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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FORNIA | 미국 캘리포니아

로맨스가 필요해

w. 청흔 (@ASHBLU3)

(BGM : Katy Perry - California gurls / John Splithoff - Show me)

01.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아, 나 사고쳤구나 싶은 순간은 그닥 자주 있지는 않았다. 박지민이 가진 해마 속 기억의 물줄기를 거스르고 거슬러서 굳이 그런 순간을 찾자면 우선 네 살 무렵일까. 먼 나라 이웃나라를 보고 잔 덕분에 이불에 콜롬버스가 들고 다녔을 법한 누런 세계지도를 그렸을 때 한 번, 열한 살 때 친구가 빌려준 다마고치를 베개 밑에 숨기고 잤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왕창 깨져있었을 때 두 번, 마지막으로 고삼 수능 날 아침에 늦잠을 잤을 때 세 번. 총 세 번의 아침에 공통적으로 좆됐음을 실감했었지만, 무엇도 고삼 수능 날 늦잠을 자서 경찰차를 타고 등교한 경험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찍힌 기사 사진이 아직도 동창놈들 휴대폰에 인생짤로 곱게 저장되어 있다니까.

사실 지금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기억이며 상황을 늘어놓는 이유야 뻔했다. 그 최악의 수능날 아침을 이길만한 사고가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을 건너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박지민은 눈을 번쩍 뜨자마자 웬 낯선 미국 땅에서, 족히 7성급은 되어 보이는 호텔 스위트룸 침대에 누워있고, 옆구리에는 피부가 허옇고 상박이 단단한 누군가를 끼고 있다 뭐 그런 말이었다. 원나잇을 자주 했던 이십 대 초반에야 별 문제 아니었지만 현재 박지민은 스물 다섯이고, 약혼이 내정되어 있던 상황(비록 지민의 탈주로 인해 파혼으로 끝났지만)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은 충분히 좆된 게 맞았다. 위스키를 하도 들이켜서 곧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으, 씨바알…. 낮은 욕설을 뱉으며 하얀 상체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는데, 팔꿈치를 덥석 붙잡혀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으갹! 볼품없이 쉰 목소리로 가볍게 비명을 지르자 지민을 품에 가둔 남자가 쿡쿡 웃었다. 지민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채 헤롱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본능적으로 이게 위기상황이라는 건 감지해서, 어찌저찌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 헤드를 짚고 이마를 푹 박았다. 아 씨발 진짜 죽겠어 진짜 죽었어 나…. 말을 웅얼거리며 상체를 숙이고 있자 뱀 같은 팔로 허리를 휘감아 세운 남자가 지민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지민 씨, 정신 좀 차려요. 낮은 목소리에 지민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파드득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흐린 시야에 멀끔한 얼굴이 천천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퉁퉁 부은 입술의 물기를 닦아내며 지민이 덜컥 한숨을 쉬었다. 숨이 막혔다. 일어났어요? 남자는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지민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 씨발 존나 큰일났다. 나 진짜, 진짜…….

 

“딱 좆됐다… 싶죠?”
“…….”
“괜찮아요. 어제 저녁 먹으면서 대충 사정 다 들었고. 우리 상호 합의 하에 잤으니까.”
“…저기, 그게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블랙아웃 없다는 것도 다 알아요.”

씨발 박지민 어디까지 씨부린 거야!

“후회해요? 그래도 소용 없어요. 당신이 나 먼저 감았잖아. 그냥 눕혀주기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내 셔츠 갈기갈기 찢어놓은게 누구….”
“알았으니까 제발 입 좀 닥쳐요 입 좀!”

지민이 쉰 목소리로 버럭 화내자 남자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반려견을 보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는 게 재수없어서 지민은 되려 눈을 흘겼다. 진짜 너무 화난다. 어이없고 억울하고. 어젯밤은 저도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실연의 상처 때문에 술을 진탕 마셨고, 진작에 포기했던 춤을 간만에 추게 돼서 기분이 너무 좋았고, 그치만 마음 한 구석은 좀 쓸쓸해서 누군가한테 안기고 싶었고 안겼다. 저를 안아준 사람이 어쩌다 타지에서 만난 모르는 남자였을 뿐이다. 그치만 새벽에 그의 손과 목소리, 몸이 준 기억은 너무… 군침 흘릴 정도로 강렬해서….

지민은 속으로 제 머리를 퍽 쳤다. 그만 생각하자. 그냥 한 순간이었을 뿐이야. 여전히 미간을 짚고 고개를 푹 숙인 지민의 뺨을 쓰다듬던 남자가 몸을 일으켜 지민을 욕실 가까이 데려다주었다. 이렇게 격한 정사를 치룬 게 오랜만이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넓디 넓은 욕실에 맨발로 들어서자 남자가 선반에서 욕실용 슬리퍼를 한 켤레 꺼내주었다. 씻고 나와서 얘기합시다. 룸 서비스 불러줄게요. 브런치 괜찮죠? …더 할 말이 없어서 지민은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남자가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지민은 바닥에 쭈그려앉아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금색 타일 밑에 흘림체로 적힌 Love California라는 단어 조합이 이렇게 미운 적은 처음이었다. 아아악, 아아아아악 박지민 등신 새끼야. 니가 정신이 있어 없어 미친놈아. 김태형한텐 또 뭐라고 말해? 벽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지난 밤을 회고하는 중이었는데 문 바깥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민 씨 다 좋은데 자해는 하지 마요. 괜히 예뻐해줬나 싶잖아.

