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GWANGANLI | 대한민국 광안리
open ending
w. 설화 (@HER_0313)
시원한 파도소리와 바람이 귀를 간질이는 것이 좋았다.
반짝거리는 모래알도, 아름다웠다.
“윤기는 광안리 좋아?”
“응 좋아.”
“왜 좋은데?”
“예쁘잖아.”
“그럼 앞으로 자주 오자. 집에서도 가까우니까, 그렇지?”
“그래.”
“튜브 빌려올게 기다려.”
“엄마?”
분명 죽음을 모르는 나이였는데도 그 때는 분명히 알았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 했던 듯-아마도 경찰이겠지- 손에는 켜진 핸드폰이 켜져 있었고
바다에 간다며 꺼내 입었던 하얀 원피스는 누구도 흰색이라 믿지 못할 정도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아, 웬 꼬마가 봤잖아.”
“뭐 어때, 죽이면 되는데.”
도망쳐야 한다고, 어서 도망치라고.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면 죽을 거라고.
누군가 소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발을 떼지 못했다.
그 때 분홍색 머리카락이 휙 지나갔다.
“씨발,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키티갱이야.”
“그래, 운도 지지리 없네. 잘 가.”
탕, 탕. 두 번의 총성이 울려퍼졌다.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상냥한 미소를 지은 ‘키티갱’이 다가와 물었다.
“넌 뭐니 꼬마야?”
경찰들이 와서 안부를 물었고, 어머니의 장례는 신속하게 치러졌다.
아버지는 매일 밤 뺨을 때렸고, 뺨이 아닌 날도 많았다.
지긋지긋한 집에서 나온 날에는 ‘그날’ 봤던 남자들과 같은 문양을 얼굴에 새긴 남자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야, 테디. ‘키티갱’이 누군지 아냐?”
“...이 판에서 걔를 모르는 사람도 있냐? 그리고 테디 아니고 구찌.”
“그 정도야?”
“우리 정 반대 세력인 DK 조직은 알지? 대가리 오른팔이야. 우리 애들도 많이 죽었어. 그 자식은.. 괴물이야, 괴물. 실력이 진짜 엄청나거든. 아직 어릴텐데,”
‘키티갱’에 대해 물으면 모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괴물’이라고.
그 이유가 성격이던 실력이던, 이 판에서 그는 괴물이었다.
“빨리 와, 디.”
“어쩌다가..”
“뭐, 디?”
“신경 쓰지 마.”
“흐응, 그래? 그나저나 요즘 도는 소문 말이야.”
“무슨 소문?”
“몰랐어? 아-주 파다하던데. 네가 KV조직 스파이라고.”
“뭐? 말도 안 되는..”
“그치, 아니지?”
“당연하지, 내 발로 나왔는데 스파이는 무슨.”
“...너 KV조직 출신 맞았어?”
“내가 말 안 했었나?”
“당연하지.. 일단 오늘 끝나고 보자.”
“키티”
“키티”
“박지민”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지민이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뒤돌았다.
“질리기라도 했어? 피하지만 말고 대화를 하자고.”
“응 질렸어. 우리 시간을 좀 가지자.”
“잠깐만,”
지민은 빠르게 뒤돌아 사라졌다. 잡을 새도 없이, 윤기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사라졌기에 그가 뻗은 손은 허공에서 맴돌았다.
그 뒤로 윤기는 지민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누구와 다르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 때문이기도 했고, 지민이 그를 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하루 종일 네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임에도 네 생각을 하느라 끝마치지 못해 다른 이에게 미루기까지 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기분 참..”
좆같네.
가시 돋은 뭔가가 심장을 옥죄는 감각이었다.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아파왔다.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종이에 꾹 눌렀다.
피와 같은 색의 검붉은 잉크가 종이로 흐르는 것이 보일 정도로, 본인 외에는 모두 알 정도로. 그렇게 빠르게 붉은색이 감정과 함께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 스며들었다.
처음으로 가진 온전한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에 쥐어 본, 온전한 내 힘으로 가진.
내 행복이었다.
이리 쉽게, 허무하게 잃어버릴 것이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는데.
“좋아해요.”
“그럼 뭐 어쩔까, 연애라도 하자고? 애기는 안 받아.”
“애기는 무슨, 사람 몇을 죽였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도 아긴가?”
“그럼 애새끼 둘이 하는 연애에요?”
“그렇네, 애기야.”
환히 웃는 네 얼굴이 아직 선명했다.
“시간을 좀 가지자.”
흠칫, 몸을 떨었다. 정신을 차리고 급히 펜촉을 떼어냈다.
“...넘어갔나.”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검붉은 잉크는 네 장을 넘기자 조금 흐릿해지더니, 여덟 장을 넘기자 완전히 사라졌다.
지독한 잉크 냄새를 옅게 남기고, 눈물에 조금씩 번져가며.
