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MACAU | 중국 마카오
Endless Macau's Night
w. 溫花 (@W_flower__)
여기는 카지노다. 누군가는 돈을 얻고 누군가는 돈을 잃는 곳.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과연 난 전자일까 후자일까? 정답은,
"축하드립니다, 게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딜러다. 굳이 따지면 전자에 속하는 월급쟁이 말단 딜러. 그리고 앞에서 온갖 신의 이름을 불러대며 감사를 표하는 저 사람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빚쟁이일 거다. 지금은 빚의 극히 '일부'를 갚았겠지. 만약 기적적으로 빚을 다 청산해도, 다시 만들러 오는 사람들이니 별 감흥 없다. 아 퇴근하고 싶다, 이 새낀 왜 안 와? 더럽게 심심하네. 낮에는 사람 많아서 힘들긴 해도 재밌다던데, 밤에는 윗층만 좀 재밌지 아래층은 여행객 다 빠져나가고 도박에 미친 놈들 뿐이라.
“많이 기다렸냐?”
어, 존나. 이렇게 말해도 조직에서 일하는 새끼라 마냥 편하게 때리지는 못 한다. 다행히 지 잘못인 걸 아는지 머쓱하게 웃길래 뭐라할 힘도 없던 지민은 태형의 어깨를 대충 두드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직원용 탈의실로 갔다. 하도 많이 입어 늘어난 목티와 바지에 각각 팔과 다리를 억지로 쑤셔넣고 코트를 걸치니 꽤 뜨뜻했다. 그리고 몇 없는 짐을 챙기고 종종걸음으로 카드 한 장에 절규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카지노를 나갔다. 저 퇴근이요.
코타이 스트립(마카오의 타이파 섬과 콜로안 섬을 매립하여 만든 코타이 구역에 있는 호텔과 카지노 등이 들어서 있는 거리이다.)은 잠들지 않는다. 새벽엔 어두울 것 같지만 오히려 건물 하나하나가 집 채만한 가로등 수준이라 낮보다 더 밝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여기서 한 때 저 꼭대기를 동경했었다는 생각에 피실피실 헛웃음만 흘리며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걸었다. 내가 미쳤지, 저기 가서 뭔 짓을 하겠다고. 코트 주머니에서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있는 욕 없는 욕 다 해가며 폰을 봤는데, ‘기일’이라는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걷는 것도 잊고 제자리에서 10초를 우뚝 서 있자 행인이 뭔 이런 미친 놈이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비켜가고 난 뒤에야 다시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피곤하기만 했지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는데 방금 몹시 매우 심각하게 더러워졌다. 이 상태로 집으로 가 침대에 누워봤자 내일 눈 밑을 판다라도 된 양 검게 하고 출근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방향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내일 출근해야 되니까 너무 센 건 마시면 안 되겠네.”
자신과 지키지 못할 약속 하나를 하며 방금 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적당히 비싸 보이는 술집 하나에 들어가 아무거나 가리키며 달라 하니 바텐더는 금방 술을 만들어 놓고는 떠났다. 홀짝 거리며 분위기 잡고 마실 생각은 딱히 없던 지민은 무작정 원샷을 하고 방금 행동을 아주 조금 후회했다. 술이 마냥 세다고는 못하기에 내일 출근은 기어서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동작을 느리게 만들었지만, 이 기세를 몰아 블랙 러시안 한 잔을 주문해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취기가 올라 볼이 발그레 해지며 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잘하면 내일 출근이 문제가 아니라 오늘 귀가가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스쳤다. 그러나 몸이 뜨거워져도 감각은 그대로인지라 옆에서 남자 한 명의 따가운 시선이 고스란히 피부를 타고 중추로 전달되었다.
“할 말 있어요?”
“아뇨, 딱히.”
“그럼 작작 보세요, 기분 나빠요.”
예전부터 유명한 지민의 필터링 없는 화법은 지금도 어김없이 발현됐다. 이에 남자가 한 번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사과 한 마디 없이 무시하는 태도에 지민이 다시 입을 열려 했으나 바텐더가 가로막았다.
“저, 지금 커피 리큐어가 다 떨어져서 죄송하지만….”