저 씨발놈 진짜 때리고 싶다. 지민은 욕을 집어삼키며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에 뭉친 근육과 피로를 이완시키며 어제의 격렬한 흔적을 씻어내듯 살갗을 박박 문질렀다. 전신 거울에 비친 몸뚱이가 죄다 붉게 얼룩져 있었다. 잇자국도 곳곳에 보였다. 대체 무슨 섹스를 한 거야. 이를 꽉 깨물고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다행히 허벅지가 좀 멍이 심하고 엉망인 것 외에는 다 괜찮은 듯 보였다. 뒤가 그닥 벌어지지도 않았다. 머리를 감는 내내 지민은 한숨을 토했다. 물을 끄고 샴푸칠을 할 때, 욕실 바깥에서 남자가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자꾸 귓가에 파고들었다. 그게 신경 쓰여서 더 격렬하게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지만, 아무래도 자꾸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지민은 아예 되짚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 미국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왔는지. 저 남자는 어떻게 만난 건지….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생각해야만 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02.
박지민은 중소 기업체 경영주 아버지와 투자자인 어머니 밑에서 난 맏형이다. 사업 확장을 목표로 열심히 꾸려오던 기업체는 공동이사 중 한 명의 갑작스런 사고 및 퇴임으로 인해 위태로워졌고, 다른 투자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부모님은 결국 기업 합병에 목표를 두고 대책 마련을 시작했다. 그때 회의에서 나온 안건이 바로 정략결혼이었다.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지. 그나마 형제 중 나이가 제일 들어찬 지민이 결혼하게 되는 게 확정되었다. 상대는 잘 나가다가 부품문제로 리콜 파동이 일어났던 거대 자동차 기업 I그룹의 큰 아들이었다. 둘이 결혼을 하게 되면 생산성도 높아지고, 투자자들에게도 믿음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결정 하에 1년이라는 긴 기간을 잡고 결혼 준비가 시작됐다. 그 사이에 박지민은 뭐, 뻔하게도 사랑에 빠졌다.

지민에게 사랑에 빠진다는 건 빈번하게 일어나는, 마치 오늘의 저녁식사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놀랍게도 그 사랑은 항상 실패해왔다.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몸만 원하거나, 감정 쓰레기통으로 소모되거나, 아니면 차이기 일쑤였으니까. 이쯤되면 문제가 본인한테 있는 게 아닐까 돌아봐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나름 고고한 도련님 출신이라 또 자존심은 있다 이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에겐 문제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미친듯이 열정적으로 애정하고, 헌신 봉사 다 하는데 왜 박지민에겐 로맨스가 오지 않을까. 심각한 고민을 하며 사람 만나길 꺼려할 즈음 결혼 상대로 낙점된 게 I기업의 장남 B였다.

B는 상냥했다. 언제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으며, 지민이 요구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딱히 사귀자는 말이 상호 간에 오간 건 아니었으나 키스를 하고 몸을 섞고… 가끔 애정 섞인 좋아한다는 말도 해주고. 섬세함도 넘쳐서 지민이 가지고 싶다던 한정판 구두 같은 걸 어디선가 구해오기도 했다. 사무치는 다정에 지민은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러길 바랐다. 이게 사랑이지 대체 뭐가 사랑이야. 우리의 끝은 분명히 아름다울 거라고 믿었다. 턱시도를 입고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버진로드를 걸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건 정말 완벽한 결혼이 될 것이었다…는 물론 멍청한 박지민의 착각으로 결말을 맺었다.

연애인지 정략결혼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하는 관계가 7개월 정도 이어진 어제 저녁, 약혼 연회가 시작됐다. 지민은 깔끔한 와인색 정장에 갈색 구두를 신고 우아하게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지민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수근거리다가 다가와 축하를 건넸다. 지민은 기쁜 마음으로 그 모든 인사를 받았다. 쏟아지는 찬사 속 곧 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샴페인을 한 모금 들이킨 지민은 B를 찾았지만 그는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화장실에라도 간 걸까. 아니면 답지 않게 긴장이라도 했나? 귀엽네. 지민은 그리 생각하며 시부모님이 될 분들께 B는 자신이 찾아보겠다며 연회장 주변을 샅샅이 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B를 찾았을 때, 지민은 제가 살아온 모든 삶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B가 인적이 드문 복도 끄에서 제 이복여동생과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지민에게 해준 적 없는 격렬함으로.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지민을 바라보는 눈빛이 연민이나, 기계적인 따뜻함 같은 것이었다면 그녀에게 입술을 부비는 그의 모습은 정말 애틋하고 불 같았다. 굴욕감이 온몸을 덮쳐왔다. 왜 지금 제가 기둥 뒤에서 이 모습을 다 지켜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B의 옆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나인데, 왜 저 둘이 정말 진실된 사랑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박지민은 그냥 방해꾼 같은지. 겨우 입술을 뗀 B의 여동생이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오빠, 결혼하지 마…. 씨발 드라마를 찍어라 드라마를. 지민은 당장이라도 저 사이를 가로막고 B의 따귀를 날리고 싶었지만, 몸에 힘이 쭉 빠친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민은 연회장 대신 화장실로 들어갔다. 휴대폰을 열고 고등학교 졸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은 절친에게 막무가내로 전화를 걸었다.

캘리포니아는 새벽 세 시였을 텐데도 김태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를 받아주었다. 지민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눈물이 퐁 터졌다. 씨발 태형아……. 지민이 울고 있다는 걸 눈치챈 태형이 잠에 푹 젖은 목소리로 허둥지둥 지민을 달랬다. 야 왜 씨발 무슨 일이야 너 오늘 약혼하는 거 아니야? 이제 약간 그놈이 너 버리고 도망갔어? 어디로 왔어 미국이래? 내가 잡아다가 거세시킬까?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친구에게 지민은 한탄하듯 다 쏟아부었다. 아니 씨발… 태형아 나 사고칠 거야. 내가 다 버리고 도망갈 거야. 김태형은 두 말 않고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박지민은 정말로, 그렇게 했다. 마음을 부칠만한 곳을 찾아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제 편인 기사 아저씨를 통해 몰래 집으로 달려가서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은색 캐리어를 들고 여권을 챙긴 뒤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휴대폰이 폭발하기 직전인지라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기사 아저씨는 내내 지민의 눈치를 보았다. 나이든 그는 사려깊고 상냥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휴지를 내어주고, 잘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하고 인사할 뿐이었다. 지민은 휴대폰을 잠시 켜서 기사 아저씨 자르면 절대 안 돌아간다고 메시지를 보낸 뒤 다시 폰을 껐다. 바로 네 시간 뒤 뜨는 비행기에 자리가 남아있어서 바로 구매했다. 근처 미용실에서 탈색을 한 번 하고, 염색을 했다. 이렇게 밝은 머리는 꽤 오랜만이었다. 진이 빠져서 공항에서 눈물젖은 샌드위치를 씹어먹고, 비자카드와 캐리어, 여권에만 의지한 채 미국으로 날랐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자기위로를 위한 도피. 그리고 시위. 모든 걸 쏟아부은 사람의 억울한 여행.