**
“야 그거 들었어?”
“뭐, 키티갱 새 애인 생긴 거?”
“와, 진짜 유명하긴 한가보네. 네가 벌써 알 정도면.”
“나 무시하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나저나 어거스트는 어쩐대.”
“그러니까.. 미련이라도 남았으면”
“미련 안 남았어도 이거 들으면 우리 다 모가지 아닐까”
“아니 모가지는 아니고, 자세히 말해 봐.”
“왜 조용해? 말해 보라니까.”
윤기의 말에 남자는 입을 열었다. ‘승윤’이라는 남자와 사귀는 모양이라고, 그 사람은 집착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며 개인적으로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윤기와 지민의 연애는 유명했다. 이 판에서 유명한 둘이기도 했고, 유명인 둘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퍼지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들의 연애에 가벼운 걸림돌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둘의 이별을 감히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인들조차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만약, 정말 만약 이 둘이 이별을 하게 되고, 둘 중 한 명이 흔히 말하는 ‘미련’이 남는다면, 그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해도 정말 죽게 될지도 모를거라는 예상을 해온 이는 분명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이어져 온 그들의 연애 중 가장 그 순간에 가까운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벌써,”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이었다. 나는 아직 네 이름 하나에 심장이 이리 뛰는데, 넌 벌써 새 인연을 찾아가는가 싶었다. 지독히도 아린 감정이었다.
그 사람에게도, 그렇게 예쁘게 웃어줬을까.
나한테 그래줬던 때처럼, 그렇게 마냥 환하게.
**
지민아
네가 이별을 원한지 2달이 지났는데 나도 지친 것 같아.
참 신기하지, 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능했나봐.
“응, 여보세요.”
“미안 지민아.”
“널 기다릴 힘이 이젠 없다.”
미안, 난 너무 지쳤어. 너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찾은 것 같으니까,
이젠 너 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만 찾으면 될 것 같아.
미련이나 남은 구질구질한 전애인의 외사랑, 이제 끝낼게. 끝내볼게.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으니까.
**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지하의 복도 끝 방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지민아, 나, 사랑한,다며”
“이름 부르지 마, 좆같게.”
지민이 손에 들린 방망이를 휘두르자 승윤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사랑하면 다 용서되는 거 아니었어?”
“뭐?”
“생각해 봐.”
비틀거리며 지민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속삭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부모님의 명을 어기고도 서로 사랑하다 마지막에는 결국 용서받았고,
어린왕자의 왕자는 장미꽃을 버렸지만 장미가 그를 사랑했기에 결국 용서받았어.“
광기로 찬 눈빛으로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승윤이 덧붙였다.
“사랑하면, 사랑이면 다 용서받는 거 아니야?”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칼을 집어 지민에게 휘둘렀으나 쉽게 저지당했다. 팔이 꺾인 승윤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고, 지민은 그를 가볍게 무시했다. 깨끗하게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구둣발로 복부를 걷어차고 혐오감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 보다 천천히 말을 뱉어냈다.
“하, 로미오와 줄리엣?”
“좆같이 굴지 마.”
그가 지었던 것처럼
“널 진짜 사랑했으면 용서했겠지. 근데 아니었거든.”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애초에 보스만 아니었으면 헤어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고마웠어, 대체품.”
연인과의 마지막 인사 치고는 짧은 한 마디를 뱉곤 방을 나간 지민은
‘진짜’사랑에게.
“윤기야..!”
“...키티? 피비린내, 누구 죽였어?”
“어? 아.. 응, 죽였어.”
“그래? 답지 않게 많이 떠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였나봐?”
왈칵, 지민이 눈물을 쏟아냈다. 애써 웃는, 윤기에겐 이제야 익숙해진 눈으로, 표정으로.
“미안해.”
“사랑,하지 않았어.”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냈다.
“난, 난.. 내 사랑은 그때도 너였고 아직도 너야.”
난 왜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아직도 네 이름에, 네 눈빛에, 목소리에,
“윤기야”
불러주는 내 이름에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말했잖아, 키티.”
아마도 내 생각에는
“지쳤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서,
“고마웠어.”
알면서도 담아두고, 그게 너무 오래 되어서 억지로 잊은 게 아닐까.
‘나와 멀어지는 게 너에게 좋을 것이다-’ 윤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리가 잘 울리는 복도 덕에, 유난히 청각에 민감한 그 덕에 모두 들었으니까. 슬프지만 이게 현실이니까.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치는 그저 능력 좋은 스파이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 지민도 언젠가 그런 취급을 당하게 될 것을.
***
“인사해라.”
남자의 말에 백금발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새로 들어 온 것 같았다.
어거스트 디. 주 무기는 쌍권총과 나이프.
그게 내가 아는 너의 전부였고,
그 날이 내 사랑의 시작이었다.
