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KOWLOON WALLED CITY | 홍콩 구룡성채
소년의 참회록
w. 푸른사막(@blue_desert9395)
#01
어렸을 적 나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었다. 무엇이든 내가 보고, 듣고 확인을 해야 안정을 찾는, 누가 말해주는 것으로만 머릿속에 집어넣기엔 만족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매일 쓸리고 검게 앉은 피딱지 투성이인 무릎으로 코를 비비며 호기심에 지쳐 집에 들어가는 일이 내 유년시절이었다. 분명 엄마는 내 다리에 묻은 모험의 결과물들을 털어 내주며 내 몸을 벅찰 정도로 꽉 안아주었다. 그 당시 나의 생각 회로에서 엄마를 이해하기엔 벅찼기에 그저 눌린 내 갈비뼈가 으스러지지 않을까라는 괜한 겁을 먹는 아이였다.
원래 익숙한 놀잇거리는 금방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창고에 나뭇가지 하나 주워 들고 가선 악기 삶아 뚱땅거리며 철창을 긁는 것은 처음에나 재밌었지 반복된 음정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괜히 심술이 나서 운동화 밑창에 달린 돌기로 흙바닥을 박박 긁어 먼지를 폴폴 내며 자칭 본거지인 구멍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 평상에는 세상 물정에 찌든 아줌마들의 이야기판이 있어서였다. 보통 이웃집 바람 얘기 같은 영양가 없는 험담이 대부분이었지만 운이 좋으면 저 강 건너 동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늘도 그 강에 처녀 하나가 뛰어들었다지 뭐야.”
“하여튼 그 강은 사람 아주 잡아먹는다니까. 아주 흙을 들이부어서 없애버리든지 해야 해.”
내가 요즘 가장 흥미로워하는 자살강 얘기였다. 이 동네에서 죽은 사람의 대다수는 익사라고 할 정도의 명성을 가진 강이니까. 난 강 밑에 엄청 큰 괴물이 한다고 믿었고, 괴물의 요상한 힘으로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다고 믿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 강을 볼 때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연 속 무언가가 날 이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엄마는 그 강은 쳐다도 보지 말라고 했지만 가끔 강가 근처에 앉아 상심에 빠진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가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강의 물고기들은 몇 없는 동화책 속 물고기보다 훨씬 컸다. 그 비약적 성장의 출처는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나는 오랜만에 들은 값어치 있는 정보에 신이 나 구멍가게에 들어가 포도 주스 한 캔과 동전 몇 개를 맞바꾸었다. 주스라면 석연치 않아하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음료였다. 과일을 사 먹기엔 쫄아든 주머니 사정과 타협한 주스는 포도 특유의 단맛 뒤 숨겨진 끝의 씁쓸한 맛을 찾아 즐기는 것이다. 가끔 나에게 주는 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 손엔 주스 캔을 들고 강가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아마 악어새들 따위가 수습을 하고 있겠지. 이 곳 사람들은 신고나, 응급상황 등의 자기들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모든 일이 자신이 정한 룰과 방식으로 굴러가길 바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것일 테니까. 비운한 사람들의 인생에 끼고 싶어 하지 않고, 괜히 오지랖을 부려 제3자의 입장이 되는 것을 꺼린다. 굳이 낯선 사람에게 제 삶을 공유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가 우울에 물든 것은 아마 ‘구룡 성채’라 불리는 강 너머 동네의 영향일 것이다.
구룡 성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엄마가 자살하고 나서였다. 구멍가게 아줌마의 말에 달려간 그 강은 이미 그녀를 잡아먹은 후였고 불만이 많은 악어새들이 잔업을 처리하고 있었다. 엄마라고 다를 리 없었다. 결국 우울히 엄마를 잡아 삼킨 것이다. 내가 실연에 빠진 강가 사람들을 보고 즐겼듯 다른 사람들도 엄마가 죽을 때 아무 행동도 취해주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제 가십거리로 씹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제 휴대폰에 담고 시시덕거렸을 수도 있다. 이상하리만치 난 그들에게 대한 분노보단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어찼다.
과연 그 강이 그녀를 자살로 이끈 건지. 내가 그런 것인지 헷갈렸다.
#02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집 안에 남은 것은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였다. 그나마 영양 공급원이라도 되었던 라면은 이미 바닥을 친지 일주일이다. 이제는 그저 돈이 필요했다. 우울감에 찌들어 사는 응석 또한 현실이 받아주지 못하였다. 살기 위해서 빵 한 조각, 생수 한 병, 옷가지를 가지기 위해선 지폐 쪼가리가 필요했다.. 어른들처럼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은 난 자살강을 건너 구룡 성채로 향했다. 피로 뒤덮인 거리를 제 발로 기어들어갔다.
