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의 장소
BUCKINGHAM PALACE | 영국 버킹엄 궁전
Order
w. 상자 (@sang_ja_)
*소설 속 인물 및 사건은 모두 가상으로 설정된 것으로 실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1845년, 봄
“으응….”
커튼사이로 환하게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 쪽을 손으로 가리며 눈살을 찌푸린 소년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튼도 더럽게 얇아서는.”
잠결에 중얼거리며 이불을 걷어내고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눈가를 비비적거린다. 소년의 몸에 걸쳐진 옷이 어깨선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고, 그 사이로 비치는 몸은 18세 남자아이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마르고 하얬다.
옷이 몸에 비해 큰건지 자꾸만 흘러내리는 잠옷을 여미던 소년이 문가에 들려오는 두어번의 노크소리에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러고는 열린 문 안으로 5명의 근위병이 다 들어오기도 전에, 지민이 입을 열었다.
“오지말라고 했을텐데?”
가장 앞에 선 근위병에게 하는 말인듯 소년이 고개를 살짝 돌린 채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왕의 명령이십니다.”
“그 놈의 명령.”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런 소년에도 표정변화 하나없이 맨 앞의 근위병이 고개를 살짝 까딱하면, 그 명령에 따른 근위병들이 또각또각- 구두소리와 함께 걸어나와 옷과 세숫물을 든 채 지민의 앞에 섰다. 그를 본 소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시선을 다시 문가에 선 그에게 옮겼다.
“치워.”
“지민군.”
“부르지마. 다 나가.”
잔뜩 날선 소년의 눈빛에도 말없이 마주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살짝 돌린 채 물러나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각 맞춰서 뒤돌아서는 네 명의 근위병들 뒤로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방에 남겨진 둘 사이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박지민.”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먼저 정적을 깬 것은 문 앞에 선 근위병쪽이었다. 문을 등진 채 서서 기지개를 쭉 피던 소년의 몸이 그의 부름에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직도 적응 못한겁니까?”
“....뭐가요.”
어떻게보면 이사, 어떻게보면 한국으로부터 영국 왕족에게 팔려온 몸인 지민은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었다. 어쩌면 그 때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을 정도로.
“이곳으로 오기 전, 그 날들이 그리우신 겁니까?”
피식-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에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꼭 쥐며 지민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영국으로 온지 59일째, 두 달 조금 되지 않는 시간동안 지민이 그나마 의지할 데라고는 이 궁전 속에서 유일하게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제 뒤에 서있는 근위병, 윤기밖에 없었다.
“민윤기.”
지민이 윤기의 이름을 부르자 대답없이 그저 웃음만 피식- 터뜨린 윤기 역시 고개를 가볍게 꾸벅- 숙이고는 뒤를 돌아 방을 나섰다. 완전히 혼자가 된 방 안에서, 지민은 늘 그랬듯이 침대 옆에 힘없이 스르륵 주저앉아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궁전 속 수많은 방들 중 하나인 그곳에서.
*
“왕의 호출이십니다.”
어느 때와 같이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아침, 감옥인지 방인지 모를 그 넓은 장소 안에 윤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침대 한 구석에 기대어 창틀만 멍하니 바라보던 지민이 들려오는 윤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스윽- 돌렸다. 늘 그랬듯이 아무 표정도 띄지 않은 윤기가 그런 지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그 눈빛으로.
한 동안 쓴적이 없는 듯 뻐근한 다리를 일으킨 지민이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순순히 윤기의 뒤를 따랐다. 며칠 간 다듬지 않은 머리가 잔뜩 길어 눈을 덮을 길이가 되었고 그에 반비례하게도 눈에 담긴 영혼은 점점 빠져나가는 듯 공허해졌다. 그런 투명한 지민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윤기가 뒤를 돌아 방을 빠져나갔다. 적막이 감도는 복도의 대리석 궁전 바닥에 또각거리는 윤기의 구두소리와 그를 뒤따르는 지민의 발소리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윤기가 두드리는 일정한 노크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많은 시중들과 근위병들, 귀족과 왕족들의 눈이 일제히 열린 문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이 궁전속에서 본 사람이라곤 매일 아침 제 방을 찾아오는 윤기를 포함한 근위병 다섯이 전부였기에 지민에게는 이 넓은 방에 모여있는 많은 인원과 시선이 낯설기만 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지민이 저도 모르게 윤기의 뒤에 숨으며 윤기의 옷소매를 꼭 움켜쥔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따가운 관심에 지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King Edward.”
한 남자의 목소리가 궁전 안을 메우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흡- 숨을 들이마셨던 지민이 안심한 듯 참았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문을 열고 또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아는 영어라고는 간간히 방 밖에서 들려오는 인사말밖에 없는 지민이기에 남자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풍기는 아우라, 쓰고있는 왕관 등으로 대충 왕이라고 추측했을 뿐.
멍때리며 가만히 서있던 지민의 손에 하나의 손길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며 시선을 내리면 윤기의 옷을 쥐고있던 지민의 손을 잡아 떨어뜨리는 윤기의 손이 보였다. 얼마나 꼭 쥐고 있었던건지 땀으로 축축해진 손과 주름진 윤기의 옷소매 역시도 지민의 눈에 들어왔다.
지민이 상황파악하느라 어버버거리는 사이 윤기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소매부근을 탁탁 털어 주름을 피고는 다시 기계처럼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반대로 사과할 타이밍마저 놓쳐버린 지민은 왠지 모를 기분으로 얼굴이 붉어진 채 괜한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King Edward.”
근위병 중 하나가 방금 전 남자가 말을 되풀이하며 무릎을 꿇자 그 뒤를 이은 다른 근위병들이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물론 지민의 앞에 선 윤기 역시도.
문앞에 서있던 왕이 고개를 한 번 까딱하면 무슨 신호라도 받은건지 근위병들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제 앞에 위치한 윤기가 무슨 로봇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느라 지민은 제 뒤로 다가온 발소리마저도 듣지못했다.
“Jimin.”
