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LISBON | 포르투갈 리스본
비망록 (備忘錄)
w. 마을 (@MIN12_village)
나에겐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래서 그곳에 간다.
포르투갈에 다시 온 것은 6개월 만이었다. 그 말은 그 일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는 걸 의미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한 우리의 끝이었다. 지친 너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너무 아팠지만 잊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여기서 내가 해야할 일은 그때 갔던 곳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었다. 6개월이나 지났지만 어딜 갔는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났다.
벨렘 탑
제일 먼저 간 곳은 벨렘 탑이었다. 빨리 가고 싶다며 간 것이었다. 그가 한 말이 생생하다.
“형! 여기 너무 멋져요. 사진에서 본 그대로인데?”
나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그때만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었지.
우중충한 날씨다. 저번에 왔을 때는 여름의 화창한 날씨였는데. 여름에 오기에 훨씬 더 좋은 곳인 건 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을 각인시키기 위해 온 거지 여행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다만 조금 그랬던 것은 가뜩이나 심란한데 날씨가 이러니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는 거다. 이런저런 회상을 하며 주변을 돌다가 전망대에 올라갔다. 바로 옆에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도 매우 좋아했었다. 여기서 내가 그의 사진을 찍어줬었다. 그 사진은...... 전해주지 못한 채 삭제하게 되었다.
아, 이건 별로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 아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가 지끈 해 당장이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계단을 거의 뛰어내려가듯 갔다. 좁은 계단에서 밀치고 내려가니 사람들은 저마다의 언어로 욕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탑에서 나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겨우 빠져나오니 막히던 숨이 탁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살았다.
평소에는 먹지도 않을 에그타르트를 먹었다. 처음 먹은 곳도 이곳이었는데, 그가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한 게 원인이었다. 단 걸 싫어하는 나였기에 몇 번 거절을 하다 마지못해 먹었는데 생각한 맛과는 달랐다. 맛있었다. 결국 한 개 더 사서 먹었었다. 다시 먹어도 맛있었다. 사실 지금 맛이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맛있는 거 같다. 분명 그럴 것이다.
포르타스 두 솔 광장과 28번 트램
우리를 닮은 샛노란 트램을 타고 광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안은 조용했고 밖은 한적했다. 창문으로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풍경이 그때 봤던 것과 똑같은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았지만 트램이 나를 안정시켜주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그 노란빛이 나를 감싸고 편안하게 해주는 느낌이었다. 너와 관련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와 관련이 된 것을 너로 치유한다는 게 무척이나 모순적이었다. 내가 애초에 모순적인 사람이기는 했다.
트램에서 내린 곳은 포르타스 두 솔 광장이다. 그곳에 있는 전망대에서는 주황 계열의 색 지붕을 가진 집을 볼 수 있다. 옆에 바다도 있어 더욱 아름답다.
이런 풍경이었기에 우리는 간질간질한 분위기였다. 그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쳐 서로를 쳐다봤고 입은 저절로 맞닿았다. 잠시 붙었다 떨어지는 것이 아닌 부드러운 키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애인과의 첫 여행에 들떠 즐겁고 신나기만 하였다.
로시우 광장
노란 햇빛이 가려져 어두워진 것은 로시우 광장에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어둠이 걷히고 빛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두근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투었다. 사소한 싸움이었기에 금방 풀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게 왜 시발점이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돌아보는 것이 이 광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이기적이었고 너는 착했다. 내가 너였다면 이 관계를 진작 끝냈을 거였다.
“형, 이럴 거면 여행은 왜 온 거예요? 서울이나 돌아다니지.”
“힘든데 어떻게 하라고. 이해도 못 해줘?”
“진짜 이기적이다.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너 혼자 다니던가. 숙소 가있을게.”
그렇게 나는 정말 그를 두고 숙소로 돌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속상했을까 싶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니 돌아왔을 때 눈이 부어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울었던 것일까?
별 의미 없이 광장을 돌아다녔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고 처음부터 이름이 특이하다고 느낀 내일 갈 시장의 모습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멍을 때렸다.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동안 앉아있다가 광장을 뜨려는 순간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갔다. 많은 서양인들 중에 몇 없는 동양인, 심지어 한국인이기는 했지만 그게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아름다웠고 빛이 나는 듯한 그냥 스쳐 지나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느낌을 처음 느껴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첫눈에 반하고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닮아있었다. 분명 다른 사람일 터였다. 확신하건대 ‘그’가 여기에 다시 올 일은 없었고 분위기가 비슷해도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 그런데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안개가 낀 듯 희미하다. 희미하기라도 한 것을 감사해야 될 정도다. 오히려 잊은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있었던 일만 기억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나는 홀린 듯 그 요정에게 다가갔다. 어떤 말로도 그를 지칭할 수는 없었지만 그나마 제일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저기...”
“혹시 죄송한데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 분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요정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이 보이는 듯하더니 착각이었는지 활짝 웃었다. 눈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
“병원까지 가주실 수 있어요? 이거 들고...”
“괜찮습니다. 손 다치셨어요?”