아이패드를 챙겨온 덕분에 태형과 연락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비행은 열네 시간정도가 걸릴 예정이었다.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면 아마도 낮이겠지. 지민은 그동안 약혼 연회를 준비한답시고 못 잔 잠이나 푹 보충하기로 했다. 다 짓무른 눈가 위에 아이팩을 올려놓고 망각의 세계로 걸어들어갔다. 꿈 속에서 B가 나와서 손을 뻗었다. 아주 그냥 씨발, 개 같은 꿈이었다.

캘리포니아는 딱 일 년만이었다. 작년 여름 태형이 취업했다고 한 턱 쏘겠다고 했을 때 놀러가서 야외에서 바비큐를 해먹고 해변에서 실컷 뛰어놀았던 그 4박 5일 여행 뒤로는 처음이라는 얘기였다. 야자수와 해변, 뻥 뚫린 하늘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산악지대가 함께 위치한 서부 끝의 거대한 땅. 태형은 캘리포니아에서는 무엇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라는 이상한 지론을 믿는 사람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2년을 공부하고는 요식 자격증 및 조주사 자격증을 따서 산타마리아에서 일 년 정도를 보낸 뒤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왔다. 현재는 말리부 해변에 작은 가게에 취직해 술과 고기를 팔고 있다. 거기서는 브이라는 이름으로 지내고 있는데 워낙 외모가 눈에 튀어서 사람들이 추파도 많이 걸고, 그걸 이용해먹는 덕분에 장사도 제법 잘 된다고 했다. 정말 김태형다운 자유로운 삶이라고 지민은 생각했다.

해외는 뭐랄까, 같은 실내인데도 공기부터 달랐다. 뭔가 좀 더 새롭고 낯선 기분. 길고 지루한 비행 끝에 공항에서 짐을 찾아 나왔다. 나오는 길에 웬 남자랑 어깨를 부딪혔지만 인상만 살짝 찌푸리고는 별 생각 없이 다시 걸었다. 게이트가 열리자 태형이 문 앞에서 지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둘은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서로를 얼싸절싸 껴안았다. 안 그래도 까무잡잡한 편이었던 태형의 피부는 거의 고동빛으로 변해 있었다. 지민이 웃으며 태형의 얼굴을 가리켰다. 야 너는 선크림도 안 바르냐. 일부러 태운 거거든. 여기는 햇빛이 워낙 좋아서 선크림도 쓸모가 없고. 오랜만에 봤는데 그런 소리나 하냐? 태형이 서운한 듯이 쏘아붙이자 지민이 엷게 웃었다. 당장 익숙한 얼굴을 보니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지민에게서 짐을 뺏어든 태형은 염색한 지민의 머리를 마구 만지작거리다가 밀짚모자를 씌워주었다. 가게 사장한테 렌트해 온 차에 짐과 지민을 싣더니 운전석에 앉았다. 지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야 너 운전도 해?”
“배웠어. 시장까지 이제 거리가 좀 있어서 차랑 운전이 필수야. 와 나 한국말 진짜 오랜만에 해 어 약간 안 어색하지? 잘 말 하고 있지?”
“너는 원래 한국말은 좀 서툴잖아.”
“너 내려.”

아이 농담이지. 지민이 어깨를 한껏 올리며 윙크를 연사했다. 태형이 토 쏠린다는 얼굴로 지민을 바라보다가 큭큭 웃었다. 카 오디오를 돌려보았지만 노래가 안 나오기에 이상하다 싶었다. 침묵으로 태형에게 물으니 지민의 눈빛을 눈치 챈 태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울 사장 차에서 음악 잘 안 들어. 카 오디오는 특이 좀 음이 너무 신형이라 싫대 존나 이상한 사람이야. 트렁크에 구형 붐박스 있는데 그거라도 틀어줘? 태형의 말에 지민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민은 나름 조예깊은 수집가였다. 태형이 갓길에 차를 세워 트렁크를 오픈한 뒤 짐을 벨트로 다 고정시키곤 붐박스에 휴대폰을 연결했다. 선곡은 지민이 도맡았다. 태형이 센스있는 선곡 기대한다고 압박을 줬지만 지민은 아랑곳 않고 캘리포니아 걸즈를 틀었다. 태형이 눈짓으로 핀잔을 줬지만 지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맞춰서 어깨춤을 추었다.

공항에서 해변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그 사이에 둘은 구형 붐박스에서 나오는 저질 음악에 몸을 흔들어대며 노래를 불렀다. 뻥 뚫린 도로 옆으로 세워진 야자수 나무들도 바람과 음악에 맞추어 잎사귀를 흔들었다. California girls, 훠! We're unforgettable! Daisy Dukes bikinis on top. Sun-kissed skin So hot, We'll melt your popsicle!!! 어우워어! 지민이 하도 머리를 세게 흔들어서 신호등 앞에서 급정거를 할 때 시원하게 이마를 박았다. 태형이 그를 실컷 비웃었지만 태형 역시도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운전대에 머리를 박아 시원하게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한 여름의 캘리포니아는 정말, 사랑하기 좋았다. 왜 이런 좋은 곳을 놔두고 갑갑하게 한국에만 있었을까. 지민은 갑자기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이 침울해진 걸 눈치 챈 태형이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남는 손으로 지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이제 때 됐어. 좀 말해봐. 그래서 그 씹새끼가 약간 이제 뭘 어쨌다고?”
“…야 뭘 벌써부터 그런 걸 물어봐. 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하면 안 돼?”
“아니 너 울 거 같은 얼굴이니까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냐.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없는 애가 떨어질 뻔 했다고. 근데 이거 한국에 있는 말 맞지?”
“그거는 급했으니까 그렇지….”

지민이 쭈글쭈글하게 답을 내놓았다. 태형은 답답한지 운전대를 돌리면서도 계속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일단 안 물어볼 테니까 좀 쉬고 괜찮아지면 얘기해. 태형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그래도 걱정이 됐는지 지민의 휴대폰을 찾자, 지민은 다 꺼서 백팩 맨 밑에 넣어버렸다고 말하곤 씨익 웃었다. 태형이 킬킬 웃으며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역시 내 친구다워. 나도 가출할 때 말이야 어? 있는 통장 다 들고 미국으로 확 날랐을 때, 그때 폰 다 꺼놓고 연락 존나 씹었거든. 삼개월쯤 지나서 메일 보냈는데 엄마가 나 실종신고 했다잖아 크하학.