뒷말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료 떨어졌으니까 다른 거 먹으란 소리 같다. 근데, 원래 불편한 건 참아도 불공평한 건 못 참지 않은가. 마침 취했겠다 뵈는 게 없어진 지민은 한 2m 옆에서 저보다 늦게 주문해놓고 당당하게 블랙 러시안을 마시는 남자를 노려봤다. 쓸데없이 잘생긴 남자도 시선을 느낀 건지 이제서야 느릿하게 돌아보는데, 괜히 질세라 싶어 눈을 더 부릅 떴다. 자신이 봐도 ‘나 지금 취했다.’라는 얼굴이라 그런 건지 남자가 그냥 코웃음 한 번을 치고 시선을 거두는 데자뷰가 일어나자 깊은 빡침이 올라온 지민은 한적한 내부에 감사를 표하며 남자가 다 들리게 말했다.
“여기는 주문을 순서대로 해주지 않나보네요?”
“네?”
“제가 왜 못 마시는 건지 이유를 듣고 싶네요, 저분한테요. 좀 물어봐 주시겠어요?”
다시 남자의 시선이 저에게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곁눈질로 깨달은 지민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당황한 바텐더의 표정을 감상했다. 진짜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민의 말에 담긴 속 뜻이 ‘왜 내가 먼저 주문했는데 저 새끼가 먼저 받냐?’라는 건 눈 감고도 알 것이다. 바텐더가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랬는데 입 꾹 닫고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만 반복하는 탓에 지민은 혀를 쯧 차며 아직까지 저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왜 그쪽이 마시고 계세요? 다행히 남자는 지민의 직설적인 화법에도 미간을 좁히는 일 없이 대답해주었다.
“돈이 좀 많아서.”
…아 난 돈 없어서 못 먹는 거다? 그쪽은 돈 많아서 먹는 거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헛웃음을 지으며 얼음을 육포 씹듯이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저 남자도 자신 못지 않게 성격 더러운 것 같다. 돈 없어서 마땅히 받아야할 서비스나 재화를 받지 못 한다는 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방금 실제로 겪은 지민은 저 남자가 초면에 얼마나 무례한 말을 말이라고 지껄였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함에 아까 마신 술이 절로 깼다.
“돈 많아서 좋으시겠네요, 평생 그 돈으로 그 짓거리 하면서 사세요. 난 정직하게 살 테니까.”
더러운 마음 달래려 왔건만 더 더럽혀진 기분에 돈만 턱 얹어놓고 밑창이 해진 운동화로 겨우겨우 딱딱 소리를 내면서 걸어 나갔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지민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들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정말 뭐 같은 하루였다.
-
“네?”
“위에서 부른다고, ‘박지민'씨를. 아직도 모르겠어?”
드디어 말단 탈출할지도 모르겠네. 미리 축하해요. 동료가 뭐라 호들갑을 떨어대든 지민은 도박중독자들의 광적인 게임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가슴이 뛰었다. 몇층이냐 물으니 높은 층이어서 더 설레기도 했다. 사실상 처음 타보는 엘리베이터는 고급졌다. 코타이 스트립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올 뿐더러 시선이 닿는 곳 마다 휘황찬란하게 꾸며져있는 게 층수와 재력은 비례한다는 태형의 말에 토를 달 수 없게 만들었다. 동시에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또렷하게 상기됐다. 아마 먹이사슬 가장 위를 군림하는 자들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탓에 차마 문고리를 돌릴 수 없었다. 먹이사슬의 꼭대기라는 뜻은 먹위사슬 최하위에 위치했던 제 부모를 잡아먹었던 놈들이기도 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안 들어가고 뭐해요?”
지민이 크게 놀라자 도리어 머쓱해진 남자는 누가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네. 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지민이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북극 체험이라도 하고 있던 건지 훅 끼쳐오는 냉기에 절로 몸이 경직됐으나, 저에게 꽂히는 여러 개의 눈동자들로 인해 직업정신으로 이 악물고 방으로 들어갔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낱낱이 훑는 눈빛에 발가벗겨진 채 서있는 기분이 든 지민은 괜스레 공백을 메우기 위해 아무말이나 지어냈다. 지금 떠오르는 가장 만만한 말이 이거 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지 다 멀쩡히 붙어있는 채 블랙칩 쌓아놓고 게임 준비하는 이곳에 안녕 못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뚱맞은 제 인사가 웃겼는지 아니면 그냥 저가 웃겼는지 한 명이 소리내서 웃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다른 이들도 다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드디어 분위기가 조금 유순해졌다. 그 틈을 타 모두의 얼굴을 조용히 훑는데, 낯익은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반가움’ 같은 감정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상대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저 저 새끼가 왜 여기있지? 같은 심정이랄까. 잠깐, 나 그럼 여기서 노는 새끼한테 어제 비꼰 거야?
