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COPENHAGEN | 덴마크 코펜하겐
인어 이야기
w. XD (@No_0901)
‘서울은 지금이면 아침이려나.’
북유럽인 만큼 4월임에도 불구하고 쌀쌀한 날씨에 윤기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새벽 3시, 몽유병 환자 마냥 멍한 눈으로 부둣가를 정처 없이 헤맸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도,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도 없었다. 의미 없는 생활에 질려버려 한국에서 도망치듯 온 곳이 여기였다. 본래 살던 곳보다 조금 더 춥고, 우중충한 날씨가, 타국에서 온 저를 거부하는 것만 같아 윤기는 캐리어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멈춰진 걸음, 한 곳으로 향해진 그의 시선은 옮겨질 생각을 안 했다. 그 시선 끝, 외롭게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있던 인어 동상 하나. 그리고 그 뒤에 있던 무언가. 공허한 눈빛 안에, 아주 작은 호기심이 비집고 들어왔다. 잘못, 본 거였으려나.
하지만 역시,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량한 동상 하나만 있었을 뿐. 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나저나, 인어 동상이면 분명 코펜하겐 명소 중 하나일 텐데. 뭐가 이리도 더럽지. 누가 던진 건지 모를 아이스크림부터 시작해서, 주변엔 쓰레기들. 공주라면서 받는 대우가 이러는데, 뭣도 아닌 인간한텐 얼마나 더러울까. 쯧, 그는 절로 혀를 찼다. 있지도 않은 얄팍한 봉사심으로 아이스크림이 묻는 부분에 물을 부어 닦아주었고, 주변 쓰레기를 검은 봉지에 주워 담았다.
‘공주면 행복해야지, 왜 이렇게 불쌍하고 그래.’
주변이 좀 볼만 해지자, 그는 주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열심히 움직인 것도 오랜만이었고, 사실 볼 것도 없는 인어 동상에게 느낀 유대가,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아파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말을 꺼내자마자, 인어 동상이 슬퍼하기라도 하는 건지. 토독, 토도독. 안개비가 그의 손등과 얼굴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비에 맞으면 항상 더러워졌던 기분이, 그날은 왜인지 모르게 위로가 되어 편안해졌던 것 같았다.
그날을 시작으로 하루, 이틀. 인어 동상을 보러 오는 게 그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
“아 저것들 또 저러네.”
FUCK! HEY! 윤기가 한숨을 푹 내쉰 후 숨을 크게 들이마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인어 동상에 오물을 던지는 사람들한테 좋게 말해봤자, 듣기는커녕 되레 욕을 뱉고 튀는 더러운 심성을 가진 인간 따위라,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음을 알았다.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줄행랑을 치는 놈의 뒷모습을 째려보는 걸 관두고는 그가 인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인어, 라고 하면 좀 웃긴가. 그래 봤자 인어 동상인데. 그래도 던진 오물들이 상에는 맞지 않았던 건지,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인어 동상은 깨끗했다. 간만에 보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쯤 되면 동상 관리인이라고 착각하겠네. 그래봤자 나도 관광객인데.”
한창 해가 지고, 어두운 새벽이 찾아올 때쯤이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처음 앉았던 그 바위에 또 주저앉은 윤기가 동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랑받으려 애썼던 인어공주는, 결국 죽어 물거품이 되었다지. 그게 마치 제 모습 같아서, 그는 인어의 다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다리지만 끝엔 지느러미가, 지느러미가 있지만 다리 모양을 한. 이도 저도 아니게 된 동상의 모습은 꽤 애처로웠다.
“Do u like The Little Mermaid?”(인어공주 좋아해요?)
뭐야. 바닷바람이 차갑기도 하고, 생각보다 볼 게 없는 곳이라 늦은 밤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윤기는 갑자기 들리는 말소리에, 몸을 흠칫거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는 대화하기 힘든 외국인과 대화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No, I hate her. And I'm Korean, don't talk to me. I can't speak English.”(아니, 싫어해요. 그리고 나 한국인이니까 말 걸지 마세요. 영어 못 해요.)