내가 처음 손에 댄 일은 ‘잔반 처리’라고 불리는 일이었다. 모두가 더러워 피하려 하지만 손에 들어오는 돈은 꽤나 쏠쏠한 일이었다. 3D 직업 중 아마 숨겨진 탑이라 불릴 수 있는 일이었다. 시체를 분리 해 쥐도 새도 모르게 버린다던가. 흰 설탕가루나 운반해주는 일. 딱, 어느 날 잘못 꼬여 어느 햇빛도 안 들어오는 시궁창에서 살갗이 썩어 죽어도 모르고, 짭새한테 걸렸을 때 상류층과 하류층 중간에서 꼬리 짜르기용인게 내가 택한 직업이었다.
난 내 눈에 점도 있는 시체의 검은 핏방울 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톱날 질을 멈추지 않았고 몇 년의 세월의 결과물로 사람도 깨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죽이는 법도 알아내었다. 뭐든 꽂히면 개같이 한다는 성격 탓이었는지 퍽 성공이란 것을 빨리 거머쥐었다.
돈이란 걸 만져보고, 성공이란 것을 느껴보고, 원하던 것을 얻고 나니 마음속엔 어느 한 구석에 처박혀 있던 우울감이 점점 뿌리를 내리고 덩치를 키워 무시 못 할 큰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에 형광등을 켜고 포도 주스로 냉장고를 채우고 제 자신을 위로해보기도 했고. 아무 생각도 없이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아 우울감을 내쫓으려 했었지만 또다시 찾아온 우울감과 텅 빈 느낌은 몸의 끝에서부터 벌레가 내 몸을 타고 기어 다니는 상상을 하게 했다. 낡은 소파에 앉아 소주나 까는 게, 아무것도 없이 몸만 커버린 게.. 이 모든 구멍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아마 가족일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가장 필요했지만 나에겐 없었던 그것. 이 징그러운 벌레들을 터트려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이 가족이라고 확신했다. 지금 내가 위치한 곳이 더러운 진흙탕이기에, 지폐 쪼가리나 번다고 잊고 살아온 게, 어느 정도 숨은 쉴 정도가 되니까 뒤돌아보게 되더라. 진짜 가지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누구와 함께 할 수 있을 꺼라 생각도 못했지만 빌어먹을 욕심이란 게 크고 있더라. 나도 모르게.
#03
가족이란 거 가지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길거리에 팔지도 않고, 자판기 뽑듯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매번 고심에 빠져도 가족이란 허황된 꿈과 같았고,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든지 깨어날 땐 늘 달콤한 꿈에만 만족하며 다시 시체를 써는 것을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쉬면 생각나는 괜한 우울감과 자괴감에 몸으로 때워보려 잔업량도 늘렸다. 담요 한 장 챙겨 와 늘 작업실에서 잠들었고 끼니 같은 건 그저 다 갈아서 한 번에 목구멍으로 쓸어 넘기는 날도 다수였다.
하지만 몸을 혹사시킨 결과는 그전과 같았다. 역시 난 외로웠고, 몸속엔 괴물이 살고 있었고, 목엔 타는 듯 한 갈증은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가를 열어 도시를 눈으로 훑어보았지만 썩어가는 이 도시는 내가 위로받기엔 부적절하였다. 창가에 낀 먼지를 손끝으로 한번 훑어보았지만 뭉친 회색 먼지 덩어리는 아무 위로의 한마디 전해주지 못하고 날 혐오하는 듯 손끝을 떨어져 나갔다..
늘 그랬듯 낡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창밖 도시에선 젊은 여자와 남자들의 익살스러운 하하 호호 소리가 내 귀를 찢어놓았다. 신경질적으로 두 귀를 막아보았지만 소음이 뭉개져 웅웅거리는 소리 또한 길게 늘어져 내 목을 졸랐다. 잊어보고자, 내 유년 시전을 기억에서 꺼내보았지만 이미 각색되고 늘어지고 찢긴 기억 조각은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냉장고에서 언제 샀는지 모를 맥주를 꺼내 들었다.. 술을 즐기진 않았지만 이제 커버린 몸이 내가 겪는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불안정했기에 억지로라도 마셨던 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즐겨왔던 포도 주스처럼 캔을 딸 때 나는 소리가 작은 쾌감을 안겨주었다. 내용물을 확인하자 함께 부풀어 오르는 하얀 거품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주위는 다 검고, 회색이고, 더럽고, 추접스러운데 혼자 새하얀 게 이질감이나 역겨웠다. 갈색 액체로 여러 번 목을 적시자 바깥 소음들이 줄어들었다. 밑을 들어내고도 탈탈 털어 마지막 방울까지 스민 난 술의 힘을 빌려 오랜만에 단 잠에 빠져들었다.