맞아 그때 존나 심각했지…. 지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태형에게 동조했다. 동창들은 다 너 죽었다고 생각했어 새끼야. 지민의 말에 태형이 어깨를 털며 애교를 부렸다. 야 그래도 너네한텐 인스타 디엠 보내고 그랬잖아 그 정도면 양호하지! 지민은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러려니 했다. 이제 한참 옛날일이고, 태형이 미국 쪽에서 너무 자리를 잘 잡아서 동창생들 입장으로는 전혀 나쁜 게 없었으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편이었다. 지민은 태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붐박스에서는 여전히 음악이 노이즈와 얽히고 섥혀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듣기는 불편했지만 나름 운치는 있었다. West coast represent, Now put your hands up!! 박지민 소리질러!!! 후!!! 쇼맨쉽 충만한 그들은 노래와 우정을 싣고 빠르게 달려나갔다. 11-7번 국도의 푯말이 쓰러질 듯 위태롭게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속도는 줄지 않았다.


03.
샤워 후 태형이 추천해준 호텔에서 실컷 뻗어있던 지민은 저녁이나 되어서 겨우 기어나와 해변을 거닐 수 있었다. 완전한 여름 성수기를 맞은 탓에 해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 허리를 껴안고 바다로 뛰어드는 연인들, 강아지와 함께 해변가를 달리며 산책하는 사람들. 노을 지는 풍경 속에 정겨운 풍경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들었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던 지민은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열 몇 시간 전만 해도 양복을 입고 연회장 화장실에서 질질 짜던 애가 갑자기 캘리포니아로 날라서 하늘하늘한 셔츠와 통 큰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박지민에겐 더 알맞는 옷 같아서 웃음이 났다.

아버지가 사업을 확장하겠다고 하신 이후로는 혹시라도 누가 될까봐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연락을 하던 친구들 중에 소문이 좀 안 좋은 친구들과는 다 연락을 끊었고 연애감정도 최대한 조절하며 사람을 가려 만났고, 행동반경도 상당히 좁아졌다. 쓸데없이 경영책이나 들여다봐야 했고 옛날 옛적부터 강렬하게 열망했던 춤이라는 꿈은 접어둔 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렇게 본인 스스로 택한 자유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감은 진짜 씨발 존나 이럴 걸. 왜 그따위로 살았는지. 한숨이 절로 났다. 나로 살기로 결심하는 것, 그 사소한 것 하나를 이 먼 타국까지 날아와서 하게 됐는지.
말리부의 바닷물이 발목을 간지럽혔다. 파도는 꼭 누군가 낼름거리는 축축한 혓바닥 같아서, 지민은 오래도록 그 파랑을 눈여겨보았다.

저녁에는 태형이 넉살을 부려준 덕분에 지민을 위한 축하파티 같은 것이 열렸다. 마음씨 좋은 가게 주인 아저씨(서로 프레드와 지민으로 부르기로 했다)가 야외에 그릴을 설치하고 꼬치 여러 개와 바비큐를 구웠다. 태형은 옆에서 칵테일과 위스키 여러 잔을 뽑아냈다. 태형의 솜씨는 놀랄만큼 좋았다. 지민이 깜짝 놀라 엄지를 들어올리자 태형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신사처럼 인사했다. 옆에서 주스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 사람들도 다같이 옹기종기 모여 지민(a.k.a 브이’s 베스트 프렌드)의 자유를 축하해주었다. 다들 사건을 자세히 알진 못하지만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얼굴들이 좋았다.

취가가 오르자 아이스크림 가게 주인이 폭죽을 잔뜩 들고 나와 하늘을 향해 쏘아댔다. 지민도 위스키를 한 네 잔째 마시니 점점 얼굴에 열이 올라서, 스파클 하나를 들고는 무반주로 마구 춤을 춰댔다. 태형이 깔깔 웃으며 블루투스 스피커로 헤비메탈 하나를 틀어주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었는데도 지민은 전혀 개의치 않고 발끝으로 우아하게 돌아 리듬을 마구 가지고 놀았다. 밤하늘 아래 해변가의 틀림없는 아름다움. 모두가 박수를 칠 때 지민은 비로소 명치 끝에 얹혀있던 절규를 뱉어냈다. 눈꼬리에 매단 유성이 모래사장으로 눈부시게 추락했다.
그리고 지민의 그런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는 어떤 동양인 남자가 있었다.

 


다음부터는 지민도 기억이 좀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그래도 제일 중요해보이는 기억부터 천천히 나열하자면, 일단 태형이 샴페인을 만드는 동안 어떤 남자와 둘이 프레드의 가게 구석 테이블에 앉아 열변을 토하는 박지민의 모습이 가장 크게 남아있었다. 저녁의 마지막 기억이기도 했고. 상황을 좀 정리해보자면 춤을 진탕 추고 인사를 하고 피곤에 젖어 가게로 들어와 태형이 퇴근할 때까지 쉬고 있던 지민 앞에 누군가 술을 보내줬고, 인사를 하다가 합석해서 대화를 하게 됐다. 제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남자에게 출처 모를 친밀감이 느껴졌다. 아까까지 영어로 얘기하느라 입도 머리도 아플 지경이었던 지민에게 (태형 제외) 타지에서 모국어를 하는 남자는 진심으로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얘길 하다보니 호텔도 같은 층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이 햇빛 쨍쨍한 도시에서도 뱀파이어처럼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빨간 하와이안 셔츠와 흰색 캡모자가 언밸런스하게 잘 어울렸다. 무표정의 냉소적인 얼굴은 좀 무서웠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그게 사르르 풀리면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미소가 나왔다. 검은 머리칼은 흰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인상이 선명해보였다. 눈꼬리가 확 올라간 고양이상이었다.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이름은 민윤기라고 했다. 간단하게, 윤. 꽤 잘 나가는 여행기 작가고, 홍콩에서 삼 개월을 보내고 미국 전역을 돌아볼 생각으로 캘리포니아로 넘어왔다고 말했다. 낮은 중저음은 유창하게 가게 안을 메우고 지민의 귀를 간질였다. 그는 말 할 때마다 추임새처럼 스읍, 하고 침을 삼키는 것 같은 습관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좀 매력적이었다.

지민은 이런데서 빼는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술은 왜 산 건데요? 그냥 한국인 같아 보여서? 지민의 질문에 윤기는 손사래를 쳤다. 설마요. 그거 비싼 술인데, 난 마음에 드는 상대 아니면 그런 술 안 사요. 무조건 병맥이나 사지. 윤기의 말에 지민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뭐 혹시 나한테 추파 거는 건가? 지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술잔에 남은 술을 다 목구멍 뒤로 넘겨버리곤 입술을 닦았다. 저기 나는요, 당분간은 누구 좋아하거나 만날 마음이 하나도 없어서요. 관심은 고맙지만 아쉽게 됐네요. 장난기 섞인 말투에 윤기가 눈을 깜빡였다. 궁금증 가득한 얼굴이었다.