“구면이죠?”
주어가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저 말이 자신을 향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여유 넘치게 웃는 저 모습이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닫게 해주었다. 저 새끼가 나 불렀구나? 맘 같아선 다가가서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치는 순간 죽을 각오로 겨우 올라간 먹이사슬을 자진해서 쭉 내려갈 것임을 알기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저 새끼’는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표정이 바뀔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시작 안 하나?”
분명 아래층에서 많이 들었던 말인데, 여기 명품 아닌 걸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치장을 한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이 말을 들으니 등골이 보통 서늘한 게 아니다. 아마 판돈도 단위부터 다르겠지. 지민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있었던 곳이 광활한 초원이었다면, 이곳은 아마 호랑이굴 가장 깊숙한 곳이리라. 지민은 당장 이곳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되찾은 평정심으로 억누르며 카드를 쥐었다. 게임이 시작했다.
블랙잭, 총 21점이 되도록 카드를 모으는 카드 게임이다. 딜러와 플레이어가 겨루는 게임으로, 딜러가 21이 넘지 않을 경우는 딜러보다 21에 가까울 경우 승리한다. 딜러가 21이 될 경우는 플레이어가 21이 되지 않으면 패배한다. 딜러가 21을 넘을 경우 21 이하의 합을 가진 사람이 승리한다.
“서렌더.”
순식간에 블랙칩 몇 개가 공중으로 분해됐음에도 남자는 별로 아쉽지 않은지 다음 판 배팅을 시작했다.
“버스트.”
여전히 표정 변화라고는 볼 수 없었다.
“…버스트.”
아래에서도 한 번 정도는 이겼는데. 상류층에 대한 기대가 하락했다.
“……버스트.”
지금 잃은 돈만 얼마야. 이제야 깨달았다. 이 사람 돈 딸 생각 1도 없다. 지민의 환상을 유리창 깨듯 와장창 부순 인간 옆 아까 문 앞에서 말 걸었던 인간 1은 그 모습에 한 마디 뱉었다.
“민윤기 오늘 무슨 자선단체냐?.”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네요…. 대화를 들어보니 어제 술집에서 만난 저 새끼가 ‘민윤기'인 것 같다. 이름도 알았겠다 김태형 수준이었다면 바로 멱살 잡고 흔들며 어제 일 가지고 여기까지 부르냐 쪼잔한 새끼야? 라고 물었을 텐데. 그러나 현실의 벽에 막힌 지민은 그저 카드만 묵묵히 나눠줄 뿐이다.
“박지민씨?”
“네,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게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건 버리든지 태우든지 알아서 하시고.”
“…네?”
“어제 평생 이 짓거리 하면서 살라고 하지 않았나, 바라는 대로 해주는 중인데. 아, 가져도 돼요.”
지민이 간과한 게 몇 개 있다. 민윤기는 진짜 ‘어제 일 가지고 여기까지 부르는 쪼잔한 새끼’였다는 것과 칵테일 먼저 마실 수 있는 수준의 부자가 아니라 천 달러짜리 블랙칩을 이제 두 번 만난 놈한테 원하면 가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부자라는 걸. 다년간 눈치 봐가며 바닥에서 올라온 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민윤기 쪽에 있는 블랙칩을 진짜로 가져갈 시 모든 이의 조소를 한 몸에 받을 것이고 안 가져갈 시엔 성의를 무시하는 거냐며 정작 민윤기는 가만히 있는데 주변인들이 입방아를 찧어댈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생각에 다다랐을 때에야 어차피 제 반응 시험하는 걸 텐데 굳이 저 시나리오대로 해 줄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조금(다량)의 반항심을 담은 사춘기의 청소년처럼 삐딱하게 대답했다.
“실례지만 그 돈의 출처를 밝혀주실 수 있습니까?”