낯선 영어발음이긴해도 제 뒤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지민이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웃으며 제 뒤에 서있는 왕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지민이 당황한 채 윤기쪽만 힐긋힐긋 바라보았다.
“Glad to meet you.”
[만나서 반가워요.]
제게 손을 내밀며 말하는 그의 말에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하는건지 잘 모르겠다는듯.
“반갑다는 인사입니다.”
윤기가 그런 지민을 알아챈건지 지민의 뒤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악수하는 문화 자체가 낯선 지민이기에 머뭇거리다 손을 살짝 맞잡으면 환하게 웃으며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든 왕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I’d like to talk to you in private.”
[따로 조용히 이야기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
“따로 보고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십니다.”
옆에서 윤기가 조용히 해석해주는 것을 느낀건지 왕이 고개를 들어 윤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윤기에게 영어로 무어라하더니 서로 몇마디 대화를 나눈다. 그 사이에 서있는 지민이 뻘쭘해질 정도로. 고개를 끄덕인 왕이 마지막으로 한 번 웃어보이고는 방향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 저 멀리 걸어가는 왕과의 거리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지민이 윤기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조금 이따가 방으로 오라십니다. 당신과 저, 둘이서.”
“왜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윤기의 딱딱한 말투에 기분이 상했는지 지민이 눈가를 찡그리며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느껴지는건 몇몇 귀족의 따가운 시선.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이해하지는 못해도 머리 하나와 눈치 하나는 빨랐던 지민이었기에 대충 분위기를 눈치챘다. 눈에 띄기 위해 아무리 아부하고 치장해도 왕과 대화 한 번 섞기 힘든 이 판에서, 갑자기 들어온 웬 동양인 애 하나가 저렇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따로 방에서 만날정도로 가까워진다면.
“질투 같은건가.”
지민의 중얼거림에 윤기의 눈길이 지민에게 닿았다. 옆에서 흘깃 바라봐도 머리쓰는듯 독기어린 눈길은 오늘 아침 지민의 방에서 봤던 지민의 그것과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무언가 살아숨쉬는 생기있는 느낌. 그것이 행복이든 생존으로 인한 욕망이든, 비어있는 것과 비교했을때는 당연하게도 이쪽이 더 나았다.
저 눈에 담긴 감정은 무엇인지, 저 머릿속에 담긴 생각이 무엇인지, 괜한 호기심이 생겼다.
*
“무슨 용건이십니까.”
“He’s asking why you asked.”
[부르신 이유를 물으십니다.]
“Let’s sit down. I think the story will get longer.”
[일단 앉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긴 이야기이니 일단 자리에 앉으라 하십니다.”
“용건만 말해달라고 전해주실래요?”
“제가 당신 전용 번역가인줄 압니까?”
윤기가 지민의 뒤에서 조용하게 으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역할하러 여기 같이 온것 아니에요? 지민의 물음에 말없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결국은 영어로 왕에게 뭐라 전달한다. 놀란 듯 눈이 동그래지는가 싶더니 가늘어진 눈으로 지민을 찬찬히 살폈다. 뭐라 전달한지는 몰라도, 지민이 한 말을 그대로 전달한 것은 아니지 싶다.
“To put it simply, I’m going to adopt you.”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자면, 널 양자로 들일 생각이다.]
“뭐?”
당연하게도 번역해줄거라 생각하고 기다리던 지민이 예상했던 윤기의 그 목소리가 아닌 다른 말에 당황하며 뒤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감정을 숨긴 그가 아닌, 놀란 그의 모습. 눈이 동그래진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채 있는 그가 낯설었다. 제 앞에 위치에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앉은 그가 도대체 뭐라 말한건지, 도대체 뭐라 말했길래 윤기가 저렇게 놀란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뭐라했는데요?”
“Could you say it again?”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I said, I’ll adopt Jimin.”
[지민을, 양자로 들인다고 말했다.]
“뭐라는 거냐고요?!”
답답해진 지민이 언성을 높이자 규칙에 어긋나는것도 잊은 채 왕을 똑바로 바라보던 윤기가 그런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을,”
양자로 들인답니다.
이어지는 윤기의 말에 지민 역시 눈이 동그래졌다. 긴장한 티를 숨기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표정에 당황이라는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알아챈 사람은 없겠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고 꼭 쥔 주먹은 손톱에 살갗이 눌려 자국이 남아갔다.
그런 지민과 대조적으로 그 앞의 의자에 앉은 왕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윤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Can you ask him if he has any intention of sitting in the chair now?”
[이제는 의자에 앉을 생각이 좀 생겼냐고 물어봐주겠나?]
*
무슨 정신으로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윤기와 함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후들거리는 다리가 탁- 풀리고 문 앞에 주저앉았다. 지금까지 방에 갇힌 채 지내던 몇달동안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하고 예측해왔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물론 죽을 뻔한 상황에서 구해져 여기로 왔기 때문에 죽음으로 허무없이 끝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거라 생각하긴 했다. 차라리 죽음보다 더 잔인한 고통이라면 모를까.
고통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지민의 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지민이 생각했던 것과는 틀어져도 너무나 틀어진, 예측하기에 너무나도 광범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양자. 양아들. 왕의 아들. 모두 지금까지 살아온 지민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한국이라는 땅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죽을 고생하며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지민에게, 그마저도 빚으로 목숨까지 위험해진 상황에서 납치 당할 뻔한 위험을 매일매일 안고살던 지민에게는 너무나도 모순적인 단어들이었다.
어찌보면 잘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의미없이, 의욕없이, 왜 살아야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던 지민이,
‘살아남아야 한다’ 라는 결심이라도 갖게 만들었으니.
“박지...아니, 왕자님.”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하는데?”
왕의 명령. 지민이 혐오할 그 단어를 애써 삼키며 윤기가 말을 이었다. 비록 지민을 방에 데려다준다- 라는 윤기가 맡은 임무는 끝났지만, 괜히 말을 이어갔다.
“괜찮으십니까?”
“그쪽은 믿기세요? 지금 이 상황이?”
