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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SSELS | 벨기에 브뤼셀

un amour naturel

w. 카키(@khaki_2857)

BGM. 볼빨간사춘기-사랑에 빠졌을 때 Piano Ver.
https://youtu.be/zFvcgXvTcxM

 

 

 


***

 

 

 조용하게, 그냥 여태껏 나의 존재를 알고 있던 것들이 없는 곳에서 아주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 누구의 서선과 관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그런 게 다여서, 그 텅 빈 감정과 대학 다닐 때 그렇게 낡아 빠지도록 썼던 4B 연필 묶음 하나 가지고 이 곳까지 온 거였다. 눈앞에 보이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성당과 감히 내가 나의 좁디좁은 시야 안에 가둬놔도 될까 싶은 고귀한 조각상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현실을 도피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조금이라도 감춰질까 싶어서.

 “…‥.”

 그래, 무작정 오긴 했다. 온 건 좋다 치는데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제 뭐 하고 사냐’ 는 것 뿐이었다. 민윤기 진짜 답 없는 새끼.

 “‥…진짜 인생 의미 없게 산다.”
 “Excusez-moi (저기요.)”
 “‥…?”

 그렇게 어딘지도 모를 공원 안, 아무 벤치에나 앉아 몇 십 분을 별 뜻 없이 허비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지더니 이내 내가 자기 친구인 거 마냥 너무나도 익숙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 그 그림자를 올려다보진 않았지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랑 비슷한 또래의 남자일 거라는 걸.

 “Qu'est-ce que vous faites ici tout seul ? (여기서 혼자 뭐하세요?)”
 “…‥저 딴 나라 말 아직 못 하는데.”
 “C'est dommage. (아, 유감이네요.)”
 “무슨‥….”
 “전 여기 오래사신 줄 알았거든요.”
 “‥…뭐야.”

 한국인이잖아. 한참을 뭐라 말하던 그는 꿋꿋하게 한국어를 쓰던 날 보더니 이내 입가에 여린 미소를 띠웠다. 그리고선 내뱉은 말을 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언어였다. 마치 날 놀린 것처럼. 덕분에 그의 소심한 장난에 속아 넘어간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진짜 한국인이세요?”
 “안 그럼 여기 사는 사람 중에 이렇게 능숙하게 당신하고 대화하는 사람 있겠어요?”
 “허, 알고 있으면서 그런 장난친 겁니까?”
 “그럼 확실하지도 않은데 다짜고짜 한국말 써요?”
 “…‥아.”

 솔직히 그렇게 유치하게 싸우고도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단번에 수긍해버렸다. 또, 또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갑자기 이렇게 말 건 이유가 뭐예요? 그쪽 말대로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음…‥ 그냥, 그쪽이 궁금해서요. 조용한 곳 가서 같이 차나 한 잔 마시고 싶어서.”

 아, 잠깐. 이거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저 처음 보는 사람이 멋대로 초록 불을 키고 가려는 거 같은. 그런 수상한 기분.

 

“‥…지금 이거, 대놓고 작업거시는 겁니까?”
 “눈치가 생각보다 빠른 사람이네요. 그쪽, 알아준 거에 감사하다 해야 되나?”
 “하…‥ 참 웃긴 사람이네, 그래, 근데 만약 제가 그쪽하고 같이 차나 마시면, 저한테 무슨 이익이 오는데요?”
 “이익이랄 건 없죠. 다만‥….”
 “‥…?”
 “같이 있으면 적어도 외롭진 않은 거?”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 사람,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하게 알겠다. 이건 뭔가 잘못 걸려도 한참 잘 못 걸린 거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웃기고 한심한 건, 이 사람이 아니라 이 어이없는 말들에 자꾸만 호기심을 느끼는 나 자신이었다.

 

 “자, 그래서…‥ 어쩔래요?”
 “‥…하아, 그래. 어디 한 번 가보기나 합시다. 그쪽하고 차 마시러.”

 멍청한 놈. 결국, 또 넘어가 버렸다. 무언가 성취한 거 마냥 계속 눈웃음을 짓는, 저 순진한 척하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속내에.

 

 

***

 

 

 “‥…저기요. 어디까지 가는 거예요? 이미 근처 카페들은 다 지나쳤는데.”
 “조금만 더 가 봐요. 괜찮은 곳 있으니까.”
 “…‥.”

 아, 다 왔네요.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꽤 먼 거리를 내내 걸었을까. 이 긴 길이 익숙한 듯 걷다가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춘 그가 손가락으로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는 아담한 찻집을 가리켰다. 그리곤 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꺼낸 것은 작은 카드키였다. 생각하지 못 했던 물건에 솔직히 좀 놀라긴 했다.

 “‥…아, 본인 가게예요?”

 그가 카드키를 꺼내는 순간 거의 확실한 예상이 가긴 했다. 역시 이 찻집은 그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나름 숨기고 있던 거 같아서, 그냥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놀란 기색을 조금 보여줬다. 너무 유난스럽지 않게 딱 적당히 건조하게.