“….”
돈에서 피 냄새 날 것 같아서. 뒷말도 뱉으면 제 인생 그래프는 수직으로 하락할 것 같아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확실히 예상 외였던 건지 벙쪄 있는 모습들에 오히려 지민이 조소를 띠운다. 내가 그걸 가질 생각은 있긴한데 그냥 받기엔 너무 찜찜해서 그러니까 어떻게 번 돈인지 설명해봐. 방금 한 말의 속뜻이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모르겠으나 모두 벙쪄있다는 건 제 말을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는 뜻이고, 더이상 여기서 살아숨쉬면 자신의 생사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지민은 어수선한 도박판을 마무리함을 가장한 호랑이굴 탈출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더이상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남겨두고’ 가시는 칩은 제가 나중에 교환해서 다른 딜러 편으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니가 준 돈 내가 안 가지고 너한테 다시 돌려드릴 테니까 어차피 나중에 또 오는 거 그때 가져가세요.’
지민은 이 사람들과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빌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특히 가운데 앉아계신 ‘민윤기’씨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난 역시 여기랑 안 맞나 봐. 먹이사슬 최하위의 자식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본질은 늘 밑바닥이더라. 그 진리를 곱씹으며 다 늘어진 가디건을 걸쳤다. 옛날에는 매일이 이보다 더 개 같았는데, 조금 숨통이 트이니까 조금만 기분 더러워도 이런 생각이 드네. 나도 참 물러졌다 그죠 엄마? 방 깁숙히 묻어놨던 액자 하나를 꺼냈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나오면 좋을 텐데, 야속하게도 눈물은 이미 메마를 대로 메말라 남은 건 끝없는 절망뿐이다. 그날 밤 지민의 방은 무언가를 소중히 끌어안고 있는 그림자만이 가득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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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난 민윤기와 아이들(?)에게 은근한 엿을 먹이고 해코지 당할까봐 바로 나갔었다. 그리고 오늘 시말서 쓸 각오하고 잘릴 각오도 하고 출근했는데, 김태형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떡하니 서서 일하고 있어서 정말 무통보 해고인 건가 싶어 철렁한 마음에 왜 네가 여기있니? 하고 물으니 너 몇 번 방으로 호출 왔었는데 몰랐냐면서 지가 더 호들갑을 떨지 뭔가? 지민이 뭔 개소리야 출근하기도 전에 호출을 하는 미친 놈이 어딨냐? 라고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며 말하니 태형이 진짜라면서 너 빨리 가보라고 하도 닥달하는 통에 지민은 등살에 떠밀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떤 미친 놈인지는 몰라도 제대로 미쳤다. 거의 어제 만난 민윤기 수준이다.
“….”
미친 놈이 민윤기 수준인 게 아니라 민윤기가 상상이상으로 미친 거라 하자. 왜냐하면 지금 저기 앉아있는 분은 쌍둥이거나 도플갱어가 아닌 이상 어제 만난 민윤기이기 때문이다. …박지민 진짜 어떻게 걸려도 저런 개 또라이한테 걸리냐.
“안 앉고 뭐해요? 옷은 또 왜 그렇게….”
“지금 유니폼 안 입었으니까 딜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한 마디 해도 됩니까?”
“안 된다고 해도 말할 거죠?”
“당연하죠.”
“뭔데요?”
“원래 사람이 그래요?”
“?”
“원래 그렇게 쪼잔하고 비열하고 재수없고 그러냐고요.”
웃고 있다. 분명히 웃고 있다. 그냥 취향이 이상한 사람인가? 어떻게 대놓고 욕을 해도 저렇게 무해하게 웃을 수 있지? 원래 욕을 해도 상대가 아무 반응도 없거나 오히려 긍정적이면 도리어 욕 한 사람이 죄책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앞에서 대담하게 자기 욕 했는데 귀엽다는 말이 나온다면 이 사람은 진정으로 미쳤거나 한국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 거나 둘 중 하나다. 중국 마카오 호텔에서 후자인 경우보다는 전자가 더 가능성 있으니 저 사람은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자. 사실 어제부터 꾸준히 결론은 하나다. 이 사람은 미쳤다.
“되게… 이상하시네요.”