“아니요. 전혀.”
“멀쩡해보이시는데.”
“감정 숨기는데 뛰어난 편이라. 그건 왕자ㄴ...지민군도 비슷해보이는데.”
어차피 둘만 있는 방에서 당사자가 그리도 싫어하는 호칭, 격식 갖춰서 뭐하나 싶어 급히 말을 바꿨다. 굳이 이미 혼란스러워 미치기 직전인 지민에게 더한 스트레스를 안겨주기는 싫었다.
“공식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언제라고 했죠?”
“3일 남았습니다. 그 때를 위한 연설도 준비하라 하셨고요.”
“허-”
어이없는건지 해탈한건지, 지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런 지민을 윤기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윤기씨.”
“네.”
뒷말은 속으로 삼킨 채 윤기가 지민에 말에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쭈그려앉아있는 지민의 옆 벽에 기대어섰다.
“제가 지금 상황 파악이 덜 되서 그러는데, 만약 제가 양자가, 그러니까 왕자가 된다면 말이죠.”
“네.”
“왕위에 오르는 건가요?”
“.....”
꽤나 어려운 질문이었다. 정답은 정해져있지만 풀이가 어려운 그런 질문.
현재 왕위에 오를 예정인 왕자는 태어날 때부터 연약해 모든 병이란 병은 달고살았다. 지금 살아있는게 기적이라 할만큼 크게 아픈 적도 여럿 있었다. 아마 지금도 자신의 방 침대에서 여러 사람의 간호를 받으며 누워있을것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눈앞에 선했다. 실제로 만난적은 손에 꼽을정도로 적었지만.
왕자뿐만 아니라 현재 왕 역시도 불안정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한지라 여전히 굳건하게 왕위를 지키고 있긴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왕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귀족들이 넘쳐흘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살해당해도 아무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자로 지민을 들인다는 것은, 누가봐도 지민을 왕위에 세우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윤기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지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저 생각해주는건 윤기씨밖에 없네요. 당연한 질문인데도 대답 안 하는거보면.”
“....이제 어떡하실겁니까?”
“글쎄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화끈하게 살아야죠.”
남의 손에서 놀아나는건 지쳤으니까.
*
모든 일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원래부터 계획은 세워놓은듯, 모든 시민들에게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공식 발표 역시 순조롭게 열렸다. 거짓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하는 연설 역시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물론, 모든 일 뒤에서는 윤기가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고 있었다. 연설문 쓰기부터 적당히 사람들에게 리액션하는 법,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예절과 인사말까지. 매일 아침, 지민이 일어나 눈 뜬 순간부터 눈 감는 그 순간까지, 항상 그 옆에는 윤기가 있었다.
“그래서 Lovely가 뭐냐고요.”
“단어 그대로 직역하면 사랑스럽다, 뭐 그런뜻이긴 한데 영국에서는 ‘좋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왜 그렇게 쓴대요?”
“...제가 정했습니까?”
“....”
영영 쓸 일 없을 줄 알았던 침대 옆 책상에 나란히 앉아있는 둘의 모습은 꽤나 친해진 듯 보였다. 지민은 오른손엔 깃펜을 든 채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윤기는 손에 쥔 깃펜을 놀리며 종이에 영어 단어들을 쓰고 있었다. 한글마저도 겨우 배운 지민에게 제 2의 외국어를 배우기란, 정말이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하기 싫다.]
지민이 종이에 끄적거렸다. 그것을 읽은건지 못 읽은건지 영어를 써내리던 윤기의 깃펜이 뚝- 끊기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없다. 뭐야? 지민이 고개를 들어 윤기의 얼굴을 바라보면 지민이 적은 글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설마…
“한글 못 읽어요?”
“......”
“진짜로?”
“...집중이나 하시죠.”
“와- 대박.”
윤기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른것이 달빛에 반사되어 지민의 눈에 들어왔다. 입밖으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지민이 그런 윤기를 놀리듯이 종이에 뭐라 더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못 읽죠?]
[앞으로 여기다가 윤기씨 욕해야겠다.]
“....언제까지 놀릴겁니까?”
[안 알려줄거에요. 메롱이다.]
“하...진짜…..”
윤기가 깃펜을 내려놓고는 계속 해보라는듯 턱을 괸채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면 뭐 자동으로 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차피 못 읽을거면서 왜 봐요?]
[바보]
“바보.”
“아 깜짝이야. 그건 어떻게 읽었어요?”
“여기 적은거 다 욕입니까?”
“아니거든요. 사람을 뭘로 보고.”
“뭐로 보이길래.”
“...그거 무슨뜻이에요.”
좋은 뜻은 아니죠. 윤기의 대답에 지민이 윤기의 팔뚝을 퍽퍽 내리쳤다. 물론 윤기에겐 아프긴커녕 귀엽기만 했지만. 오늘 배운거 한 번 적어봐요. 잘 적으면 수업 끝내주고. 윤기의 말에 지민이 씩씩거리면서도 깃펜을 다시 집어들었다. 어색하지만 그나마 익숙해진 알파벳을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내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Hallo. Hi. You alright? Cheers. Lovely...
“Hello는 이제 외울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매일 틀려요?”
“발음만 외우면 되죠.”
“이왕 배우는거 한 번에 잘 알아놓으면 얼마나 편해요?”
“알파벳 외운것만 해도 되게 대단한거거든요?”
어이구, 어련하시겠어. 윤기의 대답에 지민이 또다시 들어올린 손을 윤기가 한 손으로 가뿐히 턱- 잡았다. 쳇. 투덜거리는 지민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윤기가 종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Lovely가 뭐라 했죠?”
“사랑해요?”
“.... 수업 안들었어요?”
“아- 피곤하다아..”
“답이 없네. 펜 다시 들어요.”
“나머지는 내일 하자구요..지금 벌써 몇시야, 새벽 2시나 됐구만.”
