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HAVANA | 쿠바 하바나
오늘도 맑음
w. 에필 (@EPILOGUE_sj)
여느 다른 날과 같이 더럽게도 화창한 햇살. 쿠바의 거리는 오늘도 빛난다.
빽빽하게 들어찬 밝은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햇빛에 더 밝게 보이고 그 앞을 수많은 이들이 여유롭게 지나간다.
대부분의 이들은 얼굴에 웃음을 걸고 있지만, 지민은 안다. 그들은 그저 관광객일 뿐이란 걸. 관광객들로 가득찬 하바나의 거리는 화창하다. 현지인들은 웃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그닥 화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인터넷에서 -제목이 하바나길래- 찾아 들어본 노래에서 이야기하는 ‘거기선 모두가 노래하며 산대요-’ 하는 건 다 뻥이다. 한국 노래길래 괜히 재생버튼을 눌러봤다가 첫 소절만 듣고 그대로 꺼버렸다. 그래, 남들에게 하바나는 그런 곳만으로 보이겠지.
모순적인 제 동네의 모습에 지민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좁은 가게의 벽에 붙어 다리를 꼬고 앉아, 유리창 밖으로 사람구경을 하는 -잔뜩 꾸미고 행복한듯 깔깔대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주로 구경하는 것이지만- 지민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엔 반쯤 타들어간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광대 같다- 고 생각한다. 삶에 찌들어가는 사람들의 겉만 그럴듯하게 알록달록한 하바나에서, 이 곳이 천국이겠거니, 생각한 채 현실을 잊고 거리에서 춤을 추는 모습들이.
그도 그럴 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인 상태로 하바나에 홀로 남겨졌으니까. 차고 넘치는 기념품가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도 않는 낡고 작은 가게에 빌붙어 사는 수밖에 없었다. 나이 많고 까칠하던 주인 아주머니는 혹여나 제 부모가 돌아올까 길에서 가만히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 지민을 가게로 데려와 거두어 주었고, 지민이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 때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주인 아주머니의 사망소식을 접한 그녀의 딸이 미국에서 돌아왔고 (좋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적응을 못해 자퇴한 뒤 식당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덕에 가게는 현재 주인 아주머니의 딸의 소유로 운영되고 있었다.
주변의 경쟁력 높은 다른 기념품 가게들 덕에 가게의 매출은 항상 큰 변화없이 일정했다. 그래도 관광객들 상대로 하는 장사이니 먹고 살 정도의 돈은 됐다, 다행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딸랑-
유난히 하루종일 가게가 조용하더니 오후가 되어서야 가게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보아하니 동양인처럼 보이는 남성이 걸어들어왔다.
어서오세요, 따위의 인사는 없다. 애초에 코딱지만한 가게에 들어서면서 뭘 바래.
“Perdón, tienes algún accesorios?”
들려오는 유창한 스페인어에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아, 아까 그 동양인 남자?
“Los accesorios? Si, si. Lo tenemos por ahí.”
[악세사리요? 아, 저쪽 끝에 있어요.]
“Gracias. No pude encontrarlo en ningún otro lugar.”
[감사합니다. 다른 곳에는 없더라고요.]
“Es para tu novia? Lo siento, o tu novio?”
[여자친구 선물인가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면 남자친구?]
“Voy a romper hoy.”
[오늘 헤어질 거에요.]
아…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지민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여보세요. 응, 금방 가. 끊어.”
어, 한국어?
지민이 익숙한 제 모국어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국인...이신가봐요?”
“아, 네.”
그 쪽도?
지민이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 오신 거에요?”
“네, 이별 여행이에요. 당사자는 모르는 것 같긴 한데.”
“매정하시네요.”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이거 하나, 포장해주세요. 기왕이면 예쁘게요.”
“Es 100 pesos.”
[100 페소에요.]
“Gracias.”
[감사합니다.]
“Ah, si estas solo puedes llamarme. Tengo mucho tiempo para un cóctel.”
[아, 그리고 혹시나 외로우면 연락해요. 칵테일 한 잔 할 시간은 많거든요.]
“Vale.”
[그러도록 하죠.]
지민이 반지와 함께 내민 메모지를 받아든 윤기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가게를 나섰다.
“.....잘생겼네.”
뭐, 그래봤자 다시 볼 일 없을 것 같지만.
피지도 않고 그냥 타들어가 습관적으로 지져 끈 담배를 보며 지민이 라이터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아 아까워, 물가도 올랐는데.
마지막 개비임을 확인한 지민이 일어나 안 쪽 방 -휴게실처럼 사용되는 작은 공간- 에 있는 주인에게 소리쳤다.