미쳤다는 표현 최대한 순화해준 거니까 고맙게 여기세요 민윤기씨. 아쉽게도 이런 지민의 깊은 뜻은 윤기에게로 가 그냥 병아리가 삐약 거리는 수준으로 평가됐다. 조금 부리가 뾰족하고 두툼한 병아리 한 마리. 윤기가 뭔 망상을 하던 지민은 그저 오늘은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 나갈까 싶었다. 벌써부터 편두통이 밀려오는 건 아마 출근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8할은 저 새끼 때문일지도.
“저 옷 갈아 입고 와도 되나요?”
“그 옷이 편해요?”
“편하겠어요?”
질문을 했는데 질문으로 답이 오는 이상함에도 윤기는 작은 감탄을 보이며 그 실용성이라고는 개나 줘버린 디자인의 유니폼을 떠올렸다.
“불편하면 왜 갈아 입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요?”
출근 전부터 불려와서 안 그래도 기분 뚱해서 말로 사람 조질 수 있을 것 같 건만 불 난 데 기름 붓는 격이다. 일할 때 이거 입고 할 수는 없잖아요. 지민의 애착 아이템 베이지색 가디건과 헐렁한 청바지는 누가 봐도 블랙칩으로 탑 쌓으면서 놀고 있는 사람 상대하는 카지노 딜러가 입기엔 너무 프리해보였다. 그러나 윤기는 계속해서 블랙칩을 쌓으며 나른한 고양이가 배 깔고 누웠다 먹이라도 찾은 마냥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지금 일 하는 거예요?”
“…그럼 뭐 하는데요?”
“저랑 놀면 안돼요?”
“…네?”
“그냥 놀아달라고.”
언제부터 딜러의 업무가 ‘손님 놀아주기’도 있었나. 지민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비속어들을 꺼내면 실직자라는 생각으로 겨우 눌렀다. 지민이 싫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니까 윤기도 예상했다는 듯이 입꼬리를 아주 살짝 내렸다.
“안 놀아주고 나가도 돼요. 근데 나가면 해곤데.”
“….”
“아, 이건 협박이에요.”
냉큼 나가려 하니까 윤기가 추가 조건을 하나 더 달았다. 그 추가 조건이 발목을 잡다 못해 족쇄를 채우자 지민이 욕지거리를 좀 많이 읊조리고 서비스용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돌아보니 술잔만 달그락 소리 내면서 흔들고 있는 윤기가 여유있게 웃는다. 아 진짜, 쓸데없이 더럽게 잘생겼어.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그쪽 시간.”
“….”
“이것도 엄연히 도박인데.”
“…네?”
“저는 제 시간을 걸었고, 지민씨도 시간 걸래요?”
“애초에 무슨 선택지인지도 모르는데…!”
“박지민씨가 저한테 넘어오는가 안 넘어오는가.”
“…예?”
저는 넘어온다에 걸게요, 박지민씨는 안 넘어온다에 걸던지. 궤변도 정성스레 하면 하나의 그럴듯한 의견이 되고 주장이 되고 논설문이 된다. 그러나 이런 궤변은 아무리 정성스레 해도 개소리로 치부될 뿐이다. 멍멍.
“누가 이길지 궁금하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이길 확률은 낮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이길 사람이 궁금한 게 아니라 정해져 있는데 굳이 내가 이 게임에 참여해서 귀찮음을 겪어야 하나요? 지민이 온몸으로 싫음을 표출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자본주의 같으니라고. …사실 무조건 자신이 이길 것처럼 구는 저 사람 때문에 궁금해진 것도 있다. 내 마음을 과연 바꿀 수 있을까 싶어서.
특별한 게임이 시작됐다. 그러나 흔하디 흔한 규칙 한 줄도,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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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난 되게 자신있게 말하길래 계획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시간을 산다느니 게임하자느니 밑밥은 번지르르하게 깔아놓고 기껏 하는 게 ‘다른 호텔’ 가서 도박하기. 이 사람 사실 도박 중독 아닐까? 근데 또 더럽게 못 해서 그냥 기부하는 수준으로 돈 퍼주고 계신다.
“이럴거면 그냥 우리 카지노에서 하지.”
“하지 말란 소리는 안 하네요?”
“하지 말라해도 할 거 잖아요.”
“잘 아네.”