기지개를 쭉 피며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그의 옷깃을 끌어 원래대로 앉혀놓고는 그 앞에 새 종이 한 장을 밀어주었다. 그런 윤기에 진짜 질린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는 지민의 얼굴을 본 윤기가 지민의 볼을 쭉 잡아늘렸다. 아아! 지민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윤기는 그런 지민에 큭-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웃었죠.”
“안 웃었습니다.”
귀가 좋은 지민은 그걸 또 들었지만.
“아닌데. 분명 웃었는데.”
“주제 흐리지 말고 펜이나 들죠.”
“진짜 깐깐하네.”
“한 나라의 왕자가 이렇게 무책임해서 되겠습니까?”
“윤기씨가 왕자하세요. 전 못해먹겠으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시죠.”
잠온다고요오…. 지민이 책상에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피곤한건지 눈꺼풀은 반쯤 감긴 채. 반면에 윤기는 무슨 뱀파이어라도 되는건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종이 뭉치만 뒤적거렸다. 괴물이 따로없네.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지민이 속으로 생각했다.
“Lovely. 이것만 기억해요. 많이 쓰이는거니까.”
“사랑해요.”
“사랑해요는 I love you고.”
“그럼 저건 뭔데요?”
“좋아요.”
“...뭐가 다른데요?”
윤기가 한심하다는 듯 지민은 내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지민이 대꾸하자 윤기가 턱을 괸채 또다시 입을 열었다. 대답에 쓰이는 말이라고요. Yes 대신에 쓰이는. 윤기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하는 지민에게 윤기가 물었다.
“지금 수업 마칠까요? 라고 제가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래요?”
“Lovely.”
신나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 뛰어드는 지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기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못말리겠다. 중얼거리며.
지민이 왕자로 받아들여진 후, 그들의 일상이 된 평범한 하루였다.
*
“You alright?”
“Sure.”
며칠간 밤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는걸까, 꽤나 익숙해진 지민의 영어 발음과 어휘에 윤기가 뿌듯한 듯 씨익 웃었다. 어찌보면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윤기의 직책는 왕자의 직속 근위병으로 지정되었고 그 때문에 지민이 가는 어디든지, 윤기는 항상 그 뒤를 따랐다.
“Why did that Asian kid become a prince?”
[왜 저 동양인 아이가 왕자가 된거래?]
“What kind of friendship does he have with the king?”
[왕이랑 무슨 친분인거야?]
“There's also a rumor that he'll soon be crowned king.”
[곧 왕에 오를 거라는 소문도 있던데.]
“Does that make sense?”
[말이 돼?]
물론 뒤에서 들려오는 소문들 모두는 윤기의 귀에 들어갔다. 아마 지민이 영어를 몰라 자신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못 알아들을거라고 생각해서겠지. 어떨 때는 꽤나 높은 수위의 단어를 언급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이를 부득- 갈면서 그 자들의 얼굴을 한 번 스캔하며 지나가고는, 가끔 지민에게 찾아와 부탁하는 그들을 쳐내는 것도 언젠가부터 윤기의 임무가 되었다. 지민은 아마 윤기가 그러고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가끔 한 번씩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이게 무슨뜻이냐며 윤기에게 물어온 적도 있었다. 제대로 알려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앞에서 말했다시피, 지민은 눈치가 더럽게도 빨랐다.
“요즘 사람들 반응 어때요?”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던 물음이지만, 윤기는 이 물음에 꽤나 뼈가 실려있음을 느꼈다. 처음엔 쓰다며 거절하던 커피를 어느새 익숙하게 손에 쥔 채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며 지민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윤기를 빤히 바라보았고, 마주 바라보던 윤기는 어느 귀족들에게나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흐응...무언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침대에 걸터앉은 지민이 다리를 살짝 꼰 채 윤기를 바라보았다.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바뀌어서일까, 그 전의 비어있던 지민의 모습과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거짓말.”
“......”
“윤기씨 거짓말할 때 되게 티나는거 알아요?”
“아닙니다.”
“맞아요. 거짓말할 때만 격식 꼭 갖추고.”
지민이 커피를 한 모금 홀짝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설탕을 조금밖에 안 탄 건지 인상을 찌푸리는 건 잊지 않은 채.
“설탕, 필요하십니까.”
“됐어요. 먹을만해요.”
지민씨도 거짓말 엄청 티나네요. 굳이 필요한 말은 아니었기에 윤기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저를 싫어하는게 당연하겠죠. 이곳 사람들에게 저는 ‘뜬금없이 난입한 불청객’ 정도일테니.”
“...왕자님을 좋아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그렇겠죠. 살인의 위협에서 벗어난 왕이라든지, 그 연약한 왕자라던지.”
정곡을 찌르는 지민의 말에 윤기가 또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옆 협탁에 머그잔을 내려놓은 뒤 지민이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 상태로 한 동안 손장난을 치며 정적을 유지하더니, 곧 윤기에게 물었다.
“만일 누군가가 절 죽이려고 한다면, 어떡할겁니까?”
“찾아내야죠. 그 자를.”
“찾아서 어떡할건데요?”
“.....죽이지 않을까요.”
“죽이면 뭐가 좋죠?”
“왕자님께서 살아남으시겠죠.”
“그러면 뭐가 좋은거죠?”
눈살은 살짝 찌푸린 윤기가 기분이 언짢음을 드러내며 한 대답은 ‘심술부리지 말라’였다. 지민은 줄곧 기분이 좋지 않은 날 괜히 윤기에게 틱틱대곤 하였으니. 그럴때마다 윤기는 지민을 살살 달래기 바빴다.
“제가 살면 도대체 뭐가 좋은건데요?”
“죽어서 좋을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살아서 좋을 것도 없잖아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시죠. 왕자님이 없으면 현재 이 나라는 굉장히 위태로울 겁니다.”
“....거짓말.”
하….윤기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고정한 채. 오늘 그 부인과의 대화에서 단단히 심기가 꼬일만한 일이 있었나보다. 윤기가 대충 상상했다.