#04
이래서 싫다. 숙취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이다. 술을 배운 적도 함께 하지도 않는 내가 혼자 배운 술은 비정형적이고 다듬어지지 않고 모났다. 아침부터 괴랄한 쇼를 펼치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나는 서류철 하나를 들고 와 오늘 작업량을 훑었고, 붉은 펜으로 명단을 긋고 나서야 한 숨을 쉬고는 일어났다.
그게 박지민을 만난 내가 기억하는 첫날의 아침 일과였다.
오늘 메모장엔 아침에 붉은 볼펜으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쳤던 사람을 죽이러 가야 했다.. 서랍장에서 검은 장갑을 꺼내었고, 단도를 챙겼다. 총은 경찰에게 꼬리 밟히기 좋아 피하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직접 제 손으로 생명을 끊어 낸다는 느낌 자체가 제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주소지를 따라 향한 집의 문을 노크도 하지 않고 익숙하게 문고리를 따내었다. 이 동네가 허름하기도 허름한지라 얇은 철사로 몇 번 쑤시면 열리는 정도의 집이 대부분이었다. 역시나 주인은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몇 번 그의 주위를 돌다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그에게 가까이 가다가 목의 척추 사이를 정확히 칼로 찔러 넣었다. 그는 물 밖에 나온 물고기처럼 몇 번 꿈틀거리는 가 싶더니 이내 차츰 생기를 잃어갔다.
깊이 넣었던 칼을 힘껏 빼내곤 자켓에 있던 손수건으로 쓱쓱 닦았다. 피는 깨끗이 닦이지 않고 칼날에 끈질기게 머물렀다. 내가 보통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아무리 흐르는 물로 깨끗이 흔적을 닦아내어도 내면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고 연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핏자국은 그들과 날 구분 짓는 선이기도 했다. 난 흔적을 지우는 것을 포기하고 칼집에 끼워 넣었다.
얼굴에 튄 피를 어깨로 쓸어 닦았다. 역시 괜한 행동이었는지 피는 더 번져 얼굴 전체를 물들일 듯 넓게 퍼졌다. 크게 한 숨을 쉬고 자리를 털고 있어 났다.. 장갑을 물고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쳤다. 보통 시체 운반은 혼자는 힘들 기에 업체를 쓰는 편이라 연락처에서 그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자, 작은 방에서 어느 사람이 인기척을 내며 내게로 걸어왔다.
분명 없어야 할 게 있었다.
“너 뭐야.”
“갑자기 우리 집 들어와서 우리? 아빠 죽인 건 당신인데 누구냐니.”
“지랄하지 마. 가족 없는 거 확인했는데.”
“이 동네. 누가 법 지키면서 산다고. 서류 같은 종이 쪼가리를 너무 과신하는 거 아녜요?”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역시 나에게도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비운한 인생에 누굴 끼워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목격자를 만드는 것은 어느 일보다 지저분하고 귀찮기에 더욱 견디기 힘들고 피하고 싶었다.
잠깐 쳐다본 그 아이 얼굴엔 멍 자국이 선명했다. 어디 가리지 않고 때렸는지 온몸이 시퍼랬다.
“형, 형이 나 책임질래요?”
아
가족.
어떨까. 얘가 된다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땜에 죽을 순 없는 거잖아.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건데. 어쩔 수 없는 거지. 얘도 살리고 난 가족도 만드는 거야. 합리화를 했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동물이라니까.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을 때 엄청난 괴력으로 남을 잡는다고 했다. 자살강에 빠져 폐에 물이 차 허우적대는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널 잡아보고 싶었다. 한번 그렇게 믿어보고 싶었다. 걔를 데려올 명문을 만들어 냈으니까.
#05
“형, 일어나.‘
“아, 십분, 아니 오 분만”
“형, 국 다 엎어버리기 전에 일어나.”
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손으로 더듬거려 지민의 얼굴을 내게로 끌어당기곤 지민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지민은 잠에 덜 깬 내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대는 게 웃긴 듯 푸흐흐하며 실소를 했고 지민이 내 아침을 밝게 만들어준 것에 행복했다.
이젠 내 손에 기생하던 벌레들은 박멸됐다. 창가에는 빛이라는 게 들어오고 있었고, 예전처럼 어두운 구름 따윈 키우지 않는다. 모든 게 완벽했고,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작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날 반기는 불빛이 있음에 걸음이 가벼워졌고, 더 이상의 강 얘기에 얽매이지 않는다. 아마 그 괴물은 내가 제 입맛에 들지 않았는지, 아님 내가 끝없이 반항해낸 탓인지 이미 뱉어낸 지 오래였고, 난 자유로웠다.