 

 “그냥 작게, 생계유지될 정도만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은 원래 쉬는 날인데 다른 곳보다 여기서 얘기하는 게 조용하고 좋을 거 같아서요.”

 삑-. 기계음과 함께 찻집의 문이 열렸다. 들어가는 순간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이 포근한 내부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렸다. 뭐, 첫 느낌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꽤 긍정적으로 느껴졌을지도.

 “커피 좋아해요? 아님 뭐…‥ 홍차도 있고.”
 “아‥… 홍차로 할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되니까.”

 그가 가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멀리서부터 좋은 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뭔가, 계속 기억에 남기고 싶은 그런 오묘한 향이었다.

 “자, 식기 전에 마셔요.”
 “아, 고마워요.”

 별말씀을, 제가 고맙죠. 그가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머그잔을 꼭 쥐어 잡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그의 대답에 문득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가 생전 처음 본 내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 보였던 이유.

 “저, 근데요.”
 “근데 말고, 그냥 편하게 지민이라 불러줘요. 박지민.”
 “아…‥.”

 “우리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잖아요. 지금 당장 궁금한 게 있어도, 그냥 천천히 알아가요.”

 나도 궁금한 건 한 없이 많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또 다시 가벼운 웃음과 함께 아직 뜨거운 차 한 입을 마셨다. 아깐 그렇게 밝아보였는데, 분명 여유롭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아니, 그 보다, 외로워 보였다. 아직 낯선 나와 오랜 시간을 나누고 싶어 하는 그의 눈은, 이미 잔뜩 쌓여버린 외로움에 젖어 있었다. 그 눈동자 하나에, 그게 뭐라고,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의 말에 수긍할 뿐이었다. 사실 이제 내가 굳이 궁금해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란 걸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잡다한 호기심 따위는 그저 무용지물에 가까워 진거 같았다. 그냥 내 앞에 있는 그와 차근히 나눌 대화에 집중하며,

 “제 이름 알려줬는데, 그쪽은 안 알려줄 거예요?”

 나도 그처럼 편안하게 웃고 있으면 될 것이라고, 그렇게 결론을 내었다.

 

 

***

 

 

 그 찻집, 그 자리에 앉아 한참을 그와 대화만 했다. 이름, 나이, 한국에서 이 먼 곳까지 왔던 이유, 그가 이 곳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유 그리고 내가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 특별한 주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눴던 얘기지만 그렇다 기엔 굉장히 많은 걸 알았다고 느낄 만큼 한참을. 무슨 연인도 아닌데 각별한 사이라도 된 것 마냥 서로만 바라보다 잠시 밖을 바라보니 이미 하늘이 눈을 감을 시간이 된 거 같았다. 둘 중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 하고 있었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슬슬 들어가 봐요. 오늘 처음 만났는데…‥ 되게 오래된 친구 만난 거처럼 간만에 즐거웠네요. 윤기씨 덕분에.”
 “뭘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저‥… 윤기씨.”
 “네.”
 “계속…‥ 여기 찾아와 줄 거죠?”
 “‥…당연하죠.”

 그에게 답해주며 작게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둘 다 이렇게 헤어지기엔, 오늘이 아쉬운 거 같은 눈치였다.

 “‥…가요. 고마웠어요.”
 “…‥.”

 안 그런 척 하지만 이 사람은 자기감정을 못 숨기는 사람이 분명했다. 순간 마주친 그의 눈에 아직은 아쉬움이 서려 있는 게 보였으니까. 그게 자꾸만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
 “‥….”

 나조차도 핑곗거리 같지만 오늘은 왠지, 그와 함께 있어줘야 할 거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자꾸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게 아님,

 “…‥지민씨.”

 내가 같이 있고 싶던 걸지도 모르지만.

 “‥…왜 그래요?”
 “…‥.”

 좀 웃긴 소리긴 하지만, 나 역시도 내 감정에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숨기려고 해봤지만 이미 그건 실패인 거 같았으니까.

 “‥…이번에, 제가 새로 시작한 작품에 모델이 필요한데.”
 “…‥.”

 이왕 이렇게 된 거 눈 한 번 질끈 감고,

 “지민씨가 해줄래요?”

 다시 넘어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 같다.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냥…‥ 지민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요.”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지금 이거, 대놓고 작업거시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그런 거로 할까요?”
 “참…‥ 진짜 웃긴 사람이야. 그래요, 근데 만약 제가 윤기씨 모델이 되어주면, 저한테 무슨 이익이 오는데요?”
 “흠…‥ 이익이랄 건 없죠. 다만‥….”
 
 이미, 못 이긴 척 그 사람에게,

 “같이 있으면, 적어도 외롭진 않은 거?”

 


 서로에게, 또 넘어가 버린 것 같다.

 

 

[un amour naturel]
-자연스러운 사랑-

_Fin.

©2019 RENDEZVOUS COLLAB by. @EPILOGUE_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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