아무리 왕자의 직속 근위병으로 승격하였다해도 귀족의 사이에 낄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사회였기에, 지민과 이루어지는 몇몇 대화 등에서 윤기는 항상 그 방의 문 앞을 지켰다. 전에는 통역을 위해 함께 들어간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해진 지민에게 통역은 필요하지 않았고 그렇게 들어갈 때마다 귀족들의 따가운 시선도 지겨웠기에 윤기가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독, 지민은 자신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그 말들의 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러 윤기가 그런 말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 또다른 하인이나 시녀들에게도 몇 번 물어봤었지만, 윤기와 달리 그들은 왕자와 눈 한 번 마주치는 것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기에 그 말의 뜻을 알려줄만큼 용감한 자는 없었다. 물론 윤기가 미리 일러준 것도 있겠지만.
그렇게 알려주는 이가 없다는 것을 통해 그리 기분 좋은 뜻은 아닐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작 알지는 못하니 꽤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오늘도 산책길에서 들은 그 말의 뜻이 너무나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그 말의 뜻을 안다면 그에 맞게 대처를 하건 되받아치던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이 지금 지민이 윤기에게 틱틱거리고 있는 이유였다.
“왕자님.”
“왕자라 부르지마요.”
“지민군.”
“그렇게도 부르지마요.”
“....박지민.”
“왜 반말합니까?”
이런 대화의 연속이니 윤기도 참, 인내심 하나는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기분 나쁠만도 한데 여전히 표정은 가면처럼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주먹만 꾹 쥐었다.
“왜 부르는데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오늘따라 더 가시가 세워져있는 듯 한데.”
“없었는데요.”
“말씀하시죠.”
“싫어요.”
지금 방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윤기가 고개를 들어 지민을 마주보았다. 참 많은 욕, 아니 말이 담겨있는 듯한 눈빛으로.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짧게 말하고 뒤돌아 나가는 윤기 뒤로 살짝 당황한 지민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쾅- 닫히는 문소리만 방안을 울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하...”
윤기의 말대로 오늘따라 더 짜증을 부리긴 했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지 않을거라는 불안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로해주기를 바랐던 윤기의 눈치없음 때문인지.
*
지민이 침대에서 스르륵- 눈을 떴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을 깨서일까 찌뿌둥한 몸을 쭉 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달동안 지내면서 적응했다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방이 오늘따라 무언가 낯설었다.
방밖이 소란스러운 듯 했다.
사람들의 말소리, 급하게 뛰어다니는 소리,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왕족이 머무는 침소의 복도에서는 조금의 소음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이 소음들에 대해 시작되었던 호기심은 점점 불안감으로 바뀌어갔다.
옆 의자에 걸쳐져있는 겉옷을 챙겨든 지민이 나가려고 문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벌컥 연 것은 역시나도 윤기였고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숨을 헉헉- 내쉬고있었다.
불안했다. 윤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서서히 입을 열었다.
“왕께서,”
서거하셨습니다. 이어지는 윤기의 말에 지민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손에 힘이 풀리면서 방금 챙겨든 겉옷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언젠간 일어날 일이라고, 예측은 했었다. 그저 그것이 오늘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뿐이었다. 지민이 왕자라는 칭호를 갖게 된 지가 영국의 땅을 밟게 된 지의 딱 반이 되는 오늘. 지민과 윤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오랫동안 조용히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이 왕궁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 심지어 King Edward 자신조차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있었을테지만, 막상 일어나고 나니 모두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팔부터 시작한 후들거림이 서서히 다리로 전해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려는 것을 윤기가 안듯이 붙잡았다.
“괜찮습니까?”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는 윤기의 얼굴만을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자신은 어젯밤 성질만 냈었는데, 그는 그에 대해 아무런 원망조차도 없는 듯 했다.
아니면 관심이 없다던가.
“사유는 뭔가요?”
“...살인, 으로 추정됩니다.”
역시나. 예상한대로였다.
“오후에 장례식이 치러질 예정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지민이 조금 진정한 듯 보이자 윤기가 조심스레 지민에게 감은 팔을 풀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지민을 확인한 윤기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 나갔고, 비틀거리던 지민은 결국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 왕궁 안에는 이 왕을 죽인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는 아마 장례식에 등장하여 슬픈 척 눈물을 훔치겠지. 그 사실만으로도 치가 떨릴만큼 두려웠다.
차분해지자며 마음을 다잡은 지민이 머리속으로 하나하나 차근히 생각해보기로 했다.
첫째, 자신을 양자로 받아들였었던 왕, King Edward가 죽었다.
둘째, 곧 그의 친아들인 그가 왕위에 오를것이다. 연약하고 어리긴해도 몇 달, 아니 며칠간은 버틸 수 있을거라고, 지민이 생각했다.
셋째, 만일 그까지 병으로 약화된다면, 드디어 그 날이 된 것이다.
지민이 왕위에 오르는, 그 날.
불안하기만 했던 지민의 마음속에 기대감이 슬금슬금 차오르기 시작했다.
*
버킹엄 궁전의 꼭대기에 조기가 걸렸다. 검은 옷을 갖춰입은 사람들이 궁전 앞에 잔뜩 모였고 저마다 흰 꽃을 한 송이씩 들고있었다. 큰 Edward의 그림과 관을 든 채 이동하는 근위병의 행렬 역시도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정원을 가득 메웠고 그 소리에 저 역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주먹을 꾹 쥐며 참은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곧 왕으로 즉위할 그 왕자가 서있었다. 휠체어에 탄 그의 얼굴은 마치 태양빛이 통과할 것만 같이 투명하도록 하얬고 얼굴은 갸름하다 못해 뼈의 굴곡이 일일히 다 보일 지경이었으며 그의 아내로 보이는 듯한 여자가 그런 그의 뒤에 위치해있었다.
실제로 만나보는 것은 처음이기에 지민이 신기한 듯 그 쪽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윤기가 눈치를 주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자가 왕자인가요?”
“네. 그리고 곧 왕이 되시겠지요.”
흠....지민이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약하다해도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쩌면 며칠도 버티기 힘들 듯 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지민이 장례식 절차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물론 워낙 집중에 소질이 없는 지민이기에 몇 번 더 힐끔거리긴 했지만.