“아, 한국인이었어요? 다행이다. 영어랑 한국어밖에 못해서.”
“…?”
익숙한 모국어에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한 달 전부터, 맨날 여기 온 거 봤어요. 못된 장난 하는 애들도 내쫓는 것도.”
“…아.”
예. 친화력이 좋은 사람인 건지, 자연스럽게 윤기의 옆에 앉은 남자는 며칠 대화를 나눠본 사람 마냥 쉽게 말을 걸었다. 그에 비해 친화력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윤기는 어버버해져 고개를 다른 쪽으로 급하게 틀었다. 옆에 앉으면서 훅 끼친 달콤한 향에 정신이 아찔해질 뻔했다. 뭐 하는 사람이지.
“인어공주, 싫어하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의미없는 봉사 정신.”
“거짓말.”
뭔. 어이없음이 가득 담긴 표정이 윤기의 얼굴 위로 드러났다.
“꽤 애정 있는 눈으로 바라봤잖아요. 난 쟤랑 한 몸이라서 느껴진다고.”
“…혹시 미쳤어요?”
“음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근데, 인어공주는 그렇게 불행하지 않아요.”
비록 그 왕자한테는 사랑받지 못했지만. 당신 같은 사람한테 사랑받고 있잖아요? 남자가 씩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순간 맞닿은 시선이, 진득하게 물고 늘어져 누구 하나 시선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랑한 적 없는데.”
“나는 사랑해. 저 인어는 그 누구한테도 사랑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당신이 보낸 그 애정 서린 눈빛에 푹 빠졌거든.”
당신도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아니, 사랑하지 않을까. 남자의 눈에는 어느새 물기가 가득했다. 윤기의 멍한 눈빛에 남자가 피실 웃더니 손을 뻗어 윤기의 목 뒤를 잡아 당겼다. 윤기의 이마에,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윤기의 볼과 손등에 안개비 마냥 토독, 하고 물이 떨어졌다. 몇 초간 그러고 있던 남자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벗어났다.
남자가 있던 곳이 휑하니 비워졌다. 따뜻한 입술이 맞닿았던 이마가 데일 듯이 뜨거웠다. 달콤한 그 향이 코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환장하겠네, 작게 중얼거린 윤기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뭐야.”
바위 위에, 하얀 진주 두 개가 어두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빛을 반짝이며 제 존재를 내뿜고 있었다.
***
꿈이야, 꿈.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며 윤기가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주머니에 넣어놓은 진주 두 개가 무안해질 정도로, 그날 일을 그는 잊으려 애썼다.
‘당신도 날, 사랑했으면 좋겠어. 아니, 사랑하지 않을까.’
그게 무슨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그 날의 장면에 그가 눈을 꾹 감았다. 감든 뜨든, 어차피 떠오르는 건 그대로였지만 나름 생각을 안 해보려고 그는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 남자는 인어인 걸까, 그 남자 이름은 뭘까, 왜 내게 키스하며 울었을까.
…다시 한번, 맞닿고 싶다.
그 남자가 가진 그 특유의 달콤한 향이 아직도 주변에서 맴도는 것만 같았다. 현실에서 탈주하는 건 이 정도면 됐겠거니, 그런 마음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데. 아직 제 정신은 그곳에 머물러 있기라도 한 듯 그의 귓가엔 파도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그건 집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잠들기만 하면 반복되는 그 날의 일이, 그 날의 잔향이 진하게 남았다. 조금 달라진 점이 생겼다면, 하루하루 흘러갈수록 그 남자의 얼굴이 흐려진다는 것. 눈꼬리에 눈물을 단 채로 웃어보인 그 얼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따라 윤기는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는 일이 늘었다. 미치도록,
“…외롭다.”
처음 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근데, 그 남자가 뭐라고.
“보고 싶다.”
새벽 3시, 여름이란 걸 알려주듯 밖은 습하면서 싸늘했다. 윤기는 겉옷을 대충 걸치며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 급하게 택시를 불렀다. 여의도 한강공원으로 가주세요. 급한 윤기의 목소리에 택시 기사님도 덩달아 급해진 건지 속도를 높였다. 윤기가 창밖을 바라보며 손톱을 잘근 물었다.
