어. 그래서 연락도 못하고…뒤늦게 연락 하려니까 네가 입대 했다고 하더라고”
“…”
‘운명이란 인연이란 타이밍이 중요한 건가 봐…’
지민은 갑자기 이런 노랫말이 올랐다. 옛날에 윤기를 생각하며 듣고 많이 울기도 했던 노래였다. 이제와서 설명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우연히 엇갈린게 아닌, 운명이 아니라 엇갈렸던 거였다. 조금 놀란듯 하던 지민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 키스 할래요?”
“뭐?”
“그 때 몇 년을 좋아했는데 형이랑 뽀뽀 한 번 못해본 거 억울해서요. 아님 오늘 자고 가도 되고.”
“…지민아, 나 약혼자 있어”
“네?”
지민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윤기가 뒷목을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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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정말로 우린 아마 인연이 아닌가 봐… 운명이란 인연이란 타이밍이 중요한 건가 봐…♪
버스커 버스커 – 사랑은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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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자연스레 잠에서 깼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휴대폰을 보니 알람을 설정해둔 시간보다 삼십분은 일찍 깬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억울해서라도 다시 눈을 감았을 텐데 지민은 그냥 곧바로 일어나 이불을 갰다. 적은 짐을 싸고, 몇 겹의 옷을 다시 단단히 꿰어 입었다. 삿포로는 이곳보다 훨씬 추울 터였다.
그 때,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렸다. 이 아침부터 누구야? 깜짝 놀란 지민은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냥 무시하고 없는 척 할 수도 있는 건데 왠지 문을 두드린 이가 윤기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여니 역시나 그곳엔 윤기가 서있었다. 뛰어왔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형?”
“허억…아직 안 갔네”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뭐이렇게 빨리 떠나냐. 가자. 기차 타고 가지?”
“…”
윤기와 지민은 역까지 말없이 걸었다. 됐다고 극구 만류해도 기어코 지민의 배낭을 들어준 윤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박지민 손 작은 거 여전하네. 가방 가벼운거 봐라. 이래놓고 한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쓸모없는 기념품 같은 것들로 가방을 가득 채워 갈 게 분명했다. 추위에 붉게 변한 지민의 뺨이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오타루에서 삿포로까지 한번에 가는 기차가 있었다. 표를 끊은 지민은 기차를 기다리며 흐트러지는 입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야외 기차역은 뻥 뚫려 칼바람이 불었다. 살얼음이 낀 기찻길을 멍하니 보던 지민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옆에 서있는 윤기를 쳐다보았다.
“꼭 같이 갈 것처럼 구시네요”
“같이 갈까?”
“…됐거든요. 진짜”
능글맞기만 해져서는. 지민이 목도리에 얼굴을 폭 묻었다.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고 곧 저 멀리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지민아”
“…네”
“너무 늦었지만 미안했어. 그때 너 좋아하는 거 맞았어”
“....”
지민은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형은 진짜…끝까지 이기적이에요”
“미안해”
“말해줄수 있었잖아요. 아니, 하다못해 표현이라도 좀 해줄 수 있었잖아”
지민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윤기는 말없이 외투 주머니를 뒤적이다 무언가를 내밀었다.
“…뭐에요?”
“가져가. 선물이야”
윤기가 건넨 건 다름아닌 카세트 테이프였다. 지민이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과 윤기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왠 카세트 테이프?”
“마지막 선물. 나중에 혼자 들어”
열차가 역으로 진입했다. 지민은 윤기에게 등 떠밀려 기차에 올라탔다. 조심히 가라. 잘 살고. 윤기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고 나머지 한 손을 흔들었다. 형이 안 그래도 존나 잘 살거거든요. 지민의 말에 윤기가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곧 열차 문이 닫혔다. 씨…끝까지 멋있는 척이야. 지가 뭐 옛날 고딩때 민선밴줄 알어. 완전 꼰대 같아져선. 이제 아저씨면서. 요즘 세상에 누가 카세트 테이프를 듣는다고…. 하지만 지민은 투덜대는 말과는 달리 카세트 테이프를 꼭 쥐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열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천천히 멀어지는 지민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던 윤기는 고요해진 역을 지키다 한참 후에야 자리를 떴다.
-
“와…”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길이 끝없이 늘어졌다. 기차에서 내리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곧바로 숙소로 갈까 하다가 왠지 들떠선 무작정 걸으며 소복히 쌓인 폭신한 눈을 잔뜩 밟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추웠고, 거의 시골 수준으로 차 한대 없이 한적했다. 멍하니 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하늘이 어두웠다. 아, 숙소까지 언제 돌아가냐…. 얼어붙은 코를 훌쩍대며 한숨을 폭 쉬는데 저 앞 불빛이 보였다. 의아함에 가까이 걸어가니 나무로 지어진 작은 가게였다. 마침 잘됐다 싶어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몸도 녹이고 필요한 것도 좀 살 생각이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께서 지민에게 눈인사를 했다. 물이나 과자 이것저것 카운터에 내려둔 지민은 옆에 놓인 낡은 기계를 발견했다. 어느정도 열심히 공부해 온 서툰 일본어로 할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あの...これは何ですか?”
(저기…이건 뭔가요?)