아, 진심 대가리 후려보고 싶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얄미울 수 있지? 지민이 윤기의 머리를 몰래 후려볼 계획을 짜는 동안, 윤기는 또 두 번을 졌다. 아니 진짜 자선 단체야 뭐야? 더이상 두고 보다간 아무리 화수분처럼 나오는 돈이라도 바닥 볼 것 같아 윤기를 판에서 뜯어냈다(?). 지가 먼저 자신있게 나 퇴근 시켰으면서, 카지노 나가니까 하는 말이 아주 가관이다.
“할 거 없는데 이제.”
“…한 대만 쳐도 돼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이럴 때만 갑인 척 하지 진짜.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면상 때문에 지민의 입술이 오리 친척이라해도 믿을 것처럼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친구로 대해달라는 거야 갑으로 대해달라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뭐 관광명소 같은 데 몰라요?”
“카지노요.”
아님 호텔.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바로 즉답이 나온다. 그 즉답이 방금까지 있었던 곳이란 게 좀 문제라면 문제지만. 지민도 자기가 말해놓고 답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헛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갈 곳이 하나 더 있긴하다. 근데 갑과 을이 명확한 관계에서 가기엔 너무 그런 자리고, 거기서 또 홀짝 거리면 그 날이 떠오를 것 같아서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처음 만났던 데 갈래요?”
아 진짜 눈치 더럽게 없어. 처음 만났던 데 하면 그쪽이 제 블랙 러시안 뺏어 마신 날이란 게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마음속으로 텔레파시를 보내봐도 돌아오는 건 제 대답을 독촉하는 눈빛 뿐이다.
“네, 가요.”
대신 오늘은 제가 먼저 마실게요. 윤기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소심하나 확실한 복수가 참 지민스러웠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뭔 상대의 특징을 아냐 싶지만, 윤기는 개의치 않고 ‘당돌하고 거침 없는 병아리 감아보기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블랙 러시안이요.”
“그때보니까 술 약해보이던데.”
“무슨 상관이에요, 집에 기어가든 날아가든.”
뒷말은 사실상 불가능하지 않나. 윤기가 칵테일 잔을 유유히 흔들며 물었다. 지민은 이런 순간까지 진지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고 그토록 마시고 싶었던 블랙 러시안을 한 모금 마셨다.
“맛있어요?”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지민은 제발 이 사람 앞에선 취하지 않기를 빌며 저번과 다르게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며 마셨다. 취하지 않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뭐 대충 넘어가자. 안타깝게도 상대가 초면에 자신의 취한 모습을 봤었다는 걸 망각한 지민은 얼굴에 올라오는 홍조를 가리는데 급급했다. 손으로 가려보기도 하고, 몇 번 때려보기도 하고, 화장실 핑계를 대며 찬물에 세수도 하고 왔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윤기가 가끔씩 이유 모를 웃음을 흘리면 지민이 똥 씹은 표정으로 윤기를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을 한 다섯 번 쯤 반복하니 홍조를 없애려는 노력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볼이 붉어지고 애초에 그런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붉어지는 얼굴에 지민이 얼음잔을 대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 몰라, 걍 이러고 있을래. 엎드리니 테이블의 서늘한 기운이 볼을 타고 흘러와 시원하게 해주었다.
“만져봐도 돼요?”
“뭐를… 설마 제 볼이요?”
정답인 건지 가만히 쳐다만 보길래 반항할 여력도 없던 지민은 그냥 긍정을 내보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차가운 손가락이 제 볼을 살포시 찌른다. 시원해서 좋긴 한데, 나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 사람이 이러고 있으면 재밌나?
“재밌어요?”
“네, 이렇게 말랑한 사람은 처음 보네요.”
“…칭찬이죠?”
“당연하죠.”
“그럼 됐어요.”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지민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도 모르는 바람을 맞으며 노곤해지는 몸을 애써 긴장시켰다. 여기서 긴장 놓으면 바로 곯아떨어질 것 같아서. 사실 지금 반쯤 곯아떨어지기는 했다. 얼마나 정신을 잃었냐면, 눈 앞에서 제 볼에서 머리카락로 갈아탄 민윤기가 궁금해진 정도.
“왜 그렇게 봐요?”
“궁금해서요.”
“뭐가요?”