“왕자님.”
그럴 때마다 뒤에서 조용히 자신을 불러오는 윤기에 퍼뜩- 놀라며 정면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장례식은 오후로 넘어가는 12시에서 시작해 해가 져서 어둑해질 때쯤에서야 끝이 났다. 늦은 시간이 되어 지민과 함께 방으로 돌아간 윤기는 지민의 잠자리를 준비한 뒤 바로 불을 끄고 나갔다.
지민을 보호하는 것이 제 임무였기에 오늘 해야하는 그 행렬은 자연스럽게 제외되었지만 지민과 마찬가지로 몇 시간동안 가만히 서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뻐근한 온몸을 툭툭- 마사지하며 숙소로 돌아간 윤기가 답답한 군복을 벗고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
똑똑- 노크소리에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윤기가 눈을 떴다. 침대 위에 제대로 눕지도 않은 채 자고있는 자신의 모습에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또다시 노크소리가 울렸다.
“뭐야...”
윤기는 높은 직급이다. 그런 윤기의 문을 이 한밤중에 두들릴 정도라면, 지민과 관련된 일밖에 없었다.
“K.”
“I’m out now.”
[지금 나가.]
복장을 제대로 갖출 틈도 없이 신발을 대충 구겨신은 윤기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방문을 열었다.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일까 굉장히 불안했다.
문앞에 있던 근위병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는 지민의 방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 있는건 아니겠지. 문앞에 다다른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노크도 잊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왕자님.”
문을 열면 이태껏 잠을 이루지 못한건지 눈가는 다크서클로 덮인 채 손톱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 지민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어서인지,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는 채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문가를 바라본 지민이 그 자가 윤기인 것을 확인하자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윤기의 허리에 팔을 감고 윤기의 가슴팍에 폭- 안겼다. 예상치못한 지민의 행동에 당황한 윤기가 얼어붙은채 서있자 껴안아 달라는 건지 더 꼭 끌어안는 지민에 윤기가 여전히 열려있는 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제 문을 두드렸던 그 근위병이 여전히 자신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서있었다. 윤기가 고개를 까딱해보이자 멍때리던 근위병이 급히 표정을 숨긴 채 천천히 문을 닫았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채.
내일 한 번 손 봐야겠군. 윤기가 귀찮은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다시 지민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늘 제 앞에서 약한 모습 한 번 보인 적 없었던 지민이 지금 제 품에 안겨 울고있었다. 그런 작은 지민의 몸을 제 팔로 살짝 힘을 주어 껴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우는 이유를 알았기에, 아무런 말없이 그냥 그를 꼭 껴안은 채 가만히 서서 등만 토닥이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작은 흐느낌으로 시작한 울음은 점차 커지더니 곧이어 지민이 숨이 넘어갈 듯 울기 시작했다. 이러다 쓰러질까 싶어 지민을 안아 올려 침대에 앉힌 뒤 그의 앞에 꿇어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
“혼자라서 무서우셨습니까?”
“....”
윤기의 두 번째 물음에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온 듯 급히 얼굴을 가리며 눈가를 문질러닦는 지민에 윤기가 살풋- 웃으며 지민의 양볼을 잡고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의 손길에 화악 달아오른 지민의 볼을 못본체하며 윤기가 지민의 눈가를 엄지로 꾹꾹 눌러 닦아주었다. 윤기의 손짓 하나하나에 따라붙는 지민의 시선이 간질거렸다.
“옆에 있겠습니다. 편하게 주무십시오.”
몸을 일으킨 윤기가 지민을 침대에 조심스레 눕히고 이불을 목끝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슬쩍 바라본 창밖은 새하얀 달빛만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새벽이었고 내일 특별한 일정은 없었기에 여유로울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런 날이라서일까,
“민윤기.”
지민이 뒤돌려는 윤기의 손을 붙잡자,
“...네 왕자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갔다.
“가지마요.”
지민의 볼을 타고 마지막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고,
“내 옆에 누워요.”
쿵쿵- 거리는 둘의 심장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명령이에요.”
하늘 높이 떠있는 보름달에서 나오는 빛이 눈부셨고 그에 비친 지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윤기가 침을 꿀꺽- 삼키며 너무나도 뻔한 대답을 꺼냈다.
“...네, 왕자님.”
*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 동안 바뀐거라고는 윤기가 전보다 자유롭게 지민의 방에 들락거린다는 것, 관계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 윤기의 잠자리가 지민과 같은 곳으로 바뀌었다는 것, 그리고,
“King Jimin.”
왕이 바뀌었다는 것.
두 번째로 다가온 죽음은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왕위에 오른 이후 급격하게 심해진 병으로 인해 단 3일만에 죽었다. 물론 살해된 것이 숨겨진 것일지도 몰랐지만 공식적으로는 병세라 알려졌다. 장례식 이틀 뒤, 왕 즉위식 다음날 밤이었으니, 갑작스럽게 빽빽해진 스케줄 탓에 몸이 약해졌을만도 했다.
“꿈도 못 꿨어요. 이런 세상은.”
“이 나라가 지민군에게 달렸습니다.”
“윤기씨도 함께라고 하죠.”
“제가 뭘 했다고 그러십니까.”
일단 제 옆에 있어줬었죠? 유혹하듯 살짝 꼰 지민의 다리에 잠시 윤기의 시선이 머물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칫, 재미없어.”
“...곧 회의가 있으십니다.”
“알아요. 재미도 없는 사인하기 놀이.”
“업무는 철저하게 하는걸로 약속하셨습니다.”
“누가 안한댔어요?”
목을 양쪽으로 뚜둑- 꺾으며 지민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의 지민의 방도 과하게 크긴 했지만 지금 옮겨진 지민의 방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호화스러웠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긴 지민이 윤기의 앞에 섰다. 앞에 붙은 호칭이 바뀌어서일까, 지민의 행동도 도도하게 변했다. 그에 반해 윤기는 지민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은 채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침만 축이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나 봐요. 명령하기 전에.”