- 본 게 인어공주 동상밖에 없다고? 미친놈, 그거 여의도 한강 공원에도 있잖아.
친구 놈이 보내준 문자, 덴마크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며 어쩌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역시, 안 되려나.”
뛰고 또 뛰어, 인어공주 동상 앞으로 다가왔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윤기가 열심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분홍빛 머리카락, 되게 예뻤는데. 허탈해진 마음에 동상을 지나쳐 그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게, 금방이라도 그 남자도 함께 살랑 다가올 것만 같은데.
“분홍 머리, 예뻤어요?”
멈칫,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에 윤기가 놀라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인어 동상 옆에.”
들리는 소리에 의지하여 고개를 돌린 윤기가, 인어동상으로 시선을 두자마자 무언가가 달려들었다. 갑자기 덮쳐오는 무게감에 윤기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덮친 무언가를 꼭 안았다. 그리운 향, 달콤한 향. …찾았다.
작게 중얼거린 윤기가 고개를 두어 번 휘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두 눈을 크게 떠 앞을 마주하니, 거의 잊을 뻔했던 그 남자가, 아니 인어가 앞에 있었다. 시선이 몸을 따라 내려가니, 그 끝에 존재하는 지느러미 하나. 연한 하늘빛의,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으면서도 탄탄한 지느러미가, 얄궂은 장난이라도 치듯 두어 번 흔들거리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지느러미는 부끄러워.”
“예뻤는데.”
“…지느러미만?”
“얼굴, 보여줘.”
목덜미에 닿았던 그 작은 두 손이, 윤기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윤기의 말에도 손은 치워질 생각을 하지 않은 듯했다. 결국 인어의 두 손을 윤기가 맞잡아 내렸다. 인어는 입술을 앙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이는 분홍 머리도 여전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윤기는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입을 맞추었다. 이마에만 머물렀던, 그때와는 다르게.
“그때부터, 나도 모르게 빠졌나 봐. 나도 모르게 시작한 마음을, 네가 먼저 알아챌 줄이야.”
“눈빛에 다 있었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확신했으면서, 울긴 왜 울어. 투정 가득한 목소리에 윤기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름이 뭐야, 인어야.
“…인간이 인어의 이름을 알면, 당신은 날 평생 책임져야 해요. 상관없어?”
“인어야, 나는 왕자가 아니야. 근데 널 좋아해. 상관없어?”
네가 상관없다면, 나도 상관없어. 널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 윤기의 말에 인어가 그를 더 꽉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지민, 박지민.
…지민이구나, 예쁘네. 동화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건지, 윤기가 작게 중얼거리자마자 하얀빛이 지민의 꼬리를 감싸왔다. 당황하며 그것을 지켜보던 윤기의 눈 위로 다시 작은 손이 자리잡았다. 보지 말라고 작게 속삭이는 건 덤이었다. 피식, 하고 작게 웃은 윤기가 작은 손을 잡아 조금 내려, 손바닥에 키스를 남겼다. 간지럽다며 꺄르르 웃은 지민이, 어느새 꼬리 대신 자리한 다리를 윤기의 허리에 둘렀다.
“꿈 같다. 지금 되게.”
“꿈 아닌데.”
“그래도,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잖아.”
“주인공은 윤기랑 나이고?”
“인어공주 이야기인데 해피엔딩이네.”
그나저나,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윤기의 물음에 으음, 하고 작게 소리 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민이, 이내 잘한 일을 하고 칭찬이라도 바라는 아이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비밀. 첫 만남부터 느꼈지만,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어였다.
p.s. 이 말을 쓸까 말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글이 너무 난해해서 써야할 거 같고 ;ㅎㅁㅎ;. 아무 생각 없이 쓴 글이니까 그냥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구나~ 그걸 모르고 잇었구나~ 지민이는 한 달 동안 동상에 숨어서 윤기를 지켜봤구나~ 으음 지민이는 인어구나~ 이렇게 봐주세요. 보는 사람이 있긴 하나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