“왜 당분간 없는데요? 아, 답하기 좀 곤란한 질문인가? 미안해요.”
“…아니, 뭐 그런 건 딱히 아닌데요. 그냥, 일단 나부터가 사람하고 연애감정 맺는 게 좀 서툴러서요.”
“아, 혹시 최근에 뭐 실연 그런 거 당했어요?”

꽤나 날카로운 질문에 지민이 움찔, 몸을 떨었다. 맞나보네. 조용히 중얼거린 윤기는 미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막 찌르고 후벼팔 생각은 없었어요. 미안해요. 윤기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당신 잘못도 아닌 걸 뭐. 그놈이 존나 씹새끼였던 거지…. 지민이 답답한 듯 술을 찾자 윤기는 제 손에 있던 술을 넘겨주었다. 프레드에게 맥주를 두 병 더 부탁하고, 윤기가 턱을 괴어 지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꽤나 끈적한 눈빛이었다. 알려줄 수 있어요? 어떤 식으로 쓰레기였는데? 지민은 아, 하고 잠깐 입을 벌렸다. 눈치를 보듯 태형 쪽을 쳐다보자 태형은 여자 손님들에게 안주와 칵테일을 만들어주기 바빴다. 설마 서운해하진 않겠지. 한숨을 쉰 지민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물었다. 설마 맨입으로 말하게 할 생각은 아니죠? 지민의 말에 윤기가 한참 웃더니 위스키를 두 잔 더 주문했다. 낯선 이에게 제 치부를 고백하는 게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닌 걸 처음 알았다.

그 다음 기억부터는 좀 더 암전이 잦았다. 맥주 한 병에 위스키 두 잔을 비우고 정말 얼굴이 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개져선 이런 저런 얘기를 다 떠든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주로 B에 대한 욕과 분노표출이었다. 그 썅놈새끼가 나한테 비록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나긴 했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더 잘 살아보자고 해놓고는 지 호적에 올라와 있는 여자애랑 키스를 했다고요 글쎄. 섹스 했는지는 어떻게 알겠어? 농담 아니고 한국에 돌아가면 그놈 거세시킬 거예요. 무시무시한 말에 윤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걸로 되겠어요? 용액에 넣어서 대대손손 보관하라고 그 여자 얼굴에 던져줘요, 하고 키득거렸다.

이 양반 점점 더 마음에 드네. 지민은 같이 키득거리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한 번 이야기하고 나니 서러움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워낙 경계심이 짙어서 처음 본 사람하고는 말도 잘 안 섞는데, 이상하게 민윤기 앞에서는 말이 술술 잘도 풀렸다. 약이나 옥장판 팔았으면 정말 잘 했을 거야. 취한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지민은 말을 이었다. 투정과 찡얼거림 그 사이 어딘가 같은 어눌한 발음이었다.

“그으러니까, 로맨스가 필요하다고요, 로맨스.”

필연적인 의무감도 싫고, 몸만 원하는 외로운 관계도 이제 싫증나요. 좀 불 같기도 하고, 물 같기도 하고. 그런 질척하고 뻔한 사랑 좀 해보고 싶어요. 매너리즘에 빠진 이 시대에는 낭만이 좀 필요하다고요. 안 그래요? 술에 취해 던져본 말인데도 윤기는 제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 비워진 스테이크 접시를 포크로 콕콕 치다가 지민에게 다시 되물었다. 그럼 지민 씨가 생각하는 로맨스의 기준은 뭔데요? 뭐 물고 빨고 울고 하면 다 로맨슨가? 뻔한 사랑이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지. 사귀다가 헤어져도 로맨스는 로맨스인데. 윤기의 말에 지민이 불퉁해져선 입술을 쭉 내밀었다.

뭔 말을 못해. 그냥 비유적인 거죠. 그냥 평범해도 좋은 사랑 말하는 거예요. 거창하게 말고요. 난 그런 사랑도 못해봐서 그런 거에 로망 좀 있어요. 왜요, 뭐 너무 유치해요? 좋겠다 그런 평범한 로맨스 가져봐서! 부럽네! 난 그 흔한 게 필요해서 죽을 맛인데! ……술 취해서 실컷 꼬장부리고 빈 잔을 빙빙 돌렸다. 테이블에 왼뺨을 붙이자 냉기가 올라오면서 좀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지민의 꼬장을 보던 윤기가 큭큭 웃더니 주변을 한 번 스윽 둘러보고선 지민의 쪽으로 얼굴을 가깝게 붙였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정신을 못 차리던 지민은 어느 순간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감각에 비로소 경각심이 들었다. 아 이거 뭔가 좀, 너무 가깝지 않나? 술 먹어서 냄새도 엄청 날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던 찰나에 윤기가 낮게 속삭이듯 물었다.

“로맨스를 가져본 적 없다는 거면, 뭔지도 잘 모른다는 뜻이죠?”
“…그렇죠.”
“좀 가르쳐줄까요?”

물론 당신이 필요하다면요. 융단 같은 목소리가 목을 죄었다. 제안 치고는 좀 강요스럽다. 그런데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저음이었다. 지민의 손가락 위로 뼈마디가 불거진 희고 굵은 손가락이 얹혔다. 음…… 지민은 허밍하듯 콧소리를 냈다. 윤기가 답을 종용하듯 새끼손가락을 천천히 쓸어보다가 걸었다. 고작 손끝 하나가 닿았을 뿐인데 척추가 시렸다. 원래 이런 건가? 괜찮나? 아니 어차피 여긴 캘리포니아니까. 김태형의 말로는 ‘무엇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굳이 나서서 박지민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만 하면 가르쳐준다고 하는데. 그럼 그 정도 호의는 받아도 되지 않나. 알코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눈이 거의 맛이 간 지민의 앞에 윤기가 손바닥을 흔들어보였다. 셋 셀 동안 결정해요. 아니면 데려다주지도 않고 칼 같이 일어날 테니까. 자, 하나, 둘….

“주, 주세요!”
“…정확히 뭘?”
“…씨이. 가르쳐, 달라고요. 로맨스든 낭만이든 뭐든.”
“좋아요. 나는 여러 나라를 다녀보는 게 직업인 낭만파 작가니까 제법 도움이 될 걸.”