“그거 권력남용입니다.”
“이럴 때 남용하려고 쌓은 권력인데.”
“....”
“끝까지 안보네. 이제 명령이에요. 저 봐요.”
하… 윤기가 눈을 꾹 감은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근위병들이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거더라? 지민이 은근히 윤기에게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왕의 명령을.”
지민이 윤기의 턱을 들어올렸다. 윤기의 날카로운 눈빛이 지민에게 닿았다. 그 눈빛의 찌릿한 느낌에 지민이 눈을 찡긋거렸다.
“진작 좀 볼것이지.”
지민이 윤기의 얼굴에 제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미동도 하지않는 윤기의 입술에 입도장을 한 번 꾹 찍고는 입맛을 다시며 제 입술을 혀를 내어 슥- 핥았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지금 저한테 명령하는겁니까?”
“명령이 아닌 부탁입니다.”
“그럼 거절하죠.”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지민이 윤기의 입술을 깊숙히 빨아들였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윤기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자 그제서야 윤기가 지민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민의 허리를 끌어당겨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면 윤기의 얼굴에 위치하던 지민의 손이 서서히 내려오더니 윤기의 목을 끌어안았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방에서 근위병과 이런 행위를 하고있다는게 밖으로 알려지면 무슨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어쩌면 왕위에서 끌어내려질지도 몰랐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겠냐만.
“하아...잠시만….윽...”
지민의 윤기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아까 전 무관심했던 그 얼굴은 어디간건지 잔뜩 돌변한 채 지민을 내려다보는 윤기의 소유욕이 가득 찬 눈빛만이 존재했다. 벽에 밀어붙여진 지민이 윤기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헉헉 숨을 고르고 있었고 윤기는 그 짧은 시간도 못견디겠다는 듯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회의하러 가야해요.”
“지금 상태로는 안 보내줄겁니다. 아니, 못보냅니다.”
싱긋- 입가에 미소를 띄운 지민이 윤기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졌다. 기대했던 진한 키스가 아니자 윤기가 이게 뭐냐는 듯 눈살을 찡그렸다. 초조한 듯 손은 지민의 상의 허리부근을 만지작거리던 채였다.
“근무지로 돌아가세요. 명령입니다.”
“....진짜 사악하십니다.”
“몰랐어요?”
“그럴리가요.”
그 매력에 이 자리에 있는건데.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키며 윤기가 지민에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지민이 서있는 자리에서 정확히 다섯걸음 떨어진 문 앞, 그곳이 지민이 지정한 ‘근무지’였다. 어쩌면 그렇게 정한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윤기를 괴롭히기 위함일지도 몰랐다.
“옷 갈아입을거에요. 뒤돌아요.”
하나하나 단추를 풀자 드러난 지민의 쇄골에 새겨진 진한 키스마크가 시선을 끌었다.
*
하루하루가 위태로울 거라 생각했던 지민의 예상과 반대로 몇 년간 지민이 주도하는 정권은 유지되었다. 살해시도라고 보일만큼 의심스러운 사건도 일절 없었고 지민에게 반대하는 세력 역시도 드물었다. 시민들도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었으며 지민이 딱히 나서서 무얼 하지 않아도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또한,
“으응...”
“더 자요.”
윤기와의 관계도 여전히 진행중이었다. 비밀로 숨겨왔던 둘의 사이는 어느날부턴가 왕궁에 자자하게 소문이 퍼졌고 그에 오히려 더 편하게 행각을 즐겨온 둘이었다. 뒤에서 뭐라 수군거렸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가장 강한 지민의 앞에서 대놓고 그에 대해 뭐라할 자는 없었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서류를 뒤적거리는 지민의 뒤에서 윤기가 가만히 서서 그런 지민을 바라보고있었다 가끔 징징거리는 지민의 투정도 들어주면서.
구름이 잔뜩 낀 날씨에 지민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상하게도 지민은 비가 오는 날씨를 싫어했다. 어쩌면 그 날의 기억 때문일지도 몰랐다.
“기분이 안 좋아보이십니다.”
“비오는 날에는 기분이 별로야.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 같고 막...”
그 때 문에서 똑똑- 노크소리가 울렸다. 지민의 대답 후 천천히 문이 열렸지만 들어오는 자는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에 지민이 윤기를 돌아보았다. 그런 지민과 달리 윤기는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
“무슨 일이냐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거짓말하ㅈ…”
철컥- 뒤에서 들려오는 총 장전 소리에 당황한 지민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윤기를 바라보던 지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Hi.”
[반가워요.]
복면을 쓴 한 남성과 그 뒤를 이은 총 든 사내들. 상황을 파악하느라 지민이 뒤로 물러나며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What are you doing? Get the gun out of here.”
[무슨짓입니까? 당장 총 치워요.]
“I can't do that. It's the moment I've been waiting for.”
[그럴 순 없죠. 내가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데.]
총을 들이밀며 손을 들라는 남자의 말에 지민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당신이 King Edward를 죽인건가? 지민의 물음에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이어 천천히 쓰고있던 복면을 끌어내렸다.
“..!!”
지민이 놀라서인지 흡- 숨을 들이마셨다. 너는… 지민이 말을 더듬자 남자가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지민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지민이 당황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남자의 얼굴이 자신 이전의 그 왕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에.
“Thank you, K.”
[수고많았어요, K.]
“Don't mention it.”
[별 말씀을요.]
“It's thanks to you. Jimin would never have doubted you.”
[당신 덕분이에요. Jimin은 당신을 한치도 의심한 적이 없었을테니까.]
“.....”
“이게 무슨소리야…?”
민윤기. 윤기야. 아니잖아, 어? 믿기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지민이 윤기를 애타게 불렀다. 그 부름에 지민을 바라보던 윤기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Get him.”
[잡아.]
“민윤기.”
또렷히 제 귀로 들려오는 지민의 목소리에 윤기가 질끈 눈을 감았다. 뒤따른 사내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지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윤기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배신할 줄은 몰랐네.”