“잘생겼네.”
“저요?”
“응. 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여기에.”
“이름 알려줘요.”
“흐응, 꼬마야. 남의 이름을 물을 땐,”
“민윤기.”
“응?”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어..?”
“내 이름, 민윤기라고.”
네가 본명을 잘 알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죽기 직전인 사람에게만 가볍게 속삭인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박지민.”
그래서 알려줬다.
“좋아해요.”
아직도,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 너무, 생생해서,
“아파..”
손가락과 코끝에 찌잉 울리는 듯 한 느낌이 일더니 가슴이 미칠 듯 저려왔다.
“흐,으 윤기야..”
눈물을 뚝뚝 떨궈냈다. 이유는 몰랐다. 그냥 가슴이 저려왔고, 그렇지 않으면 그 고통을 참아내야 했으니까.
어쩌면, 후회.
*
내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 긴급만 아니면 집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거란 말이었다.
배게에 머리를 뉘었다. 눈을 꾹 감았다.
“...말했잖아, 키티.”
“지쳤다고.”
“고마웠어.”
눈을 번쩍 뜨곤 고개를 들었다. 반쯤 앉았다 다시 풀썩 누웠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민은 자신이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굳이 손을 들어 그것을 닦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대로 흘러가게 두었다. 베개가 뜨거워졌다가 빠르게 식어갔다. 차가운 감각에 소름이 돋았지만 금세 다시 뜨거워졌기에 문제는 없었다.
**
“...좆팔, 어쩐지 불길하더라.”
급히 옷을 갈아입고 총을 챙겼다. 오랜만에 걸린 비상이었다.
장소는 광안리, 상대는 KV조직.
도착했을 땐 이미 난장판이었다. 경찰은 이미 이 편이기에 영화를 찍는다는 명분으로 일반인 통제만 할 뿐이었다. 일반인을 건드리면 복잡해지니까. 잔뜩 긴장 한 채 꼴에 경찰이라고 총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꽤 우스웠다.
“그렇게 벌벌 떨면서 쏠 수는 있겠어?”
“정신 차려.”
“그러다 죽이겠다?”
계단 꼭대기에서 해변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왜인지 네가 한 눈에 들어왔고,
네 옛 활동명을 부르며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도 함께 보였다.
“슈가...!!”
“살려, 살려줘 슈가,”
탕,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미동도 없었지만 ‘그래도’ 라는 명분으로, 어쩌면 핑계로.
“추억에 잠기기라도 했어?”
“아니, 무슨.. 대가리였으면 몰라도.”
“안 보이니까 상관 없는거네.”
“응. 아예 안 나온 거 같던데.”
“그래? 수고해. 죽지 말고.”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이제 잊을 법도 한 인사.
‘자기야, 죽지 말고. 죽어도 나한테. 알지?’
탕, 탕, 탕.
총알 소리가 멎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일부는 오는 척만 하다 도망가기도 했지만, 그들을 뺀다 하더라도 많았다. 디 쪽도 바빠 보였지만 총이 두 개라 그런지 더 수월해 보이기는 했다.
“...많기도 하다, 진짜.”
철컥,
아
“좆됐다.”
정말, 정말 열심히 달렸다. 누군가 키티갱의 총알이 떨어졌다 소리치는 목소리를 들은 후엔 더 빠르게 달렸다. 바닥에 엎어진 시체 하나를 등에 업어 방패막이로 사용하며. 이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일이 없었다. 궁금하지 않기도 했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한 바퀴를 쭉 돌다보니 따라 오지 않았던 칼잡이들과 마주쳤다.
그들을 제치고 달리다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가.
“굳이 살 이유가 있을까,”
탕,
“헛소리 하지 마.”
**
“혼자서 저렇게 많이 상대한다고..?”
그저 동료를 향한 걱정이라 변명하며 너에게로 향했다.
멈칫하곤 뭔가 생각하는 듯 했는데
“굳이 살 이유가 있을까,”
나 때문인가 싶었다.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널 밀어내서.
그래서 지금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탕,
“헛소리 하지 마.”
어쩌면, 후회.
“윤..!”
순식간이었다.
위치가 뒤바뀌고, 나는 앞으로 넘어갔으며
급히 고개를 든 순간 너는
웃고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했던 그 표정으로.
우리가 한창 사랑했던 때처럼, 그렇게 마냥 환하게.
탕,
쓰러진 남자는 무시하고 너를 받았다.
“아니 미친, 왜.. 무슨,”
“말했잖아, 자기야.”
“죽어도 나한테 죽으라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전을 받은 의사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스쳤으니 망정이지.”
“내가 그 정도도 못 피할 것 같아?”
“아니.”
“당연하지.”
시원한 파도소리와 바람이 귀를 간질였다.
반짝거리는 모래알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