여유롭게 말하는 얼굴을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오늘부터 잘 부탁한다는 씩씩한 인사를 하기 위해 벌떡 일어난 몸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어, 어어어, 사뿐히 기울어졌다. 태형이가 서 있는 칵테일 바도 프레드가 양꼬치를 굽는 그릴도 다 기울어졌다. 어어, 어어어. 마지막으로 시야에 들어온 건 조금 놀란듯한 검은 머리 남자의 얼굴이 전부였을까.
그리고 마지막 암전-.

 


04.

호텔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다만 그나마도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건, 윤기를 잡아당긴 자신의 손, 저를 만져댄 윤기의 손, 서로 잔뜩 엉긴 허벅지, 한껏 움츠려든 발가락. 뭐 이런것들 뿐이었다. 몸 상태를 봐선 뒤로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게 그나마 다행인가. 지민은 샤워기를 껐다. 어제 부린 추태를 생각하면 죽고만 싶었으나, 어쨌거나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그 어떤 사건도 수습할 수 없었다. 지민은 축축한 몸을 타올로 정돈한 뒤 샤워가운을 입고 천천히 바깥으로 나갔다. 윤기가 테이블 위에 브런치와 샐러드를 준비하곤 커피까지 따라 한 상 가득히 차려놓았다.

머리를 덜 말린 지민이 식탁 앞에 와서 앉자 윤기는 자연스럽게 지민의 손목을 잡고 침실로 이끌어 머리를 탈탈 털어 말려주었다. 지민이 안 해줘도 괜찮은데… 하고 볼 멘 소리를 하자 윤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지민 씨 그러다 비듬 생겨요. 감기도 걸릴 거고. 건강 나빠지는 건 별로 낭만적이지 않잖아요. 지민은 눈살을 콱 찌푸렸다. 저건 분명히 자신을 놀리는 거였다. 웃음기가 잔뜩 맺힌 그의 얼굴이 애틋한 동시에 약간은 미웠다.

윤기의 솜씨 덕분에 머리를 빠르게 다 말린 지민은 다시 식탁 앞에 앉아 브런치를 먹기 시작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운 토스트, 반숙 계란, 작은 브로콜리 수프와 피클. 맛있었는지 생각보다 놀랐다. 지민이 토스트를 두 입 째 집어넣었을 때 즈음, 윤기가 의자에 기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물었다. 그래서, 어제 말한 건 좀 생각해봤어요? 윤기의 물음에 지민이 한 순간 손놀림이 멈췄다. 그걸 빠르게 포착한 윤기가 키들키들 웃었다. 지금 대답하기 힘들면 말고요. 캘리포니아에서 내일 모레까지는 있을 거니까 그때 말해줘도 돼요. 윤기의 여유로운 말투에 지민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반쯤 남은 빵을 내려놓고, 입가에 빵 부스러기를 정리했다. 그리고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스스로도 좀 의외였다. 해봐요, 마음대로. 여기는 뭐든 할 수 있는 곳이니까.

지민의 말에 윤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뭐든 할 수 있는 곳이라, 좋네. 짜놓은 일정 있으니까 친구한테 전화 걸어서 생존신고 해요. 아까 나랑 통화하긴 했는데 그래도 걱정할 거예요. 윤기의 말에 지민이 벼락맞은 사람처럼 튀어울랐다. 아니 태형이랑 통화를 했다고요? 무, 뭐 이상한 말 한 건 아니죠? 지민이 불안한 눈빛을 하자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쪽이 어제 쓰러졌을 때 내가 대신 호텔 데려다주고 온다고 해서 번호 교환한 거예요. 새벽에 문자 보내고 아침에 전화하고. 멀쩡히 각자 룸에서 잤다고 해놨으니까 걱정 마요. 윤기의 말에 지민의 입이 퐁 벌어졌다. 눈치가 있어서 좋긴 한데, 그게 되려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한 지민이 먹은 접시를 정리했다. 휴대폰을 켜면 난리가 날 테니 아이패드로 연락해야겠다. 한숨이 절로 났다.

윤기 역시도 먹은 밥을 정리하곤 가운을 단단히 여민 채 슬리퍼를 신었다. 한 시간 후에 호텔 로비로 와요. 짜놓은 플랜 있으니까 거기 맞춰서 다녀오죠. 멀진 않을 거예요. 윤기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당신이랑 왜, 뭐 그런 표정이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의 얼빠진 표정을 보다 풉 웃었다. 지민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왜 웃어요. 이런 거 오랜만이라 그래요. 윤기가 문 가까이 가며 물었다. 이런 거 뭐가 오랜만인데요. 데이트? 윤기는 항상 툭 던진 말로 정곡을 찔렀다. 지민이 대답이 없자 윤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나도 오랜만이니까.”
“…….”
“둘 다 오랜만인 건 똑같으니, 협조만 좀 잘 해줘요.”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윤기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내뱉은 뒤 자기 룸으로 내려갔다. 삐리릭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민은 손바닥으로 제 뺨을 찰싹찰싹 때려보았다.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박지민은 엊그제 약혼남과 파혼을 하고, 절친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라서 술 먹고 춤 추고 진탕 놀다가, 웬 모르는 남자랑 자, 자, 잔 거였다. 그리고 그 남자랑 로맨스 신파물 하나 찍겠다고 약속까지 해버렸고. 이건 존나 사고다. 박지민 인생 진짜 개막장으로 사는 구나. 전화해서 무를까 고민하던 찰나에 아이패드가 시끄럽게 울려댔다. 태형이 영상통화를 걸어오기에 머리를 후다닥 정리하고 가운을 더 여몄다. 다른 걸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은 그냥 마음먹은 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05.
해변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온 곳이 해변이었다. 태형이 있는 말리부와는 거리가 좀 떨어진 산타 모니카 비치는 LA 현지에서도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많은 여행 중심지로 손꼽혔다. 해변 옆에 놀이공원이 있어 더욱 아찔한 느낌을 받으며 놀 수 있고, 군것질 거리가 많아서 돌아다니는 내내 입이 심심하지 않은 그런 장소였다.