“왜 이렇게 대해요? 난 그쪽한테 욕 밖에 안 한 것 같은데?”
”욕이 꼴렸나보죠 뭐.”
…꼴렸다고?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전부터 느꼈는데, 취향 진짜 이상하시네요.”
“그쪽이 이상해요? 난 그쪽이 취향인 거 같은데.”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가? 왜 저딴 ‘책으로 배우는 연애지침서’에 나올 만한 플러팅을 들었는데도 전혀 싫지가 않지? 심지어 설렜다. 미친, 박지민 술 취했나봐.
“…방금 건 좀 호감이었다.”
“다행이네요, 욕 먹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술이 용기를 심어주는가보다, 평소보다 더 뵈는 게 없어진 지민은 드디어 테이블에서 머리를 뗐다. 원래,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확인하는 방법이,
“….”
스킨십이라더라. 얼굴이 빨개질 때 입술도 같이 빨개졌던 건지 아주 새빨간 입술이 윤기의 술잔이 닿던 곳에 술잔 대신 닿았다. 윤기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3초 동안 고민했다. 박지민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았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리드해달라는 뜻일까 아닐까. 윤기가 자신만의 눈치게임을 하는 동안 지민은 미동도 없이 눈만 감고 있었다. 살포시 감은 눈 위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때문에 그만 아찔해진 정신이 윤기를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게 했다. 지민은 여전히 눈을 감았고, 바텐더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고, 윤기는 가만히 지민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길고 가늘게 늘어나는 은빛 거미줄들이 허공에 수놓아진다. 지민은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눈을 뜨고 거미줄들을 보며 푸스스 웃었고, 윤기는 제멋대로 리드한 게 지민의 심기를 거스른 건가 싶어 조용히 지민을 관찰했다. 그러나, 나온 건 그때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호감이었네. 도박 이기셨네요, 축하드려요.”
“나 싫어했던 거 아니었어요?”
“난 미쳤다고 했지 싫다고는 안 했는데요?”
언제 그렇게 왜곡하신 거예요 ‘미친’ 민윤기씨? 지민이 ‘미친'에 포인트를 주며 말해도 윤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넘겼다. 다시 테이블에 엎드리며 웅얼거렸다.
“난 한 번도 그쪽 미쳤다고만 했지 싫다고 안 했어요. …사실 그쪽보다 미친 놈들 상대하고 상대했던 사람이라 그다지 거슬리지 않아요, 그냥 돈 많고 잘생긴 미친 놈이 사람 괴롭히는데 재미들렸구나, 싶었죠.”
“그럼 내일도 놀아줄래요? 방금 그쪽이 더 재밌어져서.”
“음, 그래요 뭐. 놀아드릴게요.”
말은 새침했으나 표정은 누구보다도 해사하고 밝았다. 이중적인 그의 모습에, 윤기도 막연한 재미가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변질 되는 것을 느꼈다. 지민은 반쯤 풀린 눈으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럼, 오늘 일 잊지 말고 내일도 와요.”
지민은 기억 못 할 약속이지만 새끼손가락은 공들여서 걸었다. 도박은 기적적으로 윤기가 이겼다. 보상은 지민의 마음이라지?
ㅡ
나 어떻게 집에 왔지. 말끔히 어제 출근 복장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민윤기랑 술 마신 뒤로 기억이 안 나는데, 민윤기랑 키스한 기억이 뇌에 박혀있다. 술 퍼마시고 집에서 퍼질러 자다 꾼 꿈으로 치부한 지민은, 이불속으로 다시 꼬물꼬물 들어가며 잠을 청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추호도 모른 채 말이다. 출근하니 태형에게 등 떠밀려 룸으로 향하는 것이 소름끼치게 어제와 똑같아서 의문을 품던 찰나 언제나 뭐든지 안다는 듯이 와인잔을 흔드는 손과 나른한 눈이 저를 반긴다.
“…이거 혹시 타임 리프인가요?”
그럴리가, 그냥 지민씨가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 입고 온 거겠죠. 민윤기는 방 안에서 홀로 반짝였다.
“오라면서요, 어제.”
아아, 그 키스는 꿈이 아니었나보다.
꿈이라서 달았던 게 아니라,
민윤기라서 달았던 거였나보다.
마카오의 밤은 오늘도 잠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