“カセット”
(카세트)
“카셋토…아! 카세트”
망설이던 지민이 물건들 사이에 카세트를 내려 두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는 정보를 듣고 코코아까지 얻어마신 지민은 녹은 몸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할머니께서 알려주신 길로 쭉 걷다보니 정말로 정류장이 보였다. 겨우 두 대의 버스가 오는 것 같았다. 몸은 충분히 녹이고 와 견딜만 했지만 배차간격이 길어 지루해졌다. 지민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피곤했다.
“…”
문득 주머니에 넣었던 작은 카세트기를 꺼냈다. 뭐하자고 이런 낡은 골동품 같은 카세트기를 산 거지. 그냥 과자나 하나 더 살걸. 이게 다 민윤기 때문이야. 지민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윤기에게 받은 카세트 테이프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
지민은 안테나를 뺄 줄 몰라서 한 번, 테이프를 어디에 넣는지 몰라서 두 번, 켤 줄을 몰라서 세 번이나 헤맸다. 심지어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아 씨 이거 그냥 고장난 장식품인거 아냐? 그냥 다 갖다 버려뿔라! 씩씩대며 퍽퍽 내려치니 그제서야 지직대는 소리가 났다. 어? 되는 건가? 안테나를 만지작 대던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흠흠. 듣고 있냐?』
어? 형 목소리… 설마 직접 녹음 한 건가..? 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세트기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뭐?
『…매일매일 폭설을 기다리다 드디어 폭설을 만났습니다. 요즘 저의 근황을 이야기하자면 매일매일 폭설 중이라는 겁니다. 이리도 폭설 중인데 무엇이 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폭설이 두 눈으로 들이치는데 어떻게 한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을까요. 놀랍네요, 이런 기적들이, 괜찮네요.』
뭐라는 거야? 이게 뭐야?
『…우리 천 살까지 만나 살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
『이러면 어떨까요. 모두를 던지는 거예요. 그 다음은 그 이후의 모두를 단단히 잠그는 거예요.』
지민은 그제서야 윤기가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걸 알았다. 뭐지 이게? 시 같은 건가?
『삿포로에 갈까요. 』
익숙한 문장이 나오자 지민이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발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술을 마시러 갈 땐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거예요. 전나무에서 떨어지는 눈폭탄도 맞으면서요. 동물의 발자국을 따라 조금만 가다가 조금만 환해지는 거예요.』
『하루에 일 미터씩 눈이 내리고 천 일 동안 천 미터의 눈이 쌓여도 우리는 가만히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미끄러지는 거예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바깥으로 나가요. 하고 싶은 것들을 묶어두면 안 되겠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절망한 것을 사과할 일도 없으며, 세상 모두가 흰색이니 의심도 서로 없겠죠. 우리가 선명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 모호해지기 위해서라도 삿포로는 딱이네요.』
어느덧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얼이 빠진 지민의 콧잔등에 눈송이가 느릿하게 내려 앉았다.
『당신의 많은 부분들. 한숨을 내쉬지 않고는 열거할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부분들까지도. 당신은 단 하나인데 나는 여럿이어서, 당신은 죄가 없고 나는 죄가 여럿인 것까지도 눈 속에 단단히 파묻고 오겠습니다.』
지민은 손을 파르르 떨며 윤기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자신이 너무나도 좋아하던 목소리였다. 이따금 직접 쓴 곡의 가사를 읊어줄 때, 장난스레 라디오 디제이를 하라고도 했었던 적도 있었던. 그런 잔잔하고 나긋나긋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였다. 형,지금,대체 무슨 글을 읽고 있는 거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게 뭐야?
『삿포로에 갈까요. 』
“…”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지민은 그 자리에서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 중간중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저릿했다. 끝나버린 테이프는 지지직 소리를 내며 늘어져 버렸다.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쳐 갔는데도 한참을 그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윤기는 제 나름대로 늘 표현하고 있었던 거였다. 바보같게도 좋아한단 말 하나를 못해서 삿포로에 가자는 둥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해대며 지민의 곁을 맴돌았던 거였다. 미친놈.나쁜새끼. 이걸 대체 몇 년만에 알려 주는거야. 그렇게 되물었을땐 다 회피해 놓고선. 이제와서, 이제와서….
지민이 카세트기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고요함을 뚫고 우당탕 소리와 함께 떨어진 카세트기에서 다 늘어진 테이프가 튕겨져 나왔다. 아마 윤기가 읽은 글은 윤기가 오래토록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일 테다. 지민은 떨어진 카세트기를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찬 공기에 흩어진 윤기의 목소리를 되내였다.
내 첫사랑. 내 인연이 아니었던 사람. 우리 다음 생엔 꼭 붉은 실로 이어져서 만나요. 함께 흰 눈에 모든 걸 파묻어 버려요.
삿포로의 겨울은 차가웠다. 당장이라도 온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지민은 이제서야 오래된 첫사랑에 막을 내렸다. 내리는 눈을 하릴없이 맞으며 얼 것 같은 눈물을 흘렸다.
fin.
*마지막에 윤기가 읽은시 (『 』괄호 안에 있는 내용) 는 이병률 시인의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 이라는 시를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