가볍게 차려입은 지민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을 쥐고 먹고 있었다. 옆에서 윤기가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바다는 말리부와 비슷하지만 좀 더 에메랄드 빛이 강했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맑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색감 자체는 지민의 마음에 들었다. 말리부에서처럼 발목을 담그지 않고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산책했다. 낮에 보는 바다는 저녁보다야 활기가 넘쳤다. 그치만 이 사람 미어터지고 놀이공원 곳곳에서 비명이 난사하는 산타 모니카에서 무슨 낭만을 찾겠다는 건지.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지민이 윤기를 슬쩍 돌아보자 윤기가 알았다는 듯 손짓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전신 래쉬가드를 입은 웬 건장한 남자 한 명을 데려왔다. 아, 설마설마….

“우리 서핑해요?”
“딩동댕. 탈 줄은 안다고 했죠? 그래도 여기서는 서핑 하려면 간단한 교육이랑 주의사항 숙지 하고 옷이랑 보드 대여해서 들어가야 돼요. 오늘 바람이 적당해서 이거 하기 괜찮을 것 같았거든.”

어제 밤에 술을 먹다가 기왕 캘리포니아까지 날아왔으니 황금빛 태양 아래 서핑을 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걸 어디 메모라도 해뒀나보다. 지민이 멍 때리고 있는 동안 윤기는 뭔가 서류를 받아 작성했고, 지민은 관계자에게 설명을 들은 뒤 래쉬가드와 보드를 빌려 다시 해변으로 나갔다. 착장이 바뀌니 바다가 좀 달라보였다. 태형은 오늘도 근무한다고 했으니까, 서핑했다는 말을 들으면 배 아파서 울겠는데. 지민은 태형을 놀려줄 생각에 킥킥거리며 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아갔다. 윤기는 옷을 갈아입지 않고 계속 다른 관계자와 얘길 하고 있는걸로 봐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듯했다. 하긴 어딜 봐도 운동을 좋아할 것처럼은 안 보이지. 그래도 손 움직이는 건 잘 하던데… 아 미쳤나봐. 지민은 혀를 콱 씹고 싶었다.

처음 한 두 번은 오랜만이라 감을 못 잡고 몇 번 넘어졌다가, 세 번째에 비로소 제대로 파도를 탔다. 초급자는 아니라서 적당히 깊은 곳부터 시작했더니 옆에서 같이 보드를 타던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어주었다. 푸른 해변에 물비늘이 끼얹어지며 눈 부시게 일렁였다. 바다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좋았다.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바다는 뭘 해도 낭만이 넘치는 곳이 맞다. 사람이 많든 적든, 바다에 빠지든 아니든 간에.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인드 문제일 뿐이다.

지민은 좀 더 큰 파도를 타기 위해 더 깊은 바다로 들어갔다. 몸을 엎드려 헤엄쳐 가는 동안 어디선가 큰 엔진음이 들렸다. 해양구조팀인가 하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게 수상스키임을 알았다. 거대한 엔진음을 뿜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도도 잊고 한참 쳐다보는데, 코 앞에 닿을 거리가 되어서야 그게 윤기임을 알았다. 움직이는 거 죽도록 싫어할 것 같은 사람이 선글라스를 낀 채 아주 우아하게 물 위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장갑 낀 손이 지민에게 인사를 건네자 지민은 저도 모르게 윤기 씨! 하고 불렀다. 구명조끼를 입었는데도 괜히 태가 달라 보였다. 정오의 태양이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바다 쪽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지민은 마지막으로 가장 큰 파도를 멋지게 타서 뭍으로 돌아왔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다 관계자와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멀리서 저를 바라보는 윤기의 시선이 정통으로 꽂혔다. 그가 왜 앞머리를 다 적신 채로 그렇게 애틋한 얼굴을 하는 지 지민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해변의 마지막 마무리는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놀이공원이었다. 그냥 못 탄다고 하면 됐을 걸 굳이 고집해서 롤러코스터를 한 번 타서 속을 뒤집고, 범퍼카를 밀면서 남의 차 뒤꽁무니를 뻥뻥 차대고, 실컷 꼬리잡기를 하고 나서야 상황이 종료됐다. 그 사이 해는 어둑어둑해졌고, 산타모니카의 아름다운 바다 뒤로 일몰이 지는 걸 보고 난 지민이 고개를 슬쩍 틀어 윤기를 쳐다봤다. 이제 뭘 할 거냐는 원초적인 물음이었다. 윤기는 츄러스를 사와 높은 망루 쪽으로 올라갔다. 날이 어두워지며 놀이공원에 불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캘리포니아의 정경은 사람을 좀 설레게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지금 제 옆에 앉아있는 이 남자 때문인지도 모르고.

둘은 망루 위 기다랗게 늘어진 줄에 섰다. 실컷 놀고나니 좀 기분이 이상했다. 모르는 남자에게 제 속을 털어놓고, 하룻밤을 보내고, 데이트 비슷한 뭔가를 같이 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사흘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태형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는 사실 틀린 말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윤기가 엄지로 츄러스에 붙어 있던 설탕 가루가 묻은 지민의 입가를 털어주었다. 지민은 표정으로 자꾸만 윤기에게 뭔가를 물었지만 윤기는 묵묵부답이었다. 줄이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놀이공원의 꽃, 대관람차였다. 지민은 높은 곳에 대한 조금의 공포심이 있어서 걱정을 꽤나 했지만 로맨틱하면 대관람차만한 곳도 없다고 생각해서 제법 순순히 기구에 올랐다. 뭣보다 위에서 아래 야경을 내려다보고 싶기도 했고. 어제 말리부의 밤바다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긴 좀 더 본격적으로 큰 폭죽을 하늘로 쏘아올려 날리는 듯했다. 다칠까봐 전문 스태프 말고는 사람들이 주변에 바리게이트가 쳐진 듯 둥글게 모여 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관람차에서 내려다보는 아래풍경은 뭐랄까 좀 더 특별했다. 어제 봤던 비슷한 해변에 어제 봤던 비슷한 불꽃놀이인데도. 내려가서 또 춤을 추고 싶어지는 거였다.

둘을 태운 관람차는 서서히 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게 돌아가는 대관람차는 사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흔들리거나 무섭지는 않아서 한 시름 놓은 지민이 떡 퍼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고 축 처졌다. 그런 지민을 보며 윤기가 웃자, 지민은 뭐가 그렇게 웃기냐며 발로 윤기의 운동화코를 쿡 찔렀다. 윤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를 잠시 흘겨본 지민이 잠시 바깥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로맨스 가르쳐 준다더니 결국 그냥 놀기만 하고.”
“주입식은 별로잖아요. 난 그런 교육이 싫어서 한국 땅 빨리 뜬 건데.”
“그렇긴 해요. 그리고 서핑이 재밌었으니까 넘어가 줄게요.”