“Señora, volveré pronto!”
[이모, 잠깐 나갔다 올게요!]
*
“...and then they, … Honey, are you listening?”
[...그래서 걔네가,...자기야, 듣고 있어?]
“Sorry, I was zoning out. What was it again?”
[미안, 딴 생각 하고 있었어. 뭐라고 했어?]
“Hey, is there something wrong?”
[자기야, 혹시 뭔 문제 있어?]
“I think this is it.”
[이제 끝인 거 같아.]
“What is?”
[뭐가?]
“Us.”
[우리가.]
“......”
“Sorry, I need to go. Have a safe trip.”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미안. 조심해서 돌아가.]
윤기가 파스텔 톤의 파란 올드카의 문을 닫았다.
“최악이다 당신,”
“응, 알아. 너도 알고 있었잖아.”
“그래, 알고는 있었지. 근데 이렇게 끝낼 줄은 몰랐네.”
“이렇게 라니, 우리 관계가 별 관계였었나?”
글쎄,
여인이 차의 시동을 걸며 차 옆의 윤기를 바라보았다.
“잘 가. 플로리다에서 만나면 아는 척은 해줘.”
“알았어.”
트렁크에서 자신의 가방을 꺼낸 윤기가 사두었던 반지를 쥐어주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음, 미안. 여기가 나름 괜찮아서 눌러앉으려고. 플로리다에선 못 볼 것 같아.
라는 말은 과감히 생략한 채.
아, 차 뽑으러 가야겠네, 이번엔 민트색으로 뽑을까.
*
쨍한 햇빛에 비쳐 눈부신 파도가 부서지는 해변 앞에 지민이 선글라스를 낀 채 홀로 섰다.
“...오늘도 사람 참 많네.”
지민이 해변에 누워 조잘대는 연인들을 피해 야자수 아래에 있는 바로 걸어갔다.
“항상 먹던 걸로 부탁해.”
“지랄하네, 오늘도 손님 없냐?”
칵테일 잔에 파인애플을 꽂아넣던 남성이 피식 웃으며 유창한 한국어로 지민에게 말했다.
“아니, 하나 팔았어. 100페소.”
“오, 웬일로 니네 가게에 손님이 있어?”
“응. 잘생겼더라.”
“네 스타일이야? 동양인?”
“한국인. 이별여행 왔대.”
“이별여행을? 하바나로? 누가 하바나에 이별여행을 와.”
“그러게 말이다. 연락하라고 전화번호 줬는데,”
연락 안 오겠지?
바텐더가 준 피나콜라다를 한 모금 마신 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거 너무 달다고- 피나 콜라다 주지 말랬잖아.
“그냥 주는대로 마셔.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지.”
“너 짜증나.”
지민이 바텐더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곱게 펴보이고는 다시 칵테일 잔을 들었다.
“그나저나 이제 막 헤어진 사람이 새로운 사람 찾으려고 하겠냐?”
그 순간 주머니에서 오는 진동에 지민이 핸드폰을 꺼냈다.
+98 47-309-1322
Unknown Number
[지금 시간 돼요? 칵테일 한 잔 하고 싶은데.]
“응, 찾으려나 보네.”
*
“그래서, 원래는 플로리다 출신이라고요?”
“네. 지민 씨는요?”
“원래 한국에서 살긴 했었는데, 어렸을 때 여기로 옮겨 왔어요.”
“이민 오셨구나,”
“아뇨. 부모님이 버리고 갔어요.”
그러니까 이런 꼬진 데서 썩고 있지.
“아, 실례를-”
“아니에요. 별로 신경 안 써요. 실례 아니니까 그만 둬요.”
“.....”
“애인이랑은, 어떻게 됐어요?”
“반지는 줬어요. 인사하고 헤어졌고.”
아. 생각해보니 차도 뺏겼네요.
“네?”
뭐지 이 남자. 애인한테 차 뺏겼다면서 뭐 이리 담담하지?
지민이 머리 위에 걸쳐뒀던 선글라스를 내려 콧대에 걸쳤다.
“방금 차 뽑고 왔는데. 드라이브나 가실래요?”
“드라이브 좋죠.”
“타요.”
밝은 민트색 오픈카에 올라탄 지민이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피워도 돼죠?”
“네. 신경 안 써요.”
전애인이 꼴초였어서 말이에요.
윤기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지민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 그러시구나-
“그나저나, 취향 독특하네요. 민트색 오픈카라니. 찾기도 힘들었을텐데. 아닌가?”
“하바나잖아요.”
“그래, 맞아요. 여기가 하바나였죠. 그렇네요.”
“여기서 살다보면 잊기도 하고 그러나보네요.”