“네... 금 간 것 같아요.”
“짐 다 주세요.”
다 가져갈 필요는 없었지만 너무 굳어버려 모든 짐을 들었다. 한쪽 손만 다친 거여서 한 개만 들어도 됐는데. 오른손잡이인데 오른손이 다쳤다고 했다.
외국인이 갈 수 있는 병원을 검색하고 곧바로 찾아갔다. 역시 금 간 것이 맞았다. 붕대까지 했다. 여행까지 와서 다치다니 얼마나 속상할까.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밥 한 끼 사드릴게요.”
그렇게 해서 맛집이라는 식당에 도착했다. 인테리어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뻤다. 그런데 미시감인지 기시감인지 모를 느낌이 들었다. 묘하면서도 불편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니 그런 생각이 확 사라지는 듯했다.
“생각해보니 이름도 안 알려드렸네요. 저는 박지민이에요.”
“민윤기입니다.”
“맛있게 드셨어요?”
“네. 왜 맛집이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아요.”
거짓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다 먹은거 보니 맛있는 건 맞나? 체 안 한게 다행이었다.
“헤어지기 아쉽다.”
“......”
“너무 부담스러웠나요? 나는 윤기씨 마음에 드는데.”
“...그럼 같이 다닐래요?”
그 말을 필두로 주변을 돌아다니다 밤이 되어 숙소에서 방을 빼고 지민 씨가 묵고 있는 숙소로 갔다. 같은 방이었다. 만난지 하루였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했다. 오래 본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든지 잘될 것 같고 모든 것이 밝게 빛난다. 그건 아마 지민 씨를 만났기 때문이겠지.
도둑 시장
시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북적북적했다. 어느새 말을 놓은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지민이는 무척 신나 보였다. 그렇게 가고 싶다고 말하더니 정말 그랬나 보다. 귀여웠다. 외국이라도 시장이긴 해서 그런지 처음 와본 것 같지 않았다. 여기 형 거랑 똑같은 거 있다. 지민이 말한 것은 언제부터 찼는지도 모르는, 거의 몸의 일부분이 된 팔찌였다. 수공업 같은 느낌이라 비슷한 것을 찾기 어려운데,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내가 여기서 이걸 샀었나? 애초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나? 그냥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지민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보더니 벌써 여러 개를 샀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팔찌였다.
“형이랑 커플템이다!”
“커플도 아닌데 뭐.”
“우리 사귈래요?”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
“잊으면 안 돼… 잊으면...”
“네?”
“왜?”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뭐라고 했어?”
“잘못 들었나 봐요.”
분명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지..?
아무튼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갔다. 이제는 오래된 연인의 모습 같았다. 실제로는 별로 되지 않았지만.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전망대만 몇 번을 가는지 비슷한 풍경으로만 느껴져 지루했는데 지민이는 좋은지 들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같이 보자고 했지만 괜찮으니 보고 오라고 했다. 떨어졌다 금방 올라가는 입꼬리에 역시 같이 갔어야 했나 싶었지만 그냥 앉아있었다.
“형! 에그타르트 먹으러 갈래요?”
“그래, 먹자.”
에그타르트... 분명 먹은 적이 있었는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단 걸 별로 안 좋아해도 이것만큼은 좋아했다는 건 확실하다. 몇 개는 먹고 몇 개는 숙소에 가져가기로 했다. 그러고 지민이 말했다.
“우리 진짜 많이 먹는다ㅋㅋㅋ”
숙소로 가기 전에 이곳 근처를 자율적으로 돌아다니다 만나기로 했다. 시간은 8시까지. 원래 각자 왔던 만큼 그런 시간을 한 번쯤 갖기로 하였고 그게 오늘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8시가 다 되어갔다. 조금 더 보자 하다가 가야 할 시간이었는데도 가지 않았다. 결국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도착했다.
“전화도 안 받고… 뭐 하다 늦었어요?”
“보다 보니 늦어버렸어 미안해.”
“전에 말한 적 있지 않아요? 무엇보다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그 약속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더 빨리 준비하고 시간에 맞춰 가려고 하잖아요. 늦는다는 건 그렇지 않다는 건데, 지금 형은 어때요?”
제로니모스 수도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가는 관광지였다. 그곳은 아름답고 웅장했다. 지민이는 계속 나에게 웃어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였다. 무언가 어긋나 잘못된 느낌이 들어 불안해졌다. 그러나 왜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는 몰랐다. 단단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형, 나 이제 힘들어요. 내가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나 혼자만 사랑한 거죠?”
이번에는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해요, 제발.
사랑하는 그를 내가 지치게 만들었다. 지민의 말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섞여있었지만 알려고 들지 않았다. 아픔과 내가 했던 잘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 에워싸 신경 쓸 틈이 없었기 때문에.
아리따운 너를 두고 나는 왜 그리하였는가.
이 아픔은 영원토록 남을 것이고.
나는 이 일을 잊지 않기 위해 비망록을 쓸 것이다.
fin.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문정희, ‘비망록’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