“...죄송합니다.”
“그거라도 알아서 다행이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거라 생각했던 윤기의 예상과 달리 지민은 후련해보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윤기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탕- 총성이 울렸다.
지민을 붙잡고 있던 한 사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일에 방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지민을 향했다.
“I think it's less unfair to know where to go and die.”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고 죽어야지 덜 억울하지 않을까 싶은데?]
지민이 씨익- 웃으며 총을 빙글 돌리며 윤기를 바라봤다. 배신 때문에 분노로 가득찬 눈으로.
"지민아..."
“It might be better not to know.”
[모르는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
“I'll decide which one is better.”
[어떤게 더 나을지는 제가 결정해요.]
두 남자 사이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열댓개의 총구가 자신을 향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민에게서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It was a lie from beginning to end.”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이었다고 봐야겠죠.]
“I didn't ask you.”
[당신에게 안물었습니다.]
일부러 성질을 긁으려는건지 지민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시선을 힐긋 주었다. 어린 나이라서인지 그 남자의 울그락 불그락해진 얼굴에 모든 감정이 드러났다.
그 자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지민이 오로지 윤기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설명해봐요 윤기씨. 지민이 가볍게 툭- 뱉었지만 어딘가 뼈가 어려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보던 윤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흔치 않은 왕의 부름에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윤기가 집무실로 향했다. 넓은 방 안 혼자 의자에 앉아있던 King Edward가 웃으며 윤기를 맞았다.
“Jimin, do you know that?”
[지민군, 알아요?]
“Yes.”
[네.]
물론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었지만 간단한 인사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에 윤기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There's only you and me in this room right now.”
[지금 이 방에는 당신과 저밖에 없어요.]
“Yes, my majesty.”
[네.]
“I mean, what I'm saying is that it's not supposed to spread out.”
[지금부터 제가하는 말이 외부로 퍼지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Yes, my majesty.”
[네.]
“I'm probably going to die soon, but my goal is not to let me die.”
[저는 아마 곧 죽을거에요. 하지만 제 목적은 제가 죽지 않는것이 아닙니다.]
윤기가 이 말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굴리는동안 기다림 없이 왕이 바로 말을 이었다.
“I’m going to adopt Jimin, and I’m going to succeed the throne.”
[지민군을 양자로 들일겁니다. 그리고, 왕위를 잇게 만들겁니다.]
“Pardon?”
[네?]
왕이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온화하게 웃으며 윤기를 바라봤다. 금새 표정을 숨긴 윤기가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되물었다.
“I don't know what you mean.”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왕이 죽고 현재 왕자까지 죽으면 대를 이을 사람인 그 왕자의 아들은 왕위에 오르기엔 너무 어리기 때문에 대를 이을 사람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왕위는 어느 귀족 중 하나, 즉 다른 대손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것을 걱정한 왕이 낸 아이디어는 이것이었다.
박지민을 왕위에 올려 왕위 다툼을 모두 떠넘긴다. 그 사이 왕자의 아들은 서서히 자라고 지민을 왕위에서 몰아낸 뒤 왕위에 오른다.
즉, 지민은 그저 그 아들이 자랄 때까지 시간만 끌어주는 존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윤기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I'll take orders, King Edward.”
그 뒤 윤기는 그저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저와 출신지가 같은 동양인 아이, 지민에게 서서히 접근했다. 지민이 영국에 들어온지 겨우 5일째되는 날이었다.
그 때부터 윤기는 이미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럼 저한테 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어요?"
매일밤 껴안고 잠든것도, 달달한 모닝키스도, 옷이 흘러내릴때마다 끌어올려주던 손길도, 가끔 힘들다고 울 때마다 안아준것들도, 다 거짓이에요? 지민의 날카로운 물음에 윤기가 아무말 없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한참 뜸을 들이던 윤기가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완전히 거짓이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만,"
제 임무에는 지민군이 사랑을 하지 못하게, 즉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하라는 것도 함께 포함되어있었습니다. 그뿐입니다.
이어진 윤기의 말에 참던 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입술을 꾹 깨물며 성큼성큼 윤기에게 다가가 제 손에 쥐고있던 총을 건넸다. 됐어요, 이제 죽여요. 지민의 말에 윤기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King Jimin."
"이것도 명령이라고 해야지만 할래요?"
"..."
“It's an order. Shoot me.”
[명령입니다, 절 쏘세요.]
“All right. K, get your mission done.”
[좋아요. K, 어서 임무를 완수하세요.]
옆에 서있던 그 자까지 말을 거들었다. 이 상황에서도, 윤기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I'll take orders.”
[...명령 받들겠습니다.]
천천히 걸어나간 윤기가 철컥- 총구를 지민의 머리에 가져다대었다. 처음으로 '두려움'의 감정이 지민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윤기가 조심스럽게 지민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었다. 두 입술이 맞물리고 지민이 제 목에 팔을 감은 순간,
또 한 번 총성이 울렸다.
*
"형 우리 영국에서 어디 갈래요?"
"어디 찾아본데 있어?"
"음...빅벤이랑, 타워 브릿지도 있고…아! 여기요."
버킹엄 궁전. 여기가 그렇게 이쁘다 그러더라구요.
조잘조잘 말하는 그에게 형이라고 불린 그 자가 가볍게 쪽- 입을 맞췄다.
"신혼여행이니까, 가고싶은데 다 가자."
"히- 형 돈이 그렇게 많아요?"
"너 먹여살릴 정도는 있어."
큭-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리며 또다시 입술을 맞댔다. 까르륵- 웃음소리와 함께 방문이 덜컥- 닫겼고 방금 전까지 그가 들고있던 핸드폰 화면에 '버킹엄 궁전'이라고 적힌 검색 결과가 밝게 떠있었다.
그리고 그 핸드폰 아래,
민윤기 ♡ 박지민이라 적힌 청첩장이 핸드폰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방안에서 나오는 웃음소리는 끊일 줄을 몰랐고 시간이 지나 핸드폰 불빛이 천천히 꺼졌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