가끔 괴롭거나,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 앉을 때면 지민은 내게 와 그러한 모든 것들을 걷어 내주었고, 난 더 이상 이 동네의 분위기에 잡아먹히지 않는다. 그런 지민은 내게 안식처이자 일종의 도피처이다. 내가 도망치고 싶을 때 날 기다려주는 존재이다.
“사랑해.”
“형.”
“진짜”
“알거든, 형이 나 말고 누가 있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사랑한다는 것만큼 그렇게 기분 좋은 일도 없더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보고 배우지도 못한 내가, 사랑을 겪어보지도 못한 내가, 감히 말하기에 난 지금 누구보다 사랑을 받고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정말 이젠 너 없이라는 말은 입에 붙지도 않더라.
#06
“형, 형은 여기가 좋아요?”
“뭔 소리야.”
“이 동네, 계속 살고 싶냐구요.”
전혀, 나갈 수 있다면, 무조건 나가고 싶어.
하지만 말은 못 하겠더라. 겁이 나서. 여기 말고선 존재를 인정받을 자신도 없어. 밖에 나가면, 다시 어린아이 시절에 멈춘 내가 들통이 날까, 두려워서.
“우리, 딴 곳에서 살면 안 될까요.”
“아니, 절대.”
나도 모르게 날 선 대답이 나갔다. 무조건 반사처럼 뇌를 거치지 않은 대답이 나갔다. 아마 널 잃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머릿속에 온통 이기적이라는 단어가 떠다니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여기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지민아. 우린 어딜 돌아다녀도 다시 돌아오는 곳은 결국 여기야, 구룡 성채.”
지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미안하고 죄책감에 몸은 계속 떨렸다. 지민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떼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미련하다, 바보 같다, 등신. 그런 소리겠지. 내게서 우울이 찾아오고 있었다.
#07
“다녀올게.”
요즘 지민이 침대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다. 기력이 없는 듯 침대에서 거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 탓인걸 알기에 난 어느 위로도 전해주지 못했다. 괴로움이라는 게 이미 몸에 들어차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괴롭고 암울했다.
집을 나오며 자는 지민에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그리곤 뚫어지게 지민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자는 모습이 왠지 슬퍼 보였다. 그의 발목엔 썩은 밧줄이 그를 묶어두고 있는 망상이 보였다. 난 급히 자리를 떴고, 문을 조심히 닫았다.
오랜만에 강가에 들렸다. 강가에 다니는 사람은 예전보다 줄었고, 강은 좀 쓸쓸해 보였다. 이젠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 호기심이란 거 아마 여기로 넘어오면서 다 이 강에 버려버렸는지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저 두려움만이 그득 찼다. 오랜만에 가방에 챙겼던 포도주스를 꺼내 마셨다. 이젠 포도 주스로만은 쓴맛을 느껴볼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힘을 주고 살았나 보다. 쓴 커피로 세상을 버텨온 나에겐 어린 시절의 쓴 맛은 큰 고통이 되질 못한다.
강가에 남은 주스를 흘려보내었다. 그렇게 검던 포도 주스는 노을에 비쳐 붉은 핏빛을 띄고 있었다.
그제야 알겠더라. 그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내 욕심이 과했다는 것을. 내가 주제넘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내가 발 담그고 있는 곳이 흙탕물이기에 제 앞가리지 못하고 허우적대다 붙잡은 게 순수한 소년이었고, 내가 그를 망쳤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우리도 여느 가족처럼 물들고 녹아들어 하나가 될 것이란 것은 망상이었다. 난 그 아이가 행복하길 바랬던 것뿐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걸 가로막는 게 바로 나였더라.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버텨왔는데 결국 내가 맞은 결말은 이거라는 것, 내 욕심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내 죄는 내 목숨, 내 더러운 손으로 다 갚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속죄는 박지민 너였다.
난 지금이라도 덜 물든 너를, 아직 희망이라도 가지고 있는 너를. 살리고 싶음 마음에 그런 거야. 난 원래 이기적인 놈이니까. 이해 좀 해줘라. 부디 제발 잘 살아줘라.
난 미련 없이 강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살아보려는 욕심도 나지 않게 남은 숨은 다 내뱉고 떨어졌다.
귓가에 들어찬 물소리가 이젠 소음이 아녔고, 생각보다 아늑했다.
내가 그렇게 찾던 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로소 궁금증을 풀었고, 이제야 안정감을 느꼈다.
사랑한다. 지민아. 널 위해 죽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