당신 수상스키 타는 것도 꽤 멋있어 보이기도 했고. 뒷말은 일부러 삼켰다. 덜 무서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높이 올라가서 지민은 슬쩍 다리를 모았다. 절로 공손해진 자세에 윤기가 웃으며 물었다. 무서워요? 지민은 나름 쫀심이 있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 엊그제까지 죽네 마네 했는데, 술 진탕 마시고 모르는 사람이랑 유사 데이트 같은 거 하면서 놀고 있잖아요. 부모님 연락은 하나도 확인 안 했는데.

“이 관람차에서 내리면 꿈에서 깰 것 같아서 좀 무서워요.”

이상하게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약한 부분을 자꾸 드러내게 됐다. 지금껏 스스로 강인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는데 엊그제 그 사건을 겪고 알았다. 지민은 생각보다 더 약하고 더 금방 무너질 사람이었다. B가 죽을만큼 미운 것도 있었지만 사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이유도 있었다. 나는 사랑받지 못 할 상인가. 풀이 죽은 것 같은 지민을 보던 윤기가 상체를 불쑥 숙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지민이 몸을 흠칫 떨었다. 윤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이제와서 말하는 건데 나 당신 공항에서부터 봤어요.”

공항? 어느 공항? 홍콩에서 날아왔다며? 물음표를 가득 띄운 지민에게 윤기가 큭큭대며 말했다. 어제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요. 그때 수화물 센터에서 캐리어 찾아서 나오는데 누구랑 어깨가 심하게 부딪혔거든. 한국인인 거 같아서 자세히 보니까 되게 내 취향인 거예요. 너무 금방 사라진데다가 나와보니 웬 피부 어두운 남자랑 부둥켜 안고 있길래 아, 글렀다 싶었지. 그리피스 공원 들렀다가 말리부 해변까지 달렸는데 이게 웬일인지, 프레드네 가게 앞에서 누가 춤을 추고 있는 거야. 그 사람도 되게 내 취향이었는데, 또 자세히 보니까 당신이었어요. 그리고 그 껴안고 있던 남자애랑은 친구라고 하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있겠나 싶었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계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헐… 지민의 입술이 퐁 벌어졌다. 윤기는 능청맞게 말을 이었다. 난 운명론자는 절대 아닌데, 이번만큼은 그거 좀 믿어보기로 했어요. 로맨스 가르쳐주겠다고 잘난 듯이 얘기했지만 나도 티끌만큼도 몰라요. 도시나 여행지에 대한 에로틱이나 로맨스는 잘 알지만 사람은 너무 어렵더라고.

“그래서, 로맨스가 필요하다고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줄 수 있을 거 같고. 윤기가 말을 멈추자마자 덜컹, 대관람차가 꼭대기에 다다랐다. 가장 높은 곳에서 본 아래 풍경은 생각보다 아찔했다. 지민이 눈살을 찌푸리자 윤기가 지민의 뺨을 부드럽게 붙잡아 시야를 차단했다. 지민의 눈 안에 윤기만 가득 들어찼다. 지민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 당신 나한테 거짓말 했다는 얘기네요. 지민의 말에 윤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작업을 걸었다는 더 좋은 표현이 있을 거 같은데요.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쪽이 마음에 든다는 말이에요. 이리저리 차이고 낭만 찾는 그쪽을 연민해서 도와주고 싶은 게 아니라, 비싼 술 사고 오롯이 내 돈 들여서 호강하게 해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었다고.

윤기의 말에 지민이 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수많은 조명들이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관람차가 땅에 닿을 시간은 채 40초도 남지 않았다. 지민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로맨스를 배우겠다는 건 허황된 일이었다. 최고의 로맨스를 가질 수 없다면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민은 윤기처럼 상체를 최대한 상대 쪽으로 붙인 뒤 고개를 숙였다. 숨이 닿을 거리가 한 뼘만큼만 남자 지민이 작게 속삭였다. 키스해요 빨리. 윤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진심이에요? 그냥 이것만 하고 보낼 거 아니죠? 지민이 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는 대관람차 로맨스는 이거 뿐이니까 얼른요. 그리고 다시 암전. 네온 조명과 시끌벅적한 놀이공원의 음악 소리 사이에서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음이 작은 관람차 칸 안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질척거리며 서로를 감는 혓바닥이 집요했다. 바닷물만큼이나 축축한 살덩이들이 좋아라 얽히고 쓰러졌다. 지민은 잠시 숨 쉬는 방법을 잊을 뻔했다. 불현듯 어젯밤이 떠올랐다. 어젯밤과 오늘 이전의 삶은 다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관람차가 지상에 닿자 윤기와 지민은 놀이기구를 더 타지 않고, 대신 거뭇해진 해변을 조금 거닐었다. 맨발에 닿는 모래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지민이 바닷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자 질 수 없다는 듯 윤기가 발길질을 했다. 차 타고 가야 하는데, 다 망했네. 흠뻑 젖은 몸을 감싸고 키들키들 웃었다. 윤기가 뒤에서 지민을 껴안아왔다. 착 들러붙은 옷의 감촉과 축축한 머리칼이 뺨에 비벼지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걸 사람들이 낭만이라고 부르던가. 그렇다면 우린 감히 ‘로맨스’를 취하고 있나. 그건 생각보다도 더 쉽고, 낯설고, 아름다웠다.

윤기가 고개를 숙여 지민의 입술에 거꾸로 입을 맞췄다. 따뜻한 숨이 오가며 뜨겁게 얽혔다. 떨어진 후 윤기가 짠맛이 난다며 작게 웃었다. 지민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을 안 했으면 좀 더 로맨틱 했을 텐데. 우리는 역시 글렀다. 그래도 적어도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서로를 넣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니까 이만하면 큰 성취였다.

발목을 바다에 넣고 천천히 걸었다. 짠기가 도는 입술을 한참 물고 빨고, 허리를 껴안았다.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우리의 미래도 모른다. 다만 껴안아 보듬을 수는 있다. 손깍지를 끼고 손톱을 문지를 수 있다. 속박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의 자유이고 낭만이라면, 그래 우리에게는, 로맨스가 필요해. 아주 많이.
달의 눈가가 누렇게 짓물렸다. 캘리포니아의 밤하늘이 머리 위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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