“아뇨. 그건 아닌데.”
사실 좆같아서 잊고 싶은데 그게 참 안 잊어지네요.
지민이 후- 연기를 내뱉었다. 시니컬한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좀 슬퍼보였다.
“하바나를 싫어하시나 봐요?”
“여기만 뜨면 좀 달라질 거 같은데 아마 여기를 뜰 일은 없을거라서 말이에요. 내 삶은 시궁창인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거든요.”
밖을 힐끔 쳐다보더니 바다 앞 도로변에 윤기가 차를 세웠다. 시동은 끄지 않은 채 지민을 바라보며 덤덤히 말을 건넸다.
“그 시궁창인생에 끼어들어도 되나요?”
저 의미심장한 미소 뒤의 숨은 뜻은 뭘까. 이 사람, 뭘 원하는 걸까. 생각하며 지민이 한 모금 들이마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 지금 그거, 내맘대로 해석해도 돼요?”
“어떻게 해석할 건데요?”
“애프터 신청이요.”
“아, 잘못 짚었는데.”
그럼 역시나 그렇지.
지민이 쪽팔림에 바깥을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나 이제 싱글이니까, 사귀자고요. 아니면, 같이 살래요?”
콜록, 콜록, 켁.
지민이 담배연기를 들이마시다가 연거푸 기침을 내뱉었다.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지민 씨는 어때요?”
“네? 뭐가요?”
기침을 겨우 멈춘 채로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지민이 윤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어떠냐고요.”
“어, 아니 그게-”
“천천히 말해줘도 돼요. 빨리 얘기해주면 더 좋고.”
크흠, 작은 헛기침소리를 낸 지민이 창가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괴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어쩔 줄 몰라하는 지민을 본 윤기가 피식 웃고는 차의 시동을 껐다.
“칵테일, 마시러 갈까요?”
지민이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자 고개는 여전히 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Dos Piña Colada, por favor. Gracias.”
[피나콜라다 두 잔이요. 감사합니다.]
윤기가 바에 걸어들어가며 미소와 함께 바텐더에게 유창한 스페인어로 주문을 했다.
“¿Cuándo aprendió Español?”
[스페인어는 언제 배웠어요?]
“Vivo en Florida. Digo, viví en Florida.”
[저 플로리다에 살아요. 아니, 플로리다에 살았었죠.]
“¿Viví?”
[살았다뇨?]
“Me gusta aqui.”
[여기가 맘에 들어요.]
여기라면, 하바나가 맘에 든다는 건가?
“하바나가요?”
“네. 지민 씨도 있고 말이에요.”
능글 맞은 윤기의 말에 지민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어느새 바텐더가 내어준 잔을 윤기가 지민에게 건넸다.
“마셔요.”
아, 피나콜라다.
“역시 하바나네요.”
지민이 피나콜라다를 한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하바나를 싫어한댔죠?”
“네. 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해요.”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면요?”
“...?”
“그러니까, 내 말은.”
그 하바나에 내가 있다면요. 나랑 함께 할래요?
윤기의 눈에 하바나의 붉은 석양이 비쳐보였다.
지민은 저도 모르게 눈을 마주친 채 멈춰있었고,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 인생, 책임지겠다는 말이에요.”
나랑 함께 해줄래요?
세상이 멈춘 듯한 순간이었다. 붉은 배경이 서서히 일렁였고, 지민의 눈동자도 함께 일렁였다.
지민이 상체를 앞으로 숙여 윤기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는 둘의 입술이 서서히 맞닿았다.
“지금 이건, 대답이에요?”
“네.”
“키스할래요?”
“좋아요.”
둘의 그림자가 다시 서서히 겹쳐졌다.
석양이 지는 해변 앞, 칵테일 두 잔과 행복한 연인.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했다.
*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민이 눈을 떴다. 새하얀 이불 옆에는 제 연인이 누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깼어요?”
“응. 잘 잤어요?”
“덕분에.”
찬 에어컨 공기로 가득한 방에 지민과 윤기가 한 이불로 몸을 함께 감싸고는 창가에 섰다.
“오늘도 참 밝네요.”
“그러게요.”
“Te amo.”
[사랑해요.]
“Tambien.”
[나도.]
윤기의 입술이 지민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지민은 생각했다.
그 때, 인터넷에서 어찌 들었던 그 밝은 노래가 들리는 것 같다고.
마지막 가사가 그랬다.
‘그대의 존재는 날 꿈꾸게 해'
설렘에 가득찬 눈빛으로 지민이 몸을 돌려 윤기를 껴안았다.
이불이 쨍한 햇빛을 받아 빛났다.
오늘도 하바나